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소년의 꿈
요시이에 히로유키 지음, 남도현 옮김 / 양철북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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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를 불량하게 보내다 훌륭한 어른이 된 사람의 이야기. 많이 들어온 주제 아니던가. 우리나라에서도 또 일본에서도 이런 류의 책은 많이 나오는데...

 

이런 자전적 이야기는 지나치게 감동적이라 오히려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뭐? 어짜라고?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온 과거는 아름답게 포장되기 마련이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는 말처럼, 이들은 어른이 되어 성공했기에 이런 자전적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방황을 하다가 그 방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오히려 예외적 인간이 각광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든가, 또는 성공보다는 행복을 추구하라는 자기계발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을 해보자. 왜 이런 자기성장 이야기가 아직도 나오는가? 그것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지금은 힘들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그런 희망에 대한 기대조차도 없어지면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단은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비록 성공할 확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성공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그토록 처절한 삶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포기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은 지금 자신이 처한 환경을 되돌아보게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고나 할까?

 

"불량소년의 꿈"

 

제목에 이미 나와 있다. 어린 시절 불량하게 지내던 아이가 어떤 계기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다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그렇다. 이 책의 지은이는 '사립 호쿠세이 고등학교'의 사회 교사다. 그리고 호쿠세이 고등학교는 우리나라로 치면 대안학교, 즉 학교부적응 학생이나 또는 기타 다른 이유가 있는 청소년들이 오는 학교다.

 

그는 어떻게 이 학교의 교사가 되었는가? 여기까지의 과정이 이 책의 앞부분을 이룬다.

 

가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비뚜루 나가게 되었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된 과정. 아동상담소를 거쳐 양부모에게 입양이 되고(이를 가정 위탁교육이라고 하면 될 듯), 여기서 넘쳐나는 여유 시간을 견디지 못해 책을 읽게 되고, 학교에 대한 그리움으로 당시 폐교가 될 위기를 전국에서 학업 포기 학생을 모집한다는 호쿠세이 학교에 가게 된 사연. 거기서 어떻게 버티어내고, 여기에는 늘 헌신적인 교사가 등장하고, 그런 교사에게 감화를 받고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하고 실현하려고 한다는 어쩌면 너무도 뻔한 내용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뻔한, 너무도 상투적인 내용임에도 술술 거부감 없이 읽히는 이유는, 지은이 자신이 대단하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그렇게 엇나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외로움, 두려움, 약함'이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겉으로 강하게 나가는 청소년들의 이면에 숨겨있는 나약함, 두려움, 외로움을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어른들의 이중성과 연결되어 더욱 강화되어 갈 뿐이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

 

후반부는 자신이 졸업한 학교의 교사가 되어 자신과 비슷한 방황을 겪는 아이들과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차피 책이 나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것인데, 지은이는 아이들과 함께 계속 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런 교사가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좋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갈등하고 화해하고, 그럼에도 떠나가고 떠나보내고, 속고 속이고, 실망하고... 이것들이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마치 몇 년에 학생들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 대안학교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적나라한 학교의 모습, 그럼에도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 우리나라 대안학교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보여주었던 책들과도 비슷한데, 우리나라 교육이 일본과 너무도 비슷한 점이 많으니 이는 당연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다 무시하더라도 한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한 책인데...

 

일탈은 강함에서 나오지 않고 약함과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청소년들에게는 충분한 시간, 정말로 심심해 미칠 지경까지 가야 하는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 또 그들에게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이야기해주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보여주는 교사, 무엇보다도 함께 싸우면서 생활할 수 있는 친구들, 그들을 모두 품을 수 있는 마을이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 책.

 

공부잘하는 모범생들이 주축이 된 우리나라 공교육 현장, 여기서 숨도 못 쉬고 뛰쳐나가는 일탈학생들, 그들을 백안시하는 사회, 도무지 생각할 시간도 없이 이리저리 굴리는 학습에의 강요.

 

이건 아니다 싶다. 교사들도 다양하게 선발하고, 아이들이 숨 쉴 수 있는 시간도 좀 주고... 그들끼리 함께 지내며 갈등을 겪고 해결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학교, 그런 학교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요시이에 히로유키.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런 책은 누가 읽어야 할까? 소위 말하는 불량청소년? 아니면 교사? 부모? 교육행정가?

 

글쎄... 읽고 싶은 사람이 읽으면 되겠지. 누가 읽어도 어느 부분에서 얻을 것이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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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 우리 시대의 질문 1
노명우 외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 현실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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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메르스, 지금 유행하고 있는 말이다. 재난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고라고도 하기도 하는데, 이를 다시 사건이라고 하면, 사고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았을 때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매르스를 사건이라고 하면 우리 사회는 너무도 많은 사건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 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이유는 사건을 제대로 해결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되려나.

