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임을 뽑는 공고를 냈다.

아무도 안 온다.

어디에 내셨냐고 해서 찾아다 사서들이 즐겨 가는 페이지에 내려고 봤더니........

헉, 사서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사서교사 자격증 그거... 사실 별로 많지 않다. 문헌정보학(내가 대학다닐 때는 도서관학)을 4년 전공해야 하고, 교직 이수도 해야 한다. 그런데 전혀 쓰임새가 없었던 그 자격증은, 우리 때 공부 잘 했던 애들도 별로 하지 않았다. 다소 소심해서 어디다 써먹을지 모르니 무조건 따 두자 했던 친구들이랑, 나처럼 교대를 가고 싶어했는데 내 학비를 댈 분들이 안 보내주셔서(그건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ㅠㅠ) 그 한풀이로 교직을 이수했던 부류들이 있었을 뿐이다. 아, 그리고 공주사대 출신들은 모두 가지고 있다.

아, 내 친구도 있다. ~꿘이었던 내 친구는 거의 수업을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래도 성적은 괜찮아서 교직이수의 자격이 되었다. 자기는 교직 이수하기 정말 싫은데, 순전히 자기가 노트를 빌려야 하는 내가 교직을 이수하기 떄문에 따라했다. 아직도 나 때문에 자기 학점이 엉망이라고 궁시렁댄다. 헉, 4년 내내 노트 빌려주고, 노트 서머리해주고...그때는 '내가 니 덕분에 졸업한다'라고 하더니만.

어쨌든, 그 자격증 가진 사람 구하기 쉽지 않을 거라 말씀드리고, 나도 여기저기 퍼다 두었다.

그런데...

어제 하루 무려 8군데서 전화가 왔다고 하고, 전화 안한 채 이력서 들고 찾아온 사람도 댓 명이란다.

교감선생님은 엄청 당황하셨다.

저, 나는 어떤 사람이 잘 할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문제가 되는지 잘 모르니까 혹시 조언을 좀 해주실랍니까?

이러시면서 보여주신다. 두세 명 오면 뽑겠는데 너무 여럿이 오니 도대체 뽑질 못하시겠단다.

제가 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겠다고 말씀드리면서도 흘낏 보니, 이력서가 화려~하다. 현직 교사자격증을 가진 사람도 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런저런 자격증을 엄청 가진 사람들이다. 물론 사서교사는 아니지만 사서자격증은 다 있다.

갑자기, 내가 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게 과연 잘 하는 짓일까 생각했다.

취업란이 대단한가 보다.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계약직을 놓고도 이렇게들 박이 터지니 말이다. 남편은, 그 자리 권리금 받고 팔아란다 ^^

그만 두려니 갑자기 학교도서관의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가슴 한 켠이 아릿하기도 하고, 괜히 걸래들고 다니면서 책상을 박박 문지르기도 한다. 겨우 16개월 일했으면서 40년 일하고 정년퇴직하는 것처럼 온갖 감정은 다 잡는다...ㅠㅠ

그동안 벌어진 일이야 정말 하루하루 전쟁이었지만, 그 기억들이 하나하나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아이들 하나하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한동안 좀 아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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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10-20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이란 것이 그렇게 요기롭지요. 아프고 슬픈 기억은 싹 지우고 좋은 장면만 계속 보여주는....
이왕 결정하셨으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시고, "에이, 씨워언하다!"고 나오세요. 나중에 분명, 더 좋은 기회가 생길거예요.
(그리고 권리금...ㅎㅎ 그거, 발상 죽이네요.^^)

로드무비 2004-10-2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든 일 마쳐놓고 왜 그만두시려고요.
어련히 알아서 하신 결정이겠습니까마는 조금 아쉽네요.^^

2004-10-20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10-20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결정하고 나서는 절대 돌아보지 마세요 님 결정이 아마 옳을 겁니다.

숨은아이 2004-10-2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글도 그렇고요, 글을 읽다 보면 영화처럼 스르르 그림이 떠오르는데, 참 아름답고도 슬퍼요. 이렇게 아름다운 느낌 안겨주신 호랑녀님께 좋은 일만 있기를.

