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아직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았다.

  아무리 각종 단체에서 수 십년 동안 '필독' 이니 '100대 명작'이니 해도 돌아앉은 돌벅수처럼 끄떡하지 않았다. 필름을 이 십여년 전으로 돌려보자. '레드 썬.!!'

  고등학교 다닐때 사실 단테 표 <신곡>라면의 겉봉지를 뜯은 적이 있다. 요즘처럼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팔팔 끓는 날씨 속에서도 단테표 라면이 끓였다. 면발 넣고 스푸 넣고...그러나 뚜껑한번 열어보고 지옥문 닫히듯 '쿵' 닫아버렸다. <정석수학>과 <성문종합영어>의 익숙함이 차라리 나았다.  의고투의 말투와 발음도 안돼는 주석 속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은 최악이었다. 역시 '라면은 몸에 않좋다.'는 고금의 진리 되뇌이며 <신곡>과 돌아섰다. 내게 <신곡>은 DIVIINA COMMEDIA가 아니라 '신 한번 보려다가 곡소리나는 책' 이었다.

그리고 이제 " 우리네 생명길 한 가운데에서/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을 때 (도모노부 역)' 다시 <신곡>을 만나려고 한다. 단테 시대보다 인간의 평균 연령이 늘었을 테니 단테가 말한 '인생의 반고비' 가 물리적으로도  내 나이 즈음이 아닐까 한다. 이제 다시 단테의 <신곡>을 만날 용기가 생긴 것이다. (내 나이가 이제 그렇게 되어서 일지도)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는 <신곡>으로 가기 위해 먼저 만난 책이다. 어린 시절 한 번 채한 음식은 나이가 들어도 먹기가 꺼려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가르시아 효과'라고 한다고 들었다. <신곡>에 이미 데인 나 역시 조심스럽게 가고 싶어서 이 책을 고른 것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나처럼 <신곡>에 소화불량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소화제가 될 듯 하다. 물론 단테 전공자이거나 각종 서지분석의 대가들에게 이 책은 시시할 수도 있다. '뭐 다 아는 얘기를 하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강의에 직접 참가해서 질의 응답을 하던 일본의 노교수들의 겸허함 정도는 책을 읽고 배워도 될 듯 하다.

도모노부 교수 역시 단테 전공자는 아니다. 저자의 약력과 본문 내용을 살펴봐도 어림짐작 할 수 있다. 그는 철학전공이었고 주로 철학이나 미학관련 책들을 펴냈다. 그런 그가 단테에 대해 전문가가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 관심과 그에 이어지는 '토요공부법'에 의한 것이다. 철학 공부에도 빠듯했던 그는 스스로 규칙을 정해 매주 토요일 밤 3시간씩 단테와의 연애를 한다. <신곡>을 읽고 비교분석하고 정리작업을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오래 숙성된 개인적 노력의 결과이다.  

저자는 단테의 <신곡>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단테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베르길리우스를 먼저 말한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가 서사시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던 호머를 되짚어간다. 그러닉까 계보로 말하자면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 로 이어진다. 도모노부 교수는 서사시의 전통과 각 작가들의 차이점을 비교분석하면서 <신곡>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준다. 강유원의 <서구정치사상 읽기>라는 책에도 보면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의 문장을 비교하면서 시대적 에피스테메의 차이를 예로 드는 장면이 있다. 도모노부 교수의 분석틀과 거의 똑같다. 다른 책에는 과문하니까 이것이 일종의 서사시 전통을 해석하는 고전적인 방식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단테 신곡 강의>는 이렇게 호머와 베르길리우스의 그리스.로마문화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단테의 신곡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책 초반부에 이야기한다. 그리고 4번째 강의 부터 '지옥'으로 들어간다. 저자는 매 강의 도입부에 지난번 장에서 언급했던 것들을 복습하는 차원에서 정리해 준다. 너무 많은 내용으로 두서가 없어진 뇌세포들을 짧고 간단하게 줄맞춤해주는 셈이다. 도모노부는 단테를 대단한 문학가로만 평가하는 것에 반대한다.그가 평가하는 단테는 비록 실패했으나 현실의 정치가였으며 성찰적인 철학자이다. 시적 영감은 자기 개혁으로 이어진다.그리고 이것은 역사의 목적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사고의 원형을 형성한다. 도모노부는 단테의 이러한 사상이 비코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단테는 이제 지옥문 앞에 서 있다.

"영원한 것 외에는 나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 없으며, 그리하여 나 영원토록 서 있으리라, 너희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야마카와 역)

