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저 -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
베르톨트 브레히트 원작, 라삐율 편역 / 북인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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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장 좋은 여자 친구는 연극 배우이다.그녀는 대학을 입학하자 마자 연극동아리에 가입했다.당시 대학교 연극 동아리가 무대에 가장 자주 올리던 레퍼토리가 브레히트였다.대학을 졸업하고 그녀는 정말 연극배우가 되었다.프로연극인인 그녀의 1년 연봉은 운좋은 해에 400만원쯤 된다고 했다.부산에 내려오기 전 까지 그녀의 공연은 거의 전부 다 봤다.연극계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초대권 준다는 것을 늘 마다했다.

브레히트의 작품을 읽다가 그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전화기 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아이와 함께 복지관 문화프로그램 참여하러 왔다고 한다.그 집 아이랑 우리 아이는 3달 터울이다.그녀는 안그래도 점심 먹다가 내 생각 나서 전화 한 번 하려고 했다며 내 전화를 신기해했다.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최근에 읽은 브레히트를 이야기하려는 순간.그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어 미안한데 전화 끊어야 겠어.내가 다음에 다시 할께.아이가 저리로 도망간다.잡아야돼 '

'어...그래..브레히트는 보내줄...' 

' ...뚜뚜뚜...'

그녀에게 브레히트의 미완성 작품 <팟저>를 보내야겠다.지난해 7월 나온 책이었으니 읽었으리 만무하다.아이 키운다고 정신없는 1년차 엄마이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팟저>(또는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은 퍼즐놀이다.브레히트는 <팟저>를 완성하지 않은채 남겨 두었다.우리가 만나는 이<팟저>는 편역자 라삐욜(무대미술,행위예술을 하는 한국 사람이다)이 재구성한 것이다.책은 크게 1,2부로 나뉘어져 있다.1부는 브레히트의 단편을 이리저리 묶어낸 <팟저>대본이다.2부는 좀 복잡하다.일종의 해설서에 가깝다. <팟저>생성사부터 <팟저>에 대한 작품론,그리고 브레히트의 제자이자 동독 최고의 연출가였던 하이너 뮐러의 <팟저>해설,이 책을 편저할 때 누락된 브레히트의 <팟저>관련 메모들이 들어 있다.

<팟저>는 미완성의 열린 텍스트이다.편저자가 이 책을 꾸린 이유는 브레히트의 재료를 다시 한번 손봐서 연극무대에 올릴 수 있길 하는 바람에서이다.그렇기 때문에 편저자는 76년 <팟저> 초연을 주도했던 하이너 뮐러의 작업을 첨삭하면서 라삐욜의 <팟저>를 만든다.이 텍스트를 토대로 또다른 변형이 가능하다.(브레히트가 연출가들에게 주장했듯이)

<팟저 도큐멘트(작업계획들과 메모들,구상들)>은 그렇게 일단은 중점적으로 글쓴이의 공부를 위해 만들어졌다....글쓴이인 나는 아무것도 완성할 필요가 없다.내가 나를 수업한 것으로 족하다...브레히트 <팟저 주석 c2>

<팟저>는 무정형의 텍스트이기 때문에 읽을 때부터 물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하다.줄거리라고 할만한 것은 딱히 없다.또 내러티브를 위한 친절한 연결고리도 없다.인물들은 마치 선지자나 혁명가들처럼 불연속적인 언어를 내지른다.거기에 작품과 작가와의 관계가 책 서문에 박힌 이름처럼 딱 달라 붙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근대 독자의 '작가=작품'의 연결이 흔들린다.이게 누구의 작품인가? 브레히트는 500여장의 메모만을 남겼다.그 메모가 작품인가? 모호해진다. 열려있기 때문이다.내가 능력만 된다면 내 나름대로 <팟저>를 구성해도 브레히트에게 쓴소리 듣지 않는다.(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팟저>의 줄거리는 간단하며 등장인물도 예닐곱명 수준이다.4명의 탈영병이 탱크 위에서 내리면서 극은 시작한다.그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면서-팟저는 스스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다-함께 행동하기로 결정한다.그들은 무리 중 카우만의 집으로 숨어든다.이들 중 팟저만이 밖으로 나가서 음식을 구해올 수 있다.팟저는 푸줏간남자들과 다툼을 벌인다.동료들은 발각을 염려하여 행동 강령대로 외면한다.팟저는 카우만의 굶주린(?) 아내와 관계한다.그들은 그녀를 자유화(?)한다.팟저는 스스로를 없앰으로서 나머지를 없애려한다.무리는 팟저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길지 않은 이야기다.또 코러스 기능이 수시로 등장하여 작품을 설명하고 관객의 몰입을 막는다.브레히트를 읽거나 보면서 '감동' '동화' '눈물 뚝뚝' 된다면 브레히트를 모독하는 짓일게다.<팟저>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대단하다.<팟저>에서는 전쟁과 도시,개인의 욕구와 집단의 욕구,급진주의와 반급진주의,이성과 감성,역사적 폭력과 단절,대중의 모순과 희망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20세기 역사와 철학,사회를 관통하는 주제들이 단절된 무운형태의 시적 표현들로 적시되어 있다.(피터 한트케의 인기작품 <관객모독>에서 이런 투로 한 장을 구성한 것을 본적이 있다.예를 들면."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이게 단절된 무운형식의 표현이다.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는 알고 나면 재밌고 낭독하면 새로움이 있다.)

