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유시민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것 같다. 국가에서 국민들을 통제하는 방법에서 국가 자체의 정치권력보다는 미디어로 통한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이다. 미디어 즉 매체라는 의미이다. 매체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으로 생각하고 느끼거나 혹은 판단할 수 있을 있게 해주는 정보적인 수용방법 경로이다.

그런 정보경로에서 미디어라는 이름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가령 이전에 봤던 섹스와 돈이라는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도서에서 미디어로 통한 언론의 활약은 국민들의 인식과 행동 자체를 변환시키고 또한 그것에 알맞도록 맞춤식까지 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 말은 사실이다. 현재 독재국가 중의 하나인 북한에서는 언론을 오로지 (마르크스-레닌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독재정당이 장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언론이 나라 그 자체를 북한과 같은 괴뢰정부가 아닌 이른바 자유주의국가에서 한다면 어떻게 될까나? 물론 언론으로 통한 미디어의 전파는 경제적인 위력과 동시에 정치적인 압박도 들어간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독재가 아니지만 독재 내지 혹은 은폐, 조작, 공작의 방법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 내가 읽고 있는 도서 중에서 정치사상에 대한 안내 도서를 읽고 있다. 거기서 그 동안 내가 알고만 있었던 철학자 이름 한 명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마키아밸리이다. 마키아밸리는 이른바 군주론(君主論)이란 정치에 필요한 하나의 교본을 저술한다. 그의 저술명저인 군주론에선 군주가 어떻게 대처해야만 정치를 잘 이끌어갈 수 있는가이다.

따라서 과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정치는 철학적인 영역에서 분리시킨 철학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군주독재의 방법설을 알려준 마키아밸리 역시 알고 보니 그도 인권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군주가 집정하는 집정관, 우수한 엘리트 관료의 원로원, 그리고 국민들이 하는 호민관에서 3가지 정치적인 구도로 통해 독재정치를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사회에서는 군사·외교적으로 불안하여 다소 군주에게 강한 권력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라는 것은 한 곳에 독재되어서는 안되고, 권력의 이동이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안되면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변모하여 모든 정치적인 간섭과 견제를 제외하고, 횡포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국가적인 권력기관 문제가 내내 한국사회의 신문과 방송에서 탑을 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적인 권력과 올바른 정보를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국민 대부분은 일일이 정치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을망정, 하나하나 정치적 안건에 대해 참관할 수가 없다. 따라서 국가에서 뽑는 공무원도 있는 반면, 국민들이 선택하여 투표권으로 지정하는 선거도 있다. 문제는 이 선거로 통해 창출되는 정치가들은 상당히 높은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움직임에 많은 국가적인 대사가 좌우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이 좋은 정치가로서 활약하기보단, 역으로 그것을 이용하여 사익을 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국가공무원이라고 모두 그들을 제어할 수 없다. 오로지 그들을 손으로 뽑은 국민들만 가능하다. 그들에게 주어진 그러니깐 그 개인 자신들은 작고 외소하나, 그 개인들이 모이면 아주 크고 웅장한 심판관이 되어 자신들이 선발한  권력들을 심판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권력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얼마나 제대로 하고 있는가? 혹은 하지 않은가를 알아야 필요성이 있다. 이때 그 충실한 국민의 눈과 귀를 해야 할 존재가 바로 언론이다. 언론들이 타락하면 국민들이 거짓말에 넘어가고, 진실은 어두운 저 황혼 아래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언론인들의 양심과 언론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선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가 없다면 그것인 민주주의국가가 아닌 그저 독재정치 세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언론의 자유를 방해하고, 오히려 매도한 언론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이 책을 보는 나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한다. 이전에 그토록 이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최근 가질 수 없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했다. 그것은 조선일보에 대한 진실한 언론의 진실성이다.

내가 최초로 조선일보에 대해 의심하던 것은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임과 더불어 터진 김해 봉하마을의 사택이다. 참고로 본인이 사는 집은 경남 김해 옆의 부산이다. 부산 옆에 김해라면 당연히 어느 정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야기는 길가거나 혹은 가게에 물건 사러가거나 심지어 친구와 가족들 사이에도 듣는다.

