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슐츠 씨 -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
박상현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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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문제는 남성과 여성 중 남성만이 기능하는 옷을 입을 수 있고 입게 될 것을 당연하게 기대하고 그걸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기여는 제한적이라는 사고방식, 여자를 전통적인 위치에 묶어두려는 태도가 여자의 옷을 만드는 데 반영된다. “옷은 사회적 산물”이라고 했던 페미니스트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말이 맞다면 주머니가 없는 여자의 옷은 여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게 주머니 문제의 핵심이다.            p.123 


1950년부터 연재되었던 만화 <피너츠>에는 여자아이가 스포츠를 잘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나오며, 흑인 캐릭터도 등장한다. 당시만 해도 스포츠는 남학생들의 전유물이었으며 미국은 인종분리 정책이 합법이던 사회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주 파격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만화 자체가 워낙 부드러운 톤을 갖고 있어서 사회적 통념과 배치된 내용을 그려도 사람들이 반발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하니 여성들의 스포츠 활동과 인종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슐츠가 작품에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키게 된 것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한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한 장 받는다. 흑인 민권운동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절이었고,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백인이 쏜 총에 사망한 즈음이었다. 교사로 일하며 세 아이를 키우던 여성은 미국 사회가 변화해서 인종 사이의 편견을 극족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피너츠>가 아이들의 무의식적인 태도를 형성하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흑인 아이 캐릭터를 넣을 것을 제안한 그 여성은 워낙 인기 있는 만화의 작가가 자신에게 답장을 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슐츠는 답장을 보낸다. 긍정적인 답장은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고민한 내용이었고, 두 사람은 몇 달에 걸쳐 여러 차례의 편지를 주고 받게 된다. 그 결과 <피너츠>에 첫 흑인 아이 캐릭터 '프랭클린'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조연이 하나 등장한 것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슐츠는 이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면과 대사를 깜짝 놀랄 정도로 세심하게 설계해서 당시 논란이 되던 문제들을 모두 다루면서도 독자들에게서 반발심이 아닌 공감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런 평가는 대중이 가진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틀을 벗어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일종의 사회적 판결이다. 인류 사회는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이런 판결을 내려왔다... 단지 여성이라고 해서 좋은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여성이라도 특이한 사람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의 감정을 배려할 줄 모르는 여성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여성상'에서 어긋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마녀이거나 소시오패스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그 여성들이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p.219


이 책에는 차별에 맞서 싸우거나, 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장애인의 존재를 지우려는 사회에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나선 장애인 운동가, 의복의 발전사에서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었던 이유, 미묘한 폭력이 횡행하는 촬영장에서 여자 배우의 목소리, 스포츠 선수로서 ‘정신력’과 국가대표로서 애국심을 강요하는 올림픽에서 기권한 체조 선수 등 차별과 편견,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인상적인 담론을 만날 수 있었다.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이혼 소송을 다루었던 법정 공방에 대해서 수백 년 전의 마녀 재판과 별 다를 게 없는 현실이 고스란히 보였다. 당시 소셜미디어에서는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앰버 허드는 소시오패스, 라는 결론이 내려졌는데 사실 행동만 보자면 조니 뎁의 모습이 더 그것에 가까워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는 대중의 너그러운 이해가 대개 백인 남성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었고, 대중이 가진 여성의 틀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 인물은 소시오패스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흔히들 생각하는 '좋은 여성상'에서 어긋난다고 해서 마녀이거나 소시오패스인 것은 '당연히' 아닌데 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오터레터>에 연재되던 다양성, 편견, 차별에 관한 이야기들을 골라 모은 것이다. 인류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배제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무지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차별이 일상인 세상 속에서 그러한 관습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류의 오래된 습관들에 대해 말한다. 미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 지금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사회의 변화는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지만, 특별한 한 사람이 없으면 일어나기 힘들었을 변화도 있다'는 문장처럼 인위적인 노력 없이는 달라지기 어려운 일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뉴스를 발굴하고 배경 지식과 맥락까지 더해 대중에게 알려온 〈오터레터〉의 발행인 박상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 안의 차별과 해묵은 인식을 바꿔 준다. 인류의 오래된 습관을 깨고,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온 이들의 이야기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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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2부작 북케이스 세트 - 전2권 (10주년 한정판)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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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인간관계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네. 이를테면 부모님과 형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와의 관계일 수도 있지. 그리고 지난번에 자네가 말했지? 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내 제안은 이것이네. 먼저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하게. 그리고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만의 획기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지.                - 1권, p.177~178


