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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가슴 아픈 짝사랑의 대명사,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에드몽 로스탕의 소설 <시라노>의 주인공이자 17세기 프랑스에 실존했던 검술가다. 시라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빼어난 검술 실력과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솜씨를 모두 갖춘, 당대에 보기 드문 능력자였다. 그런 시라노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아름답고 재기 넘치는 록산느다. 시라노는 록산느를 사랑했지만 용기 있게 고백할 순 없었다. 기형적으로 큰 코 때문이었다. 록산느가 자신의 큰 코를 싫어할 거라고 지레짐작한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이라는 젊고 잘생긴 귀족의 이름으로 록산느에게 연애편지를 쓴다. 편지를 쓴 사람이 시라노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록산느는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지고, 시라노는 그런 두 사람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우린 말이야, 그저 이름만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오른 허구의 연인에게 못내 애태우고 있어. 자, 받게. 이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건 자네네." - 에드몽 로스탕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중에서
미아키 스가루의 장편소설 <너의 이야기>는 주인공 '야마가이 치히로'가 '근미래판 시라노'인 '나츠나기 도카'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다. 나노로봇을 이용해 인간의 기억을 개조할 수 있게 된 시대. 치히로는 의뢰인의 요구에 맞춰 가공된 기억, 즉 '의억'으로 결락된 기억을 채우는 것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부모 슬하에서 자란다. 다시 말해 치히로의 부모는 애인을 사귈 바에는 애인을 사귀는 의억을 사고, 가족과 시간을 보낼 바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낸 의억을 사는 분들이다. 치히로의 부모는 정작 실제 자식인 치히로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자라날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원하는 기억이 있으면 나중에 커서 네 돈으로 의억을 사서 채우라는 것이 부모의 가르침이다. 이윽고 어른이 된 치히로는 부모의 가르침대로 하루빨리 돈을 벌어 의억을 살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얼마 후 치히로는 넉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생애 첫 의억을 산다. 치히로가 산 의억은, 듬성듬성한 기억의 결락 부분을 채우는 의억이 아니라, 듬성듬성한 채로 남아 있는 기억조차 깡그리 지워버리는 의억. 전문용어로 '레테'다.
얼마 후 치히로는 분명 듬성듬성한 상태였던 기억 사이사이에 이질적인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들이킨 나노로봇이 레테가 아니라 가공의 청춘 시절을 제공하는 나노로봇, 즉 '그린그린'임을 확인한다. 얄궂게도 가공의 청춘 시절 속 여자친구 도카는 치히로의 이상형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찰랑찰랑한 긴 머리, 멀리서도 눈에 띄는 새하얀 피부, 오묘하면서도 달콤한 웃음소리까지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치히로는 내가 산 의억은 이게 아니라고, 내가 원한 결과는 이런 게 아니라고 항의하지만 항의할 대상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머릿속에 한 번 자리 잡은 의억은 밀어낼수록 밀려들고, 점점 더 강렬해지고 분명해진다. 치히로가 다시 한 번 레테를 복용하기로 결심하자, 이번에는 도카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치히로 앞에 나타난다. 이것은 기억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 이 여자는 나를 속이려고 나타난 사기꾼일까. 아니면 도카라는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데 내가 잊어버린 걸까. 사기꾼에게 현혹되면 안 된다는 이성과 모든 걸 다 잊고 현혹되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던 치히로는 마침내 가슴 아픈 '진실'을 알게 된다.
"치히로는 날 어두운 곳에서 데리고 나가줬어." 그녀는 말을 이었다. "친구가 없던 내 곁에 항상 함께 있어줬고, 내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 몇 번이나 구해줬어. 치히로가 없었으면 나, 오래전에 절망에 빠져 죽었을지도 몰라." 오버하지 마, 나는 웃었다. 진짜라니까, 그녀도 웃었다. "그러니까 있잖아, 언젠가 치히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땐 내가 치히로의 히어로가 되어줄게." (201쪽)
치히로가 알게 되는 진실이란, 도카가 의뢰인의 요구에 맞춰 가공된 기억을 만드는 '의억기공사'라는 것이다. 의억가공사는 쉽게 말해 '한 사람을 위한 소설가'다. 소설가가 수천수만 명의 독자를 상정하고 소설을 쓴다면, 의억가공사는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 의억가공사는 의뢰인의 최면 상태에서 추출한 '이력서'를 살핀 다음 의뢰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가공의 과거를 작성한다. 의뢰인이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면 즐거운 학교생활을 한 의억을, 연애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면 좋아하는 사람과 뜨겁게 사랑한 의억을 만들어주는 식이다.
