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벤션 오브 라잉 - The Invention of L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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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메디의 결말이나 과정은 늘 예측가능한데 왜 보나? 예측가능성의 다른 표현방법 때문이다. 이 영화를 코미디로 만드는 장치는 거짓말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시작되는 데 있다. 타인에게 순간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는 게 관습이고 당연한 사회가 있다. 사람들은 늘 상처 받기 때문에 희망이란 말을 모른다. 모두 진실만을 말하는 세계는 암울했다. 루저는 계속 루저고 이기적 유전자 소유자들은 거만하기 이를데 없다. 도둑도 그 자리에서 체포되지만(도둑이 있는 게 의아하지만) 정의와 평등이 존재하는 것 같진 않다.

그러다 죽음을 앞둔 엄마의 두려움을 위로하기 위해 통념상 루저인 아들은 거짓말을 한다. 사후 세계는 행복만 있다고. 세상은 발칵 뒤집히고 그는 저 바닥의 루저에서 초고속으로 성공이란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간다. 곤경에 처한 사람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이 그를 성공으로 이끈다. 꽤 흥미로운 지점들이 눈에 띈다. 그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은 영화들은 사람들을 웃게 하고 대박이난다. 영화같은 예술장르는 인간의 잉여감정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고 비관적 세계를 낙관적으로 돌려놓기 위한 인간의 자구책일지 모른다. 신이 인간의 영역을 창조한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은 인간 시뮬레인션 상황을 창조해서 현실에서 못마땅한 부분을 개조해버린다. 단 두 시간 뿐일지라도 현실과 다른 세상은 희망적으로 보인다.

영화는 신의 존재가 없는 사회를 배경으로하는데 하늘에 있는 그 누군가의 존재를 믿기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불운과 행운을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 무언가 탓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행동의지나 동기에 대한 타자의 시선을 인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까. 좋든 싫든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을 타자의 확언을 듣고 싶은 욕구가 근본적인걸까, 하는 의문이 남는 영화지만 심각한 영화는 물론 아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못생겨도 예쁜 아내를 얻을 수 있다는 결말이다. 단, 못생겼으면 재력과 명성이 있어야한다고 영화에서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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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올라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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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운 미국스러운 영화다. 18년동안 함께 산 레즈비언 커플의 결혼생활에 위기를 겪는다. 정자를 받아 레즈비언 '엄마들'을 둔 아이들이 아버지를 찾으면서 삼각관계 구도가 된다. 흥미로운 소재와 대안 가족의 형태로 출발했지만 결국 배타적 가족중심주의로 끝나고 마는 아쉬운 영화다.  

외형만 레즈비언 부부지 실제로는 남녀로 구성된 부부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보여준다. 따뜻한 말 한마디로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줄스(아네트 베닝), 남편처럼 이것저것 지적하는 닉(줄리언 무어). 게다가 아이들이 찾은, 정자를 제공한 아빠는 새로운 긴장감을 제공한다. 아이들의 아빠와 줄스의 관계를 알고 절망하는 닉은 그에게, 가족이 필요하다면 직접만들라고 한다. 친아빠의 등장으로 쑥대밭이 된 가정은 결국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는 해피엔딩이다. 이 영화가 가족을 지키는 미덕을 보여주는 건 가정의 주체가 레즈비언 부부라서가 아니라 부부란 혹은 가족이란 구불거리는 길과 엄청난 위력의 태풍도 이겨내는 거라는 훈계가 담겨있어 참 못마땅했다.   

영화 속 인물 중 가장 감정이 이입이 되는 건, 아이들의 생부다. 열아홉에 별 생각없이 정자를 기증했는데 18년이 지난 어느날 그 정자의 실재가 나타난다. 혼자 사업에 몰두하면서 적절한 즐거움을 찾으는 싱글라이프를 꾸렸다. 아이들의 등장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가족에 대한 불러일으킨다. 이런 것도 괜찮겠는데..했다. 어느날 짠 하고 다큰 자식이 나타나는 건 불로소득쯤 될 거 같다. 더구나 늙어가고 있다면 더더욱.  

미국스러운 부분은, 불로소득은 없다고 일침을 가한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부의 진지한 태도는 고민스러운 게 아니라 가차없이 내팽겨쳐진다. 18년을 노력한 사람만이 안정된 감정을 가질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좋은 소재를 경박하게 다룬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어쩌면 내가 아이들한테도 또는 엄마들한테도 공감할 수 없는 탓일 수 있다. 내 생물학적 나이와 사회적 규범 나이가 불일치하는 데서 오는 블랙홀이 있을 지도 모른다.  