아주 유명한 지옥문의 자기 소개식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을 수 십번도 더 읽었다. 그런데 너무 좋다. 읽으면 읽을 수 록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것이 '고전'의 포스가 아닌가 싶다. 또한 단테 이후 동서양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을 읽고 감동하고 좋아했을 것을 상상하면서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는데 무한한 동류의식을 느꼈다. 내가 '고전'을 읽고 나면 뿌듯해지는 것 중 하나는 이런 황당한 상상력도 한 몫을 한다. 단테를 버나드 쇼도 읽지 않았을 까, 오스카 와일드도 읽었겠지,토마스만도, 카잔차키스도...햐...나도 그들이 본 걸 같이 보는구나. (우리는 같은 독자!!) 이런 생각들을 하면 인류의 위대한 인물들과 한 무리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주어서 무엇보다 흐뭇하다. (물론 다짜고짜 내맘대로 하는 상상이지만...^^ )  도모노부 선생은 지옥의 공간성을 이야기하면서 지옥이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의 상상이 고착화되서 지옥은 땅 속 깊이 천국은 하늘 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내게 '그건 아니지' 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단테가 뒤에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빛의 천국이야 나는 모르겠다만 지옥은 이 땅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인류가 겪어온 수많은 전쟁, 기아, 살육, 착취, 배신 등을 생각하면 지옥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단테는 '희망'에 주목한다. 즉 '희망'을 버린 모든 곳이 '지옥' 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별'을 '희망'의 상징으로 읽어서 천국,연옥,지옥에 나타나는 별의 이미지를 그때 그때 상기시킨다.

연옥편에서는 단테의 텍스트와 르 고프의 명저 <연옥의 탄생>(바람구두님의 리뷰를 본 적이 있다.)를 소개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세속적 질문들에 대응하는 방식들을 이야기 한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태어난 사람들과 태어나자 죽은 아이들의 사후심판같은 것들 말이다. 르 고프는 그런 문제에 대한 답변을 찾는 과정에서 13세기 이후 연옥 개념이 일반화된다고 말한다. 단테에게 연옥은 '불로서 정화하는 곳'이며 지옥처럼 완벽하게 닫힌 구조는 아니라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 열려 있는 곳으로 정의한다.

도모노부 선생은 <천국>편이 철학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이 많아서 <지옥>편에 비해 외면받는다고 아쉬워한다. 그가 보기에 단테의 궁극적 목적은 '천국'에 이르는 길을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을 잊고 과정의 흥미진진함만을 쫓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것인 셈이다. 단테는 천국의 진리를 인간의 진리 범주 밖에 두고 있다. 인간의 격과 신의 격은 다르기때문이다. <천국>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고등학교때까지 교회를 다녔던 삐딱한 교인이었기이 한결 이해하기 좋았다. 일단 내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신곡>에는 '인간의 희망과 의지가 우주를 움직이는 신의 사랑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 <신곡>가지고 고등학교 학생처럼 종교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면 그 신이 왜 그의 아들을 내려 보냈는지. 그리고 대속의 과정이 인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같은 것들에 대한 선이해는 필요할 듯 하다.

<단테 신곡 강의>를 읽다보면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낭독의 즐거움'의 문제이다. 단테의 <신곡>은 일종의 정형시이다. (로쟈님의 단테 페이퍼를 참고하시길..) 압운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랩에서 '라임'이라고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냥 저냥 이태리어 발음이야 대충 따라 간다해도 도저히 그 '운율'을 흉내내지 못하겠다. 책에는 '딴따 딴따'하면서 초등학교 음악시간처럼 몇 개의 예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 귀로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과연 이렇게 읽는게 맞나? ' 싶다. 누군가 멋드러진 이탈리아어로 읽어주는 몇 몇 구절을 들어보고 싶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좀 찾아봐야 겠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독도'와 관련이 있다. 단테와 '독도'라니 '소주'와 '야채 비빕밥' 같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일본 이기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일본에만도 단테 <신곡>의 번역본이 20여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것이 중역을 포함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쪽발이' 일본은 '밥통' 과 '자동차' 만 잘만드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인문 사회적 토대는 상당히 깊고 저력이 있다. 일본의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짝' 신고 '전자제품' 판 돈으로  문화 강국이 되었다는 식의 발상은 아주 저열하다. 그런 발상 머물고 있다면 '독도'를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요즘 기업에서도 인문사회학에 관심을 갖는 듯 하다. 기업들이 직원들을 위해 강좌를 열기도 하고 의식있는 직장인들도 관심을 갖고 그런 가보다. 그런 관심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결국 '말 잘 듣고, '돈 잘벌어 올' 예비 CEO들을 창출하기 위해 인문학이 '이윤창출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인상이 있어서 의심쩍은 눈빛을 거둘수가 없다. 인문학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저마다 다른 답들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제 단테의 <신곡>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던 <신곡>에 대한 '가르시아 이펙트'로 부터는 벗어났다. 그리고 덤으로 한줄 한줄 아주 천천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담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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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8-14 16:55   좋아요 0 | URL
"강유원의 <서구정치사상 읽기>라는 책에도 보면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의 문장을 비교하면서 시대적 에피스테메의 차이를 예로 드는 장면이 있다. 도모노부 교수의 분석틀과 거의 똑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유원씨가 이 책의 교정을 봤습니다. 저는 읽으면서 '인용'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시집
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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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윤제림의 시는 웃긴다. -그래... 웃긴다.

물론 이 시집에 어설픈 간판쟁이처럼 이름을 달아줄 몇 몇 단어들이 내 주머니 속엔 있다. 이 친구들이 서로 치고 나가겠다고 열 바짝받은 냄비 속 옥수수 마냥 각축 중이다. 하지만 간판을 팔레트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결국 한 두가지 주종을 이루는 색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웃긴다' 라는 경거망동한 단어를 그 주머니 속에서 뽑아 들고 말았다.