인생의 진리를 구하는 청년이 철학자에게 묻는다. 아무리 지식을 쌓은들 그 토대가 되는 기질이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고, 대체 왜 인간은 누구나 변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느냐고 말이다. 철학자는 원인론과 목적론에 대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라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을 쉽고 명쾌하게 들려 준다.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는 ‘어떻게 행복한 인생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일상적인 언어로 들려 준다. 




과거 1000년의 도읍으로 번성을 누리던 옛 도시 외곽에 철학자가 한 명 살았다. 인간은 오늘이라도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이 납득 가지 않은 한 청년이 철학자를 찾아가 진의를 따져 묵기로 한다. 번뇌로 가득한 청년의 눈에는 세계가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가 믿기 힘들 정도로 단순하고, 인생 역시 그러하다는 철학자의 말이 이해될 리가 없었다. 


철학자는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고. 그러니 철학자가 보는 세계와 청년이 보는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청년은 반발한다. 하지만 철학자는 청년이 세계를 복잡하게 보는 것은 스스로가 그렇기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신부터 변한다면 세계도 단순하게 변할 거라고 말한다. 청년에게는 철학자의 주장이 모두 허황된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과연 철학자는 그의 말에 거부반응부터 보이는 청년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가령 지금 자네가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하세. 자신을 바꾸고 싶다고 하자고. 하지만 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를 포기하고,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고, '지금까지의 나'가 다시는 얼굴을 내밀지 않도록, 말하자면 무덤에 묻는 것을 의미한다네. 그렇게 해야 겨우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현실에 불만이 있다고 해서 '죽음'을 택할 수 있을까?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뛰어내릴 수 있을까? ...... 그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네. 그래서 인간은 변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괴로워도 '이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걸세. 그리고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긍정할 수 있도록 '이대로 좋은' 이유를 찾으면서 살아가는 거라네.                - 2권, p.72~73


2권은 <미움받을 용기>로부터 3년 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철학자와의 대화를 통해 아들러 사상에 감화되어 부푼 마음으로 아들러의 생활양식을 실천하려고 돌아갔던 청년이 다시 철학자를 찾아온다. "당신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아들러의 사상은 현실 사회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운, 그저 이상론에 불과하다."며 화가 잔뜩 난 상태로 말이다. 어쩌면 책을 읽은 독자들 역시 청년처럼 아들러의 사상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실천할 수는 없다고, 비슷한 의문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집필된 2권은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물론 2권에서도 청년은 끊임없이 딴지를 걸고, 시비조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철학자의 대답에 반박하기도 하면서 독자들의 역할을 대신해준다. 덕분에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바깥세상과 격리된 철학자의 서재를 나가면서 단단한 마음으로 현실의 문을 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전 세계 1000만 부, 국내 판매 200만 부를 넘어서며 아들러 열풍을 일으켰던 <미움받을 용기>가 출간 10주년을 기념해 한정판 북케이스 세트로 출간되었다. 세련된 색감이 돋보이는 북케이스와 표지 디자인, 그리고 따뜻한 삽화로 새 옷을 입어 소장용으로도, 선물용으로도 너무 좋다. 2014년 출간 당시 역대 최장기 51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제목까지 하나의 상징이 된 인생책으로 등극했던 작품이라 읽어 보지 않았더라도 제목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대체 왜 이 책이 그렇게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현대의 새로운 고전이 되었는지 궁금하다면, 이번 기회에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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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음 - 두 사람을 위한 시 다산어린이문학
폴 플라이시먼 지음, 에릭 베도스 그림, 정지인 옮김 / 다산어린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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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넘는 뉴베리상 역사 중에서 드물게 시집으로 뉴베리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뉴베리상’은 어린이문학계의 노벨 문학상이라 불릴 정도로 대표적인 어린이문학상으로 수상작 대부분은 소설이다. 그런데 어떻게 '시'라는 장르로 뉴베리 대상을 수상한 건지 궁금해졌다. 