호랑녀 2004-10-2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2월까지 일할 거, 넉달 일찍 그만 둔 건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은 섭섭한 마음보다는 시원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날짜가 다가오니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군요.
진우맘님, 지금 저에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기회는 아이들과 함께 할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사실 우리애들 너무 방치했거든요.
로드무비님... 우리학교 선생님들도 다 그렇게 얘기하셔요. 이제 바쁜 일 다 끝났구만 왜 관두냐구요. 그런데 전 그냥 팔잔가보다고 얘기했어요. 바쁠 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었지요. ^^
마태우스님, 돌아보지는 않아요. 그냥 그만 두려고 보니 한 순간 한 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아이들 하나하나도 참 소중하구요.
숨은아이님... 왜 아름답고도 슬플까요... 가을이어선가? 제 마음을 들켜버린 것같아 가슴이 덜컥 합니다 ^^
속삭여주신 님, 아마 더 자주 들어올 거에요. 다시금 알라딘폐인의 길에 접어들 것만 같은 예감이 들지 않으십니까? ^^

아영엄마 2004-10-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으로서는 그만 두려니 정말 섭섭하시겠고, 요즘 일자리 구하는 사람 많다는 걸 느끼게 하는 글이네요. (음.. 저도 이삼년지나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할텐데 걱정이 앞섭니다) 마무리 잘 하시길 바랄께요.
 

그만둘 땐 두더라도...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도서관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을 한다. 각 반마다 도서관이용수업을 하는데, 솔직히 뭐 도서관에서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짓은 하면 안 되고... 그런 얘기가 뭐 얼마나 재미 있나.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암막커튼 치고, 전동스크린 내리고 스캔받아둔 그림책 띄워서 아이들에게 읽어준다.

요즘 읽어주는 책은 

 

바로 이 책.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다.

난 잘 모르겠는데, 아이들은 앤서니 브라운에 광분한다. 고정팬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커다란 화면으로 보니 고릴라의 얼굴이 정말 적나라하다. 게다가 책 속 군데군데 숨겨둔 고릴라 그림들도 아이들이 잘 찾아낸다. 두어 번 읽다보니 요령도 생겨서, 화면 넘기는 지점까지 계산해가며 읽어준다. 3학년까지 읽어줬는데, 4학년부터는 책을 바꿀지 아님 그냥 갈지 고민중이다.

 

이 책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이 책은 도서관에 한 권 뿐이고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 스캔을 받지 못했다. 이 책 띄워주고 그냥 음악 틀어주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이 책을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꼭 빌려서라도 보시길 바란다. 그림만 있고 글씨는 하나도 없는데, 부록으로 딸려오는 음악CD가 정말 좋다. 음악 틀어두고 페이지 넘겨가면서 보는 그림책이다.)

1. 각 반마다 수업태도가 정말 다르다. 어떤 반은, 아이들이 정말... 어쩜 2학년이 맞을까 싶을 만큼 얌전하고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하는데... 그런데 반응이 없다. 화면 전체에 고릴라 얼굴이 쫙 나오면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거나 뭔가 반응이 있어야 재미있는데, 그냥 조용~~~하다. 묻는 말엔 아주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대답을 잘 하는데... 재미 없다.

그런가 하면 어떤 반은... 역시 2학년인데, 어떻게 된 게 40명 중 가만히 앉아있는 놈들은 10명도 안 된다. 돌아다니고, 앞으로 나와 스크린 만지고... 자유로운 만큼 그림책의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반응은 엄청 쎈데... 그런데 산만하다. 담임선생님은 함께 계시지도 않지만, 계신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담임선생님 말씀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는 소문이 있다.

비슷한 아이들을 나눠서 반편성한 건데, 한 학기만에 아이들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싶으니 담임선생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2. 똑같은 고릴라 그림을 보고도 어떤 아이는 고릴라의 얼굴에 주목하는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주목한다. 와, 저 고릴라 젖꼭지 좀 봐! 이러면서 분위기 흐트리는 놈들... 참...

3. 3학년의 어떤 놈은... 아마 외국에서 살다 온 모양이다. 고릴라 그림책이 화면에 뜨자마자 'Oh, Anthony Brown!' 하더니... 내가 한마디 하면 계속 영어로 옮긴다. 고의는 아닌 것 같고, 다만 한글을 보면 일단 영어로 옮겨야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신경 쓰여 죽는 줄 알았다. 영어를 좀만 잘했음, '좀 조용히 해 줄래? 자꾸 소리를 내서 선생님이 방해가 되는구나'라고 얘길 했을텐데...

