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산문집
이문재 지음, 강운구 사진 / 호미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문재 산문집은 등푸른 고등어같다.그러나 바다를 막건너온 고등어는 아니다.발효의 시간을 거친,이제는 바다보다는 인간과 더 가까와 져 있는 고등어다.그의 문장은 소박한 밥상에 오른 고갈비처럼 맛깔스럽고 그 의미는 한 젓가락 꽉차게 잡히는 흰살처럼 두툼하다.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푸른 바다 심연을 누릴 때 처럼 생생하다.시인은 매일 만나는 새로운 것들을 기록하며 등의 푸른 빛이 퇴색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새해 처음 읽은 책이자 오랜 만에 읽은 산문집이다.결론 부터 말하자면 첫 걸음이  너무 사뿐하여 행복하다.김학철 선생의 <우렁이 속 같은 세상> 이후 가장 훌륭한 산문을 만난것 같다.김학철 선생의 산문이 우직한 감나무같았다면 이문재 시인의 산문은 물푸레나무같다.물론 김학철과 이문재 사이에 더 좋은 글들도 많았을 것이다.(나는 과거 유명한 고답적인 산문을 읽는 정도에서 만족했다.)그 중간에 산문을 접해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그러나 인연이 좋지 않았다.내 나이 또래의 어떤 여류시인의 관념적이며 화려한 산문을 읽다 내팽겨친게 1년도 넘은 일이다.그 후 산문과의 '절연'의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과문한 탓에 좋은 글을 찾지 않았던 것이 새삼 부끄러워지기도 한다.어쨋거나 오랜 만에 만난 산문과의 해후가 '이문재 산문집'이었으니 분명 행운이다.(아무래도 올 한해 이 책을 여기 저기 많이 선물할 것 같다.) .

길 위에 살면서도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시인답게 이문재는 디지털화한 세상을 천천히 소요한다.이문재 시인의 글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느림' '아날로그' '몸' '걷기' 등이다.시인은 첫 장부터 '나는 아날로그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힌다.스스로 아날로그임을 부끄러워하는 나 같은 도시인들에게 이 선언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아날로그선언'은 내게 DSLR이 없는 것도MP3가 없는 것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또 90년대 후반쯤 나온 것으로 추측되는-글을 치면 가끔 한 줄씩 동시에 나타나기도 할 만큼 느려터진- LG IBM 컴퓨터도 불편해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아날로그'는 '기다림'을 특징으로 한다.흔히 인스턴트 식품의 대명사인 '라면'조차 이문재 시인은 '컵라면'에 비하면 '기다림'과 '주체적 이용'이 있기 때문에 이시대의 마지막 음식이라고 이야기한다.만년필이 그렇고 파이프 담배가 그렇다.불편하지만 그것들을 이용하기 까지 '시간'이라는 것이 개입된다. 그 시간은 사물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짧은 명상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녹차를 마시는 시간을 예로 든다.

'끓는 물이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고 또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으며 상대방이 찻잔을 비우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와인이 숙성되고 녹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여름 내내 포도를 키운 먼 곳의 농부를 떠올릴 수 있다.비탈에서 녹차를 따는 아낙네의 깊은 눈망울을 그려 볼 수도 있다.포도를 영글게하고 녹차 잎을 틔워 내는 데에 참여한 우주 전체가 고마울 수도 있다.'

근대의 속도 지상주의는 우리 삶을 점점 피폐화 시키고 있다.사람들은 그것을 발전으로 받아들이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다.따뜻한 정서의 공간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사라져 간다.골목과 마당에 대한 시인의 생각에는 애틋함이 묻어난다.나이 든 사람의 '옛날이 좋았어' 라는 신세타령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잃어버리는 정서의 공간이 너무 크다.

'황혼병이라고 있다.저녁이 되면 공연히 불안 초조해지는 질병..내가 다니던 대학교 앞에는 골목이 제법 많았다. 이모집,작은집,큰엄마네같은 단골 주점이 그 골목안에 있었다....언제든 쳐들어갈 수 있는 선배나 친구의 하숙집,자취방도 그 골목과 모두 이어져 있었다....정동에서 인사동까지 걸어가는 골목길이 나를 다스리는데 한몫을 했다.골목이 특효약이었다.....모든 대도시가 골목을 박멸하고 있다...도시의 실핏줄이 바로 골목이다.실핏줄이 없는 인체가 식물 인간이듯이 골목이 없는 도시는 죽은 도시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다니던 대학도 무지하게 한옥골목이 많았다.그 골목에 면한 친구 하숙방,버스 끊겨 갈데없는 청춘을 졸린 눈을 비비며 창문을 열고 친구가 맞아 주었다.어떤 때는 주인없는 방에 혼자 들어가 자고 있으면 저 멀리 골목에서 친구의 술에 취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도 햇다.저녁 내내 생각을 하고 술기운을 빌어 여자친구를 데리고간 골목길,순진한 입맞춤 한 번을 못하고 얼마나 똑같은 골목길을 뱅뱅 돌았는지.......오랫동안 가보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 골목길에는 사람의 향기가 나고 있을 것이다.고층 아파트 숲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향기이다.

