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 -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3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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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그림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인지, 그렇다고 첫눈에 반해서도 아니어서인지 그렇게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니 내가 느꼈던 점이 클림트의 그런 의도였구나를 알게 되어 이제야 비로소(!) 그의 그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오스트리아 빈 사람인 클림트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서른 무렵의 나이에 역사화가로 성공을 하게 된다. 미술의 시작을 장식미술로 시작한 클림트는 동료, 동생과 함께 예술가 컴퍼니라는 팀을 창립하여 주요건물들에 역사화 같은 벽화를 그렸다. 이후 빈 분리파를 창단하고 역사화가에서 벗어나 황금시대로 나아가는 클림트.

 그의 황금시대를 연 것은 중세도시 라벤나로의 여행이었다. 1500년전 비잔티움 제국의 모자이크에서 새로운 예술의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의 그림의 인물들은 얼굴 부분만 실제적으로 느껴지고 몸은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를 띄게 된다. 그렇게 황금시대를 맞은 클림트는 이후 장식과 동양(일본)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에게 재충전의 공간이었던 아터호수를 그린 풍경화 역시 다른 화가들의 풍경화와는 다르다. 아버지가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본인도 건강에 신경을 매우 썼으나 우연히도, 불행하게도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뇌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그가 양감이나 사실성을 포기하고 장식, 선, 평면을 강조했던 것에는 금세공업자 집안이었던 그의 가정환경이 많이 좌우했을 듯하다. 클림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의 동방박사 모자이크가 인상적이다. 단순하고 투박하고 색도 한톤 다운된 듯한 벽화에서 예술의 영속성을 느꼈던 클림트의 심정이 조금 이해가 되는 듯하다. 그리고, 이번에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예술가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귀족들의 부인들은 유명한 그림으로 남아 천년 넘게 자신을 알릴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삶의 유한함을 느끼게되는 나이라서 이런게 눈에 들어왔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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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의 공간 - 나의 마음을 읽다 나의 삶을 그리다
김현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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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떠올려보면 사람에게는 확실히 공간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다. 사회 초년생때 머물렀던 원룸, 아주 작은 방에서도 필요한 세간살이들이 다 들어가있었고 그 좁은 방에 책이며 물건들이 나름의 질서를 이루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좀더 큰 집으로 여러번 이사를 하면서 공간에 적응하는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곤 한다. 책의 제목처럼 건축은 건물 그 자체이기 보다는 그 건축물과 사람과의 관계, '공간'에 대한 학문이며 기술이다. 어떻게 보면 예술의 영역이기도 한 건축은 우리의 삶, 생활과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다. 문, 계단, 창, 지붕, 대문, 책장, 탁자, 부엌, 방이라는 단어에서는 너무나도 생활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매일 여닫는 문을 자세히 관찰한 적은 없지 않은가. 그 안에는 무게의 분배라든지, 경첩이나 회전과 같은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으며 그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의 심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방과 죽음이라는 꼭지가 인상적이었다. 어디에서 사는가가 우리에게 중요하듯, 어디에서 죽을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죽음은 우리의 삶과는 확연히 분리되어진 장소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질 뿐이다.

공간을 떠올리고 그것을 직접 만드는 일을 통해서 인간의 진정한 사랑과 자유의 참 의미를 알게 된다. 가장 비참한 공간을 감옥이라 부르고, 끝을 알 수 없이 풍부하고 심오한 세계를 우주라고 부른다면, 자신의 환경을 비극으로 빠뜨리는데 있어서 공간은 절대적인 조건인 것 같다. 동시에 마치 하룻밤, 달고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모든 세상이 달라지는 어떤 날처럼, 비천함과 숭고함이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도 일상의 공간이다. p.325

일상의 공간에서 자유를 찾으려면 공간에 대한 장악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공간이 나의 개성을, 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줄 때 잘 살아낸 느낌이 들지 않을까. 그 집이 얼마나 큰 집인지, 사치스러운 세간살이들로 가득차있는지는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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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산책 - 식물세밀화가가 식물을 보는 방법
이소영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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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태니컬 아트라고 문화센터에서 여는 프로그램인줄로만 알았던 나는 식물 세밀화라는 것의 바른 명칭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식물 세밀화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극사실주의적 그림이 아니라 식물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은 확대하고 강조하되, 식물 개체의 환경 변이와 같이 종의 특징이 아닌 면은 축소하는 해부도라고 한다. (p.89) 그래서 식물 세밀화에 대해 찾아보니 그 아름다움에 놀라 한참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 분야에 저자와 같은 원예학자가 많은지 미술을 전공한 화가들이 많은지 궁금해졌다.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식물세밀화라는 분야를 거의 개척한 듯하고 자부심 또한 매우 큰 것 같다. 영국이나 일본처럼 일찍이 식물세밀화의 중요성을 알고 활발히 연구되어온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이제서야 그 중요성을 인식한 초기인듯하다.