 

메르스가 아직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무어라 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가면 메르스 역시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책임자는 없이 사고만 일어난 결과가 될 가능성이 많다. 하긴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을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겠지만, 방역을 통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을텐데, 그리 못하면 사건이 되는 것이지.

 

메르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질병의 사회학이라든지 하는 제목으로 질병에 관해서는 인문학적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질병을 나름대로 분석해낸다.

 

하지만 '세월호'라는 이름을 호명하면 모든 것이 멈춰버리고 만다. 아직도 2014년 4월 16일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 특별법'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도대체 이 법이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 메르스 때문에 방송이 되지 않으니 나같은 일반인들은 알 길이 없고.

 

아직도 바닷속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9명이나 있는데, 실종자 수색부터 배를 인양하는 문제까지 어느 하나도 말끔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객관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실종자, 인양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알려져 있지 않은 책임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면 예전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사고로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닌지.

 

'세월호' 하면 그래서 답답하다.

 

답답한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한데, 이 점에 대해서 인문학적으로 접근한 책이 나왔다.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이라고 되어 있는 이 책은 여러 사람들이 세월호에 대해서 인문학적으로 분석한 글들을 모았다.

 

어떤 책은 너무 이론적이다 싶을 정도여서 이런 내용을 일반인들이 꼭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기도 하지만, 이론이란 세상을 해석하는 틀을 제공하는 것이니, 어려운 글들도 우리들이 사건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며 '세월호'는 아직도 진행 중임을, 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됐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비대칭'이라는 말이 나온다. 국가권력을 비롯한 힘을 지니고 있는 세력에 맞서 약자들이 견딜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비켜서서 대응하기'가 아닐까 한다.

 

정면으로 맞서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살짝 비껴서서 정면으로 날아오는 힘을 미끌어지게 하기... 그것이 힘이 없는 사람들이 비대칭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비켜서서 맞서기는 우리들 모두에게 필요하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남아, 잊지 않고 사건을 해결하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세월호를 잊지 않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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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탐사와 산책 2
김석철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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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는 서울역 고가를 폐쇄하느냐 마느냐는 논쟁이 있었다. 서울역 고가를 차가 다니지 않게 하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든다는 서울시와 차량이 다니지 않으면 엄청난 교통체증과 남대문 시장 상인들의 생계에 지장을 줄 수 있어서 반대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었던 것.

 

 

차량이 다니지 않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가면 좋겠지만, 수십 년 동안 그곳에서 생계를 유지해온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장 덜 가는 방향으로 일이 추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이 단지 공무원일까? 시장이 바뀌었다고,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이렇게 도시 계획이 바뀔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정책을 내긴 하겠지만, 이 정책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장소로 만드는 일은 건축가가 한다.

 

건축은 그래서 토목이 아니다. 대학에서 5년이나 교육을 하는 이유도 건축은 그냥 건설을 지나서 삶을 재구성하는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주 짧은 기간에 엄청난 도시로 변모한 서울은 옛것과 현대적인 것이 어우러지는 곳이 되었어야 했으나, 이를 전체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개발만 서두르는 바람에 전통을 잃은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지금도 늦진 않았으리라. 서울이 또 우리나라 곳곳이 아직도 옛것을 지니고 있고, 옛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또 무조건 없애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으니, 옛것과 현대적인 것, 미래적인 것이 어울리게 장소를 만들어가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럴 때 예전에 건축에 종사한 사람들, 현대 건축을 이끌어 건축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과 그들의 건축을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유가 있을테고, 그들의 건축이 칭송을 받는 이유가 있을테니 말이다.

 

건축 전문가가 아닌 나같은 사람은 건축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좋아보이는 건축과 좋아보이지 않는 건축은 느낄 수 있으니, 현대 건축의 선구자들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둔다면 건축을 보는 안목이 조금은 높아지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건축을 보는 안목이 높아지면 그만큼 우리 삶의 질도 높아질테니... 안목이 높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에 엉터리 건축이 들어설 여지는 없기 때문에.

 

이 책에는 12명의 건축가가 나온다. 건축계에서는 모두 잘 알려진 사람이겠지만, 건축 책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나에게는 들어본 이름도 있고, 처음 듣는 이름도 있다.

 

그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토 바그너, 안토니오 가우디, 찰스 레니 매킨토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알바 알토, 루이스 칸, 루이스 바라간, 필립 존슨, 그리고 우리나라 건축가 김중업

 

이들은 각 나라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세계 건축을 대표할 만한 건축물을 남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 시대를 이끌었고, 후대에도 많은 영향을 준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 아니 건축을 하고자 한다면 이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를 생각했는데... 단지 이들의 작품을 모방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그것은 이들에게서 잘못 배운 것이다.