작품에서 대립적 구도를 갖는 이는 팟저와 코이너이다.이둘은 <팟저>안에서 상호보완적이다.팟저가 개인주의,아나키즘,급진주의의 축을 잡고 있다면 코이너는 공동체주의,반급진주의,이성주의자로서위치한다.하이너 뮐러는 역사적 스펙트럼 위에서 코이너를 레닌으로 배치시킨다.

(코이너) 그들이 우리를 한명씩 건드리면/그 땐 우린 끝이야.우리는/더 이상 가면 안돼,여기/경계지역에서/그들이 제일 불만스러워 하고 있어 그 다음은: 공장이/있는 곳이지!

<팟저>에서 쉽게 읽히는 정서는 전쟁으로 대표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것이다.이 전쟁을 중심배경으로 팟저 대 코이너의 대결구도가 형성된다.전쟁 또는 국가,국가 폭력에 대한 <팟저>의 표현은 시이며 프로파간다다.

고기가는 기계를 다루는/자들은 손잡이 말고는/아무것도 다루려 하지 않고/그렇게/인류의 정돈된 대중은/잘못된 목적으로 출동하고/그렇게 새로운/요령과 같은 박자 안의 욕망은 악용된다.

욕망의 구획지어짐에 대한 브레히트식 표현이다.이 욕망은 자본주의하에서 전쟁이란 이름으로 해소된다.고기 가는 기계를 다루는 자들은 전쟁을 다루는 자들이기도 하다.네그리의 <제국>에 보면 이런 뉘앙스의 글이 나온다." 우리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은 지하 창고의 금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기억에 의해 쓴거라서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고기사는 기계를 다루는 자들은 적을 규정하고 그들에게 총부리를 대라고 명령한다.팟저는 다르게 말한다.

내 앞에,내가 대항해 싸웠던 상대는:내 형제다/하지만 내 뒤에 그리고 내 형제 뒤에는:우리의 적이 있다.

너희들이 아직 몇 조각 고기 살점을/이빨 사이에 혹은/너희 형제들의 이빨 사이에 가지고 있는 한/너희들은 살육을 멈추지 않는다/게다가/물은 썩는다 입안에서

 뒤/돌아들 봐라 그리고 민족들의 전쟁을/계급들의 전쟁으로/세계 전쟁을/시민전쟁으로 바꿔라,즉 흩어지지 말고/이 전쟁을 너희 나라 땅에서 해라,너희가 너희의 시민계급을 박멸하지 않기 전에,전쟁은/끝나지 않을 테니

이기주의자이며 능력을 갖춘 리더 격인 팟저.그는 급진주의적이며 다중적이다.그가 희망을 거는 인간 이후의 대중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이간다.'각성된 민중'이라는 개념처럼 들린다.팟저는 과거의 것들을 부정하는 정신이다.라삐욜이 브레히트를 니체와 마르크스의 변증법으로 본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일듯 하다.팟저는 부정의 정신을 극한으로 밀고가는 전복을 원한다.(낭독하면 재미있다.)

쳇바퀴처럼 살려는/너희들의 건강하지 않은 욕구/나는 그게 싫다.

부당한 것은 인간적이다/더 인간적인 것은 그러나/부당함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

인간에게 인간은/완전히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모든 뼈와 살을/즙으로 녹여버리는/엄청난 위를 /통과한 것과 같이/네가 진창에서는/물고기와 사과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처럼/그렇게 희뿌연 죽 속에 인간의 목숨이 놓여있다.

그리고 너희에겐 아무/문제가 되지 않는것:비가/위에서 아래로 내린다는 것/그것은 나에겐/도저희 견딜 수 없는 것이다/알파벳에서 A 다음에 B가 오고 그것 말고는/아무것도 오지 않는다는 것.너희들한테는 그게 옮지만/나에게 그것은 완전히 별볼 일 없는 것이다.

세상의 부당함을 가리키고 있는/너희 손가락은/이미 썩었다: 시꺼먼 손가락!/그리고 호소하는 너희들의 팔은 이미 어깨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 도시 전체에/전복할 준비와/능력이 되는자가/단지 다섯뿐이라면,/곧 그들과 한 패가 되라/낡은 모든 것은 놔두고/즉시 새로운 것/즉 완전한 전복을 선택하라

그러나 팟저는 패배한다.대중의 패러독스에 의해 또는 자기 함몰에 의한 패배이다.브레히트는 이들이 대중을 떠나는 순간 그 패배가 결정되었다고 말한다.팟저의 마지막 유언..

누가 이 싸움에서 승리할 지/나는 모르겠다/그러나 늘 이기던자는 패배하고 말았다/그리고 지금부터 전 세월에 걸쳐/너희 세상엔 더 이상 어떤 승리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패배자만이/늘어날 것이다.

체제의 영원한 승전가를 예견하는 듯 하다.그러나 모순은 희망을 위한 반전이다.하이너 뮐러는 여기서 '적' 개념을 환기시킨다.완전한 세계개혁프로그램으로 완전한 적 개념이 만들어진다.착취를 살아 있는 자의 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어떤 절대적인 적개념도 필요없다.아직 끝나지 않았다.<팟저>의 마지막 코러스...

너의 목소리를 움츠려라,연설가여/너의 이름은 칠판에서 지워질 것이다/너의 명령들은/더 이상 수행되지 않을 것이다.허락하라/새로운 이름들이 칠판에 등장하고/새로운 명령들이 지켜지는 것을/옛날 초소를 떠나라.