식물, 공원의 모습을 담은 도판이 아름다운 책이다. 외국의 다양한 식물원들이 소개되는데 그런 식물원에 자주 가볼 수 있어서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행에 따라 다양한 식물들이 우리들에게 왔다가 떠나기도 한다. 다육식물이 한때 유행하더니 어느 덧 나에게도 보인 공중에 매달아 헝클어진 머리털을 연상시키는 틸란드시아 역시 그런 예이다. 나이가 들수록 식물에 더 관심이 간다. 모야모라는 앱으로 꽃이름도 많이 찾아보고 외우고, 다른 사람에게 아는 척까지 한다. ㅎㅎ 나비와 벌이 식물 주위를 맴도는 것처럼 우리 사람도 식물 주위에서 귀엽게 행복을 나누며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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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 -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의 화신 클래식 클라우드 4
김한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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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언급했듯 나 역시 페소아를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 매력에 빠져들어 이 책을 두번 읽었었다. 이후에 이탈리아어 중역인 까치글방의 <불안의 책>을 몇년 전에 읽었다. 첫 페이지부터 사로잡는 문장이라니... 이렇게 단 두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페소아의 매력에 빠졌는데 그 때문에 리스본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한민의 <페소아>를 다 읽고는 정말 저자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나이에 페소아를 연구하려고 전공과 상관없이 포르투갈에 갈 수 있는 용기며 단순한 관심을 넘어선 전공자로서의 위엄이 책의 곳곳에 나온다. 한국에는 아직 페소아에 관련된 책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큰 몫을 할 것 같다. 페소아는 여러 개의 이명으로 문학작품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이 정신병이 있지 않을까해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고독을 친구 삼아 평생을 살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심정을 여러 개의 자아로 나누어 활동했던 것일까. 여러 개의 인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통일된 자아를 이루는 것이 인격의 완성인양 배워온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페소아의 흔적을 찾아 멀리 리스본까지 날아가는 것이겠지만 페소아는 오히려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상상만으로도 여러 인물을 살아본 사람이니 상상만으로도 세상 여러 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페소아의 집이라는 박물관은 사실 엄밀히 말해 페소아의 집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페소아의 기본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아르테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인물과 여행지를 결합한 시리즈를 출간하나 보다. 흥미로운 책들이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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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생활의 즐거움
필립 길버트 해머튼 지음, 김욱 옮김 / 리수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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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말투는 고집스런 나이 지긋하신 지식인께서 계속 충고를 하는 듯한 말투이다. 그런데 그 충고가 기분나쁘지 않고 너무 고지식하면서도 완고해서 도리어 웃음이 난다. 일단 출발은 우리 인간은 지적 생활을 추구해야만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한다. 지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희생해야만 하는, 또는 지켜야만 하는 강령(?)들을 나열하는데 그 조언에 내 생활을 슬쩍 뒤돌아보게 만든다. 가령 엄청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던 칸트의 하루 일과를 내 하루와 비교해보게 하여 이렇게 살 순 없군,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습관을 좋은 쪽으로 바꾸고 하루를 알차게 살고 그럼으로써 지적 탐구의 매력도 느끼는 것은 물론 지적인 결과물까지 생산해낼 수 있는 삶을 산다면 후회없는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습관을 바꾸는 것조차 힘들어하겠지만 말이다. 읽을 책은 너무 많고 쫓기듯이 책을 읽을 때가 많다. 이거 다 읽고 다음 책은 이것을 어서 읽어야지 하면서 말이다. 이 책에 가난한 지식인에게 라는 꼭지가 있다. 여러 권의 문학전집 컬렉션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하는 부자와 가난하지만 한권의 책을 반복해서 몇번씩 소중히 읽고 그로 인해 삶을 바꾸는 지식인도 있다는 것이다. 후자의 삶이 더 풍요로우리라 믿는다. 아직은 헝그리 정신을 갖고 열심히 사는 삶이 옳다고 생각하는 나이다. 누가보면 촌스럽겠지만 말이다.

 

사람이 자기를 상실하지만 않는다면

생활은 그를 넘어뜨리지 않는다.

타고난 나를 잃지만 않는다면,

나의 전부를 잃어도 좋으리라.

-괴테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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