우선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두 사람을 위한 시'라는 부제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시집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읽어야 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듀엣곡을 부르듯이 한 사람은 왼쪽 부분을, 또 한 사람은 오른쪽 부분을 낭독하며 읽도록 쓰인 시라니 흥미로웠다.


실제로 이 작품은 미국 교실에서 읽기 체험 교과서처럼 읽힌다고 한다. 친구들끼리 짝을 지어 읽어도 좋고, 학생과 선생님, 혹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해도 좋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읽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새로운 형식의 시들은 곤충의 세계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실린 시들은 함께 두 사람이 읽다가, 어느 때는 오른쪽 사람 혼자, 또 어느 순간에는 왼쪽 사람 혼자 읽도록 행이 띄어져 있고, 두 사람이 함께 낭독을 하는 과정 자체가 자연스럽게 대화처럼 연결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 읽다 보면 혼자 낭독을 하기도 하고, 상대와 대화를 주고받기도, 혹은 문답을 하기도 하며, 상대와 내 목소리가 동시에 포개지면서 노래하는 듯한 리듬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독특한 낭독 방법은 시를 눈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읽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독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 더욱 특별하다. 




물 위를 걷는 소금쟁이, 짧은 일평생을 보내는 하루살이, 풀쩍 뛰어올라 저 멀리 착지하는 메뚜기, 여기저기 빛으로 점을 찍는 반딧불이, 웅장한 합창을 하는 매미, 부지런히 일하느라 바쁜 꿀벌 등 다양한 곤충들을 만날 수 있다. 세밀하게 묘사된 곤충 그림들도 시선을 사로잡고, 각각의 곤충들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을 살려주는 단어 표현들도 재미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번역한 정지인 번역가가 번역을 했는데, 덕분에 더 생생하고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마지막에 수록된 작품 해설 또한 흥미로운 방식이라 인상적이다. 동시인이자 아동문학평론가의 글과 곤충학자이자 국립생물자원관 환경 연구관의 글 두 편을 작품 해설로 만날 수 있는데, 시에 대한 해석과 곤충에 대한 설명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어 아주 재미있었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곤충의 한살이, 여러 곤충이 각자 시점으로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곤충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 준다. 


통통 튀는 메뚜기, 아롱아롱 반딧불이, 먼지 쌓인 책장에서 살아가는 책다듬이벌레, 츠츠츠츠 노래하는 매미, 뱅뱅 맴돌다 슈욱 도는 물맴이, 바람에 앞뒤로 흔들리는 번데기... 뜨거운 낮과 고요한 밤을 오가며 만나게 되는 곤충들의 하루는 다양한 소리들로 '즐거운 소음'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곁에 늘 있지만, 일상 속 소음들에 묻혀 잘 들리지 않던 그들의 소리가 노래처럼 울려 퍼지는 그런 작품이었다. 이 아름다운 책을 통해 아주 특별한 독서 체험을 경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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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째 열다섯 3 - 두 개의 구슬 텍스트T 10
김혜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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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 평범한 인간 아이들과 자신을 비교하다 보면 가을은 한없이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가을에게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든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게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그것만 바라보다 보면 결국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날이 온다. 타인의 삶은 타인의 삶일 뿐이고 나는 내 삶을 살면 되는 거다. 언제부터인가 가을은 인간과 자신의 삶이 다름을 받아들였다.             p.43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군 신화를 살짝 비틀어 여우에서 사람의 모습이 된 야호족과 범에서 사람이 된 호랑족이 공존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는 K 판타지 <오백 년째 열다섯> 그 세 번째 이야기가 나왔다. 판타지적인 설정이 배경이지만, 주요 서사는 중학생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현실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이야기라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가 되었다. 