4. 토요일 오후에 도서관을 대관을 해줬다. 물론 내가 아니라 우리학교 보스가. 퇴근했다가 끝나는 시간에 다시 나가 문단속하고 정리를 했다. 그 김에 우리집 막내를 데리고 나가서, 혼자만을 위해 그림책을 읽어줬다. 고릴라와 괴물들이 사는 나라. 둘 다 우리 아이가 무척 좋아하는 책이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노릇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았다. 담주 언제는 아이 친구들을 데려다 한 번만 더 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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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4-10-17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앤터니 브라운~ㅎㅎㅎ(설마 우리 아들은 아니겠지요~)ㅋㅋ

숨은아이 2004-10-1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하세요! 해버리세요! (찔러 찔러) 아아... 그런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놓고 싶다!
 

흑흑... 모두들 고맙습니다 ^^

수영장에 가서 미친듯이 수영을 ... 하고 싶었는데 사실은 초보라서 25미터만 겨우 가서 쉬고 또 25미터 돌아오고... 이렇게 하고 돌아왔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아버지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아마 학교라는 곳에 대해, 학생은 생각하지 않고 늘 교사 편의주의인 학교라는 공간에 실망하던 차, 차마 담임한테는 터지지 못하고 나한테 터진 거겠죠.

저는...

다른 사람보다도 늘 학생 입장에서 보려고 꽤 노력했는데 그 정도로는 많이 부족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수라장 속이다 보니 학생 하나하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죠. 인정해야죠. 물론 다시 그 순간이 온다고 해도 달라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제가 가장 노력했던 부분을 무시당하니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고, 어쩌면 다소 그 아버지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계산했던 건 아닌데, 제 마음 속에서 나도 이렇게 상처받는데 너도 함 당해봐라... 했을지 모르겠어요. ㅠㅠ

다음주에 시아버님이 서울에 오셔서 수술하시고 한 보름쯤 입원해 계셔야 하는데, 병수발하겠다고 함께 오시는 우리 시어머님... 아버님보다 더 몸이 안 좋으시거든요.  생각 같아서는 우리 동서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전 그냥... 기대는 안 하고, 도움이 되면 고맙다고 생각하기로 했거든요.

게다가 세 놈이나 되는 우리 아이 중 한 놈이... 집중력장애인 것 같아서 치료를 요하네요. 별 거 아니라고 얘기는 하지만, 애미 된 심정은 장애아를 키우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요. 괜히 아이에게 미안해지고,

그동안 애만 잡았던 것도 미안하고...방치해 두었던 것도 미안하고... 어려서부터 예민하던 아이에게 늘 짜증만 냈지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생물학적으로 어려운 걸 애에게 요구했으니 아이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어차피 아이가 극복해야 할 문제지만 제가 옆에서 좀더 신경을 써야할 것 같아요. 공부도 좀 해야겠구요.

그런저런 생각에 우울하던 차, 그 아빠가 똥 밟았을지도 몰라요.

퇴근길에 교장선생님은 안 계셔서, 교감선생님께만 개인사정으로 쉬겠다고 말씀드렸어요. 10월이면 도서관 바쁜 일 다 지나니 새 사람 뽑아도 될 거라구요.

그리고 나오는데, 모 부장님... 도서관에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생활지도가 안 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떠드는 놈들을 냅두면 어쩌냐구요...

허허... 조용히 시킬 틈도 없답니다. 낸들 시끄러운 게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놈들 조용히 시킬 틈도 없답니다. 그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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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1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4-10-1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으로 푸시다니 멋지십니다. ^^ 휴식이 아니라 병구완 때문에 그만두시게 되다니 안타까워요. 하지만 머릿속에 가득한 숙제도 한 가닥씩 풀어나가다 보면 다아 해결되겠지요...

하얀마녀 2004-10-1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이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을테고 호랑녀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요. 그래도 풀리셨다니 다행입니다. ^^

2004-10-11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4-10-12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다녀야 하는 사정이 없다면,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학교 도서관 어려운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아래 글 읽어보니 상상의 한도를 초과하네요.
그런 공간이라면 책을 사랑하는 호랑녀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별로 득될 것이 없지 싶습니다.
그 동안 할만큼 하셨습니다.
(나쁜 일은 뭉쳐서 오고, 뭉쳐서 가더군요. 어려운 일 모두 금세 다 풀릴거예요.)

조선인 2004-10-1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걱정에, 부모님 걱정에, 일을 쉬셔도 할 일이 터럭같겠습니다.
부디 힘내시고 아자 아자 아자!!!

