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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이름 정하기
이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평점 :

이랑이라는 아티스트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이랑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집중해 감상한 건, 책과 만화, 영화, 음악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한 가지 일에 정진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산발적으로 하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는데(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랑 작가는 여러 가지 일을 산발적으로 해도 무엇이든 잘 해내는 사람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기 때문이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고, 총 12편의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모든 소설이 탁월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설은 <똥손좀비>다. 보조출연자로 일하는 용훈은 지하철 사고 때문에 좀비 영화 촬영장에 늦게 간다. 그 바람에 전문 분장사의 분장을 못 받고 직접 좀비 분장을 하게 되는데, 용훈의 좀비 분장이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면서 용훈은 '똥손좀비'로 불리게 되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문제는 용훈이 원하는 건 성실하게 연기력을 쌓아서 배우로 인정받는 것이지, 고작 한철 인터넷에서 유행하고 말 밈(meme)의 주인공으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용훈의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계속해서 좀비 떼처럼 용훈에게 달려들고 용훈을 이용하려 든다.
만약 내가 용훈과 같은 처지가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만, 나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없는 일도 아니기에(만약 내 졸업 사진이 갑자기 인터넷상에서 밈이 되어 퍼진다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발상은 기발하되 현실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은, 마치 내 이야기 같고 내 친구 이야기 같은 소설들이 주로 담겨 있다. 이랑 작가의 다음 소설집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