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다듬기
이상교 지음, 밤코 그림 / 문학동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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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기도 하고, 무쳐 먹기도 하고, 국물을 내는 데도 사용하는 멸치. 우리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 중 하나다. 짭쪼름한 멸치 볶음, 매콤한 멸치 고추장 볶음, 달콤한 견과류 멸치 볶음, 그리고 시원하고 깊은 국물을 내는 데 사용하는 다시팩과 멸치 김밥, 멸치 튀김, 멸치 무 조림... 많기도 하다.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멸치 요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번쯤 멸치를 다듬어 보거나, 멸치를 다듬는 것을 구경해 본 적도 있을 것이다. 대가리 떼고, 똥 빼고, 대가리 떼고, 똥 빼고... 반복되는 손놀림으로 어느새 수북이 쌓인 멸치들은 깔끔하고, 맑은 국물 요리를 위한 훌륭한 재료가 되어 준다.


 

 

이번에 만난 귀여운 그림책은 바로 그 멸치 다듬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상교 작가의 동시에 밤코 화가가 그림을 그렸다. 멸치를 다듬을 때 부스러기를 받쳐 주는 신문지를 다채롭게 재구성해 재미를 더해준다. '멸치'를 주인공으로 도심 한가운데서 멸치 떼 목격, 마른 하늘에 멸치 떼, 멸치란 무엇인가, 토막상식, 멸치네컷, 메루치의 꿈 등등 오늘의 특종과 기상 예보, 구인 구직 공고 등 아기자기하고 유쾌하게 신문지 속 세상을 멸치의 세계로 색다르게 만들었다. 멸치들은 철새 대이동의 계절에 철새 떼를 따라 이동하기도 하고, 발레리나가 되어 무대 위를 종횡무진 활약하고, 미술관에서 명화의 모티브가 되어 관객들을 만나기도 한다.

 

 

가끔 멸치 조림을 먹다 보면 수북한 멸치들 사이에 정말 손톱만큼 작은 게나 꼴뚜기 등을 만날 때가 있다. 그제야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바다에 사는 물고기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쩐지 마른 멸치를 많이 접하다 보니, 멸치가 물고기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 버리게 되는데 말이다.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신문지에 누워 차례를 기다리던 멸치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세상 속으로 향하는 여정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마른 멸치들만 보다가, 비로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멸치들의 움직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늘을 날고, 무대 위와 명화 속을 거쳐, 우주 공간을 통과해 휴가철 해변까지 정말 세상 곳곳을 종횡무진하는 멸치들의 여정은 귀엽기도 하고, 웃음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멸치의 존재를 피부로 와닿게 만들어 준다.

 

 

아빠와 아들이 사이좋게 앉아서 대가리 떼고 똥 빼고 반복 작업을 하는 과정도 만화처럼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고양이가 와서 방해를 하기도 하고, 끝난 줄 알았는데 한 번 더 한 가득 담겨서 일거리가 오기도 하고, 기지개도 켜고, 몸도 풀면서 부지런히 반복 작업을 한다. 대가리와 똥을 모은 곳과 몸통을 모은 곳을 구분해야 하는데, 반복 작업을 하다 보면 헷갈리기 일쑤다. 그럴 때 짜증도 나지만, 서둘러 다시 옮겨 놓는다. 그렇게 열심히 다듬은 멸치 한 가득은 과연 어떤 요리로 재탄생하게 될까. 엄마는 멸치들을 가지고 어떤 맛있는 한 상 차림을 만들어 줄까. 기대가 되는 시간들이다.

 

읽고 나면 누군가와 함께 멸치를 다듬고 싶어 지는 이 그림책은 우리가 무심코 먹는 식탁 위 맛있는 한 끼를 위한 과정을 사랑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함께하면 두 배로 즐거운 멸치 다듬기의 세계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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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
브라이언 에븐슨 지음, 이유림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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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들려줬던 여러 이야기 속에서 부모님은 이주민이자 개척자였고 이곳에 처음 발을 내디딘 사람들이었지만, 어떤 실패를 겪으며 이곳에 남은 유일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어떨 때 언니는 우리가 있는 곳이 남쪽 대륙 외진 곳 어딘가이며, 부모님은 그곳에서 침몰한 배의 유일한 생존자들이었다고 말했다. 또 어떨 때는 부모님이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서 공기를 타고, 일반적인 세상의 질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또는 거울을 통해서 이쪽으로 건너왔다고 말했다.              - '두 번째 문' 중에서, p.66~67