비혼자 삶은 풍요로우면서도 결핍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을 돌볼 많은 시간과 여유 뒤에 더불어 삶에 대한 치열한 갈등이 없어서 공감하고 나 아닌 것에 애정을 들이는 데 인색하다. 어떤 사람에게 애정을 쏟는데 인색하다는 걸 알면서도 바꿀 수 없어 사람이 아닌 대상에 무한한 애정을 쏟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알면서도...결혼생활이 거친 바람과 비를 동반한 태풍이라면 비혼자의 삶은, 겉으로는 평온한 태풍의 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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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보았다 - I Saw The Devi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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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봉전부터 잔인하다는 말이 나돌아 봐야하나 망설였다. 난 다른 상상력은 지나칠정도로 없는 편인데 이상하게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성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울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하다. 피가 낭자한 장면은 거의 못본다. 이 무슨 불균형스런 태도인가 싶지만 내가 이렇게 생겨먹었느니 어쩌겠는가. 잔뜩 겁을 먹고 가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견딜만했지만 144분이라는 런닝타임동안 별 이야기 없이 인간을 살덩어리로만 보는데 울렁증이 났다. 저녁에 바지락 칼국수를 먹는데 바지락 살을 씹는 순간, 남의 살을 씹고 있는다는 불쾌감이 이어졌으니 영화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2.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자체를 좋아하기 보다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각적 즐거움 때문에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본다. 닫힌 공간에 인물들을 모아 놓고 공간에서 풀어가는 플롯은, 전체 틀이 대체로 약한 그의 영화들을 보게 하는 힘이다. 이 영화에서는 공간의 세부적 집착을 버린 대신에 조명 사용이 눈에 띈다. 어처구니없게도 조명은 따스하면서도 명암이 선명하다. 클로즈업을 너무 많이 사용한 영화는 촌스럽게 여겨지는데 사극 드라마처럼 빈번한 클로즈업 사용에도 이 영화는 촌스럽지 않다.

3. 메인 플롯이 건들거리고 전체적으로스릴러라는 형식을 취하지만 긴장감보다는 잔인함의 끝은 어디인가를 뒤따라간다. 근데 너무 길다. 순진한 사람들이 야수의 심성을 지닌 이들에게 희생당하는 건 일차원적 잔혹함에 대한 탐구아닌가. 초원에서 한가하게 풀 뜯던 사슴이 재수없어서 사자의 습격을 받아 갈갈이 찢기는 데서 안됐다고 느끼만 심적 동요나 정신적 고찰을 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초원의 동물의 세계를 사람으로 치환해 놓은, 원시적 잔혹함만이 있어 희생자와 복수하는 자의 절박한 감정선을 따라가기 힘들다.  

4. 영화적 스타일에 대한 생각을 좀 했다. 나아가 거시적으로 한국영화의 나아길이라기 보다는, 영화 보기를 인생의 큰 낙으로 여기는 관객 1인으로서 좀 더 다양한 한국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한국영화는 분명히 전환기에 있다. 주로 활동하는 감독들이 유년기를 어떻게 보냈느냐에 달려있다. 스타일이 분명하고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 있는 외국감독들의 유년기를 보면 대여섯살부터 카메라를 만지기 시작해 십세 전에 첫 단편을(비공식적 영화지만) 만들 경우가 많다. 내 다음 세대나 다다음 세대들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싶다. 지금 감독들은 하드보일드한 할리우드 장르영화를 보면서 자랐고 영화 속에 그런 어린 시절의 꿈을 이미지화한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에서 익숙한 장면이 많이 보이고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다양성이란 이름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런 영화라면 굳이 한국영화가 아니어도 되지 않나...한국배우, 한국감독, 한국자본으로 미국적 영화를 만들어낼 필요가 꼭 있을까, 싶다.  

하드보일드 소설을 즐겨 읽었던 트뤼포가 영화를 만들었을 때, 미국적이라고 비판받았지만 21세기는 트뤼포의 영화를 미국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미국장르 영화를 즐겨본 감독들이, 트뤼포처럼 한국적 장르영화로 즐거움을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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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츠 오브 컨트롤 - The Limits of Cont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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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덤에 가야해"란 말을 실천하는 한 킬러의 여정을 담은 로드 무비. 마드리드-세비야-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작은 마을-다시 마드리드로 이어지는 동선 중에 만난 사람들인데 킬러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지만 작전을 구실로 킬러의 여행기 같다. 비장한 표정에 말 없고 더블 에스프레소가 아닌, 에스프레소 싱글 두 잔을 시켜놓고 하는 일이라고는 지나가는 사람을 관찰한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세요?"란 암호로 낡은 성냥갑을 주고 받는 간단한 접선이 끝나면 그는 골목길을 누비며 다시 호텔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가끔 레니아 소피아 미술관에 들러 후안 그리스 그림 앞에서 표정없이 한참 서있다 돌아선다. 그의 각진 얼굴은 무표정해 보이면서도 비장해보이고 또 어떤 때는 모나리자처럼 묘한 미소가 희미하게 번지면서 슬퍼보인다. 스페인어만이 아니라 모국어도 말 할 수 없는 형에 처해진 것처럼 무언가 말할 듯하면서도 체념하는 표정이다.