세실 2004-10-1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공공도서관 사서라 동지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쉽네요.
요즘 학교도서관 사서들의 처우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암튼 생생한 소식 잘 봤습니다.
어느곳에 계시더라도 아자아자~ 힘내세요~
 

개관식 전, 하루 평균 대출건수 200건 정도이던 것이 개관식 후엔 오전중에 500건이 넘어간다.

대출이 500이라는 것은 반납도 500이라는 것. 책 빌리는 아이들 얼굴을 보거나 이름을 불러줄 시간도 없다. 마치 기계가 된 것 같다.

그럼 수업시간에 쉴까? 도서관이용지도를 했다. 1학년 두 반 수업.

그리고 나머지 두 시간은 3학년의 한 반이 도서관수업을 했다. 내가 직접 소리를 질러야 하는 수업은 아니었지만, 만들기 수업이었기 때문에 도서관은 엉망이었고, 담임선생님은 아이들만 둔 채 교실에 계셨다.

이렇게 4교시가 흐르고 점심시간.

30분 후에 돌아오겠다고 메모해 두었지만 아이들이 복도에서 진을 치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 밥이 제대로 씹어지지 않는다. 결국 10분만에, 거의 밥을 입 속에 집어넣고 뛰어와서 문을 열었다. 드라마에서 억척아줌마를 보여주기 위해 꼭 집어넣는 씬. 백과점 문 열면 우루루 뛰어들어가 물건 집고 계산하는 아수라장! 꼭 그런 모습이다.

12시 30분부터 1시 20분을 넘길 때까지, 자리에 한 번 앉아보지 못하고 내내 서서 바코드만 찍어댔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왠 남자가 눈을 부라리면서 들어왔다.

아니 이런 경우가 어딨습니까?

예? 무슨 일 때문이시죠?

얘한테 책을 읽히는 습관 좀 들일랬더니 내내 도서관 공사한다고 맨날 헛걸음만 치더니, 이제는 반납 안 한 책이 있다고 또 안 빌려줬다면서요?

대출증을 달라 그러면서 아이를 봤더니 금방 왔던 1학년이다. 7월 초에 빌려간 책이 반납처리가 안 되어서 대출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아이가 그럼 책을 집에 놔두고 반납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는 그런 애란 말입니까? 부터 시작해서 ...어쨌든 내가 고압적인 자세이고, 아이들 입장에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단다. 선생님이 아이를 믿어야지 이럴 수 있느냐 하는 게 요지였다.

어쨌든 긴긴 줄이 있었고, 5교시 시작종이 울렸으며, 아이들은 아우성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이상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마침 도서관 문 닫고 공사한 걸 가지고 뭐라고 하기에 잘 되었다 생각하고 교장실로 가시라고 했다. 학교정책에 관한 것은 나도 잘 모르므로 정책을 담당하시는 분께 가서 말씀드리라고.

그런 말을... 조용한 어조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나도 폭발해서 그와 똑같은 수준으로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후우 =3=3=3

아이들이 다 교실로 돌아가고, 오늘 처음으로 찾아온 적막.

커피를 타다 물을 엎지르고 말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사실, 집에 좀 복잡한 일들이 있어서 가능한 한 빨리 그만 두고 전업주부로서의 역할에 전념하자고 남편과 얘기했던 터였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일로 울 만한 나는 아니었다.

(이럴 땐 혼자 있어야 하는데 1, 2학년들이, 집에 갔던 놈들이 또 한 떼가 몰려오는 바람에 들켰다.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다.)

교감선생님이 올라오셨다. 그넘이 아마 교감선생님께 가서 얘기를 한 모양이다. 울고 있는 날 보고는, 진정하라고(어쩌면 그넘 말만 듣고 야단치려고 오셨을지도 모른다 ㅠㅠ),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말씀하시곤 그냥 가셨다.

하루가 너무 길다. 힘들다...

내일은 이용자수업 세 시간인데... (이번주와 다음주 해서 35시간이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시작할 도서바자회(그 망할 도서바자회 ㅠㅠ)에서 팔 책 목록도 결정해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그만 두겠다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에휴, 삼재도 아니라는데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나란 사람의 주변에는 늘 일이 생긴다. 늘...

한 걸음 내딛으면 넘어지고, 겨우 일어서면 또 넘어지고 한다는 누구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넘어졌던 수많은 일들은 내가 보기엔 상당부분 자초한 것이었다고 느꼈는데, 내 주변의 일들을 나는 어떻게 자초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나 하나 사라져도 분명히 흔적도 안 남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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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10-11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올리고, 아래 있는 포춘쿠키를 눌렀더니 이런 글이 나왔다.