 

앞쪽에도 뒤쪽에도 머리카락뿐이어서 어느 쪽이 앞모습인지 구별할 수 없는, 얼굴이 없는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해 딸이 사라진 방에서 들려오는 딸의 노랫소리에 시달리는 남자와 영화 촬영을 위해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는 영화감독, 인간의 살아 있는 몸을 탐하는 우주 괴물, 돌연변이 생명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생존자들, 부모님이 어디론가 사라진 텅 빈 집에 남겨진 두 자매, 아내가 실종된 남편의 비극 등 짧게는 단 두 페이지, 길어도 이십 여 페이지 분량의 단편들은 모두 강렬한 잔상을 남기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드라고는 얇은 벽 너머로 들려오는 딸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딸을 깨우러 갔지만 방에는 딸이 있었던 흔적 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방을 정리했으며, 어디로 간 것일까. 게다가 딸의 침실은 그가 전날 밤 그 방을 떠났을 때 그대로 밖에서 잠겨 있는 상태였다. 그는 딸이 방 어딘가에 숨어 있는게 아닐까 싶어 찾아 봤지만, 방은 물론 집 안 어디에도 딸은 없었다. 딸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집 안의 모든 곳을 뒤졌지만 아이는 없었고, 어떻게 봐도 불가능할 것 같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딸아이가 밖으로 나간 게 분명했다. 그는 이웃집으로 가서 혹시 딸을 보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예순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는 산소 튜뷰를 연결한 마른 몸으로 걸쇠가 걸린 사이로 그를 바라본다. 그녀는 여자아이를 보지 못했다며, 아이가 실종되었다면 집마다 돌아다닐 게 아니라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건 드라고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그는 과연 딸을 찾을 수 있을까. 평범한 미스터리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점차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당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빌라드는 그렇게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살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제가.. 엄밀히 말하다니요?
"당신은 무언가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당신의 몸은 선체가 부서진 이후에 얼어붙었는데, 꽤 온전한 상태로 보전될 만큼 그 과정이 빠르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뇌를 스캔할 수 있었죠. 당신의 생각을요." 제가 스캔본이라는 말인가요?
"그날 목숨을 잃은 건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혹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목격했습니까? 우리는 그 원인을 알아내야 합니다."           - '마지막 캡슐' 중에서, p.213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가 등장하고, 낮에 마주하는 상담사가 밤에 집에 나타나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행동하고, 현실의 조각난 틈에서, 숨고 싶은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진다. 우리는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지켜볼 뿐이다. 작가는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강박과 집착에 집어삼켜진 삶들을 그려 보이며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은 균열로 가득한 부서진 세계를 창조해낸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스물두 작품은 환상과 호러 SF 등의 여러 장르를 보여준다. 미국 언론에서 '스티븐 킹의 팬들이 반길 상당히 유능하고 조금 덜 다작한 작가가 여기 있다'라고 했을 정도로 오싹하고, 강렬한 이야기들이다. 대담하고, 독창적이고, 파격적이며, 특히나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인상적이다.

 

일상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진 공포와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환상이 잘 버무려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미국 사변소설계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브라이언 에븐슨은 이 작품으로 2019년 셜리 잭슨상과 2020년 월드 판타지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섬뜩하고, 기괴하고, 오싹하다.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어떤 사악한 존재가 어디선가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유혈이 낭자하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등장하기도 하며, 누군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가스라이팅처럼 공포의 종류도 매우 다각도로 보여진다. 극중 한 인물의 대사처럼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데에 이유가 없다'는 점이 가장 공포를 자아낸다. 혹시나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어떠한 차이도, 변화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돌이킬 수 없으며,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극중 인물들은 자주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의 마음은 고스란히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도착한다. "세상은 이상한 곳이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이 말은 극중 인물들뿐만 아니라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스티븐 킹과 히치콕, 러브 크래프트와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들을 좋아한다면 꼭 만나보길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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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애에 이름을 붙인다면
시요일 엮음 / 미디어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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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잊지 마세요/꽃말을 만든 첫 마음을 생각한다/꽃 속에 말을 넣어 건네는 마음/꽃말은 못 보고 꽃만 보는 마음도 생각한다/나를 잊지 마세요/아예 꽃을 못 보는 마음/마음 안에 꽃이 살지 않아/꽃을 못 보는 그 마음도 생각한다              - 이문재, '꽃말' 중에서, p.65