올해는 6월 항쟁 20주년이다.요즘은 예전 만큼 브레히트가 읽히지 않는다.할 수 없다.읽히지 않음에도 브레히트는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이런 말을 후대에게 던진다.

'인류는 실현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더 이상 계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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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6-13 15:05   좋아요 0 | URL
쳇바퀴처럼 살려는/너희들의 건강하지 않은 욕구/나는 그게 싫다.
요즘... 학교와 계급 재생산...을 읽고 있는데요... 교육의 구조가 가난한 아이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노동자가 되도록... 그렇게 스스로를 망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말, 저도 거기 화가 납니다.ㅜㅠ

2007-06-13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06-13 15:45   좋아요 0 | URL
^^ 하층 계급의 아이들이 중산층 계급이 만드는 경쟁의 장에 뛰어들지 않고 또 서로 비교하지 않으며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다는 것이겠지요.속칭 '마초문화'가 될 터인데...하층 계급의 특수한 문화 속에서 이런 '거친 문화'를 없애기는 힘들어보입니다. 생존과 존재성 자체를 희식시킬 수 있을겝니다.결국 공돌이 아이들은 스스로 '거친 노동자.마초적 사나이'로 살아남게 되지요.독이 독을 치료하듯이 이 지점에 개입할 수 있는게 어쩔수 없이 또 '교육'일 것이니 공고 선생님의 역할이 크십니다.
운동장을 매일 빼앗겨 싫어하시겠지만 공고의 4강 진출은 멋있었습니다.다른 팀의 절반 밖에 안돼는 인원.... 부산의 야구명문에 중학 선수들을 전부 빼앗겨 버린 팀... 꼴찌의 반란을 보는 듯 했습니다.힘내라 공돌이!!

글샘 2007-06-14 09:13   좋아요 0 | URL
어, 보셨군요^^ 열 여섯명의 선수로 전국대회 4강에 간 것은 신기한 일이었죠.
지금 3학년이 졸업하면 내년부턴 그나마 9명의 엔트리를 짜기도 힘든 상황이랍니다.
그 잘 한다던 투수도, 작년까진 타자였던 애였구요^^
아이들의 문화에 개입하기엔 아이들이 너무도 멀어 보입니다. 그 애들이 스스로 노동자가 되기를 부정하는 듯하거든요. 공부는 죽어도 안 하는 것들이, 대학 간다고 설치는 거 보면, 속이 뒤집어집니다.^^ 하긴, 노동자가 돼 봐야 의식도 거기 적응이 되겠죠. 아직도 노동을 천시하는 풍조가 극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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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책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을 떠올렸다.그 영화는 포스터가 유명했다.멀리서 유학온 친구들 하숙방 마다 하나 씩 걸려 있던 기억이난다.얕은 강물과 짙은 녹음,그리고 탱고 무희처럼 날렵하게 날아오른 낚시줄... 그리고 브래드 피트.요즘은 아내와 함께 아시아 아이들 수집하는 취미가 생긴 그이다.많이 쭈그러졌다.그러나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올 때만해도 그는 아름다왔다.미국인의 이상형이라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후계자가 될 만 했다.특히 영화 속에서 자연과 물아일체된 그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스스로 풍경이 된  동생 브래드피트의 낚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감동먹었던 형의 나레이션이 생각난다. 브래드 피트가 예뻐서 더 예쁜 낚시 장면이었다.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의 여유로움을 생각하며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는다면 정확하게 10센티미터 바늘에 낚인 것이다.<미국의 송어낚시>에서 저자는 전원을 그리워 하지만 영화처럼 그림 같은 전원의 모습은 책 어느 구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오히려 기계,폭력,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둥둥 떠내려가는 송어 만이 나올 뿐이다.그러니 소설 속에서 통속적인 낭만과 여유로움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제목에 속아서 낚이지 않는게 좋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결코 읽기 편안하지 않다.우선 이 책의 구성은 파편적이다.2-3장 정도 분량의 짧은 연작소설이 이어진다.대략 50개의 짧은 장마다 소제목이 있다.물론 앞에 나왔던 이야기가 몇 마을 건너 또 언급되기도 한다.1000피스 직소퍼즐이 마룻 바닥에 마구 흩어진 듯 소설이 쓰여져 있다.읽다보면 어느 정도 맞추어지기는 하지만 전체의 그림을 다 맞춘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프랑스 영화사에서 '누벨바그 시대' 프랑소와 트뤼포와 같은 작가들이 실험한 ' 점프컷'과 비슷하다.남자와 여자가 뽀뽀를 하는 로맨틱한 장면이 나오려는데 갑자기 다음 장면은 광산 노동자의 일하는 씬으로 구성되는 그런 것들이다.몸에 배인 관습에 배치되는 구성이어서 난망하다.그런데 이 난감함 속에 의미가 발생한다.이 책<미국의 송어낚시>역시 이런'점프컷'들을 다닥 다닥 이어 붙여 놓은 것 같다.그래서 결론이 무었이냐 ? 줄거리 찾지 말라는 이야기다. 줄거리를 찾아내려고 하면 본인만 힘들다.작가가 처음부터 3분 라면처럼 딱 떨어지는 소설 형식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부디 소설을 읽으면 10줄 정도로 소설의 줄거리를 꼭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도 '송어낚시' 바들에 낚이지 말길 바란다.물면 아프다.

