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마라. 누구에게도 그녀를 빼앗기지 마라. 그 어떤 것에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녀를 돌봐줘야 해. 네 생명보다도 더 귀하게.   -훌리안 카락스-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몇 번을 말해도 역시 마지막 장이다. 그 수많은 마지막 중에서도 이제 일순위에 오른 것은 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일생에 단 한번 찾아오는 사랑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것이 잔혹한 운명의 저주였다는 걸 알고 악마가 되어버린 남자의 저 회한. 자신이 빼앗기고 돌보지 못한 사랑. 잔인한 아버지들에게 휘둘리고 버림받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치기 급급했던, 그렇게 손을 잡지 못하고 놓아버린 사랑에 대한 저 절절한 회한 앞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의 회한은 곧 그의 구원이다. 아이러니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에 침몰된 미켈과 누리아의 스스로를 태워 올린 헌신 앞에서 숙연히 침묵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삶을 구원했기 때문임을 안다. 그들을 동정하는 것은 잠깐이다. 다른 여자, 다른 남자를 바라보는 사랑을 위해 죽는다는 신파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그러므로 다니엘과 베아트리체가 이룬 사랑은 훌리안을 옭아맸던 사랑의 저주가 풀리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두 손을 들어 만세라도 부르고 싶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푸슈킨의 저 시를 입버릇처럼 흥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니 삶에 속아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저 구절에 철저히 반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 삶에 대한 배반은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응징할 것이다. 참고 기다리고 용서하는 건 인간의 몫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선과 악의 본질이 딱 절반씩 도사리고 있다. 그리하여 선하거나 악한 의지에 따라 누구라도 악마가 될 수 있다. 훌리안은 선하고 푸메로는 악하다고? 그 둘은 선하거나 혹은 악할 수 있다. 인간백정 푸메로에겐 무능한 아버지와 최악의 어머니가 있었다. 다니엘의 좋은 아버지와 돌아가신 천사 같은 엄마가 아닌. 훌리안에게도 불완전한 의붓아비와 욕망에 눈이 먼 생부, 약하지만 나쁘지 않은 엄마가 있다. 훌리안은 사랑했지만 운명에 맞설 기백도 용기도 없어 도망쳤고 그 그림자가 일생을 지배했다. 푸메로는 어머니를 엽총으로 사살한 그 시점에서 이미 인간과 악마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인간을 향한 헌신과 희생과 희망, 구원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는 인물은 단연 페르민이다. 그의 구원자는 다니엘이다. 그의 몸과 영혼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과 악몽은 다니엘이 내밀어준 손의 온기에 의해 치유된다. 그는 다니엘의 또 다른 아버지이자 친구, 스승이면서 그림자다. 그는 훌리안에 대한 다니엘의 호기심과 열정을 아무런 의심 없이 이해하고 존중하며 지지한다. 이보다 굉장한 축복이 있을까.




 이토록 가슴 졸이며 마지막 몇 장을 읽었던 소설이 언제였던가 싶게 가물가물하다. 폭풍우 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몇 시간의 죽음의 사투를 벌인 기분이다.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자신만의 책 한 권을 선택하는 어린 다니엘과 만났을 때까지는 신비와 흥미가 전부였다. 멋진 일, 적당히 우울하거나 슬픈 뭔가가 일어나리라는 기대감에서 시작된, 책을 덮는다. 그리고 상상으로 통곡(기쁨 혹은 슬픔의)한다. 눈물만한 최상의 정화는 없지만 그저 상상만이다.  좀 더 어려서 이 책을 읽었다면 거리낌 없이 울 수 있었을 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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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7-13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그 구렁텅이에서 허우적 거릴때 저도 누군가의 손을 간절히 잡고 싶더군요.

겨울 2007-07-16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잉크냄새님.^^
어쩌면 이 책 속에서 그때 잡지 못한 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