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 허의 내 갈 길 가는 에세이
안톤 허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중한 이십 대를 하기 싫은 공부에 낭비함으로써 받은 타격은 커다란 여파를 남겼고 지금까지도 후회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 시간에 소설을 더 읽었더라면, 문학 이론서를 더 읽었더라면, 외국어를 배웠더라면, 영국이나 프랑스에 교환학생으로 갔더라면(법대생으로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번역가나 소설가로서의 데뷔가 이토록 늦어졌을까. 무엇보다도 번역이나 글의 숙련도 및 완성도가 지금보다는 훨씬 높지 않을까. 그런 아쉬움은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부모님 말은 절대 들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기 인생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실수를 해도 자신의 실수를 하는 것이 낫다. 인생을 망쳐도 내 손으로 망쳐야 한다.              p.63

 

작년해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을 때 수상을 기원하며 발표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수상은 불발이 되었지만, 최근에 전미도서상 1차 후보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올랐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몇 해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부커상을 수상했던 것도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롱리스트(1차 후보)에 오른 두 작품 <저주토끼>와 <대도시의 사랑법>을 한국인 번역가 한 사람이 번역했다고 해서 관심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바로 부커상 역사상 한 해에 두 권의 책을 올린 세 번째 번역가이자 유색인종으로서는 첫 번째 번역가가 된 안톤 허의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법대생이었던 그가 늦은 나이에 문학 공부를 시작해 한국문학 번역가로 데뷔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모두 담겨 있다. 영미권에서는 한국문학이 여전히 인지도가 낮은데다, 영미권 출판계의 고질적인 백인 우월주의 등으로 한국문학 출판은 양적으로 부진한 편이다. 게다가 번역가가 개인 차원에서 책 한 권의 번역 권리를 얻으려면 속된 말로 100퍼센트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엄청난 장벽을 넘어야만 한다고. 한국 출판사에 번역 허락을 받고, 샘플 번역을 제작하고, 제안서를 쓰고, 영어권 출판사에 제출하고 꽤 오랜 시간 기다리고, 여러 단계의 설득 과정을 거쳐 거의 기적에 가까운 출판에 이르는 것이다. 한국문학 번역가로서의 굉장히 현실적이고 디테일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번역가 지망생이라면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다. 

 

 

 

번역을 할 때 제 영혼의 작은 파편이 번역에 실리게 되고, 독자는 그 파편에 반응하는 듯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좋아하고, 제가 의도했던 리딩을(정확히 말하면 제가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하는 리딩을) 그대로 쫓아가는 독자들을 보면 번역가로서 말로 형언하기 힘든 뿌듯함을 느낍니다. 물론 독자들은 스스로의 희망, 불안, 편견을 이런 '부재'의 공간에 투여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문학의 범주에 속하며 문학은 누군가 생각하듯 그렇게 나약하지는 않습니다. 훌륭한 문학은 깊은 독서와 번역을 통해 더 풍요로워지지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번역가로서 자신이 나른 것이 충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p.177

 