 도대체 웃기는 걸 '웃긴다'는 말 말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 까? 내가 홍길동도 아닌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 이라 부르지 못한데서야 말이 되겠나.

싸리제 너머/비행운 떳다//  붉은 밭고랑에서 허리를 펴며/호미 든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남양댁/소리치겠다.//  "저기 우리 진평이 간다"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 진평이가 몬다// ......<공군소령 김진평>

청소당번이 도망갔다/ 걸레질 몇 번 하고 다 했다며/ 가방도 그냥 두고 가는 그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괜히 왔다 간다"/ 가래침을 뱉으며/ 유유히 교문을 빠져나가는데 / 담임선생도 / 아무 말을 못했다. //.......<걸레스님> (중광 1935-2202)

안 우낀가? 나만 웃긴가. ^^

  마지막 시의 압권은 '담임선생도 아무 말을 못했다' 가 아닐까 싶다. 그 벙찐 선생의 얼굴과 세상만물의 모든 실을 끊고 교문을 나서며 '씨-익'하고 웃는 걸레스님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가?  일종의 니체적인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웃긴 시 한 편 더 보자. 길다.

1. 화장실 다녀오느라 일행을 놓친 할머니 한 분이/ 줄지어 늘어선 유치원 아이들을 헤치며/ 아무 버스나 기웃거립니다.// 노란 버스와 아이들 역시 동무 하나가 안 보이는 지/ 선생님들은 손나팔을 만들어 선창을 하고/ 아이들은 합창을하듯 따라 부릅니다. 코-끼-리!

2. 사람과 차들의 단풍숲을 헤치며/ 대열을 빠져나온 버스 한 대가 어중간히 멈춰 섭니다.// 좁다랗게 열린 차창 하나에 서너 명의 할머니들이 매달려서/ 합창을 합니다. 밀-양-댁! // 좁다란 차창을 빠져나온 꼬깃한 손수건도 한 장 다급하게 소리를 칩니다.

3. 밀, 양, 댁이 열심히 뛰어갑니다// 할머니를 태운 버스가 조심조심/ 사람과 차들의 단풍숲 사이로 길을 냅니다// 그 길 끝에 아이 하나가 서 있습니다 /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입니다// 코, 끼, 리입니다.   ... <관광버스가 보이는 풍경>

안 웃긴가? 안 웃기면 정말 당신은 과묵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메마른 사람이다. 컴퓨터로 글을 봐서 그럴지도 모르니 당장 시집을 사서 편안하게 '해우소'에 앉아서 읽어봐라. 당신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거다.

잡지에 글을 쓰는 평론가 신형철은 '시치미'의 어원에 장광설을 늘어 놓으며 윤제림의 전법이 '시침떼기'라는 것을 말한다. 앞의 세 시에서는 '진평이', '담임선생', '코, 끼, 리' 가 그런 '시치미'다. 그리고 이렇게 시치미 뚝 떼고 시인은 무리를 뒤로 하고 혼자 씩 웃으며 가는 거다. 윤제림의 시는 그래서 웃기는데 박장대소의 웃음이 아니다. 혼자 입을 실룩거리거나  입 한 쪽이 실에 의해 잡아당겨 진 듯 웃는 그런 웃음이다.

 거기까지 좋았다. 그런데 평론가의 글에서 그리고 저자의 약력에서 내가 윤제림이 '광고쟁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광고쟁이'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자본주의의 꽃' 아닌가 ? 내 전공도 이 쪽과 관련이 있어서 친구들 중에도 광고밥 먹는 사람들이 꽤 많다. 내겐 윤제림의 '시치미'떼기 전법이 요즘 유행하는 광고수법과 거의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좋다는 의미도 나쁘다는 의미도 아니다. 웃긴다는 의미다.^^ )  TV 광고에서 '유머'는 중요하다. 이런 유머를 만들어 내는 방식 중에 하나가 끝가지 그 광고 비밀을 움켜쥐고 있다고  마지막 한 두 컷에서 폭로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볼까... 도서관에서 책고르는 것 만큼 너무 많아서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데...최근 광고중 영화배우 김수로의 '해드뱅잉' CF 떠올려 보자.(잘 모르겠으면 검색해서 보시라.) 김수로가 딮 퍼플의 <SMOKE 0N THE WATER>에 맞추어 무아지경 상태에서 해드뱅잉을 한다. 잘도 한다. 날라리 논 가닥에 제대로 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주변 사람들이 김수로를 쳐다보고 있다 (자막: 지치시죠?) 김수로는 해드뱅잉을 한 것이 아니라 과하게 존 것이다.  그리고 '활력 발효유...000" 마지막에 한방 김수로의 애드립이 결합된다. 쪽팔리니까 빨리 나가려고 옷을 입다가 거꾸로 걸치고 나간다. 15초 안에 반전이 이렇게 일어난다.

윤제림의 시를 계속 읽다보면 끝에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다리게 된다. 이게 관성화되니까 마치 해외 유명 TV광고 모음전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이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하나의 반전이-내 말로 '반전'이다- 있다.

