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더욱 익숙하다. 이 말은 '집은, 혹은 건축은 단순히 기술적 구조적인 측면에서 세우는 물리적 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짓고 밥을 짓듯이 어떠한 재료를 가지고 일련의 사고 과정을 통하여 뭔가 만들어내 가는 것'이란 뜻이다.

... 도시의 가로에 빼곡히 들어서 있는 건물들 가운데 이런 의미에 부합되는 건축을 구별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믿는 한, 첫번째는 그 건물이 합목적인가에 있다. 두번째로 장소성을 들 수 있다. 세번째로 거론해야 하는 중요한 명제는 시대성의 문제이다.' (23쪽)

 

건축을 그냥 기술로만 파악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건축을 예술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승효상은 이 책에서 건축은 이런 개념으로만 설명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는 건축의 어원을 따져 건축(architecture)이 으뜸 혹은 크다는 뜻의 'arch'와 기술 혹은 학문이라는 뜻의 'tect'라는 라틴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해서 '원학(원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시작하는 글에서 말하고 있다.

 

그만큼 건축은 우리 삶의 원형이라는 말이고, 건축에는 우리 삶을 만들어가는 요소가 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그는 겉으로만 화려한 건축을 무시하고 경원하고 있다. 겉모습이 아니라 생활이 반영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축이야말로 의미가 있고, 그것이 좋은 건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좋은 건축이라고 말하는 세 가지 요소를 보면 알 수 있다. 삶에 기여하는 합목적성과 그 시대, 그 공간에 어울리는 장소성과 시대성을 확보해야만 좋은 건물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우리 주변에서 좋은 건축이 어떤 것인가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건축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있다. 이 여행은 몸의 여행이자 사유의 여행이기도 하다.

 

책으로만 접한 건축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며, 그것을 자신의 사유로 끌어안아 자신의 건축으로 되살려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 보고 느낀 결과는 책에서 생각했던 결과와는 다르며, 이런 보고 느끼고 생각함이 승효상의 건축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이 책은 건축기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순한 건축기행이라고 하기보다는 승효상의 건축 사유 기행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그는 세계 각지의 건축을 통해서 자신의 건축에 대한 사유를 확장시키고 만들어가고 있다. 그 점을 하나하나 건축기행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축물들을 그를 따라서 함께 보면서 느끼는 시간이 바로 이 책을 읽는 시간이 되는데...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가서 보면서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 않으니 책을 통하여 여행하는 방법이 차선으로 선택된다.

 

그렇다. 이 책을 통해서 승효상과 함께 건축 기행을 한다. 그와 함께 건축에 대한 사유를 넓혀 나간다. 단순히 넓혀만 나가서는 안된다. 깊게도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 것이 된다.

 

기행이나 공부의 가장 큰 목적인 결국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공부가 스승의 학문을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야 진정한 공부가 되듯이, 건축 또한 세계 각지의 좋은 건축을 보면서 결국은 내 건축을, 우리의 건축을 생각해야 하고,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건축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특히 이 책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빛에 대한 문제, 사람 삶에 대한 문제, 그리고 비움의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결국 건축은 삶일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의 삶에는 빛과 공기가 필수적이고, 이러한 빛과 공기는 공간이라는 비움으로 인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테니...

 

몇 권 되지 않지만 건축에 대한 책을 읽으며 봐왔던 건축물도 있지만, 그것들에 대해 새로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책이고, 왜 그 건축들이 좋은 건축인지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책이어서 이 책이 고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풍속화, 붓과 색으로 조선을 깨우다 - 풍속화가 김홍도, 신윤복, 김준근과의 만남
EBS 화인 제작팀 지음 / 지식채널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미술에 관한 책들을 보다가 그것도 주로 서양의 미술을 보다가 왜 우리나라엔 서양처럼 이렇게 화려한 채색을 하지 않았을까? 색깔이 있다고 해도 너무도 단조로워 오히려 흑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수묵담채화라서 그런가? 그렇다고 해도 우리나라가 과연 색채에 무심했던가 하는 생각들을 했었다.