이 책은 다양한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책을 이끌어가는 힘이 상징과 은유다.그런데 이것들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빨간 버버리코트는 연쇄살인마의 표적'이란 식의 통속적 은유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책 제목에서 부터 '미국'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되듯이 즐겨 사용되는 상징과 은유들을 이해하려면 미국 문학,역사,문화 등에 익숙해야한다.그런데 미국인도 전부 다 알 것 같지는 않다.예를 들어 이 책에서 거짓된 아메리카 드림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생각해보자.작가가 그를 거짓된 꿈의 환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한 프랭클린은 그냥 미국 역사 태동기의 선구자쯤으로 여기고 넘어가기 쉽다.기존 체제에 불복하는 자유롤운 공간으로 제시되는 '모래상자'도 그렇다.아이가 노는 '모래상자'를 '탈주공간'으로 이해하려면 꽤나 많은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귀찮아도 책 뒤에 나오는 역자의 친절한 설명문에 기댈 수 밖에 없다.거의 매 장 마다 앞과 뒤를 오고 가야 하기 때문에 뒤쪽 친절한 보충설명란에 책갈피를 하나 꽂아 놓고 보는게 덜 귀찮다.또한 소설의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4년 역자가 작가와 나눈 인터뷰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브라우티건은 비교적 자세하게 자신의 문학관과 <미국의 송어낚시>가 가진 소설적 의미와 소설이 탄생하게된 배경에 대해서 쓰고 있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이런 류의 영화가 대개 좀 난감한 면이 있는데 가끔 혹하는 마음에 보면 또 아주 신선한 재미가 있다.이 소설은 1967년에 나왔다.이 시점은 20세기 서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점이다.히피,마약,베트남전,인권 행진,유럽의 68혁명 등등... 소설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작가 역시 사이키델릭한 짐모리슨의 음악을 들으며 마약을 한대 멋드러지게 맞고 펜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최소한 마리화나 정도는 깊에 빨아 들였을 것이다.소설 속 상상에 마약의 중독적인 향기가 배어있다.뽕의 뒷 맛은 그래서 가끔 구질 구질,상상 초월의 설정들을 만들어 낸다.아내와 강가에서 정사를 나누다가 질러버린 정액이 부패한 송어들과 둥둥 떠다니는 작가의 상상에 구역질이 날만한 바른생활 선남선녀들도 이 책에 낚이지 않길 바란다.

정작 중요한 이 책의 주제는 무엇일까 ? 대략 느끼려고 했으나 브라우티건이 인터뷰에서 한 줄로 정리해준다.생각하기 싫으니까 그냥 인용해보자.

제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가 상실,비탄,목가,향수,탐색으로 이어지는 것도 거기에 있습니다.제 소설의 주인공들은 잃어버린 '미국'을 찾아 방황합니다.

그리고 주인공 찾기 강박증에 걸린 독자를 끝까지 괴롭히는 이 책의 주인공에 대한 것도 언급한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사랑도,장소도,책도,꿈도 그리고 작가의 펜촉도 될 수 있는 무형의 것입니다.풍요를 상실한 현대의 불모지에서 부재하는 인간의 정신,꿈,미국을 탐색하는 작업은 언어의 유희나 알레고리 패러디나 농담으로 이루어집니다.현대의 악몽적인 상황하에서는 언어와 아이디어와 내용 사이에 단절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옮겨 놓고 보니 모두 여섯 줄이다..사실 이 여섯 줄이 <미국의 송어낚시>를 참고서에 싣고 싶은 출판업자가 그렇게도 찾는 문장이었을 것이다.또한 엉킨 실타래를 ?다가 절반 포기,절반 짜증에 혼합된 사람들 역시 찾고 싶었던 말일것이다.소설의 주제,작품의 구성,언어표현의 방식까지 다 적혀있다.

이 책에서는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현대인의 상실감,자연과 공존하지 못하는 소외,죽음에의 공포,자본주의의 폐해 등이 송어낚시라는 이름으로 뒤섞인다.어떤 때는 송어낚시가 주체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읽다보면 곧 '송어낚시'가 어떤 행위나 어떤 인물이 아님을 알게된다.작가는 이 뒤죽박죽 혼합을모든 것이 떠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떠있는 물방울들이 이 녀석하고도 붙고 저 녀석하고도 붙고 또 조금 있다가 흘러서 떠내려가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속성은 비자본주의적 요소를 자본주의화하면서 성장한다고 한다.태생이 먹깨미 귀신같은 놈이다.이 유령은쌩까는 성격이 있다.자신이 쓸고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지 않는다.곶감만 빼먹고 씨는 아무렇게나 버려놓는 몰염치한 친구다.자본주의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발전과 개발은 언제나 치워지지 않는 또한 치유되지 않는 배설물들을 남겨놓았다.그게 폐선장이고 폐차장이다.이 페선장과 폐차장에는 산업사회의 쓰레기만 가득하다.미안하게도 거기에 인간들도 갖혀있다.인간이 만든 역사에 인간이 갖힌 것이다.한자로 짧고 굵다.자승자박,자업자득...이 폐선장의 쓰레기들은 넘치고 넘쳐 강을 바다를 산을 덮는다.인간의 역사 발전만큼이나 도도한 흐름이다.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는 이런 디스토피아에서도 작은 희망을 이야기한다.송어낚시 쇼티를 외면하고 프랭클린 동상앞에서 모래상자와 노는 아이들 처럼 말이다.

