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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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SF문학상인 휴고 상을 3년 연속으로 수상한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 <다섯 번째 계절>을 읽고 한참만에 두 번째 작품을 읽었는데, 아무래도 <다섯 번째 계절>을 읽을 때는 낯설었던 개념이나 구성이 이제는 익숙하다 보니 <다섯 번째 계절>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었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어머니 에쑨의 시점과 딸 나쑨의 시점으로 각각 진행된다. 지진 활동과 관련된 에너지를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하는 존재, 즉 '오로진'인 나쑨은 자신과 같은 오로진인 아들 오체를 살해하고 딸 나쑨을 데리고 사라진 남편 지자를 쫓아 헤매던 중 '카스트리마'라는 지하 도시에 다다른다. 에쑨은 카스트리마에서 옛 연인이자 스승인 알라배스터와 조우하는데, 이제 알라배스터는 쇠약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며 그를 보는 에쑨의 마음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오벨리스크의 문>에서 흥미로웠던 건, 에쑨보다도 나쑨의 이야기이다. 나쑨은 원래 어머니 에쑨을 무서워하고 아버지 지자를 좋아했다. 자신과 같은 오로진인 어머니 에쑨은 매일 어떻게 힘을 다스리고 통제해야 하는지 혼내듯 가르치는 반면, 오로진이 아닌 아버지 지자는 자신을 그저 어린 딸로서 귀여워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쑨이 오로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지자의 태도가 180도 변하고, 급기야 나쑨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나쑨을 죽이려 든다. 나쑨은 그런 아버지를 좋아할 수도 없고 미워할 수도 없어서 괴로워한다. "왜 내가 이 사람을 아직도 사랑하는 거지? 나쑨은 아버지를 쳐다보며 의아해한다." (427쪽) 


"지금 나쑨이 느끼는 감정은 어머니에 대한 차가운 분노다. 그게 불합리하다는 건 나쑨도 안다. 지자가 오로진을 너무 무서워하여 자기 자식마저 사랑할 수 없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지자의 잘못이다. 하지만, 한때 나쑨은 아버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었다. 지금 그녀는 그 완벽한 사랑을 잃은 데 대해 비난할 사람이 필요하다. 나쑨은 어머니라면 그걸 감당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적어도 저 사람보다는 강한 사람이랑 애를 낳았어야죠." (432-3쪽)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증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나쑨은 결국 어머니 에쑨만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도 나쑨을 구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무도 나쑨을 구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524쪽)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마지막 3부 <석조 하늘>에서는 에쑨과 나쑨이 마침내 만나 그동안의 오해를 풀고 차별과 억압의 시대를 끝내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다.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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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이름 정하기
이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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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이라는 아티스트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이랑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집중해 감상한 건, 책과 만화, 영화, 음악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한 가지 일에 정진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산발적으로 하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는데(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랑 작가는 여러 가지 일을 산발적으로 해도 무엇이든 잘 해내는 사람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기 때문이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고, 총 12편의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모든 소설이 탁월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설은 <똥손좀비>다. 보조출연자로 일하는 용훈은 지하철 사고 때문에 좀비 영화 촬영장에 늦게 간다. 그 바람에 전문 분장사의 분장을 못 받고 직접 좀비 분장을 하게 되는데, 용훈의 좀비 분장이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면서 용훈은 '똥손좀비'로 불리게 되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문제는 용훈이 원하는 건 성실하게 연기력을 쌓아서 배우로 인정받는 것이지, 고작 한철 인터넷에서 유행하고 말 밈(meme)의 주인공으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용훈의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계속해서 좀비 떼처럼 용훈에게 달려들고 용훈을 이용하려 든다. 


만약 내가 용훈과 같은 처지가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만, 나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없는 일도 아니기에(만약 내 졸업 사진이 갑자기 인터넷상에서 밈이 되어 퍼진다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발상은 기발하되 현실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은, 마치 내 이야기 같고 내 친구 이야기 같은 소설들이 주로 담겨 있다. 이랑 작가의 다음 소설집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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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틀리기 쉬운 영어 - THE TIMES 교열기자 출신이 알려주는 유용한 영어 사용 팁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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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이미 잘하지만 더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필살기가 담겨 있는 노트를 엿본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저자 빌 브라이슨은 2005년 영국 더럼대학교의 총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더 타임스>, <인디펜던트>의 기자로 일했다. 이 책은 저자가 <더 타임스>의 교열 기자로 재직할 때 기획, 집필되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제목을 '상당히 최근까지만 해도 지은이가 완전히 명확하게 알지 못하던 영어 어법의 모든 것에 대한 지침서'라고 붙였다면 설득력은 좀 떨어져도 더 정확했을 터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 책에 나오는 거의 모든 내용은 저자가 일간지 교열 작업을 할 때 여러 번 혼란을 겪은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책에는 영어 초보자부터 고급 영어 사용자까지 수많은 영어 사용자들이 자주 틀리거나 헷갈려 하는 영어 단어의 정확한 뜻과 용례가 A부터 Z 순서로 정리되어 있다. affect와 effect, bait와 bate, capital과 capitol처럼 철자가 비슷해서 혼동하기 쉬운 단어들의 예가 잘 정리되어 있고, country와 nation(country는 지리적 특징을, nation은 정치, 사회적 특징을 가리킨다), abbreviation과 contraction과 acronym(각각 약어, 축약형, 두문자어를 뜻한다) 등의 차이도 나와 있다. but, due to의 정확한 사용법을 비롯한 문법 지식 및 영작을 할 때 주의해야 하는 사항도 실려 있다. 박식하기로 유명한 빌 브라이슨의 책답게, 영어에 관한 지식 외에 다양한 역사, 문화 상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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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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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흡에 읽게 되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여러 호흡으로 나누어 읽게 되는 소설이 있다. 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은 단연 후자다. 책의 분량 자체는 적은 편이다. 이야기도 단순한 편이라서 한 호흡에 읽으려고 하면 충분히 그렇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문장이, 나로 하여금 여러 번 호흡을 멈추게 만들었다. 


