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명(海鳴)이 싫다. 
아득히 멀리, 정신까지 아득해질 정도로 멀리에서 차례차례 밀어닥치는 한적하고 위협적인 굉음.
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 걸까. 무슨 소리일까. 무엇이 울고 있는 걸까. 울고 있는 것은 물일까- 아니면 바람일까. 그도 아니면 또 다른 것일까. 끝없는 넓이나 무의미한 깊이만 느끼게 하고, 전혀 안심할 수가 없다. 

애초에 바다가 싫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 자란 나는 처음으로 그것을 보았을 때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바다일까,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바다의 주체는 물일까? 아니면 그 밑의 해저일까?
우선 그게 확실하지 않다. 물에 잠겨 있는 땅은 이미 바다인걸까?
그렇다면 저 불길한 파도라는 것은 뭘까.
파도도, 생각하기도 싫어질 만큼 아득히 먼 곳에서 너울너울 밀려왔다가는 떠나간다. 그것이 지금도 끊임없이 온 세상 해안에 똑같이 밀려왔다가는 돌아가는 걸까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다. 그렇다면 바다는 흐느적거리며 그 영토를 쉼없이 넓혔다 좁혔다 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방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이 깨서는 계속해서 '해명이 싫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하자면, [광골의 꿈]의 첫문장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전날 퍼마신 술이 덜 깨어 어지러운 귓청에 파도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자, 이 '해명은 싫다.' 라는 문장이 눈 앞에 전광판이 그러하듯 계속해서 번쩍이고 있었다. 싫어, 정말 싫다..   

바다 옆에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창문을 닫는다고, 귀를 닫는다고 끊이지 않는 해명을 계속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 괴로운 일이다. 이 책을 읽기 전 파도소리는 내게 언제나 낭만적인 것이었고, 꿈같은 소리었다. 하지만 교고쿠 나츠히코는 언제나 그렇듯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침투해서 무언가를 건드려서는 해명을 두려워하게끔 만들어버렸다. 마치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바다를 두려워 했던 것만 같다. 그 깊이. 그 아득함. 사람을 미치게 하는 끝없는 해명.

앞으로 나는 바닷가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 이 강렬한 첫문장에 의해 바다는 불길하고도 두려운 폭력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 해명(海鳴)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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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4-2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어디를 가셔서 쓰신 글일까요..ㅎㅎ
광골의 꿈을 읽으려고 대기시켜 놓았는데... 빨리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ㅎㅎ

Forgettable. 2010-04-20 15:30   좋아요 0 | URL
어째 한 번, 푸른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푸른 동해였던 적이 없.었.던 동해죠.
제가 갈 때마다 흐리고 쓸쓸해요.

전 이제 막 상권 읽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좋습니다. 어렵고, 무섭고, 알쏭달쏭해요. ㅎㅎ

다락방 2010-04-20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남자친구였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은 그렇게도 겨울바다를 좋아했어요. 저를 사귀면서는 저랑 같이 가긴 했지만, 대부분은 겨울마다 혼자 그 바다를 찾는데요. 그러다가 물에 뛰어드는 사람을 한번 구한적도 있대요. 훨씬 훨씬 젊었을적에 말입니다. 그러면서 겨울바다를 밤에 보면 시꺼매서 자꾸만 뛰어들고 싶게 만든다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오늘 뽀님의 사진이 쓸쓸하고, 인용하신 문구와 잘 어울려서 어쩐지 좀 무서워요. 무섭고 쓸쓸하고. 자꾸 저 안으로 걸어들어가고 싶어질라고 해요.


Forgettable. 2010-04-20 15:35   좋아요 0 | URL
전 겨울바다 너무 추워요.
겨울에 물에 뛰어드는 사람을 구했다니, 대단한 남자친구에요. 그 추운 날에 그 찬물에 뛰어들 생각을 하더니. 진짜 멋지다. 수영 잘한다고 떠벌거리는 전 아마 할 수 없을 거에요. 신발도 젖고, 옷도 젖을테니까요. 게다가 젖은 의복들은 얼테구요.. 이런 걱정들이 앞서서 아마 뛰어들지 못했을 거에요. 그 분 진짜 대단하다. 정말 대단한 사람을 사귀셨었군요, 락방님!!

저 검은 바다 실제로 보면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을걸요! 저 바다 속은 무섭고 쓸쓸한 곳이에요 정말로!

다락방 2010-04-20 16:41   좋아요 0 | URL
그사람이 그렇게 말한거지 제 눈으로 본게 아니니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죠. 잘 보이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고.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Forgettable. 2010-04-21 12:02   좋아요 0 | URL
뭘. 대단했구만요 ㅎㅎ 부러워, 그.런. 사람과의 연애 +_+

Alicia 2010-04-2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명이 있군요.. 그게 해명이군요.. 바다가있는 지방소도시로 내려가 살고싶다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휴.

