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나는 어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그러셨다.
구비문학의 세계였던가, 이해였던가.
무당이 작두 위를 탈 수 있는 힘은 모인 사람들이 두 손모아 간절히 비는 염원이 모이는 데서 나오는 거라고. 이건 신령한 힘일 수도 있고, 초능력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비는 마음과 마음이 모여야 가능한 일이라 하셨다.
한국 문화의 이해는 예서 출발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마음이라는거. 내가 말뿐인 한국 현대 소설 일부를 싫어하는 이유는 이 마음이 담기지 않아서이다. 옛날의 마음과의 단절이 고스란히 드러난 문학은 결코 현대의 마음도 울릴 수 없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 계기는 며칠 전 본 점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네에 아주 용한 점쟁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보았다. 한참 미래에 대한 불확신으로 나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점을 보는 동안 별다르게 잘 맞춘다며 호들갑을 떨 일도 없었다. 그저 예상했던 대로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았다. 하지만 툭툭 내뱉아지는 점쟁이 할머니의 반말에 왜인지 점점 마음이 조금 편해졌고, 이 점을 보는 행위는 어느새 대화가 되어있었다. 순간 눈물이 날 뻔하기도 했다. 우리 할머니보다 더 친하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기꺼이 비용을 지급하고, 기분이 좋아져서는 집으로 돌아와서, 할머니의 말대로 엄마와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대화했다.
배우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옛날 사람의 마음이 되어 설화와 민요, 판소리를 느끼려는 시도들이 모두 헛짓거리였단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은 어제였다. 무구한 역사로 이어져온 무속신앙의 기본은 신령이 아니라 신령을 믿는 무속인과 서민들의 마음이란 걸 나의 체험에서 이제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신성성과 주술성은 방편이자 정의하려는 현대인들의 핑계였을 뿐. 그 동안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 안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민속 신앙은 지금 우리가 하는 것처럼 돈 몇푼 내고 속물처럼, 그래 너 얼마나 잘 맞추나 보자. 가 아니라, 내 살아온 이야기와 내가 바라는 바를 이야기하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무속인과의 대화가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다잘 될 것이라는 무속인의 말에 위안을 받고, 마음의 응어리진 덩어리를 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다잡으며, 일하며 노래할 수 있는 낙관으로 우린 살아왔던 것이다.
단명한 이는 장수허고
무자한 이는 생남허고, 가난한 이는 부자되고,
선팔십 후팔십 다산 로인
극락길도 밝은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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