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여우 발자국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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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내가 뭘 또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한 광경이었다. 사람의 발자국은 저렇게 동그란 나뭇잎 모양을 남기지 않는다. 더욱이 매번 잉크병에 발을 담갔다 빼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선명한 검은 자국을 남길 수 있나._p.23

 

 

  단 한 번 비틀어도, 안과 밖은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현실과 허구는 구별되지 않을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가, 클라인 병이, 에셔의 그림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조선희의 <거기, 여우 발자국> 역시 비슷한 맥락에 놓인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벽면에 마주보고 붙어 있는 거울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내 모습을 찾아보는 것 같은.

 

 

  그는 실체가 환상으로, 환상을 실체로 본다. 환상이라 생각했던 어떤 여인을 따라 발길을 이어온 곳에는, 서른 두 개의 구멍창을 가진 건물이 있었다. 그에 매혹된 '태주'는 기묘한 나뭇잎 모양 발자국을 따라 건물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는 기이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 건물에 '거기, 눈구멍 뒤에'라는 이름의 카페를 연다.


  그러나 소문이 사실인 것인지, 혹은 태주가 여지껏 보던 환상과 똑같은 것인지 카페에는 기묘한 발자국이 남는다. 게다가 불쑥 자신을 찾아와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소녀 '노라'와 늘 홍우필이라는 여자가 녹음했다는 테이프 속 이야기를 듣는 '동오'형 그리고 연인인 '소정'과 카페의 종업원으로 고용된 '윤원'이 그 건물에 머물면서 태주는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아닐까 하는 의문과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한편, 또 다른 주인공이 한 명 있다. 이야기를 실체로 불러들이는 기묘한 목소리를 지닌 여자 '우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학창시절 자신의 목소리에 휩싸여 사라진 친구가 있었고, 이야기 속에 휩쓸린 자신의 고용주가 있었다. 자신이 머물던 하숙집에서 묘한 발자국을 발견한 그녀는 그 발자국을 스케치했고, 그 스케치를 연인이자 친구였던 재곤에게 빼앗겼으며, 그 이후 '여우 발자국을 내놓으라'는 정체가 불분명한 4인조에게 시달린다.


  그리고, 꼭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며 절박하게 녹음을 부탁하는 박현의가 건네준 책 『거기, 눈 구멍 뒤에』를 조금씩 읽어나가는 우필은, 박현의가 그 이야기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의문을 품는다. 그 이야기 속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들어있기에?




나는 네가 말하는 너고 너는 내가 말하는 너야. 우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다고 여기는 세상을 보며 살아. 하지만 말이야, 사람들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어? 네가 보는 내가 내가 보는 내가 아닐 수도 있고 내가 보는 네가 네가 보는 네가 아닐 수도 있잖아?_p.108




  그렇다. 이 소설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이야기고 현실이고, 어떤 이야기가 허구인가,라는 것이다.

  우필 그리고 태주가 주인공이 되어 병렬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그 두 이야기의 바깥에 있는 독자로서는 각자 그들의 '현실'에서 바라보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 서로임을 발견한다. 우필이 매 주 조금씩 녹음하는 이야기 속에는 '홍우필'이라는 여자가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있는 태주가 등장하고, 태주가 듣는 테이프 속에는 홍우필이라는 여자가 책을 녹음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허구인지 골라보라며 말문을 연 이야기이건만, 정답은 없다. 태주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태주의 현실에 있는 것이고, 우필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우필의 현실에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쪽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다음 번에서는 아니, 저쪽이 이야기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고 생각한 찰나 출발점에 서 있었고, 떨어지는 물을 바라본 찰나 그 물은 다시 폭포를 이루기 위한 물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모든 이야기는 사실적 뼈대에 허구의 살을 발라 만들지. 그냥 그런 거라고._p.138





  그렇게 에셔의 그림을 보는 것 마냥, 마주본 거울 속에서 어디 쯤부터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지를 지켜보는 것 마냥 한없이 이야기 속에 빨려들어갔다.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렇게 쭉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더불어 두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그마한 사건들을 지켜보며 그 진상은 무엇일지를 나름대로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발자국을 찾는 이들이 그토록 여우 발자국을 바랐던 이유는 무엇인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우필과 태주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뒤틀린 시공간 그 곳에는 무엇이 있을지 말이다.


  그렇게 무한한 순환의 궤도에 나를 올려놓은, 한 번의 비틀림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냥 그런 거라며 툭 비틀린 이야기를 선보인 조선희 작가의 또 다른 비틀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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