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냐의 유령 작가정신 청소년문학 5
베라 브로스골 지음, 공보경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라는 만화가 있다. 이란인인 작가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면서 타국인들은 이란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단편적인 조각만을 가지고 판단하는가를 깨닫고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삶을 만화로 그려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리주의자들과 테러, 혁명으로 뒤흔들렸던 이란은 이란이었고, 이란인으로서 이방인으로서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혼란과 고뇌에 빠진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 이란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조금 특수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고, 타국에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은 의외로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냐의 유령>이라는 책 소개를 보자마자 떠오른 것이 바로 이 <페르세폴리스>였다. 자국을 떠나 타국에 머무르는 소녀의 시선을 만화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참 닮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사춘기 소녀 아냐는 무슨 일을 겪게 될까.

 

 

  나는 살이 쪄서 고민인데, 어머니는 계속 기름진 음식을 먹으라고 권한다. 옆에 있는 남동생은 누나 속도 모르고 눈치 없이 떠들고 있다.

  나를 보고 웃어주나 했더니, 뒤에 있는 아이를 보고 있는 거였다. 오르지 못할 것 같은 농구부 남학생 숀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노라니 하나뿐인 친구 시오반은 옆에서 속을 박박 긁는다. 실없이 담배나 한 대 피워물고 있노라니 몇 안되는 개수로 시오반과 이러쿵저러쿵 말다툼을 한다.

  모든 것이 갑갑해진 그녀는, 학교 대신 시내 외곽의 외진 곳을 향한다. 딴 생각을 하며 걷다가 그녀는 우물 구멍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 우물 구멍에는 90년 전 살해당해 죽었다는 소녀의 유령이 살고 있었다. 유령은 아냐가 우물 구멍 안에서 자기와 만난 것이 퍽 기쁘고 즐거운듯 했지만, 아냐는 그 모든 것이 시큰둥하기만 하다. 오히려 죽은 소녀의 해골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무사히 우물 밖으로 구출되어 일상을 보내던 것도 잠시, 아냐의 가방 속에 들어있던 작은 뼛조각 덕분에 유령 소녀는 아냐의 옆에 머물게 된다. 아니, 오히려 아냐를 돕겠다고 나선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도 안고 있었던 아냐는 조용히 학교에 따라와 자신을 돕는 유령 소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냐는 유령과 친구가 되고, 매일매일 그녀와 함께 보내는 하루는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유령 소녀의 모습은 점차 변해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애정어린 조언과 충고였던 유령 소녀의 속삭임은 걷잡을 수 없는 집착과 방황으로 변해가고, 그에 더불어 아냐는 90년 전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유령 소녀의 진실에 이르게 된다.

 

  급기야 아냐의 동생까지 위협하기 시작한 유령소녀. 아냐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번쯤 초능력이 생겨 누군가가 답을 알려주기를 바라거나, 아무에게나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나만 보이는 친구가 있었으면, 이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봤으지도 모른다.

  베라 브로스골의 <아냐의 유령>은 분명 러시아 출신인 작가 스스로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을 미국 적응기를 바탕으로 그 상상력을 상당히 깔끔하고 공감가는 캐릭터 아냐와 유령 소녀를 등장시킴으로써 생동감 있는 이야기로 구성해낸 그래픽 노블이다.

 

 

  그녀의 모습은 다만, 미국에서 살고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살, 남자아이, 친구관계, 성적 등등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아이들의 고민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ㅎㅎ

 

  그렇게 아냐를 둘러싼 고민은 한없이 그녀를 가라앉게 만드는데, 그것을 작가는 '우물 구멍'이라는 것으로 구현해낸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부터 다시 아냐의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그 계기는 90년 전 살해당한 유령 소녀로 인한 것이다.

 

  아냐는 그야말로 언제나 다이어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러시아에서 이민을 온 것 때문에 소위 '잘 나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학교 생활을 적응하기도 힘들 뿐더러 성적도 좋지 않은 자신이 지겹기만 하다. 그리고 그녀는 우연한 유령 소녀와의 만남을 통해 사춘기 소녀의 감성으로서는 상당히 클지도 모르는 몇몇 사건들을 겪는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모두 겉모습에 불과한 것이었어, 중요한 것은 나의 내면이야,와 같은 청소년 소설의 전형적인 깨달음을 겪고 조금은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이 날까?

 

 

  의외로, 이 그래픽 노블은 그 전형적인 성장의 코드를 녹여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하는 아냐는 아주 조금 '철이 든' 소녀일 뿐이다.

  유령의 등장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한결같이 현실적인 설정과 캐릭터 그리고 결말까지 소설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거창한 깨달음 대신 오히려 그래, 어느 정도 갈등을 겪고나면 저런 모습일지도 몰라,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성장이 의외로 독특하게 다가온다. 상당히 전형적인 메시지를 던질 거라 생각했던 이야기 속에서 의외로 탄탄한 현실을 만난 당혹스러움이라 할지 반가움이라고 할지.ㅎㅎ

 

  미스터리를 너무 많이 읽어서일까, 실은 그보다는 유령 소녀가 왜 살해당했으며 우물 바닥과 함께 가라앉아버린 90년 전의 진실은 무엇이었을지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졌는데 그보다는 역시 '아냐'라는 등장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보니 유령 소녀의 사연은 내 상상만으로 채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오랜만에 사람다운 삶을 모방해 가면서 삶을 더욱 갈구하게 되어버려 점점 난폭하게 변해간 '아냐의 유령'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한 번 만나보고 싶구나.

 

 

  같은 이민자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아냐의 유령>이지만, 상징과 풍자가 절묘하게 녹아있는 <페르세폴리스>와 달리 <아냐의 유령>은 사회보다는 한 소녀의 성장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정신의 청소년 문학으로 출간된 시리즈인 만큼, 스토리를 기대하는 나보다는 아냐 또래의 소년소녀들이 읽으면 조금 더 즐거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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