또한 '마당'에 대한 이문재 시인의 기억도 나를 애틋하게 만들었다.그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나는 안방이 아니라 마당에서 자랐다' 라고.그 만큼은 아니어도 예전에 내가 살던 집 역시 마당이 있었다.내 유년 시절 기억의 많은 부분은 그 마당에서 벌어졌다.하지만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아파트에서 살게 될 우리 아기에겐 이런 기억은 별나라 이야기가 될 것이다.그 친구가 나이가 들면 '나는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아파트 놀이터에서 자랐다'라고 쓸 지도 모른다.쓰고 나니 더욱 안타깝고 애틋하다.

그는 속도의 무한 경쟁 속에서 편리와 편의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적시한다.수많은 시인들의 감수성의 원천이 되었던 우체국은  편지가 사라지며  각종 공과금 영수증을 보내는 곳으로 바뀌었다.핸드폰은 우리의 새로운 신체가 되어 하늘과 땅,지하를 가리지 않고 우리를 일중독으로 몰아간다.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단 한 순간도 각종 모니터를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모니터는 눈의 창이고 마음의 창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이 '디지털 대세화'는 우리에게 '기다림'을 앗아가 버리고 하늘의 바라보던 푸른 눈빛과 고드름을 만지던 차가운 손을 잊어버리게 했다.시인은 말한다.잊어 버린 몸을 찾고 '발효의 시간'이 주는 미덕을 즐기자고 말이다.

시인은 우선 '언플러그'라는 작은 실천을 제시한다.그는 우리가 '전력의 노예'라고 말한다.도시의 삶에 전기가 빠지면 도시의 존립 자체가 없어진다.아파트 단지에 잠시 정전이 되면 난리가 난다.몇 시간 정전이 되면 9시 뉴스감이다.도시인들의 삶은 플러그를 꽂아 놓았을 때만 작동한다.행여 플러그가 뽑히면 심적으로 무척 불안해한다.그는 '언플러그'를 통해서 '자발적 망명'을 하라고 주문한다.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기 위해서 또 근대화의 속도에 잊혀진 나의 속도를 찾기 위해 그는 '걷기'라는 방법을 제안한다.걸음으로서 모든 풍경이 비로소 자기의 것이 되며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생태주의적 삶을 지향하는 도시인으로서 시인은 한계를 알고 있다.도시적 삶에 반항하면서도 도시에서 먹고 살고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중간자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자신에 대한 자기반성에 치열하다.

'나는 아마도 눈부시게 이 도시의 속도에 적응했던 것 같다.말로는,글로는,시로는 유목민의 속도를 떠들고,쓰고하면서도,내 구체적인 삶은 이 거대 도시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생태적인 삶에 대한 동경만 가득한 나같은 이들에게 시인이 보내는 자기반성의 메시지이다.어떤 선배가 올 한해의 다짐으로 '좀 더 까칠해지자' 라고 농담처럼 말했다.그 말이 가르키는 바는 다르겠지만 나 역시 올해 좀 더 나에게 까칠해져야 겠다고 다짐해본다.언제나 문제는 마음으로 부터 손까지의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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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7-01-09 22:16   좋아요 0 | URL
어제 주문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책이에요.
기대하면서도 좀 두려워요.
그에게서 스승인 김훈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날까봐요.-,-;
(기우인가요?)

드팀전 2007-01-09 23:09   좋아요 0 | URL
걱정 안하셔도 될 듯 해요.스스로도 김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인정은 하지만 또 그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니까요...저널리스트적인 글쓰기 특징이 언뜻 보이는데 전 개인적으로 그런 글들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답니다.

잉크냄새 2007-01-16 17:12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 얼마전 읽은 <농담>이란 시에 이끌려 들어왔고 님의 리뷰로 굳히기 한판 들어가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드팀전 2007-01-16 18:01   좋아요 0 | URL
...글 내용중에 좀 중복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그냥 봐줍니다.^^ ..그정도야 하는 허용범위내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