 

시요일 앱을 처음 만났던 것이 5년도 더 넘었는데, 어느새 다섯 번째 시선집이 나왔다. 하루 한편씩 그날에 어울리는 시를 손안에 배달해준다니,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국내 최초의 시(詩) 큐레이션 앱 ‘시요일’은 시를 자유롭게 감상하고, 원하는 시를 검색할 수 있고 추천도 받고, 공유해서 나누기도 할 수 있는데, 24년 1월 기준으로 누적 회원 수가 54만 명에 달한다. 이번에 나온 책은 시요일 기획위원인 안희연, 최현우 시인이 사랑의 시작을 테마로 엄선한 시 67편을 엮은 것이다. 시의 편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매력과 컬러를 가진 시인 67인을 한 권으로 만날 수 있어 아주 버라이어티한 시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므로, 상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에 관해 읽었거나 배운 것은 대부분 실전에선 적용되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열아홉에 사랑을 경험하든, 서른에 사랑을 하든, 마흔이 넘어서 사랑을 만나든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누구나 자신만의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여전히 잊지 못할 첫사랑이든, 고백도 못해본 짝사랑이든, 처참하게 배신당한 지독한 사랑이든 간에.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타인의 연애 경험에 대해 궁금해한다. 사랑의 시작과 끝이 모두 다른, 그 과정은 우주만큼 경우의 수가 많은 각자의 이야기말이다.

 

 

 

면을 불리면 공간이 되고, 그 공간에는 면을 불려 먹는 것을 좋아하던 네가 있었고, 면을 덜 익혀 먹는 것을 좋아하던 내가 있었고, 덜 익히는 것과 불리는 것 사이에는 시간이 좀 필요했고, 그 시간이 끝났을 때, 버릇처럼 문밖을 나가는 네가 있고, 습관처럼 "올 때 메로나"라고 말하는 내가 있고, 냉장고 속에는 서로 다른 공간들이 있고, 들어온 시점이 다른 시간들이 있고, 앞으로 그 공간 속에서 견딜 수 있는 시간들이 있고, 원 플러스 원으로 샀던, 메로나가 있고,             - 권창섭, '완벽한 사랑' 중에서, p.169~170

 

'열렬히 사랑하다 부서져 흰 가루가 될 때까지 당신 속의 나를 사랑했다(p.112)'는 시의 문장처럼 지독한 사랑은 상대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향하기도 한다. '땅이 꺼져도 하늘이 무너져도 내게 두고는 끝까지 모두 다 당신 때문(p.115)'이라는 문구처럼 사랑에 빠져 있는 순간에는 오로지 상대밖에 보이지 않는다. 부글거리는 시간들이 지나가고 나면 사랑이 끝이 나기도 하고, 함께 하는 잔잔한 일상으로 다음 단계가 시작되기도 한다. 서로에게 영혼을 보여준 날부터 싸우는 경우도 있고, 앞면과 뒷면처럼 한 몸이 된듯한 일체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고, 갈피를 잡지 못해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권태와 고독으로 점철되기도 한다.

 

사랑에 빠져서 정말 좋았던 건 세상 모든 순간들이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이고, 새의 노래를 함께 들을 때면 우리는 마치 한명인 것 같았고, 가장 아름다운 꿈은, 그 애와 함께 있는 꿈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눈동자 속의 당신과 당신 눈동자 속의 내가 있고, 마음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듯한 감정과 한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잠들 수 있도록 이마를 쓰다듬어주는 순간이 있으며, 서로 같은 아침을 바라보며 미래를 사랑이라 믿는 시간들이 펼쳐진다. 누구나 하는 사랑, 흔하고 익숙한 만큼 또 어렵고 복잡한 사랑, 누군가에게는 숨쉬는 것처럼 쉬운 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생 최대의 난제이기도 한 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 때문에 겪었던 그 모든 설렘과 열정, 고통과 기쁨, 후회와 오해, 열정과 고독의 순간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 속에 수록된 시들을 한 편씩 천천히 읽으며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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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곤충사회
최재천 지음 / 열림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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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계에서 우리는 ‘가진 자’잖아요. 우리는 이미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발자국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 내디뎌야 해요. 곰도 막 걸어 다니는데, 인간이 걸어 다니는 것까지 시비 걸면 어떡하나, 하실 수도 있어요. 시비 걸어야 마땅하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인간은 이미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내딛어야 하는 막강한 존재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런 노력을 해야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97

