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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평점 :
시중에서 나도는 이야기를 그럭저럭 그러모아 늘어놓은 뒤, 이 사회에서 기꺼이 허용하는 수준의 비판의식을 첨가하고,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타자에 대한 공감 의식을 고명처럼 살짝 얹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신중한 제언을 첨부하는, 크게 흠잡을 데는 없으나 어떤 강렬한 인상도 남기지 않는 말과 글에 대해서 우리는 요구할 수 있다, 좀 더 창의적이 되라고. 목전의 상황에서 가능한 여러 선택지들을 나열하고, 그 선택지들이 가져올 편익과 비용을 계산해서 보여주지만, 그 어떤 선택지도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할 때 우리는 요구할 수 있다, 좀 더 창의적이 되라고. 창의적이 되어라. 그러나 이 말처럼 답답한 요구도 드물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p.131~132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파격적인 제목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사실들에 대한 뼈 때리는 질문들을 들려주었던 김영민 교수가 이번에는 '공부'에 관한 거창한 제목으로 다시 돌아왔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 당시 SNS상에 무수히 도배되며 가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었는데, '공부란 무엇인가'라니, 공부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어떻게 전환시켜줄 지 매우 기대가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공부'란 입시 제도와 수험생들에게나 해당되는 것 아니냐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교 입시가 끝나자마자 책이라고는 쳐다 보지도 않는 대학생, 직장인들이 꽤 많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공부는 입시와 취업 이후에도 계속 되어야 한다. '어떤 공부도 오늘날 우리가 처한 지옥을 순식간에 천국으로 바꾸어 주지는 않겠지만, 탁월함이라는 별빛을 바라볼 수 있게는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김영민 교수는 공부의 기초부터 심화까지, ‘생각의 근육’을 길러주는 리드미컬한 공부 조언을 들려준다. 맥락에 맞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방법, 모순 없는 문장을 사용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방법,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함의와 그 배경, 학문의 길에서 특별히 중요한 요소인 체력 기르기, 독서의 가치와 다독과 정독의 방법, 책을 읽고 나서 서평을 쓰는 방법, 자신만의 인덱스를 만드는 자료 정리 방법, 좋은 질문을 찾는 방법, 주제 설정의 기술 등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하다. 특히나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지식을 주입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깨우치기를 유도하는 소크라테스식 문답 형식에 진지한 내용도 웃게 만드는 특유의 유머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독도 해야 하고 정독도 해야 한다니, 그걸 언제 다해요? 이 짧은 인생에 책만 읽다가 죽으란 말인가요? 그럴 리가. 살면서는 책 읽기 말고도, 출근하기, 설거지하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멍 때리기, 실없는 얘기 하기, 개소리 참고 들어주기, 가려운 데 긁기 등 다른 할 일들이 많다. 그 와중에 책을 정독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빠른 속도로 다독을 하여 정독의 대상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읽는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p.142
인상적인 대목이 많았지만, 서평을 오랜 시간 써온 독자로서 '하나의 전체로서 책에 대해 말하기, 서평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 특히 시선을 잡아 끌었다. 서평의 기본적인 기능부터 기본적인 내용 요약에도 맥락(context)을 부여해야 하고, 내용 소개에만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비평이 담겨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서평은 책을 읽은 뒤에 자신이 느끼는 바를 쓰는 독후감과 다르며, 잠재적 독자가 해당 책을 읽고 싶게 만들어야 하는 추천사와도 다르고, 출판계 전반의 현황과 흐름을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출판 비평과도 다르다. 그리고 '서평은 서평 대상이 된 책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만큼이나 그 서평을 한 사람에 대해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것을 말해준다'는 점도 잊어 버리지 말아야 한다. 서평에는 서평 대상이 된 책에 대한 것뿐 아니라, 서평자 자신의 지력, 매력, 멍청함, 편견 등이 대대적으로 드러나 보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꽤 오랜 기간, 아주 많은 책을 읽고 서평을 써왔기에 가끔은 타성에 젖은 듯 메마른 글이 되기도 하고, 누구나 느끼는 감정을 누구라도 말할 법한 표현으로 대충 스는 경우도 많았는데, 김영민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나를 좀 돌아보게 된 느낌이었다.
이 책은 <중앙SUNDAY>에 1년 7개월여간 연재한 '공부란 무엇인가' 칼럼에서 시작되었다. 김영민 교수는 이 글들을 쓰면서 '공부란 대학에 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것이며, 대학에 가서는 무엇을 어떻게 배우면 좋은지에 대한 논의들'을 담았다. 독서와 토론과 글쓰기 같은 공부의 방법론부터 공부의 기초부터 심화까지, ‘생각의 근육’을 길러주는 조언들을 들려준다.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마 다들 평생 해본 적도, 생각한 적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만나기 전에는 그러했고 말이다. 평생 공부하는 삶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궁금하다면, 정신의 날 선 도끼를 찾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