 

우리나라가 성리학의 영향으로 수수한 삶을 추구했다고 하지만, 자연과 조화되는 삶을 추구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 전체가 칙칙한 흑백의 세상은 아니었을테고, 상류층들의 옷들은, 왕의 옷은 화려함의 극치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했는데...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그림이 너무도 없다는 사실에, 서양화들을 보다보면 우리나라 그림들이 너무 어둡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안 그린 건지, 못 그린 건지, 아니면 색깔이 변색이 되어 남아 있찌 않은 건지... 유화라는 기법을 사용한 그림이 과거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

 

게다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후기 세 명의 대표적인 풍속화가 김홍도, 신윤복, 김준근(이 이름은 사실 처음 듣는다. 내가 EBS다큐프라임을 보지 않았기에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모르고 있던 인물이다)의 그림에서도 서양의 그림에 나타나는 그런 화려한 색감은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책에서는 신윤복은 조선의 색감을 살린, 채색의 절정을 이룬 조선의 색을 살린 화가라고 하지만, 그의 색깔은 서양 그림의 색깔에 비하면 단조롭기 그지 없다. 이 단조로움 자체도 예전의 그림에 비하면 엄청 진일보한 것이라고 하지만.

 

특히 간송미술관에서 원본을 보았을 때도 색감을 잘 느끼지 못했다. 조명 탓이든, 아니면 색감을 못 느끼는 내 눈 탓이든, 나에게는 그저 그런 색으로만 보였는데... 조금 진하고, 화사하다고 할 정도에서 머물렀을 뿐.

 

그렇다면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우리 그림은 화려함을 뽐내기보다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사람의 정신을 드러내는데 있지 않았을까? 그림에서 정신의 높이와 깊이를 발견해내려고 했던 선인들의 그림 감상법이 그렇게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데...

 

풍속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당시의 풍속을 모사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태도가 그림에 드러나게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홍도의 그림을 보아도 그냥 그 시대는 그랬구나가 아니라, 그림 속의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또 그 시대의 정신문화가 그림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즉 인물들이 죽어 있지 않고 살아 있다. 그것이면 됐다.

 

거기다 일반 서민들의 옷은 그야말로 흑백이었을 터. 그러니 김홍도의 작품에서는 색채가 미약하다고 투덜거릴 일이 아니다. 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서민들의 삶에 대한 태도, 그들의 마음을 느끼면 된다.

 

그것을 이 책은 김홍도의 그림 기법과 더불어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에 비하여 신윤복은 그림을 그리는 대상이 다르다. 그는 주로 기생들을 그리고 있다. 기생들의 옷은 서민들에 비해 화려하다. 화사하다. 그러니 신윤복의 그림에는 색채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다.

 

화사한 모습 속에서도 무언가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림을 통하여 기생들과 양반들의 생활 내부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그림 기법은 요즘 인테리어 기법을 생각나게 할 정도라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만큼 그가 색채 뿐만이 아니라 구도에서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

 

여기까지는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두 사람의 화가 이야기인데, 김준근으로 넘어가면 도대체 누구야? 하고 말 정도다. 또 그의 그림은 풍속화라기 보다는 안내그림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를 알리는 풍속그림을 그렸기에 배경은 생략하고 풍속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 그래서 이 그림에서는 풍물은 있으되, 사상은 없는... 무언가 그림 뒤로 들어가 더 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고 있다.

 

개항이라는 시기에 상품으로 외국인에게 넘기는 그림들이니 가능하면 단순하고 명쾌하게 그리려고 했으리라.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는 우리나라 풍습의 핵심을 짚어냈으니, 그런 점에서 김준근의 그림이 의미가 있겠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그림에는 상업의 냄새가 너무 나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이면에 있는 그 어떤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이 김홍도, 신윤복의 그림과 김준근 그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비록 서양화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정신들이 느껴지는 그림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또한 우리 그림의 장점이 아니겠는가.

 

서양과 추구하는 정신세계가 달랐던 우리나라에서 서양화와 비교하는 어리석음은 이제 떨쳐버리려 한다. 우리 그림은 우리 그림대로 그 시대를 충실히 반영하였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글쓴이는 말한다.

 

풍속화는 그들의 삶이며 예술이며 무기였다. 그들은 풍속화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 속에 뿌리 내렸다. 그러기에 그들의 작품 속에는 실로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가득 배어 있다. 필시 그들의 풍속화가 오래도록 우리 주위에 살아 있을 수 있는 힘의 원천 역시 이것이리라. (이 책 종(終)에서)

 

그런 점에서 쉽게 조선 후기 풍속화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아마 영상으로 보면 책에서 보지 못했던 다른 어떤 것을 볼 수도 있겠지.