Forgettable. 2010-04-21 12:03   좋아요 0 | URL
와, 알리샤님이당! ㅎㅎ

해명에 대한 두려움과는 별개로 해명이란 말 좋죠.
바다가 있는 지방소도시에 내려가서 사셔도 되요. 바다 바로옆만 아니라면 파도소리 때문에 괴로울 정도는 아닐거에요, 그리고 그 느낌은 사람마다 다른거니까.. 어쩌면 시시 때때로 변하는 소리 때문에 심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Forgettable. 2010-04-21 13:10   좋아요 0 | URL
이 책의 번역가가 번역을 참 잘해주는 것 같아요. ㅎㅎ
원작자가 해명이란 단어를 사용했는진 모르겠지만요.

다락방님이랑 데이트 하기만 하면 만취데이트인데.. 알리샤님이 감당하실 수 있을까요. 헤헤^^;;;
한 번 같이 만나면 재밌겠다.

다락방 2010-04-2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다. 만취데이트 ㅋㅋ (알리샤님, 현재의 위 상태로는 우리 감당 안되실거에요 ㅠㅠ)

뽀님아.

내 이메일 주소 써줄게요. (어쩐지 곧 헤어질기세 ;;)

fallen77@hanmail.net

Forgettable. 2010-04-21 15:36   좋아요 0 | URL
뭐야 ㅋㅋ 저 알라딘 계속 할거거든요? ㅋㅋㅋㅋ
그래도 저장해둘게요!
 

지금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나는 어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그러셨다.   

구비문학의 세계였던가, 이해였던가.

무당이 작두 위를 탈 수 있는 힘은 모인 사람들이 두 손모아 간절히 비는 염원이 모이는 데서 나오는 거라고. 이건 신령한 힘일 수도 있고, 초능력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비는 마음과 마음이 모여야 가능한 일이라 하셨다. 

한국 문화의 이해는 예서 출발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마음이라는거. 내가 말뿐인 한국 현대 소설 일부를 싫어하는 이유는 이 마음이 담기지 않아서이다. 옛날의 마음과의 단절이 고스란히 드러난 문학은 결코 현대의 마음도 울릴 수 없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 계기는 며칠 전 본 점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네에 아주 용한 점쟁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보았다. 한참 미래에 대한 불확신으로 나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점을 보는 동안 별다르게 잘 맞춘다며 호들갑을 떨 일도 없었다. 그저 예상했던 대로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았다. 하지만 툭툭 내뱉아지는 점쟁이 할머니의 반말에 왜인지 점점 마음이 조금 편해졌고, 이 점을 보는 행위는 어느새 대화가 되어있었다. 순간 눈물이 날 뻔하기도 했다. 우리 할머니보다 더 친하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기꺼이 비용을 지급하고, 기분이 좋아져서는 집으로 돌아와서, 할머니의 말대로 엄마와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대화했다. 

배우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옛날 사람의 마음이 되어 설화와 민요, 판소리를 느끼려는 시도들이 모두 헛짓거리였단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은 어제였다. 무구한 역사로 이어져온 무속신앙의 기본은 신령이 아니라 신령을 믿는 무속인과 서민들의 마음이란 걸 나의 체험에서 이제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신성성과 주술성은 방편이자 정의하려는 현대인들의 핑계였을 뿐. 그 동안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 안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민속 신앙은 지금 우리가 하는 것처럼 돈 몇푼 내고 속물처럼, 그래 너 얼마나 잘 맞추나 보자. 가 아니라, 내 살아온 이야기와 내가 바라는 바를 이야기하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무속인과의 대화가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다잘 될 것이라는 무속인의 말에 위안을 받고, 마음의 응어리진 덩어리를 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다잡으며, 일하며 노래할 수 있는 낙관으로 우린 살아왔던 것이다. 

단명한 이는 장수허고
무자한 이는 생남허고, 가난한 이는 부자되고,  
선팔십 후팔십 다산 로인
극락길도 밝은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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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0-04-1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그리고 그제.
제가 읽은 두 권의 책에는 모두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마음이 없는 사람,
살아도 이미 죽어있는 사람의 이야기.

저는 요즘 제가 그런 상태인 것 같아요.
그나저나, 좋은 학교를 나오셨군요...
저는 국문학과인데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먼 산)

Forgettable. 2010-04-16 10:59   좋아요 0 | URL
좋은 학교라기 보단, 좋은 선생님을 만났죠. 책의 공동저자이십니다. ㅎㅎㅎ (왠지 자랑스럽기)
그리고 poptrash님의 관심사는 고전보단 현대문학이나 희곡쪽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전 고전문학과 희곡, 시나리오쪽을 주로 공부했어요.

poptrash님께 용한 점쟁이 하나 소개시켜드려야겠어요 ㅎㅎ
저랑 굿이라도 한 판 하며 마음을 느껴보심이 어떻겠냐는.

gimssim 2010-04-16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말은 몸이 듣고 몸의 말은 마음이 듣는 거 아닐까요?
전 그런 생각이...

