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 살인법
저우둥 지음, 이연희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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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묻겠어. 왜 아이를 죽였지?"
"별거 없어요. 감옥에 갇히고 싶었어요, 평생."
천원칭이 가볍게 대답했다. 하지만 다이화는 여전히 믿을 수 없어 계속해서 물었다.
"교도소에 들어가고 싶어서... 아이를 죽였다고? 그런 거야?"
"네."
"왜 교도소에 갇히고 싶은데?"
"공짜 콩밥을 먹으려고요, 평생."          p.53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아이가 오락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어지간한 원한이 없이는 어린아이를 이렇게 잔인하게 살해할 리 없다고 판단한 경찰의 예상과는 달리, 검거된 범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당황스럽다. 자신이 죽인 아이의 이름도 몰랐고, 그저 감옥에 갇히고 싶어 아무나 죽였다는 거였다. 범인은 일자리를 찾아도 금방 잘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도 돈을 빌려서 이제 더 이상 빌릴 데도 없고, 그래서 평생 공짜 콩밥이나 먹겠다고 덤덤하고 단조로운 말투로 대답한다. 만약 아무나 죽여도 상관없었다면, 화장실에서 비참하게 죽은 아이의 미래는 누가 보상할 수 있는가. 이런 살인범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피해자 부모는 자식이 죽어야 했던 이유를, 그 슬픔을 감내할 수 있을까?

 

 

이유도 없고, 동기도 없는 무차별 살인, 묻지마 범죄는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인해 피해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왜 헤어나올 수 없는 아픔을 겪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수 없기 때문에 마음속 응어리가 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 현실에서도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마 범죄는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강남역 부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서울역 근처에서 발생한 폭행사건 모두 묻지마 범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말 두려운 것은 바로 이런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일 것이다. 누가 대상이 되어도 상관없는, 아무런 이유 없이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이 작품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사회에서 배척당한 실직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인 저우둥은 질문을 던진다. 피해자의 억울함을 씻어줄 방법은 과연 사형 뿐인가. 범인이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정의가 구현되는 것인가.

 

 

