R.P.G. 스토리콜렉터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일생을 나비만을 쫓았던 누군가는, 나비의 창백한 잔해만을 움켜쥔 채, 팔이 꺾이고 말았다.

 

주변에 머물고 있는 가족을 대신해 다른 누군가에게 다정함을 보여줬던 누군가는, 끝내 그것을 목숨과 맞바꾸고 말았다.

 

한 가족의 아버지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한 남자의 죽음, 그 범인을 찾기 위한 경찰의 수사, 그리고 끝내 팔이 꺾여버린 또다른 배우.

'Role-Playing Game'의 약자이자 현재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가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그리고 인터넷상에서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을 누군가를 그려내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R.P.G.>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보이는 외면과 그러한 내면, 어느 쪽이 진실일까?

도코로다 료스케에게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었을까?

-p.80

 

 

 

공사 현장에서 인근에 살고 있는 한 가장이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또 한 명, 젊은 여성이 목이 졸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두 개의 살인사건이 별개의 사건이라 생각하고 수사를 시작했지만, 사건현장에서 물증이 발견되면서 두 사건이 연관이 있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수사 본부 내부의 지배적인 의견은 두 피해자와 연결된 A코가 용의자라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피해자는 인터넷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며 '어머니', '가즈미', '미노루'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이들과 함께 '가족놀이'를 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이에 따라 경찰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들을 심문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상부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끝내 그 '계획'을 밀고 나가는 경찰.

취조실의 매직 미러 너머로, 피해자 생전의 낯선 목적을 목격한 유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터넷 상에서의 피해자의 '또 다른 가족'이었던 이들이 차례로 심문을 받는다.

경찰이 세운 계획은 어떤 것이었을까? 경찰은,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까?

 

 

 

2001년의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터넷 문화의 그늘과 그리고 그 그늘이 현실에까지 미쳐버린 한 가족의 비극을 상당히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피해자의 또 다른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족 사이에 오간 대화를 경찰의 수사가 전개되는 도중도중에 삽입되어 그들 사이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던 것인지, 경찰 수사의 실마리는 어디에 숨어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궁금증을 상당히 증폭시킨다.

그와 별개로, 다케가미 형사와 취조실에서 '가족'들을 상대하고 치카코 형사가 취조실 밖 매직미러 뒤에서 '유족'을 상대하면서 계속되는 심문은 경찰의 의도가 무엇이며 이러한 대화를 통해 무엇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 역시 갈수록 커져가기만 한다.

 

 

 

그것이 요즘 유행인 걸까? 자아, 자아, 자아.

모두가 남의 시선이야 어떻든 진정한 자아를 찾는 세상이다.

찾을 필요도 없이 이미 확고한 자아가 있다고 자부하는 이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을 고르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심정을 돌아보지도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p.272

 

 

 

인터넷 공간에는 '익명성'이라는 가림막에서 비롯되는 빛과 그늘이 혼재한다. 미야베 미유키가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소설 속에서는 인터넷 공간에서의 가족 놀이에 빠졌다가 끝내 살해당하고 말았던 한 남자를 통해 그 빛과 그늘을 함께 풀어내고 있다.

그 역할놀이는 자신의 죽음을 가져온 사신이기도 했지만,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한 공간이 되어주기도 했다.

게다가 이처럼 가림막 뒤에 놓여 있는 양면성 뿐만 아니라, 그 가상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현실의 인물들이 느끼는 또 다른 형태의 소외 역시 놓치지 않았다.

두 개의 역할 놀이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했던 한 남자에게 벌어진 비극은, 그렇게 현실과 가상 공간 각각에서의 역할놀이라는 게임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읽은 것 같다. 많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난 그녀의 현대 사회파 미스터리가 좋다.

그야말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10년 전의 작품이 되었지만, 이 <R.P.G.> 역시 마찬가지다. 어찌보면 가장 밀접하다고 할 수 있을 가상 공간을 주제로 그 가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 뿐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친 '두 가족'의 모습을 통해 그들만의 역할놀이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했다.

 

자신의 '정의'라는 나비만을 쫓았으나 끝내 손에 잡힌 것은 그 나비의 '잔해' 뿐이었던 누군가의 비극을,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 사회파 미스터리다.

미야베 미유키 답다,라고 말하기에는 나는 아직 그녀의 작품을 많이 알진 못한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그들만의 역할놀이는 나에게 꽤나 반향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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