저자는 최근 처음으로 영문 장편소설을 계약했다고 한다. 그것도 미국의 '빅5' 출판사에 속하는 하퍼콜린스와의 계약이라고 하니, 곧 번역가가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 같아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대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변함없이 문학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이 마흔이 넘어서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부모님의 고시에 대한 집착으로 법대를 다녔고, 이후에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잠시 일하기도 하다가, 삼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대학원에 가서 늦깎이 영문학 전공자가 되었고, 이후 돈 잘 버는 통역사이자 번역가로 일을 하다가 결국 쉽지 않은 문학번역가의 길을 걷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보통 번역할 때 작품을 쓴 작가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나누게 된 정보라 작가와의 일화부터 부커상 뒷이야기, 영미 출판계를 뒤흔든 사기 사건의 전말, 번역가와 퀴어라는 정체성의 관계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라는 제목처럼 관습과 규칙 따위 가볍게 뛰어넘는 번역가로서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나는 에피소드들도 인상적이었다. 후반부에는 저자가 옥스퍼드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미들베리칼리지에서 진행한 강연이 수록되어 있다. 번역이 하나의 예술이라는 사실과 번역가로서의 자부심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왜 번역가는 겸손해야만 하냐고, 자신은 번역가로서 항상 뻔뻔스럽게 행동해 왔다고 말이다. 번역가와 번역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은 세상에서 그의 당당한 목소리와 자신감이 더욱 의미있게 느껴진다. 한국문학과 문학번역에 대한 생생한 현주소가 궁금하다면, 사전이 아닌 언어와 언어 사이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번역의 진짜 매력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말들
김달님 지음 / 미디어창비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치에코 씨와 이야기를 나눈 이후 언제나처럼 엘리베이터와 화장실, 건물 로비에서 종종 마주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건물에는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있다고. 매일 아침 사람들이 감동할 것을 기대하며 그날의 노동을 다짐하는 사람이. 건물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궁금해하고 쉬는 시간에는 좋아하는 창문 앞에 서서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사람이. 정성을 다해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날 마음에 담아둔 것을 일기에 적는 사람이. 치에코 씨를 떠올리면 건물 곳곳에 그가 있을 만한 자리마다 조명이 켜지는 것 같다. 치에코 씨가 없어도 그 자리를 알아볼 수 있다. 서로 이름을 알기 전에 치에코 씨가 나의 자리를 알아보았듯이. 하루하루. 우리 삶이 함께 흐르고 있다.                p.37~38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김달님 작가의 신작이다. 살면서 마주한 다양한 사람들, 그들과 함께했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들려 주었던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작가는 지난 겨울에 자신을 키워준 두 사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두 달 간격으로 연달아 떠나 보냈다. 이 책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가까운 존재를 잃으면서 느꼈던 상실감과 슬픔, 공허함을 견디고 이겨내며 쓴 글들이다. 슬픔이 긴 날들에도 다시 기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지금 여기에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조용히 희망하는 마음, 그리하여 하루하루 다가오는 삶을 기꺼이 사랑해보자는 마음이 담겨 있다.

 

회사 건물의 환경미화원, 택시 기사, 산책로에서 마주친 쑥 캐는 할머니, 글쓰기 수업을 듣는 70대 어르신, 45년 동안 물질을 해온 해녀 등 수많은 사람들이 들려준 말들을 통해서 조금씩 자라난 마음이 '다음'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한 시절 함께였지만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들, 떠올리기만 해도 언제나 힘이 되는 사람들, 일을 통해서든 다른 어떤 이유로든 잠시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인연을, 그들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작가의 마음이 페이지 마다 가득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아직 살아보지 못한 여든 너머의 삶에도 여전히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배우고, 매일 반복되는 노동에도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통해 나의 한구석이 반듯하게 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내가 모르는 인생이 이토록 많다는 깨달음을 통해 삶에 대한 애정과 의지를 다진다.

 

 

 

궁금해하다 깨닫는다. 매일 아침 달라지는 날씨처럼, 오늘도 모두에게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비가 내리는 곳에도. 차차 흐려지는 곳에도. 누군가는 열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을 기대하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라테 아트에 성공하고, 누군가는 혼자 여행을 떠난 바다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때로는 그저 이렇게 '사람들이 살아간다'라는 사실이 마음을 일으키는 힘이 될 때가 있다. 산다는 게 뭐 별건가 싶을 때 조금 더 살아볼 만해지는 것처럼. 그리고 생각한다. 세상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하루가 있고, 그 하루가 쌓인 사람들의 삶을 결코 다 알 수 없을 거라는 것. 몰라서 계속 궁금해지고 신기해지는 마음이 나에겐 세상을 좋아하는 방식이라는 걸.             p.180

 