그의 시에는 웃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는 평론가 이홍섭의 화엄세간론을 빌자면 부처님의 옅은 미소 속에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뜻하면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시를 광고와 달리 조금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반전이다.(앞의 세 편의 시도 웃음속에 짠한 무언가가 있다.) 이 범주는 우리의 촌정서에서 비롯되지만 지엽적인데 머무르지 않는다. 더 넓은 세상과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말이다.

낡고 지친 고깃배가 도망을 치면 얼마를 가랴.해경 순찰함에 끌려 배 들어온다. 목포항구 중국 배 하나 들어온다. 이 배엔 누가 탔나. 연변서 온 이가 박가. 길림 사는 최서방. 이룡강서 나온 장소저...갑판 밑에서 탄식하며 기어나오는데. 천리 뱃길 허사로세. 용궁 꿈도 헛꿈이로세. 어이 돌아가리. 빈손으로 어이 가리.  ...(중략)... 어린 처녀 하나 유독 슬피 우는데, 아이고 아버지 불쌍한 우리 아버지. 이렇게 소리 높여 제 애비만 찾으며 울더라.       ...<심청가>

절묘하지 않은가. 광고 전법은 이렇게 사회적 맥락과 이어지면서 강한 효과를 발휘한다. 거기에 '심청전'이라는 우리 고전과의 접목이라니...울림이 있는 시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예전에 봤던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선박 회사에 사기를 당한 조선족들 말이다. 꽤 오래 부산항에 억류되어 있었다. 상륙하지도 못하고 본국 송환까지 비참함 생활 속에 있었다. 브로커에게 돈 탈탈 털어 한국에 건너 왔을 텐데, 한국땅을 코 앞에 두고 땅을 밟지도 못했다. 브로커는 이미 도주했고 단 한 푼도 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경찰도 딱한 사정을 이해하지만 법적으로 돌려 보낼 수 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윤제림은 그 안에서 심청이를 본 것이다. 비슷한 시를 또 보자.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을 잃고/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 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에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손목 한 짝을 흘렸네/ 몇 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 아직도 여덟 살처럼 깊고 맑은데/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중략)

어찌할거나 어찌 집에 갈거나/ 제 손목도 간수 못 한 자식이// 제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 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 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 테지/ 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찾아보세나 사람들아...(중략)....걔 엄마 아버지한테 보이기라도 해야지/ 장갑도 아니고/ 손목인데.//

이제 웃음은 입꼬리를 내린다. 내가 사랑한 윤제림의 웃음은 이런 것들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빛이 난다. 구재 런닝이 새 런닝보다 빛날 때가 있다. 건강한 땀이 만들어낸 초코렛빛 피부 위를 살며시 덥어주고 있는 구재 러닝은 표백제 냄새를 풍기는 새 런닝보다 훨씬 더 하얗다.

얘야, 이 사진 좀 보아라/ 엄마가 한국으로 돈 벌러 갔을 때란다/...모처럼 쉬는 날이라서/ 우리나라 사람들 열 댓명이 놀러 갔었지/ 아주 유명한 절이었다.

절 이름? 뭐더라. 엄마도 찾아봐야 알겠다// 네 아빠가 사준 것이라서/ 한 번도 안쓰고 넣어둔/ 수건 한 장.// 여기 있다/ 풀. 국. 사 관광기념

그래./ 엄마가 지금 네 나이에 돈 벌러 갔던/ 먼 동쪽 나라의/ 늦은 봄날 오후였다/ 풀. 국. 사였다.

.....<풀국사>

좀 심각해진 것 같으니, 다시 웃으며 끝내자. 아...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더. 윤제림의 몇 몇 시에서는 하이쿠의 짧은 향기가 나기도 한다.

 리뷰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시의 제목은 <춘향가>...더운 여름에 윤제림의 <그는 걸어서 온다>로 한 번 살짝 웃어주자. 운주사 와불들 처럼...끝.

부여중학교, 오늘도/ 이층 창가에 서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여선생을 이기려면//

나는 아무래도, 여기/ 표 파는 여자나 되어야 할까봐요./ 정림사지 오층석탑/ 당신을 흔들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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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7-18 22:50   좋아요 0 | URL
좋은 소개 감사합니다. 해우소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읽어내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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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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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의 손아귀에 있다.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 <산 일데폰 소야곡> 중에서..
.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딜때 마다 흑진주 빛 코울타르 위를 걷는 마음이었다. 곤충을 유혹하여 생의 마지막 숨결을 앗아가는 거대한 식충 생물의 위장 , 책 장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것이 그 위액을 덮어쓰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책의 겉표지가  끈끈이 주걱의 거대한 아가리였던 셈이다. 이미 하얗게 벌린 입 속으로 들어온 이상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식충 식물의 진액 속에서 화사한 봄 날을 상상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지옥보다 더 큰 '지옥의 추억'이다.

코맥 맥커시의 <로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 온통 지구가 잿빛으로 변했는지, 왜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왜 까마귀가 없는지, 왜 곡식들은 밑둥만 남고 말라버렸는지... 이 불친절함과 하드보일드한 문장들은 대가의 아우라가 주는 차가운 매력이다. 조각가 자코메티의 움직이는 사람들을 글로 만나는 듯 문장과 단락들을 포정의 칼 솜씨로 뚝뚝 잘라내는 매커시의 능력은 그의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무뚝뚝하고 뼈만 남은 문장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살덩어리들이 문장들을 꾹꾹 채우고 있다.

