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울지 않는 밤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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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외곽에 위치한 모델하우스 분양대행사무소에서 근무하는 '나'는 동료 직원들로부터 공공연하게 따돌림을 당한다. 따돌림의 이유는 '나'가 소장의 처제이기 때문인데, 단순히 소장의 친인척이라서가 아니라 소장이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어서 뭐라도 항변도 못하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업무상 사무소를 드나드는 서형찬이라는 남자가 '나'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인다. '나'는 서형찬에게 틱틱거리면서도 점점 호감을 느끼는데, 그러다 서형찬이 부러 밝히지 않았던 어떤 진실을 알게 되면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2023년에 출간된 소설가 김이설의 소설집 <누구도 울지 않는 밤>에는 총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일견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단편들이 죽음 전후를 그리는 것이 인상적이다. 먼저 소개한 <모면> 정도가 예외적이고, 이어서 등장하는 <내일의 징후>는 4년 동거한 커플이 헤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해 등장 인물 중 한 명이 죽임을 당하면서 끝나고, <축문>은 1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 하는 남편과 그들의 두 딸 이야기를 그린다. <환기의 계절>은 오래 전 가족을 떠난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생기는 일들을 담고 있다.


자매도 많이 나온다. <모면>을 비롯해 <축문>, <환기의 계절>, <치유정원에서>에 나오는 자매들은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며 갈등을 빚고 (아마도) 결국 화해에 이른다. 이 책에 실린 단편 대부분이 밝고 즐거운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반 뗀 라 지?>는 내용이 상당히 어둡다. 베트남에서 시집 온 엄마와 한국인 아빠를 둔 두연은 한 집에 사는 고모의 아들 지혁에게 지속적인 학대와 성폭행을 당한다. 피해와 고통을 호소해도 2차 가해를 당할 뿐이다. 한국 사회의 그늘진 곳까지 꼼꼼하고 세심하게 시선을 드리우는 작가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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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의 분위기
박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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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논문 제출을 앞두고 있는 유미는 대학 도서관 열람실에서 매일 같이 논문을 쓴다. 열람실에는 유미처럼 각자의 공부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단 한 사람만은 자신이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닌 다른 대상에 집중하는 것 같다. 그 대상은 바로 유미이고, 문제의 인물은 유미의 옆자리에 앉는 남자다. 처음에는 유미도 자신이 요즘 너무 바쁜 탓에 평소보다 예민해져서 착각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라기에는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떻게 매번 그렇게 유미의 옆자리에 앉는지, 유미를 지켜보는 느낌이 드는지... 이 느낌이 착각이 아닌 또 다른 근거는 유미의 과거와 관련이 있다. 


2020년에 출간된 소설가 박민정의 소설집 <바비의 분위기>에는 총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전술한 이야기는 표제작 <바비의 분위기>의 줄거리이다. 이 소설은 유미의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외동딸인 유미는 형제자매가 없는 대신 사촌 오빠와 가깝게 지냈다. 사촌 오빠의 방에는 신기한 장난감도 많고 만화책도 많았는데, 어떤 것들은 지금도 생각날 만큼 유미의 어린 시절 기억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착한 범생이 오타쿠인 줄로만 알았던 사촌 오빠에게서 조금씩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고, 결국 유미는 친오빠처럼 따랐던 사촌 오빠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기에 이른다.


이 밖에도 인터넷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불법 촬영물이 게재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모르그 디오르마>, 미국에서 외국인들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그 모습을 담은 영상이 인터넷에 퍼져 곤욕을 치르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세실, 주희>, 한 여성이 외국으로 입양된 사촌 자매들의 방문을 통해 아들 딸 차별이 심했던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절을 떠올리는 이야기인 <신세이다이 가옥> 등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성적 대상 혹은 재생산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그들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들을 다룬 작품들이 실려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여성이라면 무관하지 않고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잘 읽혔고, 읽은 후의 여운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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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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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던 2002년의 여름. 한 여고생이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여고생을 범인 죽인으로 두 남학생이 지목되는데, 한 명은 여고생이 죽기 전 함께 차를 타고 있는 모습이 목격된 남학생이고, 다른 한 명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두 사람을 목격한 남학생이다. 경찰은 이중에 한 명을 범인으로 추정하지만 강력한 증거는 없다. 그렇게 끝내 범인을 밝히지 못한 채 4년의 시간이 흐르고, 죽은 여고생과 같은 반이었던 여학생이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 계단에서 뜻밖의 얼굴을 보게 된다. 죽은 여고생과 닮은 듯 다르게 보이는 여자 후배의 정체가 그를 놀라게 하고, 그렇게 또 다시 시간은 흐른다.