 

건축을 한다고 해서 건축에만 몰두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건축가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과학적, 수학적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예술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단지 설계만 잘한다고 해서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보면 그렇다. 시대를 읽고 그 시대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행복하게 자연과 사람과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를 건축 속에 담아내야 한다.

 

이들은 이를 실현해 내었다. 그래서 훌륭한 건축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슬퍼졌다. 우리나라 교육이 과연 이토록 훌륭한 건축가가 나올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가.

 

오로지 대학 입시를 위해 경주마처럼 내달리기만 하는 아이들, 논술이 중요하다니 아예 논술 모범답안을 외우는 아이들, 독서가 중요하다니 책의 내용을 요약해주는 학원이 성행하는 우리나라 사교육 현실, 무언가 깊이 고민하고 실행해 볼 시간을 지닐 수 없는 아이들, 자신의 앞날이 캄캄하다고 느끼는 젊은이들...

 

이들이 훌륭한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여유다. 정말로 심심할 시간이다. 심심해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심심해 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시간에서 인문학이 나오고 좋은 건축이 나온다.

 

이게 뒷받침 되지 않으면 훌륭한 건축은 물건너 간다. 지금 우리는 훌륭한 건축이 아니라 그냥 건설만이 판치는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은지... 되물어야 한다.

 

이 책에 나오는 12명의 건축가처럼 적어도 인류의 유산으로 무언가를 남길 건축가가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계속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어린이, 청소년 교육을 다시 생각해야 하고, 그 다음에 건축 교육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드니 책을 읽고 건축물들을 보는 즐거움이 뒤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앞길이 열려 있다. 좋은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많이 읽히면 우리들 생각도, 건축을 보는 우리들 눈도 서서히 변해 간다.

 

그때는 이 책에 실린 건축가들과 건축물들에 상응하는 건축들과 우리들이 함께 살고 있지 않을까. 

 

건축가에 대한 입문서로써 어렵지 않고 핵심을 간결하게 잘 짚어내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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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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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답답했다. 아니 답답함을 넘어 한심함까지... 딱히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쯧쯧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으니...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글이 대부분인 이 책은 그래서 읽은 부분도 있지만, 신문에 실린 시의성과는 달리 책으로 엮어졌을 때는 어떤 체계성이 느껴져서 더 역사책 다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읽으면서 정치는 사법부 출신들, 교수 출신들(그것도 경제학분야나 사회학 분야가 많은데)이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하는 편이, 아니 학자들은 먹물들 습성을 버리기 힘드니,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이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옛날에 왕이 되기 위해서는, 또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던가. 하다못해 동양의 성인인 공자도 자신이 스스로 역사책(춘추)을 쓰지 않았던가.

 

역사를 알지 못하고 정치를 하면 같은 잘못을 반복해서 할 수가 있고, 현재에서 과거를 발판으로 미래로 나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한국사가 학교에서 필수과목으로 지정이 되어 이제는 대학을 가고자 하는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배워야 하는데... 그런데, 과연 이런 식의 교육으로 바른 역사의식을 지닐 수 있는가 질문을 하면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고, 현재에서 과거를 해석하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역사는 그 자체로 존재하고, 숨길 수 없거나 속일 수 없는 일들이 있는데... 먼 후대에서라도 밝혀지는 진실이 있는데... 그런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가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하는데...

 

이 책에 나와 있는 역사는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다. 우리나라 현대사다. 멀어야 일제시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채 안된 역사를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잊고 있지는 않았나 싶다.

 

그렇게 역사를 망각의 늪에 빠뜨려버린 결과 우리나라 역사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얽혀 버렸는지 하나하나 풀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알렉산더처럼 한 칼에 자를 수는 없는 일. 그것이 통쾌해 보일지라도 알렉산더의 해결책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덮어버린 결과만 낳게 되니 말이다.

 

일제시대부터 꼬인 일들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기에 꼬이고 꼬여 지금 누구도 풀 수 없고, 또 풀려고 하지도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지도 모른다.

 

그것을 "역사와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분석해내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진 적이 있는가? 그 때 책임져야 했을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출세의 길을 달린 것이, 더 큰소리를 친 것이 바로 우리 현대사의 모습 아니던가.

 

그런 현대사의 민낯을 가감없이 보여준 것이 이 책이다.

 

우선 세월호부터 시작한다. 배를 버리고 팬티바람으로 탈출한 선장. 이 선장의 모습에서 6.25당시 서울을 버리고 한강다리도 끊어버리고 저 혼자 도망친 이승만을 떠올린다. 세월호 선장은 실형을 선고 받아 감옥생활이라도 하지만, 서울을 버리고 도주한 이승만은 돌아와서 오히려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처벌한다.