다이화는 리팡의 죽음과 관련해 살인범 주젠쭝 씨에게 분명 범죄 동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리 없다. 복수를 위해서 혹은 돈이나 치정 때문이다. 범인은 구치소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이제 아무도 그가 리팡을 플랫폼 아래로 민 이유를 알 수 없게 됐다. 다이화는 이해할 수 없었고, 심지어 분노했다. 윈즈는 왜 그런 인간을 변호하는 걸까? 리팡이 어떻게 죽었는지 벌써 잊었단 말인가?    p..320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타이완의 작가 저우둥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타이완에서 발생한 역대 무차별 살인 사건 관련 보도를 조사하고 전문가들의 해석을 분석했다. 그래서인지 단순히 스릴이나 재미적인 요소보다는 묻지 마 범죄의 동기와 배경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묻지마 범죄의 살인자를 변호하게 된 윈즈라는 인물이, 과거 무차별 살인 사건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던 적이 있는 피해자의 가족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윈즈는 그 일을 어렵게 맡기로 하면서 결심한다. 그의 죗값을 조금도 줄여 줄 마음이 없다고, 그의 곁에서 살인 동기에 대해 알아보고 묻지 마 살인의 발생 원인과 재발 방지 방법을 연구해 보겠다고. 한 인간이 살인범이 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린아이를 죽이고, 그걸로 콩밥을 먹겠다고 마음먹은 것에는 분명 어떤 배경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여론은 들끓고, 살인자의 정신 상태는 점점 이상해지고, 급기야 2심 때 법정에서 갑자기 진술을 바꿔 사형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지점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 가족, 피해자 가족 등 각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심리를 그려내고 있다는 거였다. 물론 무차별 살인 사건의 피해자 가족이 또 다른 무차별 살인 사건의 범인을 변호한다는 설정이 쉽게 공감이 될 수는 없었지만, 바로 그 부분으로 인해 이 작품이 특별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차별 살인범의 심리를 연구해 또 다른 피해자의 발생을 막겠다는 주인공의 결심이 작가가 이 작품을 구상하고 그려내게 된 동기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살인범을 교도소에 가두기만 하면, 사회에서 제거하기만 하면 안전을 장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무섭고, 슬프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런 작품들이 현실에 던지는 질문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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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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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서 나도는 이야기를 그럭저럭 그러모아 늘어놓은 뒤, 이 사회에서 기꺼이 허용하는 수준의 비판의식을 첨가하고,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타자에 대한 공감 의식을 고명처럼 살짝 얹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신중한 제언을 첨부하는, 크게 흠잡을 데는 없으나 어떤 강렬한 인상도 남기지 않는 말과 글에 대해서 우리는 요구할 수 있다, 좀 더 창의적이 되라고. 목전의 상황에서 가능한 여러 선택지들을 나열하고, 그 선택지들이 가져올 편익과 비용을 계산해서 보여주지만, 그 어떤 선택지도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할 때 우리는 요구할 수 있다, 좀 더 창의적이 되라고. 창의적이 되어라. 그러나 이 말처럼 답답한 요구도 드물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p.131~132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파격적인 제목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사실들에 대한 뼈 때리는 질문들을 들려주었던 김영민 교수가 이번에는 '공부'에 관한 거창한 제목으로 다시 돌아왔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 당시 SNS상에 무수히 도배되며 가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었는데, '공부란 무엇인가'라니, 공부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어떻게 전환시켜줄 지 매우 기대가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공부'란 입시 제도와 수험생들에게나 해당되는 것 아니냐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교 입시가 끝나자마자 책이라고는 쳐다 보지도 않는 대학생, 직장인들이 꽤 많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공부는 입시와 취업 이후에도 계속 되어야 한다. '어떤 공부도 오늘날 우리가 처한 지옥을 순식간에 천국으로 바꾸어 주지는 않겠지만, 탁월함이라는 별빛을 바라볼 수 있게는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김영민 교수는 공부의 기초부터 심화까지, ‘생각의 근육’을 길러주는 리드미컬한 공부 조언을 들려준다. 맥락에 맞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방법, 모순 없는 문장을 사용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방법,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함의와 그 배경, 학문의 길에서 특별히 중요한 요소인 체력 기르기, 독서의 가치와 다독과 정독의 방법, 책을 읽고 나서 서평을 쓰는 방법, 자신만의 인덱스를 만드는 자료 정리 방법, 좋은 질문을 찾는 방법, 주제 설정의 기술 등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하다. 특히나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지식을 주입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깨우치기를 유도하는 소크라테스식 문답 형식에 진지한 내용도 웃게 만드는 특유의 유머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독도 해야 하고 정독도 해야 한다니, 그걸 언제 다해요? 이 짧은 인생에 책만 읽다가 죽으란 말인가요? 그럴 리가. 살면서는 책 읽기 말고도, 출근하기, 설거지하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멍 때리기, 실없는 얘기 하기, 개소리 참고 들어주기, 가려운 데 긁기 등 다른 할 일들이 많다. 그 와중에 책을 정독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빠른 속도로 다독을 하여 정독의 대상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읽는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p.142

 

인상적인 대목이 많았지만, 서평을 오랜 시간 써온 독자로서 '하나의 전체로서 책에 대해 말하기, 서평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 특히 시선을 잡아 끌었다. 서평의 기본적인 기능부터 기본적인 내용 요약에도 맥락(context)을 부여해야 하고, 내용 소개에만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비평이 담겨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서평은 책을 읽은 뒤에 자신이 느끼는 바를 쓰는 독후감과 다르며, 잠재적 독자가 해당 책을 읽고 싶게 만들어야 하는 추천사와도 다르고, 출판계 전반의 현황과 흐름을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출판 비평과도 다르다. 그리고 '서평은 서평 대상이 된 책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만큼이나 그 서평을 한 사람에 대해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것을 말해준다'는 점도 잊어 버리지 말아야 한다. 서평에는 서평 대상이 된 책에 대한 것뿐 아니라, 서평자 자신의 지력, 매력, 멍청함, 편견 등이 대대적으로 드러나 보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꽤 오랜 기간, 아주 많은 책을 읽고 서평을 써왔기에 가끔은 타성에 젖은 듯 메마른 글이 되기도 하고, 누구나 느끼는 감정을 누구라도 말할 법한 표현으로 대충 스는 경우도 많았는데, 김영민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나를 좀 돌아보게 된 느낌이었다.

