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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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나 영화는 그 글과 장면 속에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것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축에 속하기에,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창작자의 의도와 감정이 전해져 온다. 그렇기에 어떤 한 장면에 감동을 받기도 하고, 함께 화를 낼 수도 있으며 즐겁게 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예술적 감수성은 가히 바닥을 치는 수준인지라─나의 두개골을 열어보면, 우뇌와 좌뇌의 크기가 확연하게 다를것이 틀림없다!─일상적으로 다가오는 음악에 대한 이해는 거의 못 할 정도라고 보면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가사와 멜로디가 어우러져 좋다, 아름답다,라는 것은 알 수 있고 또 그렇기에 음악을 즐겨 듣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쪽으로는 영 문외한이구나, 역시 예술적인 영감은 나에게 참 부족하구나, 라는 것을 절절하게 체감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최근 상당히 열풍을 몰고 있는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때다.

  내가 듣기엔 똑같은 노래인데, 심사위원들은 참가자의 노래를 듣고 그 미묘한 차이를 감지해 낸다. 물론 노래를 하는 데 있어 기술적인 측면은 당연히 전문가인 그들에게 훨씬 확연하게 다가온다. 아니, 그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 아닌 마음의 문제, 바로 그것을 그들은 정확하게 캐치해 내는 것이다. 참가자의 노래 속에 서려 있는 사연과 절절함,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린다. 내가 듣기엔 똑같은 노래인데, 똑같이 슬픈 가사를 노래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본다. 그 미묘한 차이를 누군가가 짚어준다면. 그 미묘한 차이를 짚을 수 있으면서 그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전해 줄 수 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9년~2010년 동안의 미발표 에세이와 단편소설을 한꺼번에 모아 '잡문'이라는 형태로 묶어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그야말로 잡다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문집이다. 잡문의 향연이다. 크크크.




설날 '복주머니'를 열어보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바람입니다. 복주머니 안에는 온갖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거야 뭐 어쩔 도리가 없겠죠. 복주머니니까요._p.15




  '대강 이런 느낌이 비슷하다'는 식으로 글을 다양하게 분류해 소개하고 있는 <잡문집>에는 다른 책의 서문이나 해설, 인삿말이나 메시지에서부터 음악, 번역, 인물,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글로 엮어낸 것 등등 편집자와 작가가 속닥속닥 모의를 하는 듯 풀어내고 있다. '어디까지나 잡다한 심경'이라고 머릿말에서 밝히고 있지만, 거기서 넘어가자마자 코웃음을 치고 만다. '어디까지나 잡다한 심경은 무슨! 너무 꼼꼼하잖아!'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그의 [잡문]들로 처음 만났다. 다시 말하면, 이 <잡문집>이 나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만남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가 풀어놓고 있는 '썰'들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수많은, 하루키를 읽은 수많은 독자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얕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챈들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에게 재즈란 어떤 것인지 내가 알 게 뭐란 말인가. 그에게 소설이란 어떤 의미인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지, 당연히 모른다. 소설을 읽어봤어야 말이지. 하다못해 에세이라도.


  그렇기에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지금까지 그의 글을 읽으며 쌓아온 시간들을, 그 때의 감정들의 축적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즐거운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고 감탄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잡문'으로만, 그렇게 분류가 되어있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문집>에 실려 있는 '잡문'들은 그렇게 잡문으로만 분류되어 읽고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문장들이다.

  짧게 실린 에세이에도 '글을 써서 먹고 살아가는' 프로 작가로서의 꼼꼼함과 치열함이 녹아 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을 깊이있는 내공으로 쌓아왔구나,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다.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인사를 하기 마련인 새해 인사나 결혼식 축하 메시지 등에도 깊은 연륜이 녹아 있다. 슬쩍 지나가듯 꺼낸 이야기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애정이 담뿍 녹아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다시 보인다. '주변'만을 둘러보고 있는 나의 좁은 시선을 상당히 자연스럽게 넓혀 둔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음악의 그 '미묘함'을, 누군가가 짚어주길 바라고 있던 미묘한 음악 속의 감정을, 도대체 어디서 잡아내어 글로 써내려갈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 글에는 독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함보다는 옆집 아저씨가 '그래, 이건 이러이러한 거야'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포근함이 서려 있다. 해가 저물면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단골집에 들어가 맥주를 한 잔 마시는 친근함이 녹아 있다.




  그야말로 '복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을 하나 하나 꺼내보듯 문득 손에 연필이 쥐어지지 않을 때, 보고 있는 글자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을 때 한 편 한 편씩 야금야금 읽어내려갔다. 그래, 복주머니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마냥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읽어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공감 못하는 것은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니까.

  어느 정도 하루키를 알 것 같다, 라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까마득하게 멀기만 해 보였던, 중학생 시절 친구가 읽고 있던 <상실의 시대>를 함께 읽다가 '이게 무슨 소리야!' 한 이후로는 가까워질 수도 가까워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친숙해졌다고 내 맘대로 정해보면 안 되려나.


  그렇게 또 한 명의 작가를 알아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즐겁게 읽었던 [잡문]은 「좋을 때는 아주 좋다」는 결혼 축하 인사, 그야말로 미묘한 예술의 세계를 글로 잡아내어 나에게 보여준 「빌리 홀리데이 이야기」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번역론을 펼치고 있는 『번역하는 것, 번역되는 것』의 챕터. 복주머니 속 수많은 선물 중에서도 보석같은 잡문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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