매커시는 '지구 최후의 날'-정확히는 '인류 최후의 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단 한 문장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인류 최후의 날'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커시의 디스토피아를 유추해 볼 수는 있을 듯 하다. 그의 시대에는 '3차 세계대전'이니 '핵전쟁'이니 하는 말이 일상적인 공포로 작동할 수 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말들은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진부한 것이 되었다. 대신 '지구온난화',(영화 '투모로우) , '치명적 바이러스' ( 영화 '지구 최후의 날', '둠스데이') 같은 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30대 이상의 세대에게 그것은 SF적인 상상력이면서도 언제나 '실존'하는 공포의 하나였다. 영화 < 그 날 이후>와 <요한계시록>의 '불로써 심판하는 하나님' 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이 하나의 팔레트 위에서 섞이던 시절이었다. 매커시의 주인공들이 역시 '핵전쟁' 이후의 세대처럼 그려진다. 햇빛을 포함한 모든 빛들이 잿빛 안개 속에서 희미하다. 식물들도 동물들도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바다는 이미 검은 폐유처럼 변했다. 핵겨울을 연상시키듯 비와 눈이 시시 때때로 엄습한다.

'인류 최후의 날' 이후 두 남자가 남는다. 아버지와 아들. 나는 감정이입에 아주 능란한 작자여서 그런지 소설의 설정 자체부터 가슴이 쿨렁 내려앉았다. 절망적인 길을 가는 두 남자와 화분 가에서 일일초를 바라보며 연신 방긋거리는 우리 부자를 같이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소설을 소설답게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학문하는 자로서는 치명적이겠으나 소설읽는 자로는 오히려 긍정적인 상황일 수도 있다고 위안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인류 최후의 프로메테우스'들을 보면서 몇 번이나 책을 내려 놓아야 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내려 앉은 가슴을 손으로 더듬 더듬 찾아서 다시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아야 했다.

공포는 공기처럼 가득하다. 단 한 순간도 단 한 공간도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공포는 때로는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 잠자는 순간에도 찾아온다. 세상에는 그들 말고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 '살을 먹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런 재앙의 원인제공자도 아니고 재앙을 이용해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무리들도 아니다. 인간과 야만 사이에서 생존의 이름으로 '살을 먹는자' 들로 떠도는 것이다. 마치 영화 <매드맥스>나 영화<둠스데이>의 생존자들처럼 말이다. 물론 영화 속 무리들처럼 <로드>의 무리들은 중무장을 하지도 조직화되지도 않았다. 그저 생존을 위해 무리를 짓고 무리 중 죽은자가 생기면 먹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될 사람들도 그렇게 처리할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냐?" 고...부디 당신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남자는 공포와 존재론적 절망 속에서 죽음에 대한 유혹을 가까스로 참아낸다. 죽음은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영원한 '무'를 가져다 줄 것이다. 차라리 그 영원한 '무'에 이르러야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죽음과 자기 사이에 그가 살려내야만 할 한 아이가 있기때문이다.

아이는 여러번 묻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인가요?" ....남자는 "좋은 사람이야" 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그런 확신을 할 수 없다. 그는 아이를 보호하고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훨씬 더 복잡한 그물 속에서 발바둥쳐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자는 약탈자 무리 중 한 명을 처치해야했고 함께 가기에 짐이 되는 아이를 길에 내버려 두어야 했다. 길에서 만난 눈 먼 노인을 그냥 지나치려했고 그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에 대해 언쟁을 해야 했다. 소설 속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고 가장 절박한 것은 배고픔이다. 이 둘 사이의 변증법은 홉스가 인용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 구약 욥기의 '리바이어던'의 시대가 우리에게 체현된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공포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다보면 얼음비를 맞은 것처럼 온 몸이 오싹 거린다. 하지만 이런 긴장감은 책읽기를 힘들게 한다. 그 때쯤 되면 매커시는 지하 벙커의 풍족한 먹거리를 주인공들에게 제공해서 독자까지 그런 텐션으로 부터 이완시켜준다. 공포 영화에서 쫓고 쫓기는 장면 뒤에 나오는 아침 장면 같은 그런 긴장의 이완말이다.  

아이는 묻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인가요? "   

선(善), 우리가 원한 것은 선이었다.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것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
선을 원했던 우리 역시 결백하지 못했다.
계율과 개념,
              신학자들의 오만함.
십자가가 몽둥이로 변하고,
                사람들의 피를 제물로 바치며,
죄악의 벽돌로 집을 짓고,
의무적인 성찬의 전례를 공포하는 것.