그의 특별한 여행은 킬러답게 어떤 지령을 받기 위해 사람들과 접선을 하면서 전개된다. 접선자들은 암호문을 말하고 킬러가 고개를 저으면, 접선자는 탁자에 앉아 수다를 떤다. 킬러한테 영화에 관심있나요, 과학에 관심있나요, 하고 묻지만 그들이 필요한 건 그의 대답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다. 그가 관심이 있든 없든 그들이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버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린다. 마드리드에서 만난 한 여자는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영화는 아무 말 없이 인물이 앉아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짐 자무쉬의 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빙고!를 속으로 외쳤다. 이 여자의 말에 동의한다면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최고의 영화로 기억 속에 보관될 것이다.  

킬러가 뭘 하나가 영화의 중심이 아니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과 좁은 골목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마음이 쏠리는 영화다. 자무쉬표 영상은 황홀하다. 스냅사진 찍듯이 인물들은 일부러 움직임을 잠깐씩 멈춘다. 킬러가 낡은 옷가방을 한 손에 들고 뚜벅뚜벅 어딘가로 걸어갈 때, 내 마음은 그의 발걸음과 함께 움직인다.  

자무쉬는 떠나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하길 좋아한다. 길을 나서는 건, 익숙한 것에 대한 저항이면서도 낯선 것에 대한 설레임 내지는 허망함을 짧은 시간에 동시에 맛 볼 수 있다. 기차나 비행기 계단을 오를 때 목적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계단을 내려오면서는 목적지는 낯설고 곧 도망고 싶은 그런 장소가 되버린다. 목적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이 변덕스러워서 그런거겠지. 

현재 가장 원하는 건 3개월 간의 기.차.여행이다. 어떤 목적지에 가겠다는 갈망은 희미하고 도시에서 도시로, 국경에서 국경으로 넘어갈 때 갈아타야하는 기차 기다리는 시간 또는 밤 기차 기다리면서 역에서 보내는 고생스런 시간들이 그립다. 몇 시간씩 우두커니 앉아 플랫폼 싸인이 들어오길 간절히 바라면서 보내는 축축하면서도 나른하고 고된 그런 시간들을 갖고 싶다는 갈망이 이 영화를 보면서 밀물처럼 차올랐다. 가야할 목적지가 있다는 희망은 곧 효력을 상실할테고 목적지에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서성거려야하며 한없이 유쾌하고 떠들썩한 시간이 아닌 걸 깨닫고 어깨가 축 처질지라도..축 처진 어깨가 주는 기분이 달콤하다고 속삭이며 꼬득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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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 Car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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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라멩코로 카르멘을 구성하려고 한 안토니오는, 카르멘이 지닌 팜므파탈을 찾다 신인, 카르멘을 발견한다. 동료들은 반대하지만 안토니오는 카르멘이 지닌 숨은 치명적 매력을 발견하고 끌린다. 연습이 진행될수록 안토니오와 카르멘의 관계는 극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관객도 어디까지가 연습이고 어디까지가 영화의 내러티브인지 구별할 수 없다. 연습 중에도 두 사람의 팽팽한 눈길이 절도 있으면서도 강렬한 발구르기에 맞춰 오간다. 연습이 끝나고 현실에서 주고 받는 팽팽한 시선을 주고 받을 때는 비제의 카르멘이 흐른다. 플라멩코과 오페라 곡의 절묘한 교차가 만들어내는 경계와 무경계는 혼란스러운면서도 아름답다.   

2. 카를로스 사우라의 플라멩코 3부작 중 한 편이다. 그동안 본 카를로스 사우라 영화는 영상과 음악의 이중주로 이루어졌다. 눈 감고 음악만 들어도 좋고 음악을 끄고 눈으로만 봐도 즐거운 영화다. 이 영화 역시 음악이 없어도 인물의 미묘한 표정과 발동작으로 감정의 파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아주 격정적이면서도 절제된 감정 표현, 플라멩코에 절대적 지지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3. 안토니오의 연습실이면서 생활 공간. 1층은 극장처럼 구며져있다. 아무런 장식없고 나무바닥이 널다란 약간 올라간 무대와 역시 아무런 무늬없는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걸 고스란히 드러내는 소박한 탁자들과 작은 의자들. 아무런 장식 없는 무대는 시선을 무용수들의 발, 발동작과 함께 움직이는 치마단의 펄럭임으로 이끈다. 노래보다 무대 장식에 집중하는 뮤지컬이 싫은 이유를 깨닫는다. 젠zen 스타일의 공간이 주는 매력에 넋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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