 

이 책은 <중앙SUNDAY>에 1년 7개월여간 연재한 '공부란 무엇인가' 칼럼에서 시작되었다. 김영민 교수는 이 글들을 쓰면서 '공부란 대학에 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것이며, 대학에 가서는 무엇을 어떻게 배우면 좋은지에 대한 논의들'을 담았다. 독서와 토론과 글쓰기 같은 공부의 방법론부터 공부의 기초부터 심화까지, ‘생각의 근육’을 길러주는 조언들을 들려준다.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마 다들 평생 해본 적도, 생각한 적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만나기 전에는 그러했고 말이다. 평생 공부하는 삶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궁금하다면, 정신의 날 선 도끼를 찾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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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 올리버 색스 평전
로런스 웨슐러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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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올리버가 동료들 앞에서 한 환자의 사례를 정확하고 신중하게 설명했는데, 내가 보는 견지에서 - 나는 때마침 그 자리에 있었다 - 그의 임상적 기술은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동료들은 별다른 감응이 없는듯 싶었다. 그는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가끔 그런다. 올리버의 가장 대단한 점은, 예술과 과학을 재결합하려는 욕구가 강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람들을 분개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빌어먹을, 그는 과학자가 아니야. 그의 저술에서 예술과 언어의 유희를 발라내야 해."      p.68

 

로런스 웨슐러는 <뉴요커>의 전속작가로서 올리버 색스의 전기를 집필 중이었다. 로런스 웨슐러와 올리버 색스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했고, 그는 약 15권의 노트를 인터뷰 내용으로 빼곡히 채웠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올리버는 그에게 전기 집필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2015년 8월, 색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전기를 완성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30년도 훌쩍 넘게 중단되었던 올리버 색스의 전기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이 책은 올리버 색스의 30년 지기 절친한 지인이자 전기 작가인 로런스 웨슐러가 쓴 올리버 색스 평전이다. 자서전 <온 더 무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올리버 색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담겨있어서 대단히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고맙습니다> <깨어남> <나는 내 침대에서 다리를 주웠다> <편두통> 등 올리버 색스가 남긴 작품들의 집필 과정과 출간에 이르는 배경 등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특별한 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자서전'이라는 형식과 '평전'이라는 형식이 갖고 있는 장단점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평전'이라는 것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것 같다.

 

 

그의 말을 들으니 문득 가슴이 뭉클한다. 그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경과의사가 아니라 임상존재학자이며, 그가 주로 사용하는 진단용 질문은 "어디가 아프세요?"가 아니라 "어떻게 지내세요? How ara you?", 즉 "어떻게 존재하세요? How do you be?"다.  
"나는 키르케고르 철학자로서, 개인이라는 범주를 다뤄. 그러므로 나는 개인을 치료하는 의사이지, 신경계를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야. 때로는 개인과 신경을 함께 돌보기도 해. 그러나 나의 공놀이 상대는 신경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이야."    p.328

 

나는 로런스 웨슐러가 올리버 색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그의 인간적인 면모나 소소한 성격, 생활 환경 등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좋았다. '색스는 비이성적인 것을 낭만적으로 사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인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지도 않는다(p.26)' 라든가, '나는 그에게 말을 걸 때, 가끔 이 친구가 딴 사람에게 대답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자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데 골몰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대화상대인 나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p.75) 라는 식의 표현들에서 색스에 대한 애정 어린, 그리고 섬세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았던 것 같다. 로런스 웨슐러는 올리버 색스 만년의 공개 강연 프로젝트를 주도했으며, 암과 싸우던 올리버 색스의 곁을 올리버의 연인이었던 빌 헤이스와 함께 끝까지 지켰다.

 

이 책에는 올리버 색스와 교감을 나눈 수많은 인물들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어, 올리버 색스라는 한 인물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만날 수 있다. 영국의 시인 톰 건, 올리버의 가장 가까운 친척, 올리버와 함께 병원에서 근무했던 마지 콜, 고서 수집상이자 올리버의 죽마고우인 에릭 콘, 저명한 내과의사이자 희극 배우인 조너선 밀러 등등 다양한 시기에 올리버와 시간을 함께 보낸 이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저자가 올리버와 함께 나눈 전화통화, 그가 손으로 쓴 편지, 대화 내용 등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그의 업적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진짜 한 인간적인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어떤 종류의 소설책이 청년 올리버를 사로잡았는지에 대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올리버는 는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셰익스피어와 <모비딕>만 있으면 족하다고 말한다. 한 편집자가 자신에게 헤밍웨이처럼 여백의 미를 추구하라고 했다는 이유로, 헤밍웨이를 무척 싫어했고, 디킨스의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삶 자체였으며, 자신은 셰익스피어를 구구단표와 함께 외웠다고 말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올리버에게 존재함은 곧 행동함이었다'는 저자의 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올리버 색스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이 책을 읽어야 비로소 올리버 색스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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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7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09-07 14:44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고맙습니다>를 아직 못읽었는데.. 챙겨보겠습니다^^

2020-09-07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8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09-08 22:32   좋아요 0 | URL
와. 구매하셨군요! 책과 함께 즐거운 시간되시길! ^^
 