 

삐딱한 덧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은 시종일관 '나'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런데 책에서 저자라고 하면 EBS 화인 제작팀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책의 출판서지를 보면 글 서주희 · 화인제작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사람은 김광호 피디라고 한다.(책 표지 접힌 부분에 보면)

 

아마 글을 작가가 좀더 부드럽게 하기 위해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썼나 본데... 즉, 공동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책의 내용을 전개할 때 '나'라고 하지 말고, '우리'라고 하든지, 아니면, 김광호 피디 책임 하에 화인 제작팀이 제작하고, 글은 서주희가 씀이라고 먼저 밝혔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의 풍경 - 정기용의 건축기행 스케치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어떤 사람은 만난 적이 없고, 잘 모르는 데도 이상하게 믿음이 간다. 그 믿음이 웬만해서는 깨지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 모두 좋아 보이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눈에 반한 사람들이 그러려나? 아니면 자신과 맞는 무엇이 있을텐데, 그것을 말로 하지는 못하지만, 감각이 그냥 감응을 해 버린다. 거부할 수가 없다. 그냥 좋은 걸, 그냥 믿음이 가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내게는 정기용이라는 건축가가 그렇다. 그냥 믿음이 간다. 이 사람이면, 이 사람이 말하는 건축이면 좋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의 책을 몇 권 읽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한 기적의 도서관 운동에 그가 건축한 기적의 도서관을 보아서였는지, 아니면 첫책을 읽고 아, 이 사람이구나, 이 건축가로구나 해서 그런지, 하여간 정기용은 내게는 믿을 만한 건축가다.

 

그래서 그가 건축에 대해 하는 얘기에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요즘 미술과 건축에 관심이 많아졌는데, 그래봤자 초보자 수준이고, 사실 초보자도 안되는 그냥 제멋대로 생각하고 감상하고 아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미술과 건축이 통한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었고, 건축은 결국 인문학이라는, 사람살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기용이 쓴 책을 모두 읽고 싶은데, 시간과 돈이 허락을 해주지 않아 망설이고 망설이다 고르게 된 책이 이 책이다. 그가 스케치하고 글을 쓴 결과물들.

 

이제 다시는 그의 새로운 글이 나오지 않을테니, 천천히 시간을 두고 그의 책들을 읽어야지 하면서 고른 책이다. 역시 실망을 주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 읽어도 좋을 책이고, 아무렇게나 읽으면 안될 책이다.

 

하나하나가 그의 생각이 건축과 자연과 감응을 일으켜 그림으로, 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그림이, 글이 감동을 준다. 스케치라서, 그 건축물에 대한 사진이 없어서 보는 재미는 적을지 몰라도 스케치라는 것이 무엇인가?

 

여행 스케치는 기억에 남기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것들을 나의 장소로 나의 존재로 끌어들이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모든 정보와 연결되는 '무의식적인 행위'다. 스케치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은 '언어'의 힘을 통해 가져온다. (9쪽)

 

스케치란 그래서 시다. 소설이나 설명문처럼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자신이 느낀 점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감정이 우선이다. 그 감정을 선으로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스케치다. 그러니 스케치는 많은 것을 담고 있지만, 또 많은 것을 담고 있지 못하다.

 

시가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다만 간략한 그 표현 속에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들은 무궁무진한데, 그걸 읽어내는 재미가 바로 시다. 마찬가지로 스케치다. 여행 스케치. 그 스케치를 통해 우리는 작가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작가는 스케치를 통해 무엇을 가져왔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발견이다. 발견의 기쁨.

 

이 기쁨은 건축을 다르게 보게 한다. 건축을 보는 눈을 갖게 한다. 건축을 바라보는 마음을 지니게 한다. 그래서 스케치는 시다. 건축은 인문학이다.

 

하지만 정기용은 말한다. 이러한 스케치로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보충하는 수단으로 언어를 동원한다고. 이 책에 나와 있는 스케치와 함께 하는 언어들은 그 자체로 시다. 너무도 많은 울림이 있는.

 

그래서 이 책을 보면서 건축에 대해서 생각하면서도 시를 느끼게 된다. 시를 읽는 것만큼 마음의 울림을 느끼게 된다. 고맙다. 건축이라는 유형물을, 어떻게 보면 딱딱한 고체인 건축을 부드러운 무형물로 바꾸어주고 있다. 언제든지 변형이 가능한 그러한 무형물로 건축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말하는 건축들은 장소를 지니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기억과 함께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장소고, 이 장소에는 역사가, 삶이 담겨 있다. 그런 공간을 그는 스케치와 글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뿐이다.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책을 펼쳐 읽으면 된다. 읽으면서 마음의 울림을 경험하면 된다.

