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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1
이시키 마코토 지음, 유은영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숲에 버려져 소리가 나지 않는 피아노, 그러나 밤중에는 누군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숲을 울린다... 처음에는 미스터리 스릴러인 줄 알았다. ^^ 아니면 소년의 성장 드라마이거나. 성장 드라마인 건 맞는데, 진짜 피아노가 나오는 음악 만화였다. 2권쯤 읽을 때까지도 두 소년의 순수한 우정이 결국 경쟁과 대립으로 치닫는, 뻔한 구도려니 생각하고 별 감흥 없이 읽었다. 그러나 볼수록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 설정이 절대 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조금씩 감탄하게 되었다.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만화나 드라마에서는 가난한 천재와 여건 좋은 수재의 경쟁을 흔히 볼 수 있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도 높고, 좋은 여건에서 교육 받아온 수재는 보통 사람들의 선망을 받으며 승승장구한다. 그런데 평범한 가정마저 갖지 못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아이가 깜짝 놀랄 만한 재능을 선보이며 어렵사리 꿈을 이루어가고, 이 과정에서 수재는 이 불운한 천재를 시샘하고 질투한다. <유리가면>에서부터 봐온 설정이다. 왜 천재는 늘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숨어 있을까? 사실은, 일본이나 우리나라 사회에서 예술가로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주변 여건을 갖춘 경우가 많다. 꼭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예술을 평소 즐길 정도는 되는 여유, 어릴 적에 재능을 알아보는 부모의 안목, 그런 바탕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천재가 나타나는 경우는,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 것이다. 실제 세상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에,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극중에서나마 우리 가운데 그런 특별한 존재가 나왔으면 하고 소망하는 게 아닐까?
9권까지 읽으면서 뒤로 갈수록 이 만화가 좋아졌다. 우선,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노력형 수재 야마미야 슈우헤이가 미운 아이가 아니라는 점이 좋다. 1, 2권에서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이찌노세 카이에게 슈우헤이가 보여주는 우정은 눈물겹기 그지없다. 어릴 적의 순수한 우정이 성장하면서 미움으로 바뀌나(아, 뻔한 상상력...)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만화에서는 1등만이 전부가 아니다. 카이의 스승인 아지노 소우스케와 슈우헤이의 전범(典範)이 되는 아버지 야마미야 요우이찌로우, 두 사람의 관계는 슈우헤이와 카이의 관계와 똑같다. 야마미야 요우이찌로우가 아지노에게 느꼈던 열등감을 슈우헤이는 카이에게 똑같이 느낀다. 그러나 야마미야와 아지노는 적이 아니다. 야마미야는 아지노를 이긴 적이 없지만, 그렇다 해서 야마미야의 피아노 연주가 가치 없는 게 되지는 않는다. 야마미야의 연주에도 그만의 힘이 있고, 그만의 아름다움, 효능이 있다. 슈우헤이가 아지노를 동경하고 숭배하면서도 아버지의 피아노 연주를 받아들이는 장면은, 그래서 참 마음에 들었다.
또 콩쿠르에서 1등은 하지 못하고 2, 3등이나 특별상만을 받는 아이, 마루야마 다카코가 있다. 다카코는 처음 참가한 콩쿠르에서 카이의 독창적인 연주가 인정받지 못하자, 이에 저항하고자 여러 콩쿠르에 참가, 규격을 탈피해 연주한다. 1등은 하지 못하지만 다카코의 연주는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모든 사람이 1등만 하려고 하고 1등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면 이들은 더 피아노를 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슈우헤이의 아버지가 슈우헤이를 대하는 방식도 좋다. 아버지는 거만한 권위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 때문에 고민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그 한계를 깨뜨리고자 노력하는 선량한 인간이다. 그는 아들에게 자기 방식을 강요하지 않으며, 자신의 경쟁심을 아들에게 대물림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찌노세 카이가 괴물이 아닌 점이 좋다. 카이가 천재라고 해도, 세 살 때부터 줄곧 버려진 피아노를 가지고 놀았다면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슈우헤이와 마찬가지로 “배운” 것이다. 규격에 맞춰 훈육되었느냐 스스로 자유롭게 습득했느냐, 그 차이가 두 사람의 성격과 성향을 갈라놓았을 뿐이다. 카이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두려워하고 경계하게 만들지 않는다. 카이는 열심히 노력해서, 성심을 다해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 재주로써 사람들과 함께 즐긴다.
10권이 곧 나온다는데, 몇 권까지 이어질까. 너무 오래 기다리게 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