천국에서도 브라우티건은 마리화나 한대 깊이 빨면서 송어낚시를 하고 있을 것 같다.씨익 웃으며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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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7-06-22 19:24   좋아요 0 | URL
아니..세상에 이렇게 멋진 리뷰를 아이 자는 틈을 이용해서 쓰셨다구요??
대단대단하십니다..아이가 일어나서 울까봐 불안해서 후다닥 쓰게 되고 그러던데요..
아빠라서 더 느긋한 걸까요?/
저도 이책 아는지기님의 소개로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읽어보진 못하고 있는데 더 궁금해지네요..
다시한번 뽑히신것 축하드려요..^^&

프레이야 2007-06-22 21:42   좋아요 0 | URL
당선, 축하합니다!

오우아 2007-06-23 20:53   좋아요 0 | URL
역시 문향(文香)이 대단하십니다. 축하드립니다.

드팀전 2007-06-25 23:46   좋아요 0 | URL
배꽃님>매주 토요일 와이프님 맛사지 보내드리고 나면 아이랑 둘이 놉니다.느긋하진 않지요.좀 자나 싶으면 '앙앙'하고 울어버리니까요..
혜경님>구두에 찔리겠습니다 ㅋㅋ
오우아님>문향??? 그게 뭔데요@@@ 그런거 없습니다.어쨋든 감사해요.
 
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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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대녕'이 아프다.

윤대녕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가슴 한 켠에 통증이 느껴진다.통증은 바늘처럼 날카롭기도 하고 무거운 망치처럼 묵직하기도 하다.간헐적인 통증에 자꾸 가슴에 손이 간다.긴 한숨과 더불어...나의 눈은 자꾸 방 한 구석을 바라보거나 창 문 밖을 멍하니 내다보게 된다.

아픈 곳에는 더 자주 손이 간다.윤대녕의 소설<제비를 기르다>는 다시 아픈 곳을 건드린다.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고 믿었넌 그 '상처'들이다.

어린 시절 들었던 '바늘' 이야기가 떠오른다.바닥에 바늘이 떨어졌다.아버지는 어두컴컴한 방을 헤집으며 바늘을 찾고 계셨다.엉거주춤 기어다니며 바늘을 찾는 아버지를 나는 멀뚱 멀뚱 바라보고 있었다.손으로 바닥을 몇 번 쓴 끝에 한 줌의 먼지와 함께 바늘이 모습을 드러냈다.아버지는 바다 밑에 가라앉았던 침몰선에서 보물을 건져낸 듯 뿌듯해 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작은 바늘은 말이지.아주 위험해.그냥 있다가 밟고 넘어가면 몸으로 들어가서 혈관을 타고 따라 돈다고..'

바늘이 혈관을 따라 타고 돈 다는 것이 사실은 아닐것 같다.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붉은 혈관을 따라돌아다니는 은빛 작은 바늘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쳤다.

'윤대녕'은 사라진게 아니었다.나는 스스로 날개를 꺽고 내려앉았다고 믿고 있지만 '그'는 은빛 바늘이 되어 내 혈관을 돌고 있다.잊고 지낼 때가 많은 것은 그 바늘이 자연선택하여 혈관의 길을 알아내고 벽에 부딪히지 않고 잘 돌았기 때문이다.혈관 벽 역시 바늘이 주는 통증에 어느정도 익숙해 져 있기도 하다.하지만 몸에 들어간 바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나는 '윤대녕'이 아프기 때문에 그 말 이외에 사실 덧붙일 말이 없다.아픈 사람에게 그 통증의 입체적 느낌을 설명하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계란같은 통증 하나가 몸에 들어가 있는 느낌.나와 똑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만이 그 미세한 통증 아닌 통증을 느낄 수 있다.11월의 바람같은 그 느낌말이다.

윤대녕의 이야기는 비슷 비슷하다.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에도 윤대녕스러운 정서는 이어진다.윤대녕이 여기까지 왔다...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내게 윤대녕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책 후기에 그 스스로도 어떤 벽에 부딪혔음을 말한다.그 벽을 넘었는지 아니면 우회했는지 모르겠다만 그 결과물이 이 책인 것만은 사실이다.이 책으로 윤대녕이 더 성숙했느니 다른 길을 보았느니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내게는 그가 '윤대녕'답게 그에게 주어진 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길 너머를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윤대녕의 인물들에서 어떤 '신비성'을 읽는다.하지만 아픈 나는 윤대녕에서 '사실성'이 느껴진다.통상적인 개념의 '리얼리즘'을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 속에 있다.

4-5년전 좋아하던 형님과 대학로에서 술을 마셨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형님은 이미 길 너머를 갔다 온 아니면 이미 길 너머와 길이 하나가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형님이 내게 그랬다.'넌 참 힘들겠다 싶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널 보면 늘 줄타기 하고 있는 사람이 생각난다.왜 있잖아.서커스 같은데서 균형잡고 줄위에 서 있는....보통 사람들은 8할 정도는 땅에 발 붙이고 있고  나머지로 허공을 그리워 하지..그게 정상적인 거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다수를 차지하지.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부유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부유 자체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지.그런데 널 보면...진짜 위태 위태하면서도 줄타기를 잘하고 있어...이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딱 50 대 50이야. 그래서 널 보면 참 힘들겠다 싶다.차라리 어느 한 쪽이 무거우면 편안해지는 법인데 말이지.그런데 아마 넌...내가 아는 사람들 처럼 영원히 부유하지는 않을거야...대신 말이지. 네가 내려앉았다고 떠다니는 사람들,그리고 아직 내려앉지 않은 사람들을 못났다거나 이상하다거나 정신 못차렸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면해. 그런 사람을 봐 왔거든.자기가 내려앉더니 지나온 자기의 과거를 부정해버리더라고...쓸모없는 시간낭비나 주체못하는 낭만성정도로 취급해버리더라고'

