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물 같은 성격과 불 같은 성격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된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적이 있고, 회화에 관해 논쟁하다가 서로 미워한 적이 있으며, 쌀쌀맞은 고갱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고흐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신의 귓불을 잘라 창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해프닝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사람에 의해 회화가 전통과 단절하고 근대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에는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최고의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가 있었고, 명망 있는 대가의 문하생들도 많았지만, 가난하고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두 화가가 그들 모두를 제치고 근대회화를 보여준 것은 여간 통쾌한 일이 아닐뿐더러 두 사람의 노력이 피땀으로 얼룩져 있어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전율이 생긴다.
두 사람의 성격은 물과 불 같아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기질이다.
고흐보다 5살 많은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했고, 냉소적이었으며, 궤변을 일삼았고, 무심하며, 상대방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너무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다.
반면 고흐에게는 북유럽 특유의 거친 면이 있었지만 천성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질이었고, 동료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같은 사람이었으며, 우정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어줄 듯하지만 버림을 받게 되면 자신을 괴롭히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장 발장과 수도승의 자화상
두 사람이 주고받은 자화상을 보면 성격과 화풍을 동시에 알 수 있다.
고갱의 <자화상>을 보면 성난 모습으로 고뇌에 찬 순교자와도 같다.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에 비유했다. 사회를 위해 헌신하지만 지명수배를 피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신세였던 장 발장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회화를 위해 헌신하지만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그는 분노했다.
그는 <자화상>에서 “예술가의 영혼을 타오르게 만드는 격렬한 화염을 묘사하고자 했다”고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자화상>과 편지를 받고 고흐도 자신의 모습을 그려 고갱에게 답례로 보냈는데 <자화상(폴 고갱에게 바침)>이다.
고흐는 일본 판화에서 승려를 보고 자신의 머리를 깎았다. 그는 자신이 회화의 세계에서 도를 구하는 수도승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갱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장 발장이었고 고흐는 회화를 위해 도를 구하는 수도승이었다. 근대회화는 장 발장과 수도승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자화상에서 눈과 코 부분을 때어내 화풍을 비교해보자.
고갱은 살색을 칠했고, 눈썹 가장자리를 어두운 색으로 테를 둘렀으며, 물감 위에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해 드로잉의 효과를 첨가한 데 비해 고흐는 물감을 2~3mm 정도로 두텁게 사용하면서 눈썹을 삼차원적으로 표현하고 볼 또한 거친 붓자국으로 물감을 거칠게 두텁거나 얇게 칠하면서 살색이 아닌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색을 사용했다.
두 자화상에서 기법의 차이가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 두 사람의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수수께끼 정물화
고갱과 고흐의 공통점은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혹독한 훈련을 통해 화가가 된 것이다.
고갱은 컵을 화면에 크게 부각시키며 테이블 너머의 사람들을 배경으로 정물화를 그렸고 고흐는 성경과 소설을 주제로 정물화를 그렸는데, 수수께끼 정물화는 두 사람의 미학을 비교하는 열쇠가 된다.
여기에 나타난 회화적 경향은 이후 두 사람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둘 다 전통을 무시한 창작이었고, 상징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고흐의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에서 펼친 성경은 구약 이사야서 35장 ‘종의 노래’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은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성경 앞의 낡은 소설은 에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이다.
커다란 성경은 권위를 나타내는 데 비해 작은 소설은 그러하지 못하지만 밝게 빛난다.
고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과로로 목사관 앞에서 쓰려져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추모하며 그린 것이다.
고흐는 목사가 되어 집안의 대를 이으려고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그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신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없어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화하고 희망을 주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와 고갱의 그림을 상징주의로 분류하는 것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이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표현이 강렬해서 두 사람의 작품을 표현주의로 분류할 수도 있다.
소설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고흐의 정물화가 무엇을 상징 혹은 표현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삶의 기쁨>은 매우 진지한 철학적 의문을 내포한 책으로 저자는 전통 신앙이 부재한 가운데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지 독자들에게 묻는다.
고흐는 신앙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고갱의 <정물이 있는 실내>는 매우 복잡하고 특이하게 구성되었다.
화면 하단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오브제들이 널려 있고 중앙에 가구가 어렴풋이 보이며 배경의 사람들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그린 것을 인물화라 하고 사물을 그린 것을 정물화라고 하는데 그는 이 둘을 합쳐서 인물화와 정물화의 장르 구분을 없앴다.
사물이 화면에 더 크게 부각되었으므로 정물화라고 한 것이다.
공간에 대한 배분도 수수께끼인데 침대가 유난히 높고 카드놀이를 하는 테이블은 침대보다 낮으며 5명이 보이지만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짐작할 수 없다.
화면 앞 테이블에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나무로 제작된 커다란 컵 탱카드가 있는데 이 컵은 그의 그림에 종종 등장한다.
컵 너머로 문이 열린 방안의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테이블 뒤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정물의 전문적 요소와 개인적 주제가 혼합된 이 정물화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외로운 죽음
고흐에게는 간질병이 있었다. 간질 증세가 나타날 때 그는 소리를 듣고 영상이 눈앞에 어른거린고 했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진주는 조개의 병의 결과이며 스타일은 대단한 고통의 산물이다”라고 했는데 고흐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발작하게 되면 공간이 보인다고 했는데 그 공간이 작품에서 노란색으로 나타났다.
노란색은 그가 즐겨 사용한 고흐의 색이다.
노란색의 상징적 의미를 알면 그의 회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격리되기 전 1888년 12월과 이듬해 초 그의 그림에서 노란색이 배경으로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고흐는 1년 동안 요양원에 격리되었고 병세가 호전되어 파리 근교 오베르로 갔다.
그는 10년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동생 테오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생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자 형을 보양하기 어려워졌다.
고흐는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을 주는 데 대해 늘 괴로워했고 결국 동생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1890년 7월 27일 오베르 근교 성곽 뒤로 가서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총알이 심장에 박혔다. 그가 어디에서 권총을 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37해 생을 쓸쓸히 마감했고 오베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고갱은 문명이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비판하면서 생의 후반을 프랑스 식민지 타히티 섬에서 지냈다.
말년에 걸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는데, 이 물음은 그가 평생 자신에게 그리고 관람자에게 물었던 화두였다.
그림에는 신생아로부터 늙은이까지 인생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인생의 수수께끼를 상징하는 대작이다. 그는 1903년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럽고 경련을 이기지 못해 커다란 소리로 이웃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밤낮을 구별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지르다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섬의 공동묘지에 묻혔고 묘비도 세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