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의 지혜 - 혼돈의 세상에서 평온함을 찾기
앤디 메리필드 지음, 정아은 옮김 / 멜론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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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나귀의 귀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다. 한번쯤은 해볼 일이다. 당나귀 귀를 손으로 어루만지면 갓 오븐에서 꺼낸 신선한 바게트 같다. 더없이 따뜻하고 부드럽다. 촘촘하게 짜인 직물이랄까, 잘 숙성된 밀가루로 만든 빵이랄까. 그리고 그 바게트가 회전하는 것을 보라!
p.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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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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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하고 나자 갑자기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자기 말에 담긴 진실을 느낀 그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절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절망이 그토록 무거웠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들뜨다 못해 현기증이 날 것만 같고,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그는 다시 말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 p.264


여기 사람들이 실패라고 규정짓는 한 남자의 인생이 있다. '실패'라고 거창하게 말하기에도 너무 평범한 어느 누군가의 인생. 대학을 졸업하고 책과 공부가 좋아 교수가 된다. 잘 맞지 않는 여자와 살지만 이혼은 하지 않는다. 불륜이라 일컬어지는 순간의 사랑으로 잠시 살아나기도 하지만 어느 덧 나이를 먹고 병에 걸려 죽고 만다. 하나 있는 딸은 불행한 가정에서 자라 역시 불행의 시작이 보이는 인생을 걷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면 이렇게 실패한 스토너의 인생이지만 이 인생을 어느 누가 실패라고 함부로 말할 수가 있는가. 책에 대한 조용한 열정. 인생의 순간순간에 보여지는 신중하고 가치있는 선택들. 고통스러운 일상을 하루하루 견뎌내는 강인함.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어느 타인이 알 것이며, 어느 누가 내 행동에 뭐라고 하느냔 말이다. 문장이 아름다워 영문판을 사서 비교하며 다시 읽고 있다.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소설을 만나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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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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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과 지하에 마련된 작은 식당에서 이미 식어버린 채소 수프 한 그릇에 빵 한 조각을 먹고 나와서는 불이 켜진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에서 나는 책 읽기가 노동인 인간의 슬픔 같은 것을 느낀다. 읽기와 쓰기를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작은 항의 같은 것도 들어있겠다 싶다. 빠른 시간 내에 최대의 결과를 얻어내야만 하는 시대정신에 맞추어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우울도 분명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빨리빨리 해치우지 못하는 일이 진득한 책 읽기이다. 한두 장에 지나지 않는 글을 일주일 이상이나 붙잡고 있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저 별 같은 이름 모를 수많은 책들이 누군가 와서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도서관. 내가 발굴하지 않으면 도서관이라는 무덤 속에서 사라질 책들. 그리고 책 읽기가 끝나도 다시 열을 지어 기다리고 있는 책들. 책 노동자들이 자주 우울한 건 그들의 노동으로도 책 읽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예감에서 나올지도 모른다. p.204

아호수를 바라보며, 이 시를 읽으며, 내 일생에 있었던 불가능한 사랑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거의 죽을 것처럼 차오르던 열정과 실망 뒤의 아픔으로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았는지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사랑의 순간에, 또한 사랑이 떠나가고 난 뒤에 저절로 솟아오르던 시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내 속으로 들어와 거대한 물 흐름을 만든다는 것도 생각했다. 그러니 떠난 사랑들이여, 당신들이 남기고 간 물은 인공 호수가 되어 언제나 변함없이 내 마음에 머물고 있음을 아시라. 어떤 사랑도, 비참하게 배반된 사랑마저도 사랑이었으므로 그 사랑의 마음이 물처럼 흐르던 동안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웠고 삶은 살 만했는가. 물은 흐르고 사랑은 그 밑에 고여 흐르지 않는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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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야간비행 - 정혜윤 여행산문집
정혜윤 지음 / 북노마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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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I know not what tomorrow will bring.

-페르난두 페소아

 

이상하게 나는 경어체(~ㅂ니다)로 쓰이거나 편지 형식으로 쓰여있는 책을 싫어한다. 몰입이 안된다고나 할까. 게다가 이 책은 시작부터 미스 양서류라는 들어본 적도 없는 표현까지 나와... 아예 기대가 없었다. 서두에 이상하면 그냥 읽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형식이 불편함에도 어느덧 이 책에게 스르르 마음을 열고 있는 나를 보았다. 필리핀 보홀의 사람들 이야기 때문에 그랬을까. 가난하지만 순수한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져와 마음을 조금씩 이 책에게 주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페르난두 페소아와 리스본 이야기가 나오니 어쩔 수가 있겠는가. 한번 유럽여행을 하게 되니 두번은 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유럽으로 스페인을 생각하면서 그림 한장 없는 이 책을 더듬더듬 읽어가며 소리없는 감동을 느낀다.

저자처럼 리스본에 가게 된다면 <최후통첩>을 고할 것들의 목록을 써 가서 그 장소에서 읽어보리라 다짐해본다. 아주 작게 중얼거리게 될지라도. 내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여행지에서의 경험은 더욱 그렇다.

당시에 제 마음은 어두웠지만 내가 사는 세상도 어두웠지만 저는 빛과 함께했다고 느낍니다. p.275

이 부분을 읽다가 왈칵 눈물이 나올 뻔했다. 힘들었던 시기에 어렵게 떠난 여행이라면 그 시간이 인생 전체에서 보았을 때 작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해 본 자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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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 부는 사람 - 모든 존재를 향한 높고 우아한 너그러움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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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기이한 삶을 지켜보며 내가 느꼈던 의문들은 책을 찾아보면 해결될 것이고 그런 지식을 제공하는 책은 많다. 하지만 지식의 궁전은 발견의 궁전과 다르며 나는 발견의 궁전의 진정한 코페르니쿠스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그 이상이다! 나는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하지만 거미는? 거미조차도?
거미조차도.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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