나는 느낀다.이제 '윤대녕'이 나의 것이 아님을.그렇지만 알고 있다.여전히 '윤대녕'스러운 것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 나머지 제비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일부는 생을 다해 죽고 나머지 제비들은 또다른 곳으로 가겠지' .... <제비를 기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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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05 12:46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감동적인 리뷰에요^^
3월, 힘차게 시작하시기를...

2007-03-05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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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역 내에 있는 서점에서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샀다.한 손에는 장모님이 보내주시는 꽤 무거운 김치 꾸러미가 있었다.다른 손은 어젯 밤 아기가 잠든 사이 스탠드 켜고 이불 덮어쓰고 본 책..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를 갈아 타기위해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플랫폼에서 보릿자루 마냥 기다리기 싫었다.비록 잠으로 귀가길을 빼앗겨 버릴 지라도 몇 줄의 글이 필요했다.햄버거 가게 옆에 있던 서점을 두리번 거렸다.사람들은 자기계발서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나는 한 쪽 귀퉁이 한 면의 반도 채우지 못한 시집 코너를 기웃거렸다.며칠 전 부고를 들었던 오규원 선생이 시집이 먼저 눈에 띄었다.그러나 계산대 위에 오른 것은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

나는 지금껏 시집 리뷰를 단 한편도 쓰지 않았다.그렇다고 내가 시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은 아니다.한 해에도 대 여섯권의 시집을 읽는다.그런데 이상하게 시집에는 리뷰를 쓰기가 꺼려진다.언제나 부담을 주는 것은 시집 뒤에 달린 문학비평가들의 비평글.왠지 나 역시 그런 준거에 맞게 글을 써야 할 것 같다는 무게감을 준다.내가 문학도들 처럼 그렇게 쓰지 못함을 또한 그렇게 분석할 힘이 없음을 안타까와 하는 사이 실기를 한다.시에 과문하다보니 의외로 시 비평 까지 읽어서 지식을 채우려는 것이 오히려 화가 될 때가 많은 셈이다.거기에다 좋은 시를 읽고 나면 의기 소침해지기 까지 한다.언어를  선별하고 조탁하는 쟁이들의 뛰어남에 어깨에 힘이 빠진다.힘없는 말에 더 채찍을 가해서 아예 주저 앉게 만드는 것은 시인들의 눈이다.내가 시인의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내게 그것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디서 잃어버린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김사인 시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나는 이 시인에게 관심이 갖다.단지 이름때문이다.'사인'이라는 이름은 왠지 모르게 남달랐다. '죽음의 원인' 인가? 아니면 '시그내처'를 말하는 '사인'인가?

  "김사인 고객님,여기에 사인해주세요"  

아니다.웃자고 한 소리일 뿐이다. 김사인 시인의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야..진짜 시인의 이름같다' 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이었다.이 생각이 언제 들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그런데 그 종적을 알수 없는 생각이 이 시집을 내게 불러들인 머나먼 이유가 되었으니 가끔은 쓸데없는 생각도 좋은 인연을 이어주기도 한다.생각이 이렇게 미치니 세상사의 이모저모가 참으로 묘하고 재미있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시집을 펼쳤다.내 주변 사방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장난치는 소리가 퍼졌다.기차 안에 소리를 줄여줄 차가운 가습기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이가 생기고 나니 아이들이 내는 소음에 예전에 비해 너그러워진다.시를 읽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옆에 앉은 내 나이 또래의 양복입은 신사는 계속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다.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

나는 이 시를 내리 세번 읽었다.한번은 빠르게 한번은 느리게 마지막은 작은 소리를 내어...안구에 습기.어젯밤 스탠드의 형광불빛이 눈에 좋지 않았던게 분명하다.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중략).......그래서 그토록 꼬부리고 숨어 있는 그것이 혹 죽은 것은 아닌가 한순간 걱정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가 그것을 건드리니/아아,가만히 움츠리며 살아 있다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 기척이 어쩐지 우리들 희망의 절망적인 상징처럼

여겨져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새끼 발가락들을 만나왔던가.안타까와 했으며 무언가 도움이 되고자 했다.그런데 그것이 육화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회적 부채감을 위한 것인지 늘 질문했다.아..그런데 '새끼 발가락'이라니? 과연 내가 본 것들이 내가 동감했던 것들이 나의 새끼발가락인적이 있었던가? '새끼 발가락'이 내 정수리에 폭포수 같은 차가움을 던진다.