Forgettable. 2010-04-16 11:02   좋아요 0 | URL
마음과 몸은 유기적이죠. 마음과 몸 중에 어떤 것이 선행하는지는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른 것 같기도 하지만, 이것들은 연결되어 있어서 어긋나려고 하면 스트레서 받아요 ㅎㅎ

저 같잖게 선문답을 하고 있네요. 히히

Tomek 2010-04-16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엘료 할아버지 말도 Forgettable님과 상통하는 것 같아요. 당신이 진심으로 바라면 온 우주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 진심.
지금 Forgettable님의 마음엔 대구의 말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도 나한테 희망을 걸지 않을 때, 나를 믿고 버티는 게 진짜 빛나는 거야!"
^.^;

Forgettable. 2010-04-16 11:07   좋아요 0 | URL
네. Tomek님 서재 갈 때마다 그 글귀 하나씩 꼬박 씹으며 읽고 있습니다. ^^

아휴, 코엘료 할아버지. 문학계의 자기계발서 대가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ㅎㅎ
그러게요. 사람들의 마음의 소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용하신 글귀를 보면 동양의 고전문학과 코에료 할아버지는 상통하는 부분이 분명 있군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는 역시 상응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Arch 2010-04-16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아서 추천했어요. 결국 점을 보는건 내 미래를 예측한다기보다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은 맘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내겐 뽀님이 좀 그렇던데. 나몰라라 직관녀랄까. ^^

그래서 말인데요. 전국 일주는 언제 떠나요?

Forgettable. 2010-04-18 22:00   좋아요 0 | URL
나몰라라 직관녀라. 제가 들은 평가 중에서 가장 기분 좋은 말이에요. 흐흐
고성은 다녀왔고요, 경주는 다음주말, 군산은 일정 잡아 봅시다. ㅋㅋ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을 전공수업에서 사용한 적이 있는데요...... 공부하느라 때가 타긴 했지만 논문집이라 공부한 기억밖에 없는 책입니다.
얼마 전 아름다운가게에 기증을 했는데, 누가 사갔는지 모르겠네요^^

Forgettable. 2010-04-18 22:02   좋아요 0 | URL
아 정말요? 이 책을 전공 수업에서 사용하는 수업이 또 있나봐요. 혹시 저랑 동문이실지도?!! ^^

글쎄요, 이 책이 논문집은 아닌데 저 역시 공부한 기억밖에 없긴 해요. 전 전공책을 하도 지저분하게 봐서 (이름도 써놓고 줄도 막 그어져있고 메모도 마구 되어있어요.) 어디 기증하지도 못하네요 ㅎㅎㅎ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8 22:18   좋아요 0 | URL
개론서가 좀 더 어울리는 말이겠네요. 지금은 하는 공부가 달라져서 옛 전공책을 보면 기분이 묘해져요. 소중하단 생각도 드는 한편, 책에 적힌 흔적이 부담스레 느껴져 지우고 싶기도 하고......

요 몇 주간 심리학과 대학원생에게 심리 검사를 받고 있는데, 그 친구가 현대판 무당이 아닐까 더러 생각해 봅니다.

Forgettable. 2010-04-18 22:34   좋아요 0 | URL
딱히 대체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었는데 개론서가 맞군요. ㅎㅎ

저는 보통 독서할 땐 책에 흔적을 잘 남겨두지 않아요. 다음 독서 때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런데, 공부하는 책에는 아낌없이 흔적을;; 지금 보면 무슨 생각으로 그 땐 이게 중요하다고 여겼을까 의아한 부분이 많죠.

요즘 읽는 책에 등장하는 정신분석을 공부한 사람이 안좋은 일을 당한 어떤 사람을 상담해주면서, 프로이트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좀 재밌기도 하고 그랬어요.
상담한 사람의 얼굴 너머로 수염난 할아버지가 비웃고 있다는 표현이 ㅎㅎ (이얘기가 갑자기 왜 떠오르지)

여튼 현대판 무당이란 말씀 공감합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4-1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무당들은 일종의 카운셀러였죠. ^^ 전 마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에요.

Forgettable. 2010-04-18 22:03   좋아요 0 | URL
예. 고마워요 :)

다락방 2010-04-18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신이 필요하다는 그 마음이 뭔지 오늘은 좀 알 것 같아요. 그리고 제게도 그게 몹시 필요한 상황인 것 같아요.

어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도 사주를 본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뭔가 불안불안한게 있었는데 사주에서 그걸 콕 찝어내서 빨리 끝내는게 좋을거라고 했다고요. 사주를 보고 운명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들은대로 살게될까봐 좀 두려웠는데, 어쩌면 들은대로 사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가장 덜 다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확신을 갖고 싶어요. 그러니 나도 사주 한번 보러 갈까요?

묻고 싶어요. 이걸 관둘까요 저걸 관둘까요 아니면 이도저도 다 관둘까요? 하고 말이지요.