주인공 가을은 오백 년 전 열다섯 살에 최초의 야호인 령에게서 구슬을 받아 종야호가 되었기에,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단,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오백 년째 열다섯으로 살고 있는 가을은 직업을 가질 수도, 결혼을 할 수도, 부모가 될 수도 없다. 친구들은 어른이 되겠지만, 가을은 어른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 가을에게 전편에서 신우라는 남자 친구가 생겼고, 그로 인해 이번에 처음으로 고등학생이 되어 보기로 한다. 그 동안은 다른 세계의 일이라고 여겼던 나이를 먹는 다는 것부터 자신이 아직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삶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친구들과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가을은 이년 후 자신의 모습으로 1단계 둔갑을 한다. 키가 오 센티미터는 더 자라고, 그에 따라 골격도 조금씩 커진 모습으로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그런데 처음 배우는 공부부터 처음 학교생활을 함께하는 고등학교 아이들까지 영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 오랜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인간들 때문에 고통받는 동물들이 너무 많더구나. 오래오래 살기에 이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것 같아. 너는 구슬 얻은 걸 후회하니?"

"책으로 따지자면 계속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고 있는 것만 같아요. 저는 다음 내용이 궁금하거든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살아 보지 못한 삶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런 거래요. 마치 인간들이 긴 삶을 사는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처럼요. 근 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p.157


중학교 시절에는 우등생이었던 가을은 고등학교 공부가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 스트레스를 받고, 그 와중에 수백 년 동안 가족처럼 지냈던 휴로부터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게 된다. 삶이 점점 예측하지 못하는 상태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가을과 신우, 그리고 휴의 삼각 관계 로맨스도 이야기에 소소한 재미를 더해준다. 엄마의 결혼에 대한 고민과 범녀가 공격 받은 사건 해결, 야호의 구슬을 훔쳐 호랑족을 만든 최초의 호랑이자 범녀 이전의 호랑족 우두머리였던 도호가 나타났다는 소문까지 가을을 둘러싼 세계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한편, 가을은 자신에게 유독 다정한 담임 선생님이 또 다른 최초 구슬을 가진 웅족 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각별히 가까워진다. 진으로부터 최초의 구슬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가을은, 너무도 그리운 령을 되살리기 위해 비밀리에 최초 구슬을 발현하는 방법은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최초 구슬에 얽힌 놀라운 비밀이 드디어 밝혀 지는데, 과연 두 개의 구슬을 하나로 모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시리즈는 오백 년 동안 열다섯 살로 살아온 여자아이라는 캐릭터 자체도 신선하고, ‘단군 신화’를 비롯해 ‘서동요’, ‘의좋은 형제’,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등 우리 신화와 옛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독특한 매력도 있다. 가을은 열다섯 살의 나이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지만, 시리즈를 거듭해 가면서 점차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어른이 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어 매번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모습은 늘 다음번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들어 준다. 이번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최초 구슬 완전체로 인해 구슬이 갖게 된 새로운 능력'에 대한 언급이 있어 네 번째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십 대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와 사랑을 받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 신화와 옛이야기에 뿌리를 둔 한국형 판타지’로서 청소년 문학의 독보적인 역사를 쓰고 있는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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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 관한 오해
이소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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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대상을 보고 평소와 다르다고 느끼더라도 우선 나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한다. 상식 밖의 자연현상을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후 위기를 의심하기 이전에 우선 우리의 무심함부터 돌아볼 일이다. 가을에 장미와 벚꽃을 마주해 놀랐다는 충격만큼, 키보드로 지구에게 미안하다고 쓰는 걱정만큼, 과연 우리는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 외 다른 생물종을 위해 쏟아낸 말들에 버금가는 행동을 하고 있을까. 실상 말과 행동이 같지 않다면, 우리가 어떤 기념일마다 지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시혜적인 자기만족일 뿐이다.              p.34


<식물 산책>, <식물의 책>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식물세밀화가? 원예학 연구자 이소영 저자의 신작이다. 16년간 식물을 관찰하고 기록해온 시간 동안 맞닥뜨린 식물에 관한 크고 작은 오해와 편견을 모았다. 식물은 뿌리를 땅에 고정하고 있기에 스스로 이동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식물이 살아 있는 생물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그들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며, 땅에 고정되어 있을 뿐 빠르게 형태를 변화시키고, 번식을 위해 누구보다 삶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약하고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공격적이기까지 한 생물이 바로 식물인 것이다. 