 

....오 빌어먹을,나는 먼 곳에 마음을 벗어두고 온 사내/그대 눈부신 무구함 앞에/상한 짐승처럼 속울음을 삼켜 나 병만 깊어지느니...<예래 바다에 묻다>

..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흘러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으로 주저않았나/깁고 닦는 느린 손길/

골목 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돋보기 너머로 한번씩 먼 데를 보는/그의 얼굴/고요하고 캄캄한 길.......... <풍경의 깊이2>

...사람 사는 일 그러하지요/한세월 저무는 일 그러하지요/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 손 부비며 돌아옵니다....<춘곤>

자동차 굉음 속/도시고속도로로 갓길을/누런 개 한마리가 끝없이 따라가고 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귀가>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자의 빈호주머니여/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그간의 일들을/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코스모스>

작은 것들의 이야기를 듣는 귀를 가진 시인이다.삶의 노정은 딸칵 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 가깝지만 또 무료배급소 늘어선 줄만큼이나 길다.저물 무렵 느린 햇살을 받고 누웠을 그 길을 생각한다.바람 좋은 저녁은 햇살을 모래가루처럼 흩어놓는다.그 모래가루를 잡고픈 허망한 시선......

일상의 비루함과 작은 것들의 지리멸렬함...시인은 그 작고 지루함에 비록 계피처럼 쓰지만 살아갈 수 있는 미소 한 자락을 퍼올린다.

<꽃>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부산까지 오는 기차안에서 나는 몇 번 천장을 바라보며 눈가의 습기를 말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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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2-22 14:03   좋아요 0 | URL
사내답지 못하게 눈물을 보이다니...
우린 참 ... 답지 못한 것을 꺼리며 살아왔나 봅니다.
그렇지만, 이젠 커밍아웃이 잦아져야할 때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잘난 여성들은 정치도 하고, 사업도 하고, 조용한 남자들은 시도 쓰고 아기도 보고...
제 잘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편견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이들 세대에게 우리가 주는 선물 아닐까 합니다.
자리를 마련해야지 하다가도 시간 내기가 쉽지 않지요.
봄방학중에 깜짝 번개라도 한번 할까요? 간단하게 쐬주 한 잔 하실 분만 모아서...
시간이 되신다면...

2007-03-07 0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문재 산문집
이문재 지음, 강운구 사진 / 호미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문재 산문집은 등푸른 고등어같다.그러나 바다를 막건너온 고등어는 아니다.발효의 시간을 거친,이제는 바다보다는 인간과 더 가까와 져 있는 고등어다.그의 문장은 소박한 밥상에 오른 고갈비처럼 맛깔스럽고 그 의미는 한 젓가락 꽉차게 잡히는 흰살처럼 두툼하다.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푸른 바다 심연을 누릴 때 처럼 생생하다.시인은 매일 만나는 새로운 것들을 기록하며 등의 푸른 빛이 퇴색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새해 처음 읽은 책이자 오랜 만에 읽은 산문집이다.결론 부터 말하자면 첫 걸음이  너무 사뿐하여 행복하다.김학철 선생의 <우렁이 속 같은 세상> 이후 가장 훌륭한 산문을 만난것 같다.김학철 선생의 산문이 우직한 감나무같았다면 이문재 시인의 산문은 물푸레나무같다.물론 김학철과 이문재 사이에 더 좋은 글들도 많았을 것이다.(나는 과거 유명한 고답적인 산문을 읽는 정도에서 만족했다.)그 중간에 산문을 접해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그러나 인연이 좋지 않았다.내 나이 또래의 어떤 여류시인의 관념적이며 화려한 산문을 읽다 내팽겨친게 1년도 넘은 일이다.그 후 산문과의 '절연'의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과문한 탓에 좋은 글을 찾지 않았던 것이 새삼 부끄러워지기도 한다.어쨋거나 오랜 만에 만난 산문과의 해후가 '이문재 산문집'이었으니 분명 행운이다.(아무래도 올 한해 이 책을 여기 저기 많이 선물할 것 같다.) .

길 위에 살면서도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시인답게 이문재는 디지털화한 세상을 천천히 소요한다.이문재 시인의 글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느림' '아날로그' '몸' '걷기' 등이다.시인은 첫 장부터 '나는 아날로그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힌다.스스로 아날로그임을 부끄러워하는 나 같은 도시인들에게 이 선언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아날로그선언'은 내게 DSLR이 없는 것도MP3가 없는 것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또 90년대 후반쯤 나온 것으로 추측되는-글을 치면 가끔 한 줄씩 동시에 나타나기도 할 만큼 느려터진- LG IBM 컴퓨터도 불편해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아날로그'는 '기다림'을 특징으로 한다.흔히 인스턴트 식품의 대명사인 '라면'조차 이문재 시인은 '컵라면'에 비하면 '기다림'과 '주체적 이용'이 있기 때문에 이시대의 마지막 음식이라고 이야기한다.만년필이 그렇고 파이프 담배가 그렇다.불편하지만 그것들을 이용하기 까지 '시간'이라는 것이 개입된다. 그 시간은 사물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짧은 명상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녹차를 마시는 시간을 예로 든다.

'끓는 물이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고 또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으며 상대방이 찻잔을 비우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와인이 숙성되고 녹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여름 내내 포도를 키운 먼 곳의 농부를 떠올릴 수 있다.비탈에서 녹차를 따는 아낙네의 깊은 눈망울을 그려 볼 수도 있다.포도를 영글게하고 녹차 잎을 틔워 내는 데에 참여한 우주 전체가 고마울 수도 있다.'

근대의 속도 지상주의는 우리 삶을 점점 피폐화 시키고 있다.사람들은 그것을 발전으로 받아들이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다.따뜻한 정서의 공간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사라져 간다.골목과 마당에 대한 시인의 생각에는 애틋함이 묻어난다.나이 든 사람의 '옛날이 좋았어' 라는 신세타령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잃어버리는 정서의 공간이 너무 크다.