 

삭막한 현대 도시... 그러나 이 도시에서도 우리는 울림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건축을 보는 눈이 아닐까 한다. 그 점을 정기용의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게 보는 세계 명화 - 스테파노 추피가 들려주는 그림 이야기
스테파노 추피 지음, 고종희 옮김 / 다섯수레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에 읽었던 "그림의 목소리"라는 책과 발상이 비슷하다. 다만 "그림의 목소리"는 시인이 감상자의 자리에서 그림에 대해서 감정이입을 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이 책은 미술사가가 그림에 대해서 좀더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기 위해서 썼다는 차이가 있다.

 

글쓴이는 말한다.

 

"걸작은 환상에 불을 지피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꿈,환영, 비밀, 신비의 세계로 인도하지요.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 느낀 감동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작품 하나하나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읽어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정된 하나의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글쓴이의 말에서)

 

이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이리라. 작품에 대해서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을 공유하고 싶은 것. 다른 사람들 역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 그리고 이야기들을 읽어내는 것.

 

미술이 그냥 외부의 존재로만 있지 않고 사람들의 내부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이야기로 다시 존재하게 되게 하기 위한 책. 그런 책을 쓰는 미술사가.

 

시인이 그림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할 때도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고, 사실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를 하게 하되, 어느 정도는 상상력이 가미되었다고 한다면, 이 책 역시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림을 이야기로 번역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이 하나의 단편소설로 전환이 된 결과가 이 책이라고 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나아가면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내용을 머리 속에서 그리게 된다면 이 책은 하나하나의 단막극이 되기도 한다.

 

단편소설이나 단막극에서 상상력이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것은 엄연히 사실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마치 역사소설이 상상력이 들어갔지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듯이.

 

그래서 글쓴이는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 소설을 읽는 느낌을 가지겠지만, 내용들은 엄연한 사실이라고. 따라서 그림에 대한 지식, 그 그림에 얽힌 이야기, 화가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이 책의 내용 전부가 나만의 이야기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일부이거나 전부가 기록,기억, 저술, 그리고 작가와 당대인의 증언들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실존 인물입니다. 따라서 각 상황과 장면, 그리고 환경은 가장 신뢰할 만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글쓴이의 말에서)

 

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작가노트"라는 항목이 있어서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전해주고 있어서 미술책으로써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런 편제도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작가와 작품 목록을 보자. 아마 너무도 유명해서 많이 본 그림들도 있을테지만, 그 그림에 대해서도 색다른 시각에서 이야기를 펼쳐가기에 안다고 해서 읽는 재미가 반감되지는 않는다.

 

조토 디 본도네, 스크로베니 예배당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안드레아 만테냐, 곤치가 가문             산드로 보티첼리, 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조르조네, 세 철학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아담의 창조        라파엘로 산치오, 시스티나의 성모

티치아노 베첼리오, 페사로의 제단화        피터르 브뤼헐, 눈 속의 사냥꾼들

카라바조, 성 마태오의 소명               렘브란트 반 린, 야간 순찰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얀 베르메르, 사랑의 편지

프란시스코 고야, 돈 루이스 왕자 가족      윌리엄 터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에드가 드가, 오페라 극장의 발레 수업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조르주 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파블로 피카소, 곡예사 가족

바실리 칸딘스키, 붉은 얼룩이 있는 그림

 

이런 책을 읽으면서 상상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미술책을 쓰는데 이런 발상을 한다는 것, 물론 그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쓰는 경우는 많았지만, 작품 내에 들어가거나 화가가 되어서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

 

벌써 이런 책을 두 권째 읽었다. 서양에서는 이런 일이 많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내가 받은 미술교육에서는 작품을 두고 작품의 인물이나 화가가 되어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하는 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데...

 

요즘 학생들은 받으려나? 적어도 이 책의 글쓴이가 말한 "진실"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림을 앞에 두고 다양한 관점에서 그림에 대해 말하고, 그림을 통해 자신을 말할 수 있는 그런 교육이 필요할텐데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런 미술 교육이 "점수"로 "측정"될 수 있을까? 점수로 측정되지 않아도 이런 미술 교육이 정말 필요한 것 아닐까.

