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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평점 :
안개 낀 도시는 새로운 세상이다..안개는 사물들의 공간배치를 낯설게 한다.바로 앞에 있는 사람만 겨우 식별할 수 있다.저 멀리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린다.하지만 그의 모습은 한번에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처음엔 검은 그림자일뿐이다.점점 윤곽이 짙어진다.수채화를 그리는 붓터치처럼 시간과 공간이 중첩시켜놓은 막을 뚫고 대상은 선명해진다.얼굴,눈,코,입....안개가 만든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은 과거에 알던 사람이 아니다.주변을 지워버린 공간이 대상의 느낌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마치 흰색 도화지 속에 그와 내가 갇혀 있는 듯 하다.
아우구스토 페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심한 고통이나 큰 기쁨에는 굴하지 않습니다.그러한 고통과 기쁨은 사소한 사건들로 구성된 거대한 안개 속에 감추어진 채 닥치기 때문입니다.인생이란 이런 것이다.안개같은 것.인생은 구름같이 모호한 것이다."
.<안개>의 스토리는 가랑비가 오는 어느날,아우구스토가 거리에서 에우헤니아를 발견하고 쫓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그녀는 독립적이며 현실적인 피아노강사이다.한눈에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그녀의 고모를 통해 그녀를 쟁취하려한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마우리시오라는 게으른 애인이 있다.관념적인 사랑을 하고 있던 아우구스토는 세탁소 직원인 로사리오에게 자신의 좌절된 욕망을 해소한다.주인공은 관념속에서 에우헤니아에 대한 사랑의 불을 키운다.자신이 가지지 못한 열정과 선명함을 보상심리와도 같다.그의 관념속에서 커가는 에우헤니아에 대한 사랑은 모든 여성적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승화한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TV단막극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유치하다.물론 그 사이사이 아우구스토의 독백이라든가 친구 빅토르와의 대화등은 의미심장하다.책의 3분의 2가 넘을때까지 신파같은 스토리는 존재론적 질문과 어우러져 이어진다.그리고 25장 말미.갑자기 우나무노가 등장하여 이렇게 선언한다.
"아우구스토와 빅토르가 이러한 소셜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 독자 여러분이 손에 들고 읽고 있는 이 소셜의 작가인 나는, 나의 소셜적인 인물들이 나를 변호하고 나의 방법론을 정당화하는 것을 보면서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이 가련한 두 소셜적 존재에게는 악마의 신이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후반부에서 말러 음악의 '개파'(전복적 파괴)'처럼 흥미진지함의 가속페달을 밟는다.배신과 질투,존재에 대한 의미부여 실패로 아우구스토는 자살을 염두에 둔다.그는 저자 우나무노를 만나러 간다.피조물과 창조주의 대화,인간과 클론의 대화,원본과 이미지의 대화이다.이 직접적 만남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마치 어린 시절 보았던 디즈니 만화의 도널드 덕이 월트 디즈니를 찾아간 것같다.실사와 합성한 그 만화에서 도널드 덕은 디즈니에게 '자신이 왜 미키마우스에게 에이스자리를 뺏겨야 하는지..왜 미키는 선하고 자기는 주인공임에도 괴팍한지...' 등을 목소리 높이며 따진다. 주인공 아우구스토와 저자 우나무노의 토론은 아우구스토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그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자신은 시뮬라르크요 환영일 뿐임이 확인되었다. 우나무노는 친구 빅토르의 입을 통해,또 아우구스토의 독백을 통해 이미 그에게 그가 환영임을 알렸다.빅토르와의 대화에서 아우구스토는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나를 삼킨다.나를 삼킨다.빅토르,나는 그림자로써 허구로써 시작했어......안개 속의 인형처럼 유령처럼 방황했어."
이런 과정을 거쳐 아우구스토는 자신을 삼키는 방법으로 자살을 주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하지만 우나무노는 주인공의 자살이 불가하다고 말한다.그의 언명은 아우구스토에게 마지막 남은 주체적 선택마저 앗아가고 스스로 피조물이자 이미지일 뿐임을 각인시킨다.우나무노는 아우구스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자살할 수가 없어.왜나하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야.너는 살아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야.왜나하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우구스토는 장자의 호접몽을 이야기하며 패러다임 바깥에서 공격을 시작한다.
"침대에 꼼짝 않고 잠들어 있는 사람이 꿈을 꿀때 무엇이 더 존재하는 겁니까?꿈을 꾸는 사람으로서의 그입니까?아니면 그의 꿈입니까?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한 이미지의 전복.시뮬라시옹의 시대를 아우구스토가 질문한다.결국 저자 우나무노는 흥분하고 아우구스토의 사망선고를 하고 만다.피조물과 이야기하다 화가난 창조주.이미지와 이야기하다 이성을 잃은 본체,또 다른 말로 하면 자기안의 또다른 자아와 이야기하다 벽에 부딪힌 우나무노.
아우구스토는 죽는다.자살인가 타살인가? 알 수 없다.하지만 아우구스토는 저자 우나무노에게 당신 역시 피조물이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저주를 남기고 죽는다.모든 인간과 이미지의 한계상황,절대상황.
이 책에는 '안개'로 대표되는 모호함,부정확성,혼동에 대한 고무적 서술이 여러차레 등장한다.데카르트적 존재론은 중언부언인 언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근대적 자아론을 해체하고 나의 자아조차 타인의 자아와 혼동시키는 전략.이러한 안개같은 혼동을 통해 저자가 궁극적으로 질문하고 싶은 것은 무었이었을까? 결국 아무것도 선명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인가? 아니면 존재 이전의 본질인가? 신파극같은 내러티브와 중층적 구조,소설이란 장르에서 일탈하여 만든 소셜.언어의 파편성에 대한 비난...우나무노는 근대적 인간과 자아론의 틈새를 가로지르고 있다.인생은 안개고 안개 속에선 무엇도 선명해지지 않는다.전략은 혼동이다.꿈과 현실이 혼동되고 허구와 환영이 혼동된다.안개 속에서 모든 것이 혼동된다.그리고 나를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