'황혼병이라고 있다.저녁이 되면 공연히 불안 초조해지는 질병..내가 다니던 대학교 앞에는 골목이 제법 많았다. 이모집,작은집,큰엄마네같은 단골 주점이 그 골목안에 있었다....언제든 쳐들어갈 수 있는 선배나 친구의 하숙집,자취방도 그 골목과 모두 이어져 있었다....정동에서 인사동까지 걸어가는 골목길이 나를 다스리는데 한몫을 했다.골목이 특효약이었다.....모든 대도시가 골목을 박멸하고 있다...도시의 실핏줄이 바로 골목이다.실핏줄이 없는 인체가 식물 인간이듯이 골목이 없는 도시는 죽은 도시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다니던 대학도 무지하게 한옥골목이 많았다.그 골목에 면한 친구 하숙방,버스 끊겨 갈데없는 청춘을 졸린 눈을 비비며 창문을 열고 친구가 맞아 주었다.어떤 때는 주인없는 방에 혼자 들어가 자고 있으면 저 멀리 골목에서 친구의 술에 취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도 햇다.저녁 내내 생각을 하고 술기운을 빌어 여자친구를 데리고간 골목길,순진한 입맞춤 한 번을 못하고 얼마나 똑같은 골목길을 뱅뱅 돌았는지.......오랫동안 가보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 골목길에는 사람의 향기가 나고 있을 것이다.고층 아파트 숲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향기이다.

또한 '마당'에 대한 이문재 시인의 기억도 나를 애틋하게 만들었다.그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나는 안방이 아니라 마당에서 자랐다' 라고.그 만큼은 아니어도 예전에 내가 살던 집 역시 마당이 있었다.내 유년 시절 기억의 많은 부분은 그 마당에서 벌어졌다.하지만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아파트에서 살게 될 우리 아기에겐 이런 기억은 별나라 이야기가 될 것이다.그 친구가 나이가 들면 '나는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아파트 놀이터에서 자랐다'라고 쓸 지도 모른다.쓰고 나니 더욱 안타깝고 애틋하다.

그는 속도의 무한 경쟁 속에서 편리와 편의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적시한다.수많은 시인들의 감수성의 원천이 되었던 우체국은  편지가 사라지며  각종 공과금 영수증을 보내는 곳으로 바뀌었다.핸드폰은 우리의 새로운 신체가 되어 하늘과 땅,지하를 가리지 않고 우리를 일중독으로 몰아간다.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단 한 순간도 각종 모니터를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모니터는 눈의 창이고 마음의 창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이 '디지털 대세화'는 우리에게 '기다림'을 앗아가 버리고 하늘의 바라보던 푸른 눈빛과 고드름을 만지던 차가운 손을 잊어버리게 했다.시인은 말한다.잊어 버린 몸을 찾고 '발효의 시간'이 주는 미덕을 즐기자고 말이다.

시인은 우선 '언플러그'라는 작은 실천을 제시한다.그는 우리가 '전력의 노예'라고 말한다.도시의 삶에 전기가 빠지면 도시의 존립 자체가 없어진다.아파트 단지에 잠시 정전이 되면 난리가 난다.몇 시간 정전이 되면 9시 뉴스감이다.도시인들의 삶은 플러그를 꽂아 놓았을 때만 작동한다.행여 플러그가 뽑히면 심적으로 무척 불안해한다.그는 '언플러그'를 통해서 '자발적 망명'을 하라고 주문한다.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기 위해서 또 근대화의 속도에 잊혀진 나의 속도를 찾기 위해 그는 '걷기'라는 방법을 제안한다.걸음으로서 모든 풍경이 비로소 자기의 것이 되며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생태주의적 삶을 지향하는 도시인으로서 시인은 한계를 알고 있다.도시적 삶에 반항하면서도 도시에서 먹고 살고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중간자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자신에 대한 자기반성에 치열하다.

'나는 아마도 눈부시게 이 도시의 속도에 적응했던 것 같다.말로는,글로는,시로는 유목민의 속도를 떠들고,쓰고하면서도,내 구체적인 삶은 이 거대 도시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생태적인 삶에 대한 동경만 가득한 나같은 이들에게 시인이 보내는 자기반성의 메시지이다.어떤 선배가 올 한해의 다짐으로 '좀 더 까칠해지자' 라고 농담처럼 말했다.그 말이 가르키는 바는 다르겠지만 나 역시 올해 좀 더 나에게 까칠해져야 겠다고 다짐해본다.언제나 문제는 마음으로 부터 손까지의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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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7-01-09 22:16   좋아요 0 | URL
어제 주문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책이에요.
기대하면서도 좀 두려워요.
그에게서 스승인 김훈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날까봐요.-,-;
(기우인가요?)

드팀전 2007-01-09 23:09   좋아요 0 | URL
걱정 안하셔도 될 듯 해요.스스로도 김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인정은 하지만 또 그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니까요...저널리스트적인 글쓰기 특징이 언뜻 보이는데 전 개인적으로 그런 글들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답니다.

잉크냄새 2007-01-16 17:12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 얼마전 읽은 <농담>이란 시에 이끌려 들어왔고 님의 리뷰로 굳히기 한판 들어가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드팀전 2007-01-16 18:01   좋아요 0 | URL
...글 내용중에 좀 중복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그냥 봐줍니다.^^ ..그정도야 하는 허용범위내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