 

그래야 작품을 보고 환상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하고,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게 될텐데... 더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될텐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부 상처 - 학습 부진의 심리학 : 배움의 본능 되살리기, 개정판
김현수 지음 / 에듀니티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는 누구나를 막론하고 공부에 대한 상처가 있다.

 

잘하는 아이는 잘하는 아이 대로, 못하는 아이는 못하는 아이 대로 제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오죽하면 학업성취는 높으나 학업에 대한 만족도는 낮은 상태를 유지하겠는가. 그런데도 아이들을 교육이라는 울타리에 가둬놓고 옴짝달짝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적어도 스스로 교육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최소한 12년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조금 낫다. 이들은 인정이라도 받고 지내니 말이다. 이와 반대로 공부 못하는 아이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천덕꾸러기가 되기 십상이다.

 

여기저기서 야단이나 맞고 잔소리나 듣고, 어떤 말을 해도 핑계에 불과하다는 소리를 듣고, 이들은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닌, 안하는 것이라는 태도를 지니게 된다.

 

속으로는 자신이 없으면서도, 공부를 하고 싶으면서도 드러난 성적에 대해서 자신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일부러 "공부 안 해!", "공부 왜 해?"라고 하면서 멀리 달아나려 한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에 대해서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공부 못하기를 바라는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공부 잘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뜻대로 안되고, 공부를 해도 해도 이상하게 제자리 걸음을 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아이들이 많지 않은가.

 

또 출발선부터 다른 아이들이 많지 않은가. 이 책 207쪽을 보면 가정 환경에 의해서 공부에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가정에서도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학습에서 어떻게 돌봄을 받겠는가. 이들은 지능을 떠나서 이미 환경에서 불평등을 경험하고 학교에 오게 된다.

 

학교는 이러한 불평등을 고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라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학교 교육과정에 있는 내용들 역시 어느 정도 경제적 우위에 있는 가정에 속해 있는 아이들에게 유리하지 않은가.

 

이런 점을 두루 살피면 공부 상처가 있는 아이들의 가정 환경은 우선 좋지 않다. 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학습에서 뒤떨어지게 된다. 한 번 뒤떨어진 학습 능력을 있는 집 아이들은 어떻게든 만회할 수가 있는데, 없는 집 아이들은 만회할 방법이 없다.

 

이들은 계속 학습 부진의 상태를 쌓아간다. 점점 더 쌓여가는 학습 부진. 그런 학습 부진이 이 아이들에게는 상처로 남아 더 이상 공부의 세계에 다가가지 않으려 한다. 도대체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 학교에서는 이러한 아이들에게 제대로 학습 부진에서 탈출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정해진 교과 시간, 교과 시험, 많은 학생들, 부족한 시간 등등이 이 아이들이 제자리 걸음을 하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은 이 점에서 아이들에게가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부 상처를 지닌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주려고 쓴 책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당연한,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 당연한 이야기가 가정에서, 학교에서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공부 상처를 준 것이니, 우리는 다시 당연한 방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떨 때는 답이 가까운 데 있고, 너무도 상식적인 것에 있을 때도 많은데, 아마도 공부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공부에 대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없으니, 아이의 특성에 맞게 기본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왜 공부를 하지 않으려 하는가 부터 파악을 하고, 아이의 성향이 어떤가 알아간 다음에, 아이에게 작은 성취를 느낄 수 있도록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선정하게 해서 그 목표를 달성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고, 그 다음에 이어서 계속 공부를 해나갈 수 있도록 해나가는 것.

 

무엇보다 아이와 신뢰관계를 쌓아야 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 이것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이런 기본을 지키는 것. 그것이 아이들이 공부로부터 상처받지 않도록 하는 일일텐데, 더 나아가서는 공부가 성적과 다르다는 점, 지금은 성적이 좋지 않을지 몰라도, 무언가를 끝까지 해냈다는 것 자체가 큰 공부라는 점을 아이들이 알게 해주는 일,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 아이들은 공부상처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그 상처를 치유할 사람들은 결국 상처를 준 어른들이지 않을까? 결자해지라고, 묶은 자들이 풀어야 한다.

 

해결책은 아이들이 지니고 있지 않다. 어른들이 쥐고 있다. 그 어른들이 외면하고 있을수록 아이들의 공부상처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이 책은 학교에서 학습과 관련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천천히 하나씩 해나가면 아이들이 어느 정도는 공부상처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방법과 더불어, 정말로 성적과 공부를 혼동하지 않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우리 어른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