당신의 마음은 의외로 닫혀 있습니다.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두십시오.

허, 참... 저 쿠키 속에 진짜 뭔 귀신이 들었나?

sooninara 2004-10-1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만해도 눈물이 날려고하는데요..
호랑녀님..너무 열심히 하시다보니 이젠 밧데리가 충전이 안되고 방전만 되는가 봐요..
우리학교보니 학부모 도우미로 도서관 자원봉사도 찾던데..도와주시는분이 없으신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 보세요..
호랑녀님..힘내세요..

깍두기 2004-10-1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이 사라지면 흔적이 어찌 안 남을까요.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신지 모르지만 힘내시고 그런 싸가지 없는 인간들 땜에 자책하지 마세요.(그나저나 그넘은 대체 뭐랍니까....)

가을산 2004-10-1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사라지셔도 도서관은 돌아갈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말해야 호랑녀님이 편하시다면..)
그래도 아이들은 새로운 사서 선생님이 호랑녀님 같지 못하다는 것을 알거에요.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힘내세요.
하루 대출 500권이라! 정말 대박이네요. 정말 수고 많으세요.

숨은아이 2004-10-11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우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힘들 땐 우세요... 여기다가 글도 쓰시고요... 뭐 하나 보태드릴 순 없지만 열심히 들을게요.

로드무비 2004-10-1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 것 같아요. 그 순간 님의 마음......
저녁에 맥주 한잔하세요.(이것도 위로라고!--;)

물만두 2004-10-1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자아자 화이팅!!! 인간사 새옹지마.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뜨는 법^^ 더 좋은 날을 위한 일보 후퇴라 생각하세요^^

마냐 2004-10-11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언니 말이 딱이군요. 음..원래 힘든 일은 몰려서 온다고 하더이다. 뭔 일인지 모르지만, 힘내세요. 연말쯤에는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요?
결정을 이미 하신건지는 모르겠지만...그래도 어쨌든 힘내시구요.
혹시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라는 '헌책'에 관심이 있으시다면..알려주세요.

반딧불,, 2004-10-1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그렇지만,,아시죠??
물론 흔적도 안 남겠지만, 아쉬워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요.

그나저나 맘이 너무 아픕니다.

마태우스 2004-10-1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저도 님이 빨리 평상심을 찾으시길 빌겠습니다. 울지 마세요. 호랑이는 어흥 하고 포효해야지, 우시면 안됩니다.

하얀마녀 2004-10-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많이 속상하셨겠어요. 바빠서 정신 없는데 그런 일까지 생기다니.

조선인 2004-10-12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0권의 대출과 반납을 이루는 도서관을 만드신 분이 약한 소리 하시면 안 되죠.
호랑언니... 도서관 자체가 이미 님의 흔적입니다.
 

도서실 리모델링 개관식을 했다.

유인물 준비하고, 파워포인트 만들고... 그러느라 바빠 죽겠는데 누구는 와서 지저분하다고 하고, 누구는 와서 뭐가 부족하다고 하고... 결혼하고 10년동안 도 많이 닦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마터면 폭발할 뻔했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다.

업무보다는 사람이 힘들다...

교장, 교감, 교무, 행정실장, 담당교사... 각각 따로따로 나에게 자료를 요청하고 일을 시키는데, 다들 자기가 시키는 일이 제일 바쁘단다. (이런 게 바로 층층시하 시집살이...)

그거 다 해주고 났더니 도서실 더럽다고 야단들이다. 자기들은 다섯시 땡 하면 퇴근해버리고, 난 그때부터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한다.

그랬는데 다들 힘들어 죽겠단다. 이상하다. 도서실 리모델링 관련한 일들도, 초청장도,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줄 유인물도, 프리젠테이션할 파워포인트도... 다 내가 만들었는데, 아니 청소도 내가 하고, 현판식을 위해 하얀 천 씌우는 것도, 천 맞춰 자르고 꿰메는 일도 다 내가 했는데(물론 하나하나 각가 다른 분들께 다 도움을 받았지만) 왜 그 사람들이 힘든지 모르겠다. 소리지르는 것, 나한테 와서 불평하는 것... 말고 또 뭐했더라?

어쨌든 우리 도서관 이렇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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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10-0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서가는 5단짜리 아랫부분 잘라내서 3단으로 만든 거고,
또 하나는 전자수업공간이다. 수업시간에 모둠별로 인터넷검색하고, 백과사전 찾고, 단행본이나 도감 같은 자료들 찾아서 모둠별로 완성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아낀다고 아꼈는데 6천만원이나 들었다.

