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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책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을 떠올렸다.그 영화는 포스터가 유명했다.멀리서 유학온 친구들 하숙방 마다 하나 씩 걸려 있던 기억이난다.얕은 강물과 짙은 녹음,그리고 탱고 무희처럼 날렵하게 날아오른 낚시줄... 그리고 브래드 피트.요즘은 아내와 함께 아시아 아이들 수집하는 취미가 생긴 그이다.많이 쭈그러졌다.그러나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올 때만해도 그는 아름다왔다.미국인의 이상형이라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후계자가 될 만 했다.특히 영화 속에서 자연과 물아일체된 그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스스로 풍경이 된 동생 브래드피트의 낚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감동먹었던 형의 나레이션이 생각난다. 브래드 피트가 예뻐서 더 예쁜 낚시 장면이었다.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의 여유로움을 생각하며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는다면 정확하게 10센티미터 바늘에 낚인 것이다.<미국의 송어낚시>에서 저자는 전원을 그리워 하지만 영화처럼 그림 같은 전원의 모습은 책 어느 구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오히려 기계,폭력,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둥둥 떠내려가는 송어 만이 나올 뿐이다.그러니 소설 속에서 통속적인 낭만과 여유로움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제목에 속아서 낚이지 않는게 좋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결코 읽기 편안하지 않다.우선 이 책의 구성은 파편적이다.2-3장 정도 분량의 짧은 연작소설이 이어진다.대략 50개의 짧은 장마다 소제목이 있다.물론 앞에 나왔던 이야기가 몇 마을 건너 또 언급되기도 한다.1000피스 직소퍼즐이 마룻 바닥에 마구 흩어진 듯 소설이 쓰여져 있다.읽다보면 어느 정도 맞추어지기는 하지만 전체의 그림을 다 맞춘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프랑스 영화사에서 '누벨바그 시대' 프랑소와 트뤼포와 같은 작가들이 실험한 ' 점프컷'과 비슷하다.남자와 여자가 뽀뽀를 하는 로맨틱한 장면이 나오려는데 갑자기 다음 장면은 광산 노동자의 일하는 씬으로 구성되는 그런 것들이다.몸에 배인 관습에 배치되는 구성이어서 난망하다.그런데 이 난감함 속에 의미가 발생한다.이 책<미국의 송어낚시>역시 이런'점프컷'들을 다닥 다닥 이어 붙여 놓은 것 같다.그래서 결론이 무었이냐 ? 줄거리 찾지 말라는 이야기다. 줄거리를 찾아내려고 하면 본인만 힘들다.작가가 처음부터 3분 라면처럼 딱 떨어지는 소설 형식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부디 소설을 읽으면 10줄 정도로 소설의 줄거리를 꼭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도 '송어낚시' 바들에 낚이지 말길 바란다.물면 아프다.
이 책은 다양한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책을 이끌어가는 힘이 상징과 은유다.그런데 이것들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빨간 버버리코트는 연쇄살인마의 표적'이란 식의 통속적 은유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책 제목에서 부터 '미국'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되듯이 즐겨 사용되는 상징과 은유들을 이해하려면 미국 문학,역사,문화 등에 익숙해야한다.그런데 미국인도 전부 다 알 것 같지는 않다.예를 들어 이 책에서 거짓된 아메리카 드림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생각해보자.작가가 그를 거짓된 꿈의 환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한 프랭클린은 그냥 미국 역사 태동기의 선구자쯤으로 여기고 넘어가기 쉽다.기존 체제에 불복하는 자유롤운 공간으로 제시되는 '모래상자'도 그렇다.아이가 노는 '모래상자'를 '탈주공간'으로 이해하려면 꽤나 많은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귀찮아도 책 뒤에 나오는 역자의 친절한 설명문에 기댈 수 밖에 없다.거의 매 장 마다 앞과 뒤를 오고 가야 하기 때문에 뒤쪽 친절한 보충설명란에 책갈피를 하나 꽂아 놓고 보는게 덜 귀찮다.또한 소설의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4년 역자가 작가와 나눈 인터뷰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브라우티건은 비교적 자세하게 자신의 문학관과 <미국의 송어낚시>가 가진 소설적 의미와 소설이 탄생하게된 배경에 대해서 쓰고 있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이런 류의 영화가 대개 좀 난감한 면이 있는데 가끔 혹하는 마음에 보면 또 아주 신선한 재미가 있다.이 소설은 1967년에 나왔다.이 시점은 20세기 서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점이다.히피,마약,베트남전,인권 행진,유럽의 68혁명 등등... 소설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작가 역시 사이키델릭한 짐모리슨의 음악을 들으며 마약을 한대 멋드러지게 맞고 펜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최소한 마리화나 정도는 깊에 빨아 들였을 것이다.소설 속 상상에 마약의 중독적인 향기가 배어있다.뽕의 뒷 맛은 그래서 가끔 구질 구질,상상 초월의 설정들을 만들어 낸다.아내와 강가에서 정사를 나누다가 질러버린 정액이 부패한 송어들과 둥둥 떠다니는 작가의 상상에 구역질이 날만한 바른생활 선남선녀들도 이 책에 낚이지 않길 바란다.
