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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츠 오브 컨트롤 - The Limits of Contro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덤에 가야해"란 말을 실천하는 한 킬러의 여정을 담은 로드 무비. 마드리드-세비야-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작은 마을-다시 마드리드로 이어지는 동선 중에 만난 사람들인데 킬러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지만 작전을 구실로 킬러의 여행기 같다. 비장한 표정에 말 없고 더블 에스프레소가 아닌, 에스프레소 싱글 두 잔을 시켜놓고 하는 일이라고는 지나가는 사람을 관찰한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세요?"란 암호로 낡은 성냥갑을 주고 받는 간단한 접선이 끝나면 그는 골목길을 누비며 다시 호텔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가끔 레니아 소피아 미술관에 들러 후안 그리스 그림 앞에서 표정없이 한참 서있다 돌아선다. 그의 각진 얼굴은 무표정해 보이면서도 비장해보이고 또 어떤 때는 모나리자처럼 묘한 미소가 희미하게 번지면서 슬퍼보인다. 스페인어만이 아니라 모국어도 말 할 수 없는 형에 처해진 것처럼 무언가 말할 듯하면서도 체념하는 표정이다.
그의 특별한 여행은 킬러답게 어떤 지령을 받기 위해 사람들과 접선을 하면서 전개된다. 접선자들은 암호문을 말하고 킬러가 고개를 저으면, 접선자는 탁자에 앉아 수다를 떤다. 킬러한테 영화에 관심있나요, 과학에 관심있나요, 하고 묻지만 그들이 필요한 건 그의 대답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다. 그가 관심이 있든 없든 그들이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버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린다. 마드리드에서 만난 한 여자는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영화는 아무 말 없이 인물이 앉아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짐 자무쉬의 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빙고!를 속으로 외쳤다. 이 여자의 말에 동의한다면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최고의 영화로 기억 속에 보관될 것이다.
킬러가 뭘 하나가 영화의 중심이 아니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과 좁은 골목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마음이 쏠리는 영화다. 자무쉬표 영상은 황홀하다. 스냅사진 찍듯이 인물들은 일부러 움직임을 잠깐씩 멈춘다. 킬러가 낡은 옷가방을 한 손에 들고 뚜벅뚜벅 어딘가로 걸어갈 때, 내 마음은 그의 발걸음과 함께 움직인다.
자무쉬는 떠나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하길 좋아한다. 길을 나서는 건, 익숙한 것에 대한 저항이면서도 낯선 것에 대한 설레임 내지는 허망함을 짧은 시간에 동시에 맛 볼 수 있다. 기차나 비행기 계단을 오를 때 목적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계단을 내려오면서는 목적지는 낯설고 곧 도망고 싶은 그런 장소가 되버린다. 목적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이 변덕스러워서 그런거겠지.
현재 가장 원하는 건 3개월 간의 기.차.여행이다. 어떤 목적지에 가겠다는 갈망은 희미하고 도시에서 도시로, 국경에서 국경으로 넘어갈 때 갈아타야하는 기차 기다리는 시간 또는 밤 기차 기다리면서 역에서 보내는 고생스런 시간들이 그립다. 몇 시간씩 우두커니 앉아 플랫폼 싸인이 들어오길 간절히 바라면서 보내는 축축하면서도 나른하고 고된 그런 시간들을 갖고 싶다는 갈망이 이 영화를 보면서 밀물처럼 차올랐다. 가야할 목적지가 있다는 희망은 곧 효력을 상실할테고 목적지에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서성거려야하며 한없이 유쾌하고 떠들썩한 시간이 아닌 걸 깨닫고 어깨가 축 처질지라도..축 처진 어깨가 주는 기분이 달콤하다고 속삭이며 꼬득이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