권여선 작가가 2019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레몬>은 (제목만 보고 상큼한 이야기를 예상했던 나로서는) 뜻밖에도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물에 가깝다. 평범한 구성도 아니다. 이 소설은 크게 사건이 발생한 2002년, 사건이 재조명되는 2006년, 관련자들의 후일담이 펼쳐지는 2015년 이후의 이야기로 나뉜다. 각각의 이야기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세 여성 - 다언, 상희, 태림 - 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를 통해 각 인물이 감추고 있는 진실과 거짓을 다양한 각도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실체도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물에 가깝다고 평했지만, 이 소설의 목적이 범인 찾기에 그치는 건 아니다. 사건의 피해자인 여고생은 뭇 남성들이 동경하고 여성들은 질투하며 그를 낳은 엄마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예쁘다는 건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동요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관계를 망가트릴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선 그저 좋다고만 할 수 없다. 실제로 피해 여고생은 자신의 외모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당황시키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소설에서 '목소리'로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 다언, 상희, 태림 - 은 어떻게 보면 사건의 가해자이거나 방관자이지만, 피해자인 면도 있다. 아름다운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로 주변 인간들을 덜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고 그들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겉보기엔 아름답지만 속에 담긴 건 달콤하지 않고 시큼한 레몬인 걸까. 레몬처럼 거리를 두고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 가면 향기롭지만 맛을 보면 시거나 쓴, (미모뿐 아니라) 인간이 탐내는 많은 가치들과 그것들의 위험성을 신선한 방식으로 표현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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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슬로우 - 나는 모든 순간의 여행자 일상이 시리즈 8
신은혜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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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인생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스스로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정한 루트에 맞춰 삶의 행로를 정하고, 조금이라도 정체 되면 자책하고 낙오될까 두려워 하며 산다. <일상이 슬로우>의 저자 신은혜도 그렇게 살았다고 말한다. 제일기획 카피라이터인 저자는 학창 시절 내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재수 끝에 들어간 대학에선 조기 졸업을 위해 기를 쓰고,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선 남보다 더 인정받으려고 전전긍긍했다.


그랬던 저자가 인생의 행로를 바꾼 건 서른네 살 때의 일이다. 취업 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 일만 했던 저자는 일 년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남들은 승진과 재테크에 목을 매는데 나만 한가하게 쉬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평생을 살면서 단 1년도 원하는 대로 보내지 못한다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래서 저자는 퇴사 후 1년 간 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차근차근 준비했다. 퇴사 후에 쓸 돈을 모으고, 바다에 갈 걸 대비해 수영을 배우고, 영포자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어를 배웠다. 그렇게 준비해서 떠난 곳은 바로 하와이. 그곳에서 6개월을 살고, 다음 6개월을 여행하며 보낸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신은혜 작가가 이 책을 낸 다음에 쓴 책은 친구와 함께 10년 동안 1년에 하나씩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도전한 기록을 담은 <가능한 불가능>이다. <가능한 불가능>에서 저자가 한 도전 중에 영어 공부, 수영 배우기, 하와이에서 살아보기 등이 있는데, 이중에서 하와이에서 살아보기 편의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볼 만하다. 아침은 출근을 위한 시간으로만 알았던 저자가 하와이에서 지내면서 아침을 여유 있게 보내는 법을 배웠고, 그 후로는 아침형 인간이 되어 일출보다 먼저 아침을 기다린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이런 여행. 나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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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의 섬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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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틀랜드 제도는 영국 스코틀랜드 북동쪽에 위치한 100여 개의 섬을 일컫는 명칭이다. 인구도 적고, 오랫동안 사용해 온 언어도 영어와 달랐던 이 지역은 1970년 북해 유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영국인들의 관심 밖이었다. 영국의 소설가 샤론 볼턴의 데뷔작 <희생양의 섬>은 바로 이 셰틀랜드 제도를 배경으로 한다.


런던의 산부인과 의사인 토라는 셰틀랜드 제도 출신인 남편을 따라 셰틀랜드 제도로 이사한다. 낯선 직장과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던 토라는 어느 날 집 앞마당을 파다가 심장이 없는 여자 시체 한 구를 발견한다. 곧바로 경찰을 불러 감식한 결과, 죽은 여성은 죽기 얼마 전에 출산을 한 흔적이 있으며, 등 뒤에는 수수께끼의 고대 문자 세 개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경찰은 최초 발견자인 토라를 위로하며 더 이상 사건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집 앞마당에서 벌어진 일인 데다가 산부인과 의사로서 산모에게 벌어진 끔찍한 일을 외면할 수 없다는 책임감에 토라는 경찰 몰래 사건을 조사한다.


토라는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지식과 접근 가능한 정보를 활용해 사건에 대해 알아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토라가 알게 되는 정보는 경찰이 알려주는 정보와 조금씩 달랐다. 토라가 문제를 제기하자 경찰은 토라가 더 이상 조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막고, 심지어 토라의 남편과 상사도 경찰의 편을 든다. 그러자 토라는 순순히 조사를 관두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방해하는 인물들이 모두 셰틀랜드 출신 남성인 점에 착안해 사건의 배후에 셰틀랜드의 숨겨진 역사와 남성 연대의 음모가 있으리라 추측하고 조사에 박차를 가한다.


이 소설은 최근에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발표한 정세랑 소설가가 좋아하는 추리 소설가로 샤론 볼턴을 들어서 구입하게 되었다. 정세랑 작가의 추천작은 <뱀이 깨어나는 마을>이었지만 나는 이 소설도 무척 좋았다. 일단 셰틀랜드 제도라는 배경이 신선하고, 낯선 환경에서 외부인 취급 받으며 겉도는 여성이 내부의 비리를 파헤치는 이야기라는 점도 공감을 자극했다. 이 소설은 또한 여성들의 연대로 남성들의 연대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 토라 말고도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더 등장하는데, 이들이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고 서로 힘을 합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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