 

여기서 우리의 역사는 책임에서 벗어나 버렸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책임져야 할 자가 큰소리를 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다음에는 간첩사건이다. 실제로 간첩들이 존재했음은 이미 사실로 밝혀졌지만, 억울하게도 조작된 간첩사건이 있었음을, 그것도 엉성한 논리로 간첩으로 몰아갔음을,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때도 마찬가지다. 간첩 조작사건의 주역들이 처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우리 역사의 슬픈 모습.

 

간첩 조작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바로 내란죄, 내란 음모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다. 대통령이 된 자부터 유명 정치인까지 도대체 내란죄로 한 번 안 걸린 사람이 없을 정도니... 한 마디로 내란 공화국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내란 공화국에서 진정한 내란은 단 세 차례라고 한다. 5.16과 유신체제, 그리고 12.12에 연결되는 5.17. 그러나 이들은 모두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내란 사건들을 조작해 낸다.

 

정권에 위협이 되면 모두 내란이다. 이건 문제다. 국가와 정권을 의도적으로 혼동하고 있는 것인데...이런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는지 다시 내란 음모죄로 한 정당을 해산시켜버렸다.  

 

이 다음에는 지금 정권의 실세가 되어 있는 과거 실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주로 안 좋은 역사를 만드는데 참여 했던 사람이거나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다. 이들 중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이다.

 

그의 인생 역정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에고... 마지막 장은 야당에 대한 이야기.

 

야당이 바로 서야 정권교체고 뭐고 할 수 있는데, 야당이 야당답지 못하니 역사학자로서 야당이 어떨 때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지를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이야기에 과연 야당 정치인들이 귀를 기울였는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지금 현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우리나라  정치 역사는 정말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얽히고 설켰다. 어떻데 풀어야 할지 막막하게도 말이다.

 

그러나 역사는 계속 축적된다. 역사는 계속 공부된다. 이런 축적과 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역사를 기억한다. 기억한 역사는 재반복되는 것을 막는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더라도 차근차근 하나하나 풀어가면 언젠가는 풀리게 되어 있다. 결코 조급해서는 안된다.

 

이게 바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잘못을 알면 바로 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잘못인 줄 알고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을, 책임지지 않는 사람을 골라내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 얽혀 있는 '고르디우스의 매듭'. 이것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을 살아가고 있는 시민, 깨어 있는 시민이다. 역사는 정치가만이 아니라 시민들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토록 지리멸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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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421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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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발견한 이성복의 시집.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

 

제목이 특이하다. 표지에는 한글로 되어 있지만, 분명 한자다. 그런데 해석이 안 된다. 물론 책을 펼치면 해석이 되어 있다.

 

'신라 향가인 풍요(風謠)(공덕가)의 한 구절로서, '오다, 서럽더라'의 뜻으로 새겨진다. 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이 이두문자를 의역하면 '이곳에 와서, 같아지려 하다가, 슬픔을 맛보고, 맞서 대들다가,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로 이해되는데, 그 또한 본래의 뜻과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시인의 말에서

 

신라시대의 시라고 할 수 있는 향가 중 하나인 풍요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따 왔다는 것이다. 풍요는 공사에 동원된 농민들이 시름을 잊기 위해 불렀던 노동요라고 하는데...

 

이 시집에서는 그래서 슬픔, 죽음들이 많이 나온다. 무언가 분위기는 무거운데... 그래서 딱히 시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데... 자연 다큐멘타리를 떠올리는 '뚝지'라는 시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해서 머리 속에 선명한 영상으로 남게 되고...

 

시집의 제목과 같은 '래여애반다라'는 무언가 침울한 분위기를 한껏 풍기고 있는데, 그 분위기 속에서도 묘한 삶의 욕구가 느껴지고 있다.

 

힘들 때 부르는 노동요는 일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노래이기도 할테니, 이 시집에 나와 있는 죽음들은 결국 삶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가볍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시부터, 여러 번 읽고 곱씹어야할 시들까지 다양하게 실려 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직접 읽어보면 될 일을.

 

시집은 읽어야 한다. 한꺼번에 죽 읽어도 좋고, 또 한 편씩 한 편씩 음미하며 읽어도 좋고.

 

이 시집은 첫시가 '죽지랑을 기리는 노래'인데... 이는 향가의 '모죽지랑가'를 떠올리면 되고, 마지막은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이니, 이는 '찬기파랑가'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시집은 신라시대 향가에 대한 변주라고 보면 된다. 향가가 신라 시대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는 노래라면, 이 시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담고 있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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