소설은 백석 시인의 7년을 그린다. 한국전쟁 후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지 않고 모두가 땀 흘려 일해 얻은 바를 즐거이 나누는 새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약속을 믿고 북으로 갔을 때만 해도 백석은 밝은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원하는 시를 마음껏 쓰고 틈틈이 외국 시를 번역하면서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몇 년 후 백석이 처한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국가에 등록된 문인으로서 '자유롭게' 시를 쓸 수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당이 요구하는 사항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야 했다. 당이 원하는 대로 시를 쓰지 않으면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시를 쓰지 않고 번역을 하겠다고 하면 사대주의자라는 또 다른 오명이 씌워졌다. 백석과 벗으로 지냈던 문인들은 하나둘 숙청되거나 벽지로 추방되었고, 지인에게 편지 한 통 마음 편히 보낼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백석의 친구 준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결국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 슬픔을 모르는 인간, 고독할 겨를이 없는 인간, 그게 바로 당이 원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형인가 봐." (30쪽) "시바이(연극, 속임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게 개조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 시바이를 할 수 있다면 남고, 못한다면 떠나라. 결국 남은 자들은 모두 시바이를 할 수밖에 없을 텐데, 모두가 시바이를 하게 되면 그건 시바이가 아니라 현실이 되겠지. 새로운 사회는 이렇게 만들어진다네. 이런 세상에서는 글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야. 자기를 속일 수 있다면 글을 쓰면 되는 거지." (31쪽) 


백석은 점점 더 조여드는 당의 압박 때문에 괴로워한다. 당의 뜻을 따르면 시인으로서의 자신은 저버리는 게 된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저버리면 가족들과 편안하게 살 수 있다. 무엇을 택할 수도 없고 택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결국 백석은 양강도 삼수군의 협동농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형(刑) 아닌 형'을 받게 되고, 거기서 그는 농사를 짓고 양을 치고 남는 시간에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낸다. 이후 백석이 삼수에서 어떤 시를 썼는지, 시를 쓰기는 했는지 밝혀진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작가는 백석이 어떤 식으로든 시심(詩心)을 지켰을 것이며, 시 쓰는 사람은 시 쓰지 않는 것으로도 시를 쓸 수 있으며 때로는 삶 자체가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번 멈추어 곱씹게 되는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소설이 표면적으로는 백석 시인의 생애 중 한 시기를 그리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무리 지어 사는 인간의 숙명을, 사람들의 압력과 원초적인 욕망에도 불구하고 문제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대안을 고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85쪽) 


아무도 해치지 않는 시조차 쓸 수 없는 삶. 그 삶을 형벌처럼 견뎌야 했던 시인. 마지막으로 눈 감을 때, 백석은 웃고 있었을까 울고 있었을까. 가닿을 곳 모르는 마음이 허공을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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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처럼 쓴다 - SF·판타지·공포·서스펜스
낸시 크레스 지음, 로리 램슨 엮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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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판타지, 공포, 미스터리 등의 장르물을 잘 쓰는 방법을 소개하는 책이다. 미국의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66인이 참여했으며, 소설가이자 출판 편집자인 로리 램슨이 책을 엮었다. 원제는 'Now Write! Science Fiction, Fantasy and Horror'로, 한국어판 제목과 다르다. 


각각의 글은 본문과 실전연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실전연습에 실용적인 팁이 아주 많다. 판타지 소설 작가 데이비드 앤서니 더럼은 소설 속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3분 글쓰기'를 제안한다. 3분 동안 특정 시대와 장소의 건물이나 실내 모습을 묘사하고, 또다시 3분 동안 방금 묘사한 방 안의 인물을 묘사하는 식이다. 전혀 말도 안 되는 문장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해도 일단 쓰고, 잘 모르는 소재나 단어라고 해도 쓴다. 그런 식으로 의식의 간섭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글을 쓰면 평소에 하지 않는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고, 이야기의 디테일도 높일 수 있다. 


SF와 판타지 장르는 중심을 이루는 세계관이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허구적인 만큼 디테일이 중요하다. 특히 캐릭터의 디테일이 중요한데, 캐릭터의 디테일을 높이고 싶을 때는 다음의 연습법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 아무 사건도 없는 평범한 날 인물은 무엇을 할까? 단 하루만이라도 휴가가 주어진다면 인물은 무엇을 할까? 이런 식으로 상상하다 보면 인물의 캐릭터가 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해질 뿐만 아니라, 에피소드도 보다 풍성해지고 작품 전체의 완성도도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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