어제는 술을 마시고 늦은밤에 돌아오면서 일부러 한 정거장 전에 내렸어요. 그전날 남동생과 술마시고 들렀던 아주 쫄깃한 우동집에 다시 가기 위해서였죠. 우동은 싫어하는데(면이 너무 두꺼워요!), 그 집 우동면발은 두껍지 않았어요. 그래서 열한시쯤 그 우동집에 갔는데 거기엔 혼자 온 남자들이 수두룩했어요. 여자는 한명도 없었어요. 짜장면과 우동만 파는 기사식당이었거든요. 늦은밤에 뭔가 치열하게 살다가 우동 한그릇씩 먹기 위해 들어온 그 남자들 틈 사이로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문 앞에서 멈칫멈칫 하다가 분홍색 네일아트를 한 손이 내내 걸렸어요. 결국 우동을 먹지도 못하고 한참을 걸어 집에 돌아왔어요.

세상에 참 많은 것들이 슬프고 지긋지긋해요.

Forgettable. 2010-04-18 22:13   좋아요 0 | URL
일요일 오후 2시. 제가 설악산 산자락을 거닐고 있을 때였군요. 헤헤
(댓글을 보아하니 이렇게 약올리면 안될 것 같은데, 왜 괴롭히고 있을까요. 아휴, )

사주는.. 잘 모르겠어요.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 같아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잖아요. 그것을 점쟁이가 그대로 꼭 집어서 말해주면 안도하게 되지만, 그 반대를 말하면 내가 오히려 점쟁이를 설득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 사주를 보더라도 큰 확신을 얻을 순 없을겝니다. ㅎㅎㅎ

그리고 난 왠지 락방님이랑 점쟁이는 안어울리는 것 같아요. 혼자서도 잘 하고 있는 것만 같아 보여서요. 그런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끔씩, 혹은 자주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긴 하지만.

우동집 이야기는 왠지 쓸쓸해요. 우동은 혼자 먹으러 가지 말아요. 그것도 술을 마시고! 게다가 남정네들이 수두룩한 곳에! 락방님처럼 매력적인 여자는 잡혀간다구요~ 분홍색 네일아트까지 했다니!!

전 네일아트는 한 번도 해본적이 없어요. 기분이 정말 좋아지나요?
많은 것들이 슬프고 지긋지긋하다니 네일아트를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건 아닌가봐요..

Arch 2010-04-20 11:06   좋아요 0 | URL
댓글엔 추천 기능이 없나요? 뽀님, 알라딘에 건의하면 내가 뽀가 다락방님이랑 남긴 댓글엔 죄다 추천해줄게요.
다락방님이랑 뽀는 페이퍼만큼 댓글도 잘 써요. 미잘이랑 나만 좀 그래.(괜히 미잘 걸고 넘어짐)

뷰리풀말미잘 2010-04-25 02:23   좋아요 0 | URL
아치, 제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Forgettable. 2010-04-25 21:14   좋아요 0 | URL
저도 지켜봐 주세요!

Forgettable. 2010-04-20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요즘 '칭찬엔 뽀도 춤춘다.' 뭐 이런 책 읽고 있어요? ㅋㅋㅋ 덩실덩실
여기에서 '뭘요, 아치도 글 굉장히 잘써요!' 라고 해야 하나 싶고. 하지만 그건 너무 오글거리고 ㅎㅎ
미잘보다 훨 낫죠 아치는. (없다고 뒷다마 작렬ㅋㅋ)

전 베플 한번 되 본적이 없는 걸요.
뭐 베플제도 있는데서 댓글 달아본적도 없지만;;

 

어제. 

부러워서 "어이쿠" 하며 감탄사를 몇 번이나 내뱉어야 했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감상하고는, 애써 현실로 돌아오려 눈을 부릅뜨고 있자니 괴로움이 절로 밀려온다.  

게다가 오른쪽 아래 잇몸은 검은 실로 깊은 상처가 겨우 꿰메어져 있고, 진통제를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없이 자기엔 약간 불쾌한 정도의 고통이 은근히 배어있다. 어차피 진통제도 다 떨어졌다. 

불가피한 금주령 때문에 술도 못마시고, 제대로 씹지못해서 소화도 안된다. 

마음을 좀 많이 빼앗겨버린 이에게 연락해봤자, 나는 아웃 오브 안중.  

책을 펴 들어도 어째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매력적인 인간들 투성이어서 그만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봄맞이 욕구불만인가. 

 

마취가 풀리는동안 울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르케스였다. 

   
 

아래쪽 사랑니였다. 치과 의사는 입을 벌리고 뜨거운 집게로 어금니를 짓눌렀다. 읍장은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주 깊숙한 곳에서 얼어붙는 듯한 공허를 느꼈으나 고통을 토해 내진 않았다. 치과 의사는 단지 손목만을 움직였다. 아무런 증오 없이, 오히려 씁쓸한 부드러움으로. 그리고 말했다.

