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8일, 오전 10시 20분.
내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서 한국을 떠나 본 최초의 날, 최초의 시간이다. 발권했던 순간, 그날의 이륙 풍경부터 착륙 풍경까지 하나하나 모두가 기억난다. 내게 이 날짜부터 일주일간 기록된 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고, 다시 돌아가고픈… 그것이다.
내가 미국으로 여행하게 된 계기 하나는, 퇴직금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직장에서 퇴직금을 받아 봤다. 내가 다니는 곳은 진짜 퇴직해야 퇴직금을 ‘한방에’ ‘왕창’ 주는 곳이 아닌, 연말에 한 번씩 월급을 더 지급해 주어 퇴직금을 정산하는 회사다. 아직 경제 개념 없고, 경제 개념의 필요성도 잘 몰랐던 철부지 나에게 그렇게 털어서 들어오는 돈은 ‘횡재’였다. 그날 이후 세부, 홍콩 등 친구들이 적은 돈으로도 쉽게 갈 수 있다고 추천을 한 곳을 하나씩 떠올리며 ‘무조건 해외여행’을 마음속에 품게 됐다. 대학교 2학년 때, 당시 패키지로 팀을 꾸린 친한 친구가 한 친구의 펑크 때문에 자리가 났다며 나에게 유럽 여행을 200만원 대로 찍어보지 않겠냐고 무척 권했었던 그 해외여행(그것도 배낭여행!). 20대 초반, 체력이 짱짱하고 배짱도 두둑할 때 가야한다고 늘 방학 중에 ‘묻지 마! 떠나리라!’ 마음먹으며 살았는데, 난 부모님이 아닌 오빠의 결정적 한마디 때문에 그 여행이 좌초된 적이 있다.
“니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준비한 여행이 아니잖아.”
오빠의 이 한마디로 그날 가족회의(?)는 끝이 났다. 그날 이후로 모든 해외여행은 내가 계획하고 준비해서 가리라 마음먹고, 가족들한테 돈을 좀 빌려 달라며 생떼를 쓸 필요 없이 내 돈을 벌 힘만 있으면 해외여행을 떠날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봤자 세부, 홍콩 정도로 비교적 돈은 적게 들면서 해외에 다녀온 티가 나는 여행지만을 생각했던 내게, 두 친구가 미국 동부 여행을 떠나자고 꼬드기기 시작했다. 미국 동부… 그냥 미국도 아닌 미국 동부… 부끄럽지만 이름만으로도 너무 멋있고 폼이 났다. 그리고 한국과는 12시간 시차가 나는 머나먼 대륙이라니. 내겐 정말 평생에 한번 갈까 말까한 큰 이벤트였다.
친구들이 미국 여행 이야기를 꺼낸 날, 내가 왜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지에 대해 고민해 봤다. 돈은 퇴직금이 해결해 준다, 마침 한 친구가 미국에서 유학 중이고 자동차도 있기 때문에 비용은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이렇게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한순간 지르는 마음이 없으면 다신 없을지도 모르는 기회다, 여행이란 건 젊을 때 하는 여행일수록 또 다른 의미와 가치가 있다… 별 생각 없이 생각해 봐도 끄덕여지는 말이었지만, 내가 미국으로 떠나리라 마음을 먹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지금까지 달려 온 회사 생활에 대한 괜한 허무감 때문이었다. 바쁠 땐 죽어라 바쁘고, 여유 있을 땐 여유가 있는, 적당히 좋은 일인 듯한데, 언젠가부터 그런 ‘괜찮은’ 일에 나만이 부여할 수 있는 가치와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니, 결국 ‘나는 잘 살아왔나?’는 무겁고 거친 질문까지 품게 됐다. 그 이후 매일 매일이 막연하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연속된 시간 같았고, 내가 참 가엾은 존재라며 이유 없고 대책 없는 자기 동정까지 하게 됐다.
결국 4일 뒤, 친구의 도움을 받아가며 난생 처음 미국행 티켓을 예약하고, 구체적인 세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큰 돈을 쓰고 멀리 떠나는 이유를 좀더 탄력 받게 하기 위해, 한편으론 내가 느끼는 현재 나의 모습에 대한 서글픔을 애써 끄집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획을 짜고, 미국 동부 관련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여행의 컨셉과 목적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를 멀리서 바라보기’가 내 여행의 목적과 컨셉이었다. 나와 연고가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끼면 상대적으로 나를 느끼기도 쉽고, 애달픈 자기 연민과 괜한 걱정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적과 컨셉이 워낙 묵직한 탓에, 2번을 경유하고 가는 총 23시간의 비행시간마저도 내겐 달콤한, 나만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워싱턴 – 뉴욕 – 애틀랜틱 시티 – 보스턴 – 필라델피아 – 워싱턴
먼 대륙에서 다섯 점을 이어가며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가지치기 식 명소 찾기 여행(?)을 하고 다녔다. 애미쉬 타운, 조지타운, 내셔널 몰, MIT와 하버드, 뉴욕 현대미술관, 사무엘 아담스 맥주 공장, 보스턴 레드 삭스 야구 경기, 브로드웨이, 브루클린 브릿지, 월 스트리트, 백악관, 센트럴 파크 그리고 점, 점, 점(…). 바쁜 여행 일정 속에 묻힐수록 지쳤던 한국에서의 내 생활이 조금씩 잊혀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조금씩 보였다. 사람들 속의 내가 얼마나 점(.)인지, 그 사실은 슬픈 일이 아니라 얼마나 힘이 나는 일인지, 아이러니하게 알게 됐다. 내가 지치고 허무해져 갔던 건, 욕심이 많은 내가 주변은 둘러보지도 않고 내가 아는 방법으로만 나의 욕심을 채우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는 것, 세상은 생각보다 다양한 삶의 시도가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는 것, 내가 나만 빛이 나는 그런 반짝반짝 거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같은 시공간에 흘러가고 있는 소박한 점이라는 것, 그래서 더욱 어깨에 긴장을 잔뜩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 미국에서 본 세상은 천천히 흐르는 여유 속에서도 자신만의 희망을 간직하며 자기만의 속도로 한걸음씩 움직이는 것 같았다. 월 스트리트, 백악관처럼 TV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곳만 떠올려 보면 늘 바쁘고 쫓길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 바쁨 속에서 내 생활을 잠시라도 잊거나 한 걸음 떨어져 뭐를 붙이고 뭐를 도려내야 하는지 셈을 하려 했는데, 생각과는 반대로 그 곳에서 여유와 느림을 찾고, 내 생활을, 그대로의 나를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에 두 끼만 먹으며 8~9시간을 관광하면서도 내가 묵직하게 가져갔던 과제를 생각보다 담담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미국이란 도시가 내게 선물한 건지, 여행이란 자유가 내게 선물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일주일간의 미국 동부 여행은 한번쯤 다시 되돌리고 싶을 만큼 소중한 추억이다. 여행이란 어쩌면 아무 생각 않고, 훌쩍 떠나면 더 값어치가 있을 마술인 것도 같다.
‘다음엔 어디로 떠나볼까?’
한 문장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