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시 베이비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인생이, 사람이, 삶이 아름다워 같은 말들의 더 이상 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할 감성도 말라버려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 침몰 중이라지만 이 적나라한 소설은 뭔가. 몇 번이나 구역질을 느끼며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용케 끝까지 읽은 이유는, 인간에 대한, 아야, 호쿠토, 무라노에 대한 연민이 있어서다. 보이지 않는 내 주위에 이런 사람이 절대 없노라 단정할 수 없듯이. 바보 같고, 미친놈 같고, 머저리 같은 그들의 사는 법을 두고 어떤 판단의 잣대도 들이댈 수 없다.




이건 픽션이다. 이건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이건 가네하라 히토미라는 작가의 머릿속 상상의 결과물이다. 그녀는 그녀가 만든 세계, 인물들 속의 신이다. 라는 전제는 내게 있어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울고, 웃고, 분노케 하고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치미는 혐오와 경멸로 책을 던져버리게 만드는 힘. 이 소설이 충격과 논란의 한 가운데 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이다. 책을 찢건 던지건 읽는 이의 자유다.




이 책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위장한 인간의 본질에 속고 있거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사람일지도. 하긴 잘난 척 고상한 척 하지 마. 너도 별 수 없어. 라는 질타는 불편하다. 닭 한 마리 토끼 한 마리 죽이는 것 쯤, 발가벗긴 아기 위에서 자위하는 것 쯤, 피가 흐르는 상처를 물고 빠는 것 쯤, 요즘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 사고보다는 양호하다는 생각이다. 학교에서 제자가 선생님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욕을 내뱉는 것보다도. 소설은 세상의 거울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의 아버지가 아니다.




나 역시 지금 얼마나 무라노 씨를 만나고 싶은가. 얼마나 간병 받고 싶은가. 얼마나 죽여주길 바라는가. 사실은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서 죽여주세요, 하고 울며 간청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울면서 죽음을 애걸하고픈 이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p. 186)




나에게 죽음을 주세요. 날 죽이고 당신도 따라 죽으라는 말 따위는 안 해요. 그런 바보 같은 말은 절대 안 해요. 당신의 그 가느다란 손가락과 화사한 손바닥으로 날 죽여주길 바랄 뿐이에요. 부탁이에요. 뭐든 드릴 테니. 제발. 죽여. 주세요. (p. 187)




좋아해요. 라는 수없는 고백에도 무반응이거나 어쩌다가 돌아오는 네. 라는 답이 전부인 무라노를 향한 아야의 독백이 처절함을 넘어 귀여운 건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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