     “이것으로 스무 명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이오, 중위.” ("Now you'll pay for our twenty dead men.")


     읍장은 턱에서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것을 느꼈고, 두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어금니가 뽑혀져 나오는 것을 느끼지 않으려고 한숨도 쉬지 않았다. 그때 눈물 속에서 어금니를 보았다. 그의 고통에 비해 너무 어처구니없게 보였다. 그래서 지난 닷새간의 밤의 고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헐떡거리며 타구로 몸을 기울이고 군복 상의 단추를 풀었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더듬더듬 찾았다. 치과 의사가 읍장에게 깨끗한 수건을 건네주었다.

     “눈물을 닦으시오.”

     읍장은 눈물을 닦았다. 떨고 있었다. 치과 의사가 손을 씻는 동안 읍장은 밑이 빠진 천장을 올려보고 거미알과 죽은 곤충이 널려 있는 먼지 낀 거미줄을 바라보았다. 치과 의사가 손을 닦으며 돌아왔다. ‘누우세요. 소금물로 입을 헹구시고.’ 그러나 읍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대식 인사로 작별을 고하고 다리를 끌며 문께로 나아갔다. 군복 상의 단추는 채우지 않고 있었다.

     “계산서를 보내시오.”

     “당신에게, 아니면 읍사무소로?”

     읍장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문을 닫고 철망 너머로 말했다.

     “마찬가지요.” ("It's the same damn thing."  나같았으면 "상관없어."로 했을텐데. 뭐, 마찬가지지만.)

<출처 : http://www.latin21.com/board3/view.php?table=translate_nh&bd_idx=15

 
   

이 단편을 다시 읽고 싶어서 이 단편이 실려있는 책을 찾기 위해 온 책장을 헤매고 다녔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잃어..버린 건가. 안그래도 욕구불만으로 열받아 있던 머리가 헤까닥 돌 무렵   

마르케스 치과 의사 

으로 구글링을 해보니 이 단편 번역이 나온다. 신비로운 구글의 세계.

 

이 단편은 1장 반쪽 분량으로, 꼬부랑꼬부랑 영어로 된 것을 몇번이나 읽으며 잘 이해도 못하고서는 좋아했었다.  

계산서를 어디로 보내든 상관없다는 읍장의 말을,  

마취가 풀리는 동안 몇 번씩이나 곱씹으며 그제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은 사랑니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ㅠㅠ 무려 스무명의 목숨값! 

 

그나저나 나는 이 봄을 잘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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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1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내야지요. 무슨일이 있어도!

Forgettable. 2010-04-1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금주 며칠했다고 우울증걸린듯!!!

무스탕 2010-04-1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이를 빼셨군요. 더 빼셔야 하나요, 이걸로 끝인가요?

Forgettable. 2010-04-11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고민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치과에서는 다 아물면 빼라고는 하는데, 썪지 않았다면 빼고 싶지 않아요. 한편으로는 이왕 시작한거 몽창 빼버릴까 싶기도 하구요. 휴..
 

   

 

 

 

 

 

 

 

G.K. 체스터턴의 신작이 나왔어요! 

(외쳐보지만 왠지 공허하다....) 

체스터턴은 굉장히 다양한 방면에서 다작했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라에 제대로 번역된 작품은 브라운 신부 전집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다.([오소독시]가 있지만 품절(혹은절판?)이라고 알스님이 알려주심) 북하우스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전집을 모두 구매했다; 한국에서 그의 작품이 유명하거나, 인기가 많지는 않지만 내 보기엔 서머셋 몸이나 E.M.포스터 못지 않은 포스를 풍긴다. (비슷한 시대의 작가라고 끌어오긴) 

책 설명을 인용해 보면  

이 작품은 정치적인 소설도 아니고, 형이상학적인 스릴러도 아니며, 스파이 소설의 형태를 취한 난해한 희극도 아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다.

 

아우, 매력적이야 >.< 

정치적이고, 형이상학적 스릴러이며, 심지어 스파이 소설의 형태를 취한 '희극'이라. 이 세가지 특징은 체스터턴이 브라운 신부 전집에서 보여줬던 수많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설명이다. 체스터턴이 보여주었던 대단했던 단편의 매력이 장편에서도 그 빛을 발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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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10-03-2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허한 외침이 되지 않게 제가 추천 한 방 ㅎ
브라운 신부 전집도 아직 다 못 읽었지만, G.K.체이스턴 책은 더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

Forgettable. 2010-03-30 05:24   좋아요 0 | URL
중독성있죠^^

아, 브라운 신부 전집을 읽으신 분이 있어서 좋아요! :)
사실 이 페이퍼는 체스터턴 읽은 알라디너 소환페이퍼였다능ㅋㅋㅋ

비로그인 2010-03-29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한 방 더는 저에요~
저도 체스터턴 좋아해요.. 얼마전 다른데서 열린책들 할인행사 하길래 포스터와 오스터도 열심히 사줬지요.. 포스터를 사놓고 싶었던 건 아마도 뽀님 서재의 영향인 듯. 포스터 전집은 껍질(?)벗기면 너무 이쁘지 않남요?