길을 걷다가 깨진 보도블록이나 갈라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틈새, 건물 벽돌 사이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서 자라는 틈새 식물들은 누군가 심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게 된 것일 텐데 볼 때마다 신기했다.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것을 보며 새삼 식물의 생명력을 느끼기도 했고 말이다. 반면 같은 것을 보고 누군가는 그들을 가엽게 여기거나, 아무데서나 자라는 잡초라고 나쁘게 보기도 한다. 하지만 바꿔서 생각해 보면, 애초에 식물이 틈새 공간에 살게 된 것은 흙 위에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를 부은 인간들 때문이다. 


도시 적응력이 높은 식물들이 계속 틈새를 선택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은 그들에게 최선의 삶의 형태였던 것이다. 서양민들레, 괭이밥, 제비꽃, 꽃마리, 쇄별꽃 등 틈새의 식물들은 인간의 손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뿌리를 내려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 매일 아스팔트를 딛고 사는 우리에게 틈새는 균열의 결과물이자 고쳐야 할 오점이지만, 사실 균열로 드러난 틈새야말로 인간을 제외한 생물들이 필요로 했던, 진작 드러났어야 했던 공간인 것이다. 덕분에 이제 틈새 식물들을 마주하게 되면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식물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진달래는 먹어도 괜찮지만 진달래와 비슷한 철죽은 먹어선 안 된다.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하고 철쭉을 개꽃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먹지 못하는 식물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또한 허가된 장소에서만 나물을 채취하며, 멸종 위기식물과 특산신물, 희귀식물 등 특정 식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나물은 우리를 시험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물을 채취할 때에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사람의 욕망이니 말이다. 더 많이 캐고자 하는 욕망, 더 귀한 종을 얻고자 하는 욕망. 욕심에 취해 숲속 더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될 뿐이다.               p.287


나팔꽃, 무궁화, 닭의장풀 등 한여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잇는 여름 꽃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꽃을 보려면 오전에 나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전에 꽃잎을 열고 오후에는 꽃잎을 다시 닫는다. 보통 꽃들이 한 번 열리면 내내 피어 있다가 며칠이 흘러 꽃이 지는데 반해, 이들은 하루 단위로 오전, 오후 꽃을 여닫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매일 꽃잎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는 것일까? 오랫동안 꽃을 피워야 수분할 시간을 최대한 많이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식물이 꽃잎을 열고 닫는 방식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매우 흥미로웠다. 자연은 늘 우리의 예상 밖에 있구나,를 새삼 깨닫기도 했고 말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점점 식물이 느리거나 정적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점점 그들의 생태에 관해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식물에 대한 착각과 오해, 편견을 되짚어 보면서 식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름 때문에 자주 정체성을 오해 받는 보리수나무, 과일로 먹을 수 없는 모과의 가치, 꽃을 피우지 않는 무화과의 꽃, 원래 주황색이 아니었던 당근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한 책이다. 특히나 매 장마다 수록된 아름답고 정밀한 식물세밀화가 인상적인데, 내용의 이해를 돕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근사한 작품이라 책 전체가 하나의 화집처럼 느껴지기도 할 만큼 완성도가 높다. 그 어느 때보다도 플랜테리어에 관심이 높아졌고, 식물 애호가들도 늘어난 요즘이다. 하지만  '식물 소비량이 늘고, 산업 규모가 커지며, 정원이 많아졌다는 것만으로 식물 문화가 발달한 것일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더 이상 식물에 관한 잘못된 정보가 통하지 않기를, 보다 정확한 식물 정보를 통해 누구나 식물에 관한 기본 소양을 갖출 수 있기를, 식물을 아끼고 보살피는 사람으로서 바래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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