                                      옥타비오 파스 <산 일데폰 소야곡>

하지만 소설 <로드>는 처음부터 이 소설이 이렇게 고생만 진창하다고 끝나지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두 남자는 자신들을 스스로 위안하며 '불을 운반하는 사람' 이라고 말한다. 신화는 말해주지 않던가? 불은 운반하는 사람은 그 불을 인류에게 전달하는 소임을 마친다.  지금 우리가 불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고 있는 것이 그 예가 아니던가. 유럽 고성에서 기어나온 유럽작가들의 디스토피아가 영구순환적인 디스토피아에서 끝난다면 헐리우드도 사랑한 이 미국 대가는 애초부터 '희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긴 우울 속에서 몇 번을 책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그들의 품 안에 불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추동력이 되었다. 십 만 번의 절망 속에도 단 한 번의 희망이 있다면 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힘' 아니던가?

여기서 끝으로 가기에 앞서, 소설 <로드>의 속의 긴장감과는 다른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서 잠깐 생각해본다. 그것은 '총'이다. 소설 속에서 '총'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이다. 이것은 다분히 미국적 환경에서 나올 수 있는 미국적 소재이다. 주인공은 애초에 세발의 총탄을 가지고 있다. 한 발은 자존감을 위해 여자가 써버렸고 또 하나는 주인공이 가족의 보호를 위해 썼다. 주인공은 항상 아이와 떨어져서 염탐해야하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총을 준다. 적을 죽이라고 주는 것이 아니다.소설 속에서 아버지가 아이에게 목구멍 깊이 총구를 넣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식에게 자살하는 방법을 알려주어야만 하는 그 심정은 다른 말이 필요치 않을 만큼 절절하다. 또 한편으로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서 죽음의 공장 앞에서 카토프의 선택 같은 희생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카토프의 선택보다는 쉬웠을 것이다. 아버지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기때문에. '총의 소유'는 이 곳에서 '힘'의 소유,'안전의 소유'와 상당히 연관깊다. 약탈의 무리들 역시 제대로된 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스포일때문에 조심스럽다.) 작가는 '산탄총과 탄창'이라는 진보된 총을 한 번 언급함으로써 독자에게 단기적이지만 미래에 대한 모종의'안도감'을 선사한다. 흔히 매커시를 서부 개척시대라는  통속소설의 주제를 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로드>에서 등장하는 디스토피아 역시 서부 개척 시대의 무법 상태와 비슷한 판형이다. 또한 미국 수정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무기 사용'에 대한  '자유주의적 접근' 역시 미국적 정서에 바탕을 둔 부분이 있다.소설은 한편에서는 유럽의 신화적인 디스토피아에서 아이디어를 빌어오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미국적 도판들이 또 인용되고 있는 셈이다.

소설<로드>에서 아이는 '우리가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지 않아야 함' 을 계속 상기시킨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눈먼 노인에게 아버지는 '만약 이 아이가 신이라면 어쩌겠습니까? "라고 묻는다. 인간의 아이는 신이 사라진 시대에,인간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홉스적인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인간'이다. 아무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 <로드>속의 세상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이는 신뢰할 수 없는 인간 만큼이나 우리들처럼 좋은 사람이 있다는 하나의 희망에 대해 놓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지만 또 인간을 믿지 않고는 인류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역설이 여기서 작동한다. 험난한 여정을 마치면서 노작가는 온몸을 다 던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이 살아 있다면 인류는 아직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본다.

우리도 그들 처럼 '길'의 중간에 멈춰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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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윌리엄 케네디 지음, 장영희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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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는 LED 옥외광고 간판처럼 이름을 수시로 갈아입는다.이 책의 원제목은 'Ironweed' 이다. 이 책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는 '억새인간' 이었다고 한다. 20여년전 일이다.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잭니콜슨 주연의 영화<ironweed>의 한글제목은 '엉겅퀴 꽃'이다.장영희 교수는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라고 예감있는 제목을 달았다. '억새인간' 이나 '억새풀' 보다는 나은 제목같다. 원제목인 <ironweed> 자체가 외설적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좀 숨기는게 있어야지 에로틱이 될 터인데 '노숙자=억새풀' 이란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인 상징작용이 왠지 탐탁치 않다.

원문과 비교해서 읽는 수준은 못되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 뭐라고 할 만한 위치는 아니다.그러나 장영희 교수의 번역이 비교적 매끄럽게 읽히는 것은 사실이다. 윌리엄 케네디의 문장이 갖고 있는 위트와 유머러스함을 표현해 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이 느껴진다. 인문사회 서적이 아닌 문학 책의 번역에 있어서도 가끔은 한국어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들을 경험한다. 그런 마당에 작가가 가진 문장의 깊은 속내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때가 많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한국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을 준다.  

이제 조금 삐닥하게 나가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왜 '퓰리처상'을 받았고 또 '20세기 영문학 100선'에 들었는지 의문이다. 식견 높은 분들의 견해이기 때문에 수상을 취소하라고 일인 시위를 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 일이니까 공소시효도 지났다. 이 소설은 내게 그저 그랬다. 잭 니콜슨의 얼굴만 잔뜩 떠오른다.나는 영화를 보진 못했다.그렇지만 스틸 사진 몇 컷으로도 잭 니콜슨이 주인공 프랜시스를 덮어 버린다. 꽤나 어울리는 캐스팅이었음에 틀림없다.  영상 이미지의 전제성이 문자를 장악해버리는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책의 문장들이 갖고 있는 뛰어난 유머와 삶을 통과하는 서걱거리는 재미들이 헐리우드식 결말로 가기 위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질 때이다. 이 책의 인물들과 인물들 간의 관계,그리고 장치들은 전형적인 헐리웃표다.'돌아온 탕아,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기다." 