Forgettable. 2010-03-30 05:25   좋아요 0 | URL
전 누군가 저땜에 책을 샀다고 하면 진짜 햄볶아요~ ^^
더군다나 포스터 전집을!!!!!

(그 할인행사 아직도 하나요? 저도 아직 못산 책이 있는데;;;;)

비로그인 2010-03-30 22:31   좋아요 0 | URL
K서점에선 2월말, I에선 3월말까지 행사였는데 포스터 책은 구간을 30%에 팔다가 소진되었는지 슬그머니 없어졌어요. 저도 전망좋은 방은 품절돼서 못구했고, 오스터의 환상의 책은 슬그머니 값이 올랐길래 투쟁해서 결국은 할인 못받은만큼 예치금으로 받았다는 힘들고 힘든 이야기..

Forgettable. 2010-03-30 22:42   좋아요 0 | URL
아쉽네요, 쩝..
30프로 세일같은거 할 때는 제깍제깍 사두어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

아깐 아침이라 정신없어서 껍데기 못벗겨(?)보고 지금 벗겨봤는데, 이제서야 벗겨봤네요(아웅 야해)
예뻐요!!!!!!!!!!!!!

비로그인 2010-03-30 22:50   좋아요 0 | URL
아, 이젠 일본소설까지 뽐뿌질을 하시다니.. (저도 일본소설 한국소설은 잘 안봐요) 그럼에도 뽀님 리뷰에는 왜 이리 혹하게 되는건지?
즐찾하나 줄면 제가 떠난줄 아세요~~~ (휘리릭~)

Forgettable. 2010-03-31 00:00   좋아요 0 | URL
호호 저땜에 책사는 분은 Manci님뿐일거에요! :)

저도 일본소설 최근에 계속 읽고 있어요. 취향은 계속 변하는건지, 아니면 제가 몰랐던 세계인건지..

안그래도 즐찾 하나둘씩 주는데 가지마세용ㅋㅋ

비로그인 2010-03-2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처음 번역되는 거였군요. 책상 앞에 앉으면 항상 눈에 보이는 위치에 있는 책이라, 당연히 번역되어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절판인지 품절인지 모르겠지만 혹여 도서관에서라도 구할 수 있으시면 '오소독시'도 한 번 읽어보세요. 체스터튼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엿볼 수 있는 책이에요. 서머셋 몸이나, E.M.포스터 상대도 안돼요! ...그렇고요. 물론 제 생각이지만요.

Forgettable. 2010-03-30 05:35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이미 읽으셨다구요? 우왕.. 역시 알스님 ㅠ_ㅠ
오소독시는 지금 구할 수가 없으니 원서로 도전해보겠슴다 ^^ (대체 언제쯤..............)

전 알스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줄 알겠습니다. 믿어요, 믿습니다! ㅎㅎ
아. [목요일이었던 남자]도 너무 기대되요.

근데 알스님, 새로운 서식처 알려주세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3-30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저는 기독교 작가 C.S.루이스 통해서 체스터턴을 알게 되었어요.

[The Everasting Man]은 홍성사를 통해 올 가을쯤에 출간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설도 읽어봐야겠네요.

Forgettable. 2010-03-30 17:05   좋아요 0 | URL
와, 정말 별 것 아닌 페이퍼인데, 파고세운닥나무님의 댓글도 받게 되는군요 :)

체스터튼의 관심사는 방대하죠. 그리고 현대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얼마나 많이 이용하는지.. 제가 읽은 브라운신부 전집은 장르가 미스터리지만 그 안에 온갖 인생사가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장편인 [목요일이었던 남자]에 대한 기대도 크고요, 체스터튼의 종교관, 디킨스론도 무척 궁금해서 언젠가는 다른 작품들을 원서로라도 읽어야지 하고 있답니다 ㅎㅎ

한국에 번역출간된 작품이 얼마 없는데도 역시 알라딘에는 고수분들이 많이 숨어계셔서 다들 알고 계시네요 ^^

파고세운닥나무 2010-03-30 19:56   좋아요 0 | URL
책 제목이 작은 꺾쇠에 들어가 화면엔 안 보이는군요.

꺾쇠 모양을 바꾸니 이제 보이네요.

홍성사에선 [영원한 인간]으로 이름 지으려 하던데, 원제도 그렇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제목입니다.

