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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보았다 - I Saw The Devi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개봉전부터 잔인하다는 말이 나돌아 봐야하나 망설였다. 난 다른 상상력은 지나칠정도로 없는 편인데 이상하게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성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울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하다. 피가 낭자한 장면은 거의 못본다. 이 무슨 불균형스런 태도인가 싶지만 내가 이렇게 생겨먹었느니 어쩌겠는가. 잔뜩 겁을 먹고 가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견딜만했지만 144분이라는 런닝타임동안 별 이야기 없이 인간을 살덩어리로만 보는데 울렁증이 났다. 저녁에 바지락 칼국수를 먹는데 바지락 살을 씹는 순간, 남의 살을 씹고 있는다는 불쾌감이 이어졌으니 영화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2.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자체를 좋아하기 보다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각적 즐거움 때문에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본다. 닫힌 공간에 인물들을 모아 놓고 공간에서 풀어가는 플롯은, 전체 틀이 대체로 약한 그의 영화들을 보게 하는 힘이다. 이 영화에서는 공간의 세부적 집착을 버린 대신에 조명 사용이 눈에 띈다. 어처구니없게도 조명은 따스하면서도 명암이 선명하다. 클로즈업을 너무 많이 사용한 영화는 촌스럽게 여겨지는데 사극 드라마처럼 빈번한 클로즈업 사용에도 이 영화는 촌스럽지 않다.
3. 메인 플롯이 건들거리고 전체적으로스릴러라는 형식을 취하지만 긴장감보다는 잔인함의 끝은 어디인가를 뒤따라간다. 근데 너무 길다. 순진한 사람들이 야수의 심성을 지닌 이들에게 희생당하는 건 일차원적 잔혹함에 대한 탐구아닌가. 초원에서 한가하게 풀 뜯던 사슴이 재수없어서 사자의 습격을 받아 갈갈이 찢기는 데서 안됐다고 느끼만 심적 동요나 정신적 고찰을 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초원의 동물의 세계를 사람으로 치환해 놓은, 원시적 잔혹함만이 있어 희생자와 복수하는 자의 절박한 감정선을 따라가기 힘들다.
4. 영화적 스타일에 대한 생각을 좀 했다. 나아가 거시적으로 한국영화의 나아길이라기 보다는, 영화 보기를 인생의 큰 낙으로 여기는 관객 1인으로서 좀 더 다양한 한국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한국영화는 분명히 전환기에 있다. 주로 활동하는 감독들이 유년기를 어떻게 보냈느냐에 달려있다. 스타일이 분명하고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 있는 외국감독들의 유년기를 보면 대여섯살부터 카메라를 만지기 시작해 십세 전에 첫 단편을(비공식적 영화지만) 만들 경우가 많다. 내 다음 세대나 다다음 세대들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싶다. 지금 감독들은 하드보일드한 할리우드 장르영화를 보면서 자랐고 영화 속에 그런 어린 시절의 꿈을 이미지화한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에서 익숙한 장면이 많이 보이고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다양성이란 이름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런 영화라면 굳이 한국영화가 아니어도 되지 않나...한국배우, 한국감독, 한국자본으로 미국적 영화를 만들어낼 필요가 꼭 있을까, 싶다.
하드보일드 소설을 즐겨 읽었던 트뤼포가 영화를 만들었을 때, 미국적이라고 비판받았지만 21세기는 트뤼포의 영화를 미국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미국장르 영화를 즐겨본 감독들이, 트뤼포처럼 한국적 장르영화로 즐거움을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