 

생태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 사회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는 25년 동안 100권 이상의 책을 집필했고, 해마다 100회 이상 강연을 해왔다. 이 책은 2013년부터 2021년까지 강연 녹취록과 편집부와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회생물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부터, 하버드대에서 공부하던 시기의 에피소드와 거의 알려진 바 없던 ‘민벌레’를 최초로 연구하며 그 분야의 1인자가 된 비결, 다윈의 성선택 이론부터 다양한 동물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며 전 생명의 진화사를 살펴본다.

 

그는 이 책이 '그동안 관찰한 호모 사피엔스의 기이한 행동에 관한 보고서'라고 말한다. 자연계에서 호모 사피엔스보다 탁월한 두뇌를 가진 동물은 아직 발견된 바 없지만, 사실 인간은 제 꾀에 넘어가는 아주 어리석은 동물이라고 말이다. 인간이 진짜 현명했으면, 이렇게 미세먼지 만들어놓고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살겠냐고, 모든 물을 다 더럽혀놓고 개울에서 물도 제대로 떠먹지 못하면서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냐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라도 자연계의 다른 생물과 공생하겠다는 뜻에서 '호모 심비우스symbious'로 거듭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생물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연을 곁에 두고 배우며 그들로부터 삶의 방식을 재정립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곤충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생태적 전환'이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전환은 생태적 전환밖에 없습니다. 기술의 전환도 아니고, 정보의 전환도 아닙니다. 죽고 사는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생태적 전환을 해야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명한 인간이라는 자화자찬은 이제 집어던지고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로서 다른 생명체들과 이 지구를 공유하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공생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p.279

 

곤충이 너무 많아 방제를 걱정하던 시절을 거쳐 이제는 모든 사람이 곤충이 사라지는 걸 걱정해야 하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을까. 꽃을 피우는 식물은 지구 전체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자연계에서 무게로 가장 성공한 존재이고, 곤충은 숫자로 가장 성공한 존재인데, 이 둘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이다. 그런데 식물 생태계가 지금 이상기후 때문에 엄청난 진통을 겪고 있다. 식물계가 사라진다는 것은 먹이사슬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맨 밑바닥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그 결과 식물계 바로 위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곤충계부터 엄청난 붕괴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간 정말 6차 대멸종이 머지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기존 다섯 번의 대멸종이 전부 천재지변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면, 곧 맞이하게 될 6차 대멸종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한 종류의 동물로 인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대 최대 규모일 거라고 예측되는 대멸종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최재천 교수는 개미와 민벌레 등 곤충에서 시작해 거미, 민물고기, 개구리를 거쳐 까치, 조랑말, 돌고래, 그리고 영장류까지 다양한 동물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해오며 그 속에서 자연스레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개미에 대한 부분들이 특히나 흥미로웠다. 인간과 가장 닮았으나 인간보다 기꺼이 희생하며 자가 조직 사회를 꾸리는 일개미들의 사례와 다른 듯 닮은 흰개미와 꿀벌의 진사회성에 대한 부분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들의 삶을 가져와서 열심히 베끼고 연구하라고 말한다. 자연에 있는 아이디어들은 수천만 년의 자연선택이라는 혹독한 검증을 이미 다 거쳤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뭘 갖고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그걸 가져다가, 그냥 주워다가 우리의 삶에도 적용해 보라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생명과 이 지구를 공유하는 공생인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는 길이기도 하다. '지구의 동식물 절반이 사라질 때 과연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 보길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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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요약 금지 - <뉴요커> 칼럼니스트 콜린 마샬의 변화하는 한국을 읽는 N가지 방법
콜린 마샬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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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국어의 ‘마이너’한 지위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영어에 의존하는 산업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왔다. 그런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 대중문화의 가장 핵심적인 행사에서 한국어를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말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듣는 것은 얼마나 고무적인 일일까? 서구권 사람들이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존중하는 듯한 모습은 또 어떨까?            p.118