이 책이 퓰리처상을 받은 해인 84년은 레이건의 시대이다. 카우보이 정부 밑에서 '레이거노믹스'와 '강한 미국' 이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70년대 미국을 교란시킨 유약한 진보의 시대가 문을 내리고 전통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건강한 미국의 상징인 '가족주의'로의 복귀였다. 모든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근간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그런 흐름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죄책감으로 떠돌던 주인공이 결국 따뜻한 가족의 품에서 불안한 행복을 얻는 결론은 그런 상관관계를 자꾸 떠올리게 한다.이런 스토리야 말로 소시민의 감수성을 젖게하는 전형적인 '잔잔한'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 메뉴 아니던가? 싸가지 없는 부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된다던가, 재능은 있지만 사고뭉치 운동선수가 동료애를 통해 하나로 된다거나.....이 모든 것들이 '통과의례'의 형태만 달리했지 상징적인 '가족'의 이름으로의 통합을 목표로 한다. 그게 뭐 딱히 나쁘냐고?  길게 토론하면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그렇지만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말하자.나는 이런 스타일에 지루함을 느끼는 취향을 가졌다.

도대체 처음과 마지막에 바람처럼 왔다가 들꽃처럼 사라진 루디는 왜 그렇게 억지로 나와야 되는지? 그의 우발적인 죽음에 '그는 은하수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었다'라는 키치적인 답변은 무슨 코미디인가? 프랜시스의 귀가를 위해 반드시 사용되어야 하는 소품처럼 루디와 헬렌은 죽는다. 모텔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헬렌이 가진 영혼의 고귀성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장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녀가 떠돌이가 되기 훨씬 전,사랑에 배신 받기 훨씬 전,그녀의 마음을 영혼을 휘감았던 곡. 작가는 이 곡을 통해 너덜너덜한 부랑아 헬렌의 삶에 빛이 있었고 그 빛을 안고 가게끔 만든다.(왜? 그래야 우리가 덜 불편하니까..) 죽음의 순간에 헬렌은 부랑아에서 성녀로 뒤바뀐다. 베토벤LP와 가지런히 펼쳐진 머리칼 등은 헬렌을 고귀한 영혼으로 만든다.가련을 넘어 숭고로 넘어가려는 의도가 너무 직접적이다.

나는 이 소설을 사회적 관점에서 노숙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지는 않는다. 실제 그들은 5미터 밖에서도 냄새가 난다. 물론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탈취 되었다. 탈취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탈취됨'으로 우리가 그들이 가진 영혼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탈취됨'으로 인해 노숙자로서 그들의 존재는 무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실재 이 인물들에게 냄새가 난다면 이것은 르포타쥬가 될 터이지 소설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불만을 갖지는 않으련다. 탈취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영혼과 접촉했다면 이 아니 좋을쏘냐....다른게  '키치'가 아니다.

내게 이 소설에서 두 가지 인상적인 것은 '야구'와 '죄책감'이다. 프랜시스의 과거를 구성하는 두가지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새로 사서 얼마 쓰지 않았던 야구 글러브가 다시 만저 보고 싶어졌다. 아직 집에 고이 모셔 놓고 있다. 그 글러브로 공을 받고 던지고 해보고 싶어졌다. 다른 하나는 '죄책감'이다. 나는 원래 이 리뷰를 쓸 때 '리뷰' 대신 그 '죄책감'에 대해 쓰려고 했다.

 만약 비오는 어제 이 리뷰를 썻다면 나는 식모 '정금'이와 관련된 나의 '죄책감'에 대해 썻을 것이다. 책에 대한 지루한 이야기는 몇 줄로 압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의 관음증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리뷰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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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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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짧은 소리로 '쎄울.." 이라고 외쳤던 것이 27년 전 일이다.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시간이 아무리 빠르다고 하더라도 27년 전이라니.갓 태어난 아기가 애아빠될 시간이다.하기야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88 올림픽 굴렁쇠 소년' 기억나며고 물어보면 '잘 모른다'는 대답을 많이 듣는다.지금 대학생들이 한 두 살 먹었을 때 올림픽이 열렸으니 '호돌이'를, '굴렁쇠'를 알 턱이 없다.그들은 가끔 TV자료 화면에서 '서울 올림픽'을 봤다고 말한다.

뜬금 없이 사마란치와 서울 올림픽을 떠올린 곳은 그가 '쎄울'을 외쳤던 곳이 '바덴바덴'이기 때문이다.이 책의 주인공인 전설적인 토스토예프스키가 향하는 곳이기도 하다.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에는 서로 다른 두 여행이 교차한다.이 두 여행은 서로 만날 수 없다.시간과 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다.한 여행은 바덴바덴을 행하고 또 다른 여행은 100년쯤 후에 샹테페테르부르크를 향한다.