정작 중요한 이 책의 주제는 무엇일까 ? 대략 느끼려고 했으나 브라우티건이 인터뷰에서 한 줄로 정리해준다.생각하기 싫으니까 그냥 인용해보자.
제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가 상실,비탄,목가,향수,탐색으로 이어지는 것도 거기에 있습니다.제 소설의 주인공들은 잃어버린 '미국'을 찾아 방황합니다.
그리고 주인공 찾기 강박증에 걸린 독자를 끝까지 괴롭히는 이 책의 주인공에 대한 것도 언급한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사랑도,장소도,책도,꿈도 그리고 작가의 펜촉도 될 수 있는 무형의 것입니다.풍요를 상실한 현대의 불모지에서 부재하는 인간의 정신,꿈,미국을 탐색하는 작업은 언어의 유희나 알레고리 패러디나 농담으로 이루어집니다.현대의 악몽적인 상황하에서는 언어와 아이디어와 내용 사이에 단절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옮겨 놓고 보니 모두 여섯 줄이다..사실 이 여섯 줄이 <미국의 송어낚시>를 참고서에 싣고 싶은 출판업자가 그렇게도 찾는 문장이었을 것이다.또한 엉킨 실타래를 ?다가 절반 포기,절반 짜증에 혼합된 사람들 역시 찾고 싶었던 말일것이다.소설의 주제,작품의 구성,언어표현의 방식까지 다 적혀있다.
이 책에서는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현대인의 상실감,자연과 공존하지 못하는 소외,죽음에의 공포,자본주의의 폐해 등이 송어낚시라는 이름으로 뒤섞인다.어떤 때는 송어낚시가 주체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읽다보면 곧 '송어낚시'가 어떤 행위나 어떤 인물이 아님을 알게된다.작가는 이 뒤죽박죽 혼합을모든 것이 떠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떠있는 물방울들이 이 녀석하고도 붙고 저 녀석하고도 붙고 또 조금 있다가 흘러서 떠내려가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속성은 비자본주의적 요소를 자본주의화하면서 성장한다고 한다.태생이 먹깨미 귀신같은 놈이다.이 유령은쌩까는 성격이 있다.자신이 쓸고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지 않는다.곶감만 빼먹고 씨는 아무렇게나 버려놓는 몰염치한 친구다.자본주의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발전과 개발은 언제나 치워지지 않는 또한 치유되지 않는 배설물들을 남겨놓았다.그게 폐선장이고 폐차장이다.이 페선장과 폐차장에는 산업사회의 쓰레기만 가득하다.미안하게도 거기에 인간들도 갖혀있다.인간이 만든 역사에 인간이 갖힌 것이다.한자로 짧고 굵다.자승자박,자업자득...이 폐선장의 쓰레기들은 넘치고 넘쳐 강을 바다를 산을 덮는다.인간의 역사 발전만큼이나 도도한 흐름이다.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는 이런 디스토피아에서도 작은 희망을 이야기한다.송어낚시 쇼티를 외면하고 프랭클린 동상앞에서 모래상자와 노는 아이들 처럼 말이다.
천국에서도 브라우티건은 마리화나 한대 깊이 빨면서 송어낚시를 하고 있을 것 같다.씨익 웃으며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