 

작가이자 유튜브 크리에이터인 마크 맨슨이 최근 한국 여행 영상을 올리며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국가를 여행했다'고 해서 화제였다. 그는 국내에서도 <신경끄기의 기술> 등의 책으로 꽤 사랑받은 작가인데, 이번 발언 덕분에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자살률 1위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우울증에 대한 그의 분석이 전부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겨우 며칠 여행하고 평가한 그의 시각으로 한국을 규정해도 되는 걸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때마침 그에 대한 반박이라도 하듯 거침없이 진짜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나왔다.

 

서울에 3650일째 거주하며 <뉴요커>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콜린 마샬의 <한국 요약 금지>이다. 그는 겉핥기식 관찰과 단정적인 시선으로 판단하는 한국이 아니라, 매순간 변화하고 달라지는 한국의 모습을 직접 겪어 보고, 살아 보며 탐사한 것이다. 김치의 나라, 삼성의 나라, 자살의 나라, BTS의 나라 한국. 이런 단어들 속에 진실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말들은 실제 한국의 복잡하면서도 모순적인 현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의 모습은 한국인들 대다수가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것들과 익숙하다는 이유로 이제까지 깨닫지 못했던 순간들을 담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의 제목처럼 한국은 한두 마디의 말로 요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점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한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이방인의 입장이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고 대답한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회를 보면 모든 것이 훨씬 더 흥미로워진다. 매일 들리고 보이는 표현이나 광고와 같이 사소한 것들도 그 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쉬운 예로 한국이든 해외든 오늘날의 히트곡들이 나에게는 단조롭거나 유치하게 들릴 때가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21세기의 K-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21세기의 한국에 대해 알려주는 가장 뚜렷한 지표가 된다.              p.198

 

커피숍 테이블 위에 개인 물품을 내려놓음으로써 내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심지어 그 물건은 비싼 것들이다, 동네에 한두 개 이상의 스타벅스가 들어와도 소규모 체인 커피점이나 작은 커피숍이 밀려나지 않는다, 고등교육기관과 병원을 포함해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다, 주류가 가득 찬 냉장고를 경비원도 잠금장치도 없이 외부에 두는 편의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사회계급의 차이를 특별히 느낀 적이 없다. 아무도 젠트리피케이션을 이유로 커피숍 유리창을 깨지 않는다, 그리고 포장마차, 떡튀순, 서울 우유 등등... 이는 저자인 콜린 마샬이 '서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43가지 이유'로 꼽은 것들의 일부이다. 그는 스타필드 라이브러리가 개관한 이후 그곳을 여러 번 방문했고, 겨울서점 유튜브를 즐겨 보며, 한국어 공부를 위해 이동진의 빨간 책방 공개 방송이 진행되는 카페에 가기도 했다. <우리말 겨루기>와 <한국기행> 방송을 즐겨보며, 홍상수의 영화를 주목한다.

 

'당신이 알던 K는 여기 없어요.'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이 주는 위안’, ‘<강남스타일>이 열어젖힌 문’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한국을 향한 전 세계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소해줬던 그는 '한국 전문가'보다는 '한국 코노셔'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코노셔(connoisseur)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는 데 집중하기보다 관심과 흥미를 꾸준히 유지해 더 잘 감상하려는 사람을 의미한다. "K-팝과 성형수술, 북한의 위협처럼 외신이 주로 다루는 소재 정도로만 한국을 알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내가 관찰하고 만난 한국을 새롭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는 웬만한 한국인들보다 더 한국인스럽게 한국에 대해 배우고, 즐기고 있다. 외부의 기준과 평가를 너무 의식하는 한국인들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알고 있던 한국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국을 섣부르게 요약하려는 시도는 의미없다고 말이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의 다른 오늘을 발견하고 새로운 내일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한국의 오늘을 깊고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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