Forgettable. 2010-03-30 21:21   좋아요 0 | URL
아ㅡ 저는 '은' 앞이 뭘까 궁금해하다가 제가 앞에 언급한 [오소독시]일까 하다가 그러면 '는'이 와야할텐데,, 하다가 여쭤본다는 걸 까먹어 버렸네요 -_-;;

이것이야말로 빅+굿뉴스인데요!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

stella.K 2010-03-3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흠. 그렇군요. 그런데 이 사람이 전에 인종 편견이 있다고 듣기도 했는데
꼭 그래서마는 아니지만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못 읽고 있는 책이네요.
박스의 글 보단 님의 서머셋 모옴이니 포스터에 비견하시니 그게 더 신뢰가 갑니다.ㅋ
기억하겠습니다.^^

Forgettable. 2010-03-30 17:17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보니 책에서 인종차별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문장 한구절을 읽고 당황했던 기억이 설핏 나요.
그런데 부두에 대한 단편도 다루고 있고, 또 찾아보니 우생학에는 반대했다고 하니,,
당시에 만연했던 영국우월주의(?)같은게 아니었던가 싶어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 않은데.. 왜, 옳고 그름에 관계 없이 노비제도가 당연했던 시대가 있었고, 여자에게 시민권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고, 동물을 인간의 이익에 이용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학대해도 됐었던 시대가 있다고들 하잖아요. (제가 말솜씨가 없어서 동문서답같은데, 스텔라님이라면 이해해주실거라.. 생각해봅니다;; 하하;;)

여튼 서머셋 몸과 포스터와 체스터튼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3대 영국작가죠 ^^

stella.K 2010-03-31 10:51   좋아요 0 | URL
음...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저도 읽어 봐야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긴한데,
문제는 저자가 신부 아니던가요? 뭐 그게 아니더라도
주인공을 신부를 내세웠다면 정의로운 캐릭터로 만들 수도 있을텐데 하는 의구심이 생기더군요.
물론 말해봤자이긴 하지만. 제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구요.
암튼 언제고 읽어봐야겠습니다.

Forgettable. 2010-03-31 15:58   좋아요 0 | URL
체스터튼은 신부가 아니죠. 종교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작가이다 보니 변명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찾아봤는데요 ^^

신부님인 주인공은 정의롭고 인간을 사랑하며 따뜻하고 깊은 마음으로 범죄를 다룹니다. 이 사람의 마음에 인종차별이라는 티끌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어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정의의 종교는 아니죠. 종교 중에서도 정의와는 가장 거리가 먼 것 같은데.. 교리를 설파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만, 가톨릭의 역사를 쭉 살펴보면 이렇게 이기적인 종교가 있나 싶기도 했어요.

설사 이 작가가 인종 차별주의자였다고 하더라도 인종 차별이라는 개념이 미비한 시대에, 특히나 식민지 개발 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영국/유럽 우월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였죠. 이런 때 우생학에 반대하고 영국민족 우월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어전쟁에서 보어인(백인이긴 합니다만)을 편들었다고 하니 이 작가의 사상에 큰 문제가 있어보이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냐는 건 무척 중요하죠. 우연히 어느 분께서 포스터에 대해서 댓글을 주셨는데, 포스터도 [인도로 가는 길]에서 식민주의 사상을 약간 보여준다고 하셨어요. 저는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해서 봐야 알겠지만, 후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덕분에 좋아하는 작가 자체에 대해서 좀 알게 됐네요. 고맙습니다.


stella.K 2010-03-31 17:53   좋아요 0 | URL
고맙긴요. 제가 오히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 작가에 대해서 더 관심이 생겼습니다.
조만간 저도 함 읽어보겠습니다.^^

lazydevil 2010-03-30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스터튼한테 문자왔어요. "포겟님께 감사의 댓글 빨랑 달고, 너두 빨랑 읽어!" ㅜㅠ

Forgettable. 2010-03-30 21:1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데빌님!! 체스터튼이랑 문자도 하는 사이였어요? ㅋㅋㅋㅋ 아웅, 부럽다아~

숨어있는 체스터튼 팬들을 만나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페이퍼에요. (진지)
 

   
 

(나를 만나러!) 

무슨 기적일까. 자신을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마츠노스케는 눈을 부릅뜨고 도련님을 삼킬 듯이 바라본다. 

"형님?" 

푸른 장식물을 천천히 눈앞에 내밀었다. 

"저는....." 

이 구슬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몇번이나 구슬이 지켜주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 구슬의 주인이 나가사키야의 도련님이고, 피가 이어진 형제고, 자신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형님이라고 불러 주어서, 정말 얼마나 기뻤는지.....) 

모처럼 만날 수 있었던 이 기회에, 어떻게 해서라도 도련님에게 모든 것을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눈물이 고여서 스스로도 멈출 수가 없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눈앞이 흐려진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의 손이, 떨리는 마츠노스케의 어깨에 닿았다. 

그 손은 따뜻하게, 매일 가장 몸을 따뜻하게 해 주던 밥보다 더 따뜻하게 마츠노스케를 감싼다.
마츠노스케는 도련님 앞에서 방바닥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샤바케]에는 영리하지만 몸이 약한 도련님과 그 도련님을 지키는 요괴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백귀야행]의 구조와 비슷하다. 하이드님 서재에서 보고 예전부터 보관함에 담아 두고는 있었는데, 완전 작은 책이면서 9,000원이라는 쫌 비싼 가격에 담아두고만 있었다. (양장본이긴 하다) 그러다가 강남 씨티극장 아래에 있는 중고책 서점 (북스리브로였던가)에서 발견하고는 2권부터 봐도 별 문제 없다해서 일단 2권만 구매해서 읽는 중이다. 