로드무비 2004-10-07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굉장히 근사합니다.
큰일 해내셨군요.
아이들이 쾌적한 공간에서 책을 읽게 되겠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요즘 왜 자주 안 보이시나 했죠.)

가을산 2004-10-07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보기 좋은데요! 나도 저런 곳에서 배워봤으면! ^^
아이들은 참 좋을 것 같아요. 저런 시설에, 호랑녀님같은 사서 선생님에!

조선인 2004-10-07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언니 속 썩이는 교장선생 밑에 여러 모로 관료가 많은가 봅니다. 그래도 언니 정말 멋진 결과물이네요. 아자 아자 아자!!!

starrysky 2004-10-07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고생하셨어요, 호랑녀님.
그리고 호랑녀님만 잔뜩 고생시킨 그 분들 참 나빠요!! -_-++
탈나셨던 손목이랑은 좀 어떠신지요.. 멋지게 꾸며진 도서실은 정말 근사하지만 저 공간을 위해 피땀 흘리셨을 호랑녀님 생각하면 맘이 아푸네요. ㅠㅠ

깍두기 2004-10-07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고생하셨어요. 그래서 안 보이시는 거라 짐작했죠. 이제 드디어 끝나셨네요. 축하드려요.
나쁜 사람들이 호랑녀님만 시키고 그랬단 말이죠? 에잇~
그래도 애들 생각해서 참으세요. 도서실 이용하는 애들이 행복해할 거잖아요^^
앞으로 자주 뵈어요*.*

비로그인 2004-10-0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게 변했군요. 고생하신 만큼 아이들도 좋아하리라 생각해보면서.. 그나저나 윗대가리(-_-) 분들의 하는 짓(-_-)은...;;;

물만두 2004-10-07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멋있어요^^

책읽는나무 2004-10-07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깨끗하기만 한데..뭐가 지저분하다는거죠?..ㅡ.ㅡ;;
수고 많으셨어요..^^

아영엄마 2004-10-07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렇게 반짝반짝 윤이 나는데.. 이런 도서실이 근처에 있다면 날마다 가고 싶을 것 같은데요! 고생하셨는데 안좋은 소리만 들으시니 기운 빠지시겠지만 아이들이 이 곳에서 좋은 책을 열심히 보리라 기대하면서 기운 북돋우시길 바래요~

하얀마녀 2004-10-07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아날 듯한 모습입니다. 대신 얼마나 고생하셨을 지... ㅜㅜ

Hanna 2004-10-07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고생의 흔적...이 드러나는..^^ 저런 도서관이 있었다면! 정말루 얼마나 좋았을까요? ^^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하셨다니~ 힘내세요. ^^ 정말 깔끔하고 예뻐요.

마냐 2004-10-08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요즘 학교 도서관은 저리 좋단말입니까? "나 돌아갈래~ (박하사탕 버전)"
암튼..그 많은 일을 혼자 하셨다니...토닥토닥..수고하셨어요. 좀 쉬엄쉬엄 하세요...글구, 원래 사회생활이란게 일이 많아 힘들다기보다 사람때문에 치이죠...에이구...도서관 보시면서 뿌듯한 즐거움만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

호랑녀 2004-10-08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저 고생 많이 했어요... 흑흑...

알고 보니 담당선생님도 고생 많이 하셨대요. 또 그 루트로 다른 일들을 시키셨다나? 그런데 그런 자료들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네요... 뭔 소린지...ㅠㅠ

그나저나 이제부터 시작이랍니다.

어머니들이 대출해간 아이들에게 주라고 사탕을 한가득 사주고 가셨는데, 그 사탕에 눈독들인 아이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칠 것만 같은 예감이옵니다.

그동안 책고팠던 아이들이겠죠. 흐흐흐, 아이들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 설렙니다.

제일 황당했던 것,

한 선생님이 맡기로 했던 간단한 일이 있었는데, 그게 윗분 눈에 안찼죠. 그래서 다시 하라고 지시를 하시자 마치 자신은 모르는 일인 것처럼 순진한 눈을 깜빡이면서, 절 바라보대요. 왜 그렇게 했냐는 듯이... 그동안 몰랐던 인간성들 많이 봤습니다.


숨은아이 2004-10-0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그냥 '선생님 보기에도 이게 모자라나요?' 하고 여쭙는 눈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차근차근 보람찬 일만 생겼으면. 손목도 좀 아끼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