그럼 무얼 부르지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4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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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잘하게 되는 데 필요한 건 열심히가 아니라고 그게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로 보여도 당사자에겐 아니라니까 열심히가 아냐 무작정이 아니란 말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있는 항목이 당사자와 함께 달려 나가는 거에 가깝다니까.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 검은 옷 당신의 말처럼 열심히의 세계로 만들어진 노래가 자기의 몸을 부수고 세상에 던져질 만큼 튼튼해? 게다가 열심히로 만들어진 노래라니 조금도 듣고 싶지 않잖아. 안 그래? 정말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생각이라는 것을 했는데 아니라고 생각해.     -'안 해' 중에서, p.53

 

박솔뫼의 첫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는 2014년 출간 당시 이 작품집으로 김승옥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나 이번에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 총서' 시리즈로 재출간되었다. <오늘의 작가 총서>가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2000년대 이후 출간작 중, 문학적 가치와 소설적 재미가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으로 독자를 만나기 어려웠거나, 다시 단장할 필요가 있는 5종의 소설을 동시에 선보였다. 신작이 아니라 독자들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기존 작품들을 새로운 표지로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이번에 만난 작품은 표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전혀 다른 작품처럼 느껴지는데,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들에 대한 사유가 근사하게 표현된 이미지라 작품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소설집에는 지명을 공유하는 작품이 두 작품 있고, 공간과 등장 인물이 공통적인 작품이 두 작품 있다. <안 해>라는 작품에서는 노래방에 손님을 가둬두고 막무가내로 노래를 시키는 검은 옷 남자가 등장한다. 여고생 두 명이 손님으로 오면 한 명은 노래를 계속 부르도록 시키고, 같이 온 친구는 노래방 뒤에 있는 방에 가둬두는 식이다. 노래를 부르던 여고생이 밖으로 나가려 하면, 문을 발로 차고 가둔다. 검은 옷 남자는 어떤 기준에선지 사람들을 고른 후 가두었고, 누군가는 가두지 않고 계속해서 노래를 시킨다.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정말로 열심히 부르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되면 그때 그 사람의 노래가 완성되는 거라는 이야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데, 물론 무작정 노래를 해야 하는 당사자는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 중에 누군가가 기세 좋게 남자의 논리를 거부한다. ‘구름새 노래방’이라는 공간과 ‘검은 옷 남자’라는 노래방 사장은 <그때 내가 뭐라고 했냐면>이라는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하지만 두 작품을 연작이라고 보기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그래서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여름이 끝나고 나는 수도로 돌아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책을 읽던 남자가 말했던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해하고 나자 그 말은 당연하게 여겨져 어째서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는지 오히려 의아했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지? 어느 때고 그렇지? 여전히 나는 가볍고 바람이 통과하고 흔들거리고 텅 비어 있고, 질문들은 빈 공간을 빠져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돌아가고 싶어지는 때도 없다. 언제나 그랬지만 다시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게 어떻지는 않았다. 사라지는 것을 계속 지켜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해만' 중에서, p.93

 

<해만>과 <해만의 지도>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해만'은 육지로부터 배로 다섯 시간이 걸리는 섬이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섬에서 서너 달 머무르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의 돈이 생겨 해만에 가게 된다. 그곳을 알게 된 것은 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존속 살인을 한 범죄자가 해만에 숨어들어 한참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관광지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고, 볼거리도 없는 그곳에 가게 된 이유치고는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곳은 마냥 안온하거나 평화로운 공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그곳에 온 여행자들이었다. 이야기는 그곳 여행자들의 숙소를 중심으로 어린 대학생, 책을 읽던 남자, 직장을 그만두고 온 '나'를 비롯해서 섬에 들어왔다는 존속살해범의 여동생이라 자처하는 여자까지 자발적으로 육지를 떠나 그곳을 찾아온 이들의 사연을 풀어낸다.

 

그 밖에도 5.18을 겪지 않은 세대가 '광주'라는 사건에 대해 갖는 역사적 태도를 보여주는 <그럼 무얼 부르지>, 사람이 테이블이 되어 가는 이상한 상황을 그리고 있는 부조리극 분위기의 <안나의 테이블>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박솔뫼의 소설들은 독특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쉽게 잘 읽히지만 다 읽고 나면 무슨 얘기인가 싶은 게 있고, 연작처럼 보이는 작품임에도 뭔가 어긋나 있다. 잔잔하게 흘러가던 서사가 갑작스레 돌발적인 곳으로 향하기도 하고, 삶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결여한 것처럼 보이던 인물에게도 욕망이 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고, 작가의 색깔이 뚜렸하다는 점이 박솔뫼의 소설들이 가지는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서사의 '재미'적인 요소는 조금 덜하지만,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를 읽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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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제린
크리스틴 맹건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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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를테면 이런 느낌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했다―평범한 우정보다는 조금 더 날카로운 어떤 것, 나를 압도할까봐, 어쩌면 나를 파괴할까봐 두려운 어떤 것. 때로는 그녀를 원한다기보다는 그녀처럼 되고 싶은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두 감정은 너무도 강렬하고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었지만 끊임없이 합쳐지고 뒤섞여서 어느 순간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녀가 지닌 느긋한 삶의 방식을 탐했고, 그것을 갈망했다. 그것이 그녀의 존재 방식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 것이기를 바랐다.     p.118