이때 뉴스에 뜬 김해 봉하마을 아방궁 소식, 국가예산을 막대한 손해를 주면서 만든 그 개인 사택에 대한 기사가 조선일보에서 내내 터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김해 봉하마을 다녀온 주변 사람이나 그밖에 동네 소식으론 순 거짓말이었다. 아니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봉하마을을 가서 확인했다. 그런 헛소문과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는 것에서 말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를 보면 안정되어 가기보다는 서민경제가 어려워지고, 중소기업들은 모두 힘들어하고, 엔지니어업체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물론 그런 올가미와 같은 불황들은 나의 목도 조르고 있다. 어느 사람들은 아마 조금 더 노력하면 좋은 곳에 가라고 하나, 내가 그런 곳에 가도 한국사회에는 반 이상의 사람들이 그런 생활에 처해지게 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역할이라면 국가정책의 문제점과 부정부패나 개선사항을 알리는 것이 우선할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권력에 대한 욕망에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노무현이 조선일보와 싸운 이유이다. 조선일보에 대한 내용은 과거 “부자 신문, 가난한 독자”에서 읽어봐서 어느 정도 짐작했다. 일제치하 고종을 폐위한 송병준이 운영하다가 훗날 독립군인 이상재에게 양도되다, 이상재가 독립적인 행태에 조선일보가 방응모에게 넘어가면서 친일의 역사는 조선일보에서 떼어낼 수 없는 과거이나 그들은 부정했다.

과거 신문기사에 대한 스크랩이 있는데 말이다. 어째든 그들은 친일세력으로 일제에 봉사하고, 해방 후에는 군사정권에 봉사했다. 한국 정치계에서 이른바 반공정치가 하나의 큰 과제일 때 그들은 매카시즘(McCarthyism)이란 정치적인 공세로 통해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당시 한일해방과 625전쟁에 막 휘말린 이후라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이란 미명을 수긍할 수 있으나, 문제는 그것이 계속되는 점이다.

뭔가를 좋은 것을 가져가는 부분이 있다면 뭔가 나쁜 것을 가져가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한 사람들에 대해 인권적인 보장이 없을 때, 이들이 가만히 있으면 선량한 시민이고, 이들이 항의하면 나라에 대항하는 이적행위로 간주했다. 부림사건이나 노동자탄압에서 많은 노동자나 서민들이 희생당했다. 그때 노무현이 등장하여 이들의 변호해주고 조선일보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5공 청문회에서 스타와 각종 정치적인 대립에서 노무현과 조선일보는 적으로 맞붙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는 그런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전쟁을 2002년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후보로 출마하기 전에 나온 도서이다. 이 책에서도 밝히듯이 지금 나는 꼼수다로 한참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이때 재미있는 어록을 남겼다.

“‘우리는 대단히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적이 되는 과정은 대단히 공정하다.” 공정함이란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고 주변에서 보는 환경적인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교육수준, 경제적 조건, 사회적인 위치, 그리고 주변 사람들 등 그 많은 것들이 인간의 판단력을 좌우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판단력은 언제나 자기에게 편하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이끌리게 한다. 따라서 한 가지 이데올로기만 집중하여 초점을 맞춘다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보일 것이다. 특히 이런 2원화적인 대립구도는 참 무섭고도 위험하다. 혹은 칸트가 제시한 3원화적인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할 수 없을까? 물론 해도 두 갈래 길 중에 선택해야할 순간은 없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 살아가는 동물이고, 선택의 순간은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야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 사고에 대한 판단기준을 어떻게 제대로 보고 듣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 개인적으로 절대적인 중립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절대적 중립이라 외치는 자들이 더 심각한 이원화적인 대립구도를 가진 사람이라 본다.

그렇다면 노무현과 조선일보라는 여기의 이원화된 구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사람은 노무현을 어느 사람은 조선일보에게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여기서 이 글을 적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노무현의 편이다. 내가 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내가 살아온 공간에서 자라온 환경이다. 노무현의 고향은 김해이고, 그의 운동지역은 부산이다.

내가 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여기 공간적인 상황에서이다. 아니라면 그의 어록처럼 “조선일보 사장님 회장님처럼 그렇게 고상한 말만 쓰고 살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분들처럼 천왕폐하를 모시고 일제에 아부하고,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회주의자적인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 땅에 가난하고 힘없고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말을 고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시대 기회주의와 편의주의에 절은 그들의 사고방식은 결코 고칠 수 없습니다.”

이 말에 어느 사람은 공감 내지 부정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정치인들은 이런 말을 이구동성을 외친다. 서민을 위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들을 위하여 라는 미사어구를 말이다. 그런데 적어도 그런 현실에 놓여있거나 관찰하는 입장과 그것을 직접 보지도 않고 먼발치에 방관하는 자들에겐 이 말에 대하여 과연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도 노무현을 싫어하기도 한다. 그래도 서민들은 누구를 더 좋아할까?

이미 죽어 온 몸을 불살라 뼈만 남아 가루로 되어 어느 단지에 모셔진 노무현이나, 그의 죽음은 조선일보와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일보의 전쟁을 하게 된 사람은 노무현이 아니라 노무현이 아닌 존재로 되었다. 노무현은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에 등장하는 유령처럼 혹은 칸트나 마르크스처럼 유령이 되어 계속 전쟁을 하고 있다. 망령이 되어버린 진짜 유령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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