언젠가부터 반전이 스토리의 기본 요건이 되었고, 누가 나쁘고 착한지 오묘할 수록 깊이 있는 이야기라 평가 받으며, 좀 더 자극적인 이야기, 좀 더 잔인한 이야기,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만을 상상해내느라 작가와 독자는 조금씩 피폐해져왔던게 아닐까. 물론 나도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이유는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냈기 때문' 운운하며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 선악이 모호한 캐릭터에 열광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권선징악이 뚜렷하고 괜시리 가슴뭉클하게 만드는 [샤바케]의 에피소드들을 읽으니 그동안의 독서 취향과 그에 따른 허세에 대한 약간의 회의감이 든다. 

며칠 전에 눈이 아주 많이 온 다음날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눈 녹는 소리였다! 봄이 오고 있구나, 라고 기뻐했고 눈 녹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용한 새벽에 밖에 있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오늘은 쉬는 날인데, 눈을 뜨니 창문 밖으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봄이 오고 있구나, 라고 또 기뻐했다.  

겨울이 가고 있다는 슬픔은 잠시 접어두었다.

기뻐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알 수 없는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고, 책 속에도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어떤 서사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혹은 더 잔인하게 왜곡해서 독자에게 '선사'함으로써 독자를 괴롭게 하는 반면, 또 다른 서사는 비틀린 현실을 보여주되, 그 현실의 다양한 이면을 함께 보여주면서 독자를 치유하고 희망을 선물한다. 그것이 헛된 희망일지라도 이런 서사야말로 그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라본다. 

세상에 오갈데 없는 고용살이꾼 마츠노스케가 배다른 형제이자 부잣집 도련님인 아우의 따뜻한 손길을 등에 엎고 우는 이 장면만 보고, 누군가는 도련님이 오갈데 없는 형님을 이용해먹고자하는 못된 속셈을 가늠해볼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서자이기 때문에 엇갈린 형제의 운명을 개탄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마츠노스케가 부잣집 도련님을 굳이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하늘빛 유리]에피소드에서는 도덕책에서나 볼듯한 형제의 우애로 마음 따뜻하게 마무리짓는다. 당연하게도!  

아주 오랜만에 아껴놓고 싶은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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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9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9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9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9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03-29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이유는 나는 그의 모든 문장에 있다고 믿어요. 그가 구축해낸 캐릭터는 사실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한 여자에 대한 상사병을 앓고 있다가 줄리엣을 보고는 그 사랑을 금세 옮겨버리고 마는 유약한 캐릭터인 로미오도 그렇고, 끊임없이 이간질을 해대는 이야고도 그렇고, 이간질에 넘어가 줏대를 잃고마는 오셀로도 그렇고 말이죠.

음, 그렇지만 내 믿음은 당연하게도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에요. 어떻게 문장에 있다고 확언할 수 있겠어요. 나는 그의 소설을 원서로 읽었던 것도 아닌데!

일전에 일본 작가가 쓴 클레오파트라를 읽고 카이사르와 안토니를 별로 안좋아했었는데, 세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읽으니, 시저도 안토니도 또 나름 괜찮은 인물로 보이고 말이죠.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인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아, 그러나 이 페이퍼는 세익스피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데..미안요. orz

Forgettable. 2010-03-29 11:22   좋아요 0 | URL
그 문장 제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하신 말씀 따라한 거라능-_-;;;

그렇지만 오히려 난 그 '특별해 보이지 않는 캐릭터'의 창조가 대단한 거라고 봐요. 그 때 당시만 해도 온갖 영웅들의 이야기만이 이야기 대접을 받고 있을 때였잖아요. 그러니 그 특별하지 않은 인물들의 등장이 문학계에선 센세이션을 일으켰던게 아닐까 하능..

전 사실 셰익스피어 제대로 읽은거 멕베스밖에 없어요;;;;;
갑자기 왜 셰익스피어 얘기해서 제 무식 뽀록냅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0-03-29 11:26   좋아요 0 | URL
아하! 그렇구나.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나는 그런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그렇네요. 온갖 영웅들의 이야기만 대접받고 있을 때 그 특별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그런 인물들. 아하!

이런 유식한 뽀 같으니라구!

Forgettable. 2010-03-29 12:03   좋아요 0 | URL
훗, 제가 쫌!!!! (아니면 어떡하지 ㄷㄷㄷ)

아 배고파.
점심'밥'약속이 취소되면서 지금 뭐먹어야 할지 패닉상태에요. 락방님은 점심 드시러 가셨겠군뇽ㅋㅋ
전 지금 냉동밥 녹혀먹게 생겼다능 org
뽀송한 월요일 되세용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