도카도 치히로처럼 지독히 외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니, 도카가 치히로보다 더 힘들었다. 치히로가 교실에서 자기 자리를 못 찾고 도서실에 처박혔다면, 도카는 도서실에서도 자기 자리를 못 찾고 양호실로 밀려났다. 어려서부터 앓은 천식은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로 인해 점점 심해졌고, 전교생 중에 1, 2등을 다툴 정도로 작은 체구와 병약한 몸은 도카를 학교 내 카스트 제도 최하위 계급에 머무르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카의 눈에 의억기공사라는 직업이 들어왔다. 의억가공사는 대단한 학력이나 경력이 없어도 필요한 재주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직장에 출퇴근하거나 여러 사람과 협력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약하고 사회 경험이 부족한 도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음 해 여름, 도카는 최연소 의억기공사로 나름 지명도 높은 클리닉에 취직했고, 학생인데도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었다. 스스로 번 돈으로 방을 빌려 독립했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천식도 치료했다. 도카는 이제부터 진짜 인생이 펼쳐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도카의 몸에서 '새로운 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도카는 생존율이 낮지 않은 기존 알츠하이머병과 달리 치사율이 100퍼센트에 달하는 신형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차피 혼자인 몸.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잊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잊고 싶지 않은 장소가 하나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삶의 마지막 나날에도 혼자일 거라고, 마지막 눈 감을 때조차 철저히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니 태어난 게 한스러웠다.
도카는 직업적 재능을 발휘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완벽한 '그'를 직접 만들어내기로 결심한다. '그'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하는 남자를 찾아서 '그'가 좋아할 만한 것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그'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구실을 만들어낸다.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에 맞춰 머리 스타일과 패션, 메이크업도 전부 개조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역할을 해줄 의뢰인이 나타난다. 그가 바로 도카의 운명의 상대, 치히로다. 도카는 치히로가 만족할 만한 '보이 미츠 걸' 이야기를 가공해 치히로의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도카의 예상대로, 치히로는 도카가 만들어낸 의억 속 도카와 사랑에 빠진다. 그렇다면 눈앞에 나타난 도카와도 사랑에 빠질까. 그것은 도카에게도 모험이었다. 평생 한 번뿐인, 생애 최후의,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죽기 전에, 딱 한 번이라도 상관없으니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토닥임을 받고 싶었다. 동정받고 싶었다. 어린아이 대하듯 무조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정하게 포옹받고 싶었다. 내 고독을 100퍼센트 이해해줄 100퍼센트의 남자에게 100퍼센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죽은 후 비통해하며 그 죽음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마음에 각인됐으면 싶었다. (262쪽)
소설 <시라노>의 답답한 전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너의 이야기>의 시원시원한 전개가 마음에 들 것이다. '근미래판 시라노'인 도카는 록산느를 짝사랑하는 시라노인 동시에 록산느의 사랑을 쟁취하는 크리스티앙이다. 심각한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앞에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시라노와 달리, 도카는 자신의 외모를 상대의 취향에 맞게 바꾸는 노력을 불사하며 당당히 앞에 나선다. 진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면서 속마음을 깊이 감췄던 시라노와 달리, 도카는 자신이 호감을 느낀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를 이끈다. 너는 가짜라고, 너의 사랑은 환상이고 거짓이라고 따지고 화내고 거부하는 치히로에게, 도카는 "왜 내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거야?"라고 항변한다.
다행히 치히로는 <시라노>의 히로인 록산느와 다르게 너무 늦지 않게 도카의 진심을 받아준다. 방법이 조금 특이하기는 해도, 사랑을 품은 상대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것은 '일반적인' 연애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꿈이든 의억이든 환상이든 착각이든 상관없으니 언제까지나 이 달콤한 이야기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작도 끝도 자유자재인 허구와 달리 현실에는 분명한 끝이 있다. 모든 기억을 잊고 싶었던 치히로는 도카와 보냈던 생애 최고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다. 생애 마지막 사랑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소원이었던 도카는 치히로만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신세가 야속하다. 점점 바스러지는 기억을 붙들며 헤어짐을 기다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절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랑은 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이별은 하고 싶지 않아서.
"전부, 진짜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이 이야기는 거짓이었기에 진짜보다 훨씬 다정한 거야." "...... 그렇구나." 그녀가 뭔가 거머쥐듯이 양손을 가슴 앞에서 모으며 수긍했다. "거짓말이니까 다정한 거구나." (354쪽)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첫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의 감정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치히로가 기억을 헤집으며 도카의 정체를 알아나가는 과정은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소설 같았고, 마침내 정체를 밝힌 도카와 도카를 받아들인 치히로가 한 여름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달콤한 로맨스 소설 같았고,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에 눈을 뜬 젊은 연인이 너무 빨리 찾아온 이별에 괴로워하는 대목은 슬픔이 넘쳐 고통스럽기까지 한 비애 소설 같았다.
인생은 사랑을 기다리고 사랑에 환호하고 사랑을 떠나보내는 과정의 반복이다. 그럴 기회를 충분히 가지지 못한 채 눈을 감은 도카가 안타깝고, 도카로부터 사랑할 용기를 전달받고 의억기공사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치히로가 눈부셨다. 그 어떤 사랑도 처음에는 짝사랑이다. 짝을 발견한 순간 짝사랑이 시작된다면, 짝이 되는 순간 짝사랑은 사랑이 된다. 부디 어느 누구도 사랑을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지만은 않기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기회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도카처럼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치히로처럼 눈앞의 사랑을 꼭 붙들기를 바란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