 

앨리스는 자신의 후견인이자 유일한 가족인 고모가 소개해준 남자 존과 충동적으로 결혼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프리카, 모로코의 탕헤르로 이주해 새 출발을 해보기로 한다. 사실 존은 그녀가 꿈꿔왔던 이상형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시끄럽고 사교적이고 자신만만했으며 종종 무모한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약속들과 꿈들을 선택하기로 한 것은, 그가 제시한 것이 바로 기회였기 때문이다. 다 잊을 기회, 지난 일은 묻어두고 돌아설 기회. 하루 종일 매 순간, 그날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지 않을 기회. 일 년 전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그녀는 그 일을 과거 속에 묻어두고 눈을 감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모로코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탕헤르의 뜨거운 열기가 벅차기만 하다. 그렇게 일종의 광장공포증을 겪으며 집안에만 틀어박힌 나날이 이어지고, 남편은 아내를 내버려두고 신비한 도시 탕헤르와 사랑에 빠져 밖으로만 나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가 앨리스를 찾아 온다.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루시는 앨리스와 미국의 베닝턴대학에서 룸메이트로 처음 만났다.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온 앨리스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장학금으로 대학에 입학한 루시는 서로에게 매혹되었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참혹한 그날의 사건 이후로 모든 게 틀어져버렸다. 앨리스는 버몬트를 떠나 모로코의 먼지 날리는 골목길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순간들 속에서 단 한 번도 루시를 다시 볼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너무도 친밀하고, 익숙해서 때로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인 것 같다는 기분까지 느꼈던 존재였지만,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존재가 다시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앨리스는 당혹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루시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끔찍한 과거를, 따분한 현재를, 제값을 하는 점술가라면 누구라도 지치고 서글픈 나의 손바닥을 통해 읽어낼 수 있었을 암울한 미래를 잊었다. 낡은 택시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서, 모로코의 울퉁불퉁하고 구불거리는 길을 달리는 택시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바람과 모래가 내 얼굴을 때리도록 내버려두면서, 그런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리고 거의 성공했다. 가슴이 아리도록 근사했던 그 몇 시간 동안―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이따금 행복감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p.203

 

앨리스와 루시는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지만, 두 가지 다른 버전의 탕헤르에 있었다. 앨리스는 루시의 탕헤르를 상상할 수 없었고, 루시가 알고 있는 앨리스의 탕헤르 또한 현실과 달랐다. 탕헤르,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닌 이상한 무법의 도시. 아프리카대륙 북쪽 끝,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항구도시 탕헤르는 오랜 세월 여러 서구 열강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이 작품은 모로코가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독립을 되찾은 해인 195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독립을 향한 모로코인들의 뜨거운 열망이 끓어오르던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좁다란 골목길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시가지 곳곳에 긴 세월 쌓여온 역사와 비밀을 감추고 있는 탕헤르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국적인 풍경들은 서사를 완성시키고, 인물들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독자들이 넋을 빼놓고 빠져들도록 최면을 건다.

 

크리스틴 맹건이라는 처음 만나는 낯선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단 몇 페이지 만에 이 소설에 반해버렸다. 도무지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심리적인 통찰력, 예민하고 근사한 문장, 숨을 들이켜면 탕헤르의 냄새가 날 것 같은 생생함이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 작품에 대해 "도나 타트와 길리언 플린과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히치콕이 연출한 작품 같다."고 말했다. 특히 이 작품은 히치콕스럽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는데, 실제로 조지 클루니 제작, 스칼릿 조핸슨 주연으로 영화화가 확정되어 있다고 하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탕헤르는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길로 이루어진 메디나와 고지대에 있는 성채 카스바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언젠가는 꼭 한번 탕헤르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두 여성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욕망과 집착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갈지, 탕헤르에서 그들이 함께하는 여정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해도 좋다. 놀라운 서스펜스와 숨막히게 매혹적인 악몽을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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