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제린
크리스틴 맹건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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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를테면 이런 느낌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했다―평범한 우정보다는 조금 더 날카로운 어떤 것, 나를 압도할까봐, 어쩌면 나를 파괴할까봐 두려운 어떤 것. 때로는 그녀를 원한다기보다는 그녀처럼 되고 싶은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두 감정은 너무도 강렬하고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었지만 끊임없이 합쳐지고 뒤섞여서 어느 순간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녀가 지닌 느긋한 삶의 방식을 탐했고, 그것을 갈망했다. 그것이 그녀의 존재 방식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 것이기를 바랐다.     p.118

 

앨리스는 자신의 후견인이자 유일한 가족인 고모가 소개해준 남자 존과 충동적으로 결혼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프리카, 모로코의 탕헤르로 이주해 새 출발을 해보기로 한다. 사실 존은 그녀가 꿈꿔왔던 이상형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시끄럽고 사교적이고 자신만만했으며 종종 무모한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약속들과 꿈들을 선택하기로 한 것은, 그가 제시한 것이 바로 기회였기 때문이다. 다 잊을 기회, 지난 일은 묻어두고 돌아설 기회. 하루 종일 매 순간, 그날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지 않을 기회. 일 년 전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그녀는 그 일을 과거 속에 묻어두고 눈을 감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모로코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탕헤르의 뜨거운 열기가 벅차기만 하다. 그렇게 일종의 광장공포증을 겪으며 집안에만 틀어박힌 나날이 이어지고, 남편은 아내를 내버려두고 신비한 도시 탕헤르와 사랑에 빠져 밖으로만 나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가 앨리스를 찾아 온다.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루시는 앨리스와 미국의 베닝턴대학에서 룸메이트로 처음 만났다.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온 앨리스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장학금으로 대학에 입학한 루시는 서로에게 매혹되었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참혹한 그날의 사건 이후로 모든 게 틀어져버렸다. 앨리스는 버몬트를 떠나 모로코의 먼지 날리는 골목길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순간들 속에서 단 한 번도 루시를 다시 볼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너무도 친밀하고, 익숙해서 때로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인 것 같다는 기분까지 느꼈던 존재였지만,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존재가 다시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앨리스는 당혹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루시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끔찍한 과거를, 따분한 현재를, 제값을 하는 점술가라면 누구라도 지치고 서글픈 나의 손바닥을 통해 읽어낼 수 있었을 암울한 미래를 잊었다. 낡은 택시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서, 모로코의 울퉁불퉁하고 구불거리는 길을 달리는 택시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바람과 모래가 내 얼굴을 때리도록 내버려두면서, 그런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리고 거의 성공했다. 가슴이 아리도록 근사했던 그 몇 시간 동안―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이따금 행복감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p.203

 

앨리스와 루시는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지만, 두 가지 다른 버전의 탕헤르에 있었다. 앨리스는 루시의 탕헤르를 상상할 수 없었고, 루시가 알고 있는 앨리스의 탕헤르 또한 현실과 달랐다. 탕헤르,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닌 이상한 무법의 도시. 아프리카대륙 북쪽 끝,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항구도시 탕헤르는 오랜 세월 여러 서구 열강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이 작품은 모로코가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독립을 되찾은 해인 195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독립을 향한 모로코인들의 뜨거운 열망이 끓어오르던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좁다란 골목길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시가지 곳곳에 긴 세월 쌓여온 역사와 비밀을 감추고 있는 탕헤르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국적인 풍경들은 서사를 완성시키고, 인물들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독자들이 넋을 빼놓고 빠져들도록 최면을 건다.

 

크리스틴 맹건이라는 처음 만나는 낯선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단 몇 페이지 만에 이 소설에 반해버렸다. 도무지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심리적인 통찰력, 예민하고 근사한 문장, 숨을 들이켜면 탕헤르의 냄새가 날 것 같은 생생함이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 작품에 대해 "도나 타트와 길리언 플린과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히치콕이 연출한 작품 같다."고 말했다. 특히 이 작품은 히치콕스럽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는데, 실제로 조지 클루니 제작, 스칼릿 조핸슨 주연으로 영화화가 확정되어 있다고 하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탕헤르는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길로 이루어진 메디나와 고지대에 있는 성채 카스바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언젠가는 꼭 한번 탕헤르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두 여성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욕망과 집착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갈지, 탕헤르에서 그들이 함께하는 여정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해도 좋다. 놀라운 서스펜스와 숨막히게 매혹적인 악몽을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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