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식 전, 하루 평균 대출건수 200건 정도이던 것이 개관식 후엔 오전중에 500건이 넘어간다.

대출이 500이라는 것은 반납도 500이라는 것. 책 빌리는 아이들 얼굴을 보거나 이름을 불러줄 시간도 없다. 마치 기계가 된 것 같다.

그럼 수업시간에 쉴까? 도서관이용지도를 했다. 1학년 두 반 수업.

그리고 나머지 두 시간은 3학년의 한 반이 도서관수업을 했다. 내가 직접 소리를 질러야 하는 수업은 아니었지만, 만들기 수업이었기 때문에 도서관은 엉망이었고, 담임선생님은 아이들만 둔 채 교실에 계셨다.

이렇게 4교시가 흐르고 점심시간.

30분 후에 돌아오겠다고 메모해 두었지만 아이들이 복도에서 진을 치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 밥이 제대로 씹어지지 않는다. 결국 10분만에, 거의 밥을 입 속에 집어넣고 뛰어와서 문을 열었다. 드라마에서 억척아줌마를 보여주기 위해 꼭 집어넣는 씬. 백과점 문 열면 우루루 뛰어들어가 물건 집고 계산하는 아수라장! 꼭 그런 모습이다.

12시 30분부터 1시 20분을 넘길 때까지, 자리에 한 번 앉아보지 못하고 내내 서서 바코드만 찍어댔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왠 남자가 눈을 부라리면서 들어왔다.

아니 이런 경우가 어딨습니까?

예? 무슨 일 때문이시죠?

얘한테 책을 읽히는 습관 좀 들일랬더니 내내 도서관 공사한다고 맨날 헛걸음만 치더니, 이제는 반납 안 한 책이 있다고 또 안 빌려줬다면서요?

대출증을 달라 그러면서 아이를 봤더니 금방 왔던 1학년이다. 7월 초에 빌려간 책이 반납처리가 안 되어서 대출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아이가 그럼 책을 집에 놔두고 반납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는 그런 애란 말입니까? 부터 시작해서 ...어쨌든 내가 고압적인 자세이고, 아이들 입장에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단다. 선생님이 아이를 믿어야지 이럴 수 있느냐 하는 게 요지였다.

어쨌든 긴긴 줄이 있었고, 5교시 시작종이 울렸으며, 아이들은 아우성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이상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마침 도서관 문 닫고 공사한 걸 가지고 뭐라고 하기에 잘 되었다 생각하고 교장실로 가시라고 했다. 학교정책에 관한 것은 나도 잘 모르므로 정책을 담당하시는 분께 가서 말씀드리라고.

그런 말을... 조용한 어조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나도 폭발해서 그와 똑같은 수준으로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후우 =3=3=3

아이들이 다 교실로 돌아가고, 오늘 처음으로 찾아온 적막.

커피를 타다 물을 엎지르고 말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사실, 집에 좀 복잡한 일들이 있어서 가능한 한 빨리 그만 두고 전업주부로서의 역할에 전념하자고 남편과 얘기했던 터였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일로 울 만한 나는 아니었다.

(이럴 땐 혼자 있어야 하는데 1, 2학년들이, 집에 갔던 놈들이 또 한 떼가 몰려오는 바람에 들켰다.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다.)

교감선생님이 올라오셨다. 그넘이 아마 교감선생님께 가서 얘기를 한 모양이다. 울고 있는 날 보고는, 진정하라고(어쩌면 그넘 말만 듣고 야단치려고 오셨을지도 모른다 ㅠㅠ),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말씀하시곤 그냥 가셨다.

하루가 너무 길다. 힘들다...

내일은 이용자수업 세 시간인데... (이번주와 다음주 해서 35시간이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시작할 도서바자회(그 망할 도서바자회 ㅠㅠ)에서 팔 책 목록도 결정해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그만 두겠다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에휴, 삼재도 아니라는데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나란 사람의 주변에는 늘 일이 생긴다. 늘...

한 걸음 내딛으면 넘어지고, 겨우 일어서면 또 넘어지고 한다는 누구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넘어졌던 수많은 일들은 내가 보기엔 상당부분 자초한 것이었다고 느꼈는데, 내 주변의 일들을 나는 어떻게 자초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나 하나 사라져도 분명히 흔적도 안 남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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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10-11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올리고, 아래 있는 포춘쿠키를 눌렀더니 이런 글이 나왔다.

당신의 마음은 의외로 닫혀 있습니다.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두십시오.

허, 참... 저 쿠키 속에 진짜 뭔 귀신이 들었나?

sooninara 2004-10-1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만해도 눈물이 날려고하는데요..
호랑녀님..너무 열심히 하시다보니 이젠 밧데리가 충전이 안되고 방전만 되는가 봐요..
우리학교보니 학부모 도우미로 도서관 자원봉사도 찾던데..도와주시는분이 없으신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 보세요..
호랑녀님..힘내세요..

깍두기 2004-10-1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이 사라지면 흔적이 어찌 안 남을까요.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신지 모르지만 힘내시고 그런 싸가지 없는 인간들 땜에 자책하지 마세요.(그나저나 그넘은 대체 뭐랍니까....)

가을산 2004-10-1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사라지셔도 도서관은 돌아갈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말해야 호랑녀님이 편하시다면..)
그래도 아이들은 새로운 사서 선생님이 호랑녀님 같지 못하다는 것을 알거에요.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힘내세요.
하루 대출 500권이라! 정말 대박이네요. 정말 수고 많으세요.

숨은아이 2004-10-11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우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힘들 땐 우세요... 여기다가 글도 쓰시고요... 뭐 하나 보태드릴 순 없지만 열심히 들을게요.

로드무비 2004-10-1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 것 같아요. 그 순간 님의 마음......
저녁에 맥주 한잔하세요.(이것도 위로라고!--;)

물만두 2004-10-1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자아자 화이팅!!! 인간사 새옹지마.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뜨는 법^^ 더 좋은 날을 위한 일보 후퇴라 생각하세요^^

마냐 2004-10-11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언니 말이 딱이군요. 음..원래 힘든 일은 몰려서 온다고 하더이다. 뭔 일인지 모르지만, 힘내세요. 연말쯤에는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요?
결정을 이미 하신건지는 모르겠지만...그래도 어쨌든 힘내시구요.
혹시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라는 '헌책'에 관심이 있으시다면..알려주세요.

반딧불,, 2004-10-1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그렇지만,,아시죠??
물론 흔적도 안 남겠지만, 아쉬워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요.

그나저나 맘이 너무 아픕니다.

마태우스 2004-10-1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 저도 님이 빨리 평상심을 찾으시길 빌겠습니다. 울지 마세요. 호랑이는 어흥 하고 포효해야지, 우시면 안됩니다.

하얀마녀 2004-10-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많이 속상하셨겠어요. 바빠서 정신 없는데 그런 일까지 생기다니.

조선인 2004-10-12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0권의 대출과 반납을 이루는 도서관을 만드신 분이 약한 소리 하시면 안 되죠.
호랑언니... 도서관 자체가 이미 님의 흔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