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둘 땐 두더라도...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도서관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을 한다. 각 반마다 도서관이용수업을 하는데, 솔직히 뭐 도서관에서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짓은 하면 안 되고... 그런 얘기가 뭐 얼마나 재미 있나.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암막커튼 치고, 전동스크린 내리고 스캔받아둔 그림책 띄워서 아이들에게 읽어준다.

요즘 읽어주는 책은 

 

바로 이 책.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다.

난 잘 모르겠는데, 아이들은 앤서니 브라운에 광분한다. 고정팬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커다란 화면으로 보니 고릴라의 얼굴이 정말 적나라하다. 게다가 책 속 군데군데 숨겨둔 고릴라 그림들도 아이들이 잘 찾아낸다. 두어 번 읽다보니 요령도 생겨서, 화면 넘기는 지점까지 계산해가며 읽어준다. 3학년까지 읽어줬는데, 4학년부터는 책을 바꿀지 아님 그냥 갈지 고민중이다.

 

이 책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이 책은 도서관에 한 권 뿐이고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 스캔을 받지 못했다. 이 책 띄워주고 그냥 음악 틀어주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이 책을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꼭 빌려서라도 보시길 바란다. 그림만 있고 글씨는 하나도 없는데, 부록으로 딸려오는 음악CD가 정말 좋다. 음악 틀어두고 페이지 넘겨가면서 보는 그림책이다.)

1. 각 반마다 수업태도가 정말 다르다. 어떤 반은, 아이들이 정말... 어쩜 2학년이 맞을까 싶을 만큼 얌전하고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하는데... 그런데 반응이 없다. 화면 전체에 고릴라 얼굴이 쫙 나오면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거나 뭔가 반응이 있어야 재미있는데, 그냥 조용~~~하다. 묻는 말엔 아주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대답을 잘 하는데... 재미 없다.

그런가 하면 어떤 반은... 역시 2학년인데, 어떻게 된 게 40명 중 가만히 앉아있는 놈들은 10명도 안 된다. 돌아다니고, 앞으로 나와 스크린 만지고... 자유로운 만큼 그림책의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반응은 엄청 쎈데... 그런데 산만하다. 담임선생님은 함께 계시지도 않지만, 계신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담임선생님 말씀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는 소문이 있다.

비슷한 아이들을 나눠서 반편성한 건데, 한 학기만에 아이들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싶으니 담임선생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2. 똑같은 고릴라 그림을 보고도 어떤 아이는 고릴라의 얼굴에 주목하는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주목한다. 와, 저 고릴라 젖꼭지 좀 봐! 이러면서 분위기 흐트리는 놈들... 참...

3. 3학년의 어떤 놈은... 아마 외국에서 살다 온 모양이다. 고릴라 그림책이 화면에 뜨자마자 'Oh, Anthony Brown!' 하더니... 내가 한마디 하면 계속 영어로 옮긴다. 고의는 아닌 것 같고, 다만 한글을 보면 일단 영어로 옮겨야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신경 쓰여 죽는 줄 알았다. 영어를 좀만 잘했음, '좀 조용히 해 줄래? 자꾸 소리를 내서 선생님이 방해가 되는구나'라고 얘길 했을텐데...

4. 토요일 오후에 도서관을 대관을 해줬다. 물론 내가 아니라 우리학교 보스가. 퇴근했다가 끝나는 시간에 다시 나가 문단속하고 정리를 했다. 그 김에 우리집 막내를 데리고 나가서, 혼자만을 위해 그림책을 읽어줬다. 고릴라와 괴물들이 사는 나라. 둘 다 우리 아이가 무척 좋아하는 책이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노릇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았다. 담주 언제는 아이 친구들을 데려다 한 번만 더 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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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4-10-17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앤터니 브라운~ㅎㅎㅎ(설마 우리 아들은 아니겠지요~)ㅋㅋ

숨은아이 2004-10-1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하세요! 해버리세요! (찔러 찔러) 아아... 그런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