러시아를 떠날 수 없었던 의사 치프킨이 '나'가 되어 소설 속의 화자로 등장한다.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흔적을 찾는 여행자이다.소설은 화자인 '나'의 이야기와 실제 회고록에 도움을 받아 재구성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재구성한다.소설가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또 소설의 대상이 소설가인 셈이다.작가 치프킨은 영원한 동토의 빙하 속에서 신비롭게 잠들어 있는 거장 토스토예프스키에게 훈기를 불어 넣는다.그의 훈기를 받은 토스토예프스키는 '못말리는' '어처구니없는' 또한 '슬프고도 아픈' 한 피조물이 되어 책 장 사이를 넘어 다닌다.살아난 토스토예프스키는 도박장을 뛰어 다니고 아내에게 돈을 구걸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질투로 반쯤 실성을 하고 유형지에서 겪은 모멸감에 치를 떤다.그 뿐이 아니다.세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평론가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또 그들의 무관심에 발끈하여 팔짝 팔짝 뛰어다닌다.때로는 자기를 학대하고 때로는 자기의 자만심에 뿌듯해 한다.

나는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이런 인물들이 좋다.분열적인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뭐라 한가지 잣대로 잡아 넣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들 말이다.물론 '명명백백' 정도만을 걷는 인물들을 만나면 그에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다들 옮바르고 인간을 초월한 듯한 의지를 보여준다.다들 의지들은 얼마나 강한지...거기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업적까지 보태지면 모두 모두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춘다.문제는 대개 그런 인간들이 좀 심심하고 그걸 떠받드는 사람들도 심심하긴 마찬가지라는데 있다.

재미있는 인간들은....그러니까 밀로스 포먼의 영화<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같은 인간들이다.또 영화<불멸의 연인>,<카핑 베토벤>등에 나오는 '괴팍한 노인' 베토벤 같은 사람들이다.연암 박지원 같은 노인네들도 재미있지 않은가?  미셀 푸코같은 인간들 흥미진진하다.시대의 바람둥이이자 죽음과 늘 손잡고 다니던 로버트 카파같은 사람들은 어떤가? 또 전장에서 시집을 읽어 대던 핸섬가이 체 게바라 같은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리타분한 양반들은 이 '뒤틀림'의 재미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바른 생활 사나이들...^^ 아주 바람직하거나 뒤돌아서면 진상이거나 둘 중에 하나는 할 것 같다. 

하여간 소설<바덴바덴에서의 여름>에 등장하는 토스토예프스키는 '어처구니'없는 남자이다.그의 '어처구니없는' 반복되는 행각들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아이같다고 해야 하는게 딱 맞다.다괴팍하고 가련한 러시아인은 거기에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하다.정치적 옯바름을 이야기해야한다면 토스토예프스키는 '꽝'이다.작가 치프킨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유태인이다.이런 딜레마를 두고 치프킨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질문을 던진다.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답변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조금은 뻔하고 날카로움을 잃은 답변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책에 대한 소개에서 이 소설이 러시아 문학 전통에 대한 두 가지 논쟁을 재현한다는 글을 읽었다.뭐 대단히 어려운 내용일 수도 있지만 상식선에서 말하자면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의 갈등이다.이건 러시아의 모든 예술장르와 일상영역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러시아의 변방성과 독자성 사이의 밀물과 썰물같은 갈등이다.치프킨은 이 책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투르게네프의 대립으로 이 두 기둥의 이야기를 건넨다.그리고 시대를 훌쩍 넘어 이 영상은 솔제니친과 사하로프의 대립구도로 형상화된다.이런 대립 구도는 만들려고 하면 근대 러시아 예술의 지형도 속에 전부 넣을 수 있을 법도 하다.환원론의 오류를 범하겠지만 말이다.소설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서구파 투르게네프에게 가급적 잘 보이려고 애쓴다.그렇지만 욱하는 그가 투르게네프의 은빛 안경 너머의 조롱에 찬 눈빛을 계속 견딜 수는 없었을 것이다.

"파리에 가서 망원경을 하나 사서 그걸로 러시아를 자세히 보시지요"

소설 속에서 투르게네프는 권력과 부가 있으며 예의 바르고 신사답다.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도박꾼에 가난하고 적당히 비굴하다.거기에 컴플렉스 덩어리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직접 만난다면 누구를 더 좋아할까?

이제 우리는 보험 드는 셈치고 실제 도스토예스스키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좀 너그럽게 봐주자.그가 언젠가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가 있는 '돌아이'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실제 투르게네프보다 토스토예프스키가 더 유명하지 않은가? .

도스토예프스키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용서빌고 후회하고 섹스하고 질투하고...휘청거리고 잘난 척하고....그림을 보고....글을 쓰고....도박을 한....인간아.당신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책 서문에서 수잔 손택은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가르켜 '지난 한 세기의 소설과 범소설(parafuction)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창조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가장 아름다운 성취인지는 모르겠으나 재미있는 작품은 확실히 맞다.

요즘 모 항공사에서 러시아 취항 광고를 하던데....

액설런트 인 플라이트....러시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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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5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02-25 15:51   좋아요 0 | URL
ㅜㅜ 맞아요.염장성이에요...
저도 (구)레닌 그라드에 가고 싶어요.샹트 페테르부르크....

2008-02-26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02-26 12:45   좋아요 0 | URL
맞아요...맞아.뺄셈을 잘못했군요..^^ 수정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