나이를 먹을 수록 삶에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질지 크게 기대하지 않게 된다.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이 설렘보다 조심스러움에 가까워지는 것, 할 수 있던 일을 하나씩 하지 못하게 되고, 가까운 존재를 영원히 떠나 보내야 하고, 예측 가능한 행복과 고만고만한 기쁨에 만족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우리가 모르는 행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먼 곳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은 순간도 분명 있다. 보지 않았더라면 존재하는지 몰랐을 풍경들을 찾아 가서 보고, 견뎌야 할 상실과 슬픔을 이겨내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좌절감을 산뜻하게 털어내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이런 책을 읽으면서 말이다.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들에 내가 모르는 행복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졌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이야기가, 내가 알 수 없는 인생들이 펼쳐져 있다. 내 옆에 있지 않더라도, 내가 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들도 어딘가에서 각자의 매일을 견뎌내고, 내일을 꿈꾸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하루가, 그 모든 인생이 나에게도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는 걸 사려 깊게 보여준다. 예쁜 표지만큼이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책이다. 계절을 계절답게 하는 존재의 이름을 익히며 세상에 알아야 할 이름이 여전히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설레이고, 세상에 없는 아름다움을 믿게 하는 따뜻함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작가는 '사람들의 포옹, 사람들의 말, 사람들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결국엔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할 나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수 년 동안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는 글을 써온 이력 때문인지 모든 글에 인간적인 시선이 담겨 있어서 특히 더 좋았던 것 같다. 우리를 조금씩 자라게 하는,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말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이 어떤 건지 가끔 생각해 - 오늘도 마음을 노래하는 뮤지션 고영배의 다정한 하루하루
고영배 지음 / 북폴리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이 되는 꿈을 꾼다. 어릴 때부터 말이 안 되는 꿈을 꾸어왔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놀라울 정도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꿈꾸는 대로, 말하는 대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걸 믿는 편이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점점 말이 되는 꿈만 꾸게 된다. 더 말도 안 되는 꿈을 막 꾸고 싶은데 이것이 마음대로 안 될 때 어른이 되어감을 체감한다. 말이 되는 꿈을 꾸는 이유는 이제 뭘 좀 알게 되어서다. 아무것도 몰라야 말도 안 되는 꿈을 꿀 수 있다.           p.129~130

 

친근한 노랫말과 유쾌한 음악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밴드 소란. 소란의 보컬 고영배의 첫 책이다. 다정하고 산뜻한, 팀 이름과는 달리 소란스럽지 않은 소란의 음악을 좋아한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스윗하고 설렘을 유발시키는 소란의 노래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책이니 말이다. '이 책에는 그동안 들키고 싶지 않았던 저와 내심 더 알리고 싶었던 저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해요.'라는 말로 포문을 여는 이 책은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파트는 노랫말로 되어 있다. 미공개 팬송인 ‘우리 가던 길로 천천히 가자’, 소란의 곡 <행복>의 가사이자 이 책의 제목인 ‘행복이 어떤 건지 가끔 생각해’, 소란을 페스티벌의 황제로 만들어준 곡 <가을목이>의 가사인 ‘고마워 예쁘게 웃으며 얘기해줘서’로 나뉘어져 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순간부터 인디 밴드 소란이 탄생하게 된 배경, 콘서트의 뒷이야기들, 유년의 기억,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뮤지션이자 남편, 그리고 아빠로서의 모습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고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즐겨 듣던 어린이가 중학생이 되어 일렉 기타를 치는 친구를 만나게 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밴드부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축제 공연을 하면서 제대로 공연에 중독되기 시작한다. 이후 진로에 대한 방황의 시간을 거쳐 인디 밴드 소란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인디밴드를 결성하는 방법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밴드 소란을 좋아하는, 밴드 음악을 하려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12년 넘게 음악을 만들고 무대에서 공연을 해온, 1년에 정식 콘서트만 세 번씩 열고 수도 없이 많은 행사와 페스티벌에서 크고 작은 공연을 해온 경험을 토대로 쓰인 글이니 말이다.

 

 

 

샘솟듯이 솟아나는 좋아하는 마음은 표현할수록 나와 상대방 안에 행복으로 저장된다. 이 행복은 기억과는 달리 변질되거나 사라지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나의 자존감으로 영원히 마음속에 머무른다. 아침에 만나서 밤새 보고 싶었다고 말해주고, 상대에게 나도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 하루는 얼마나 풍성하고 예쁠까. 살면서 아껴야 하는 것들이 무척 많다. 아끼지 않았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일들도 많다. 그런데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은 반대다. 아낄수록 나중에 후회한다.            p.171

 

2부로 가면 유년의 기억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혼자서 두 아들을 키우셨다고 한다. 그런 엄마가 언제나 강하고 빈틈없는 존재로 느껴졌었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 순간들이 얼마나 위태롭고 아슬아슬했었는지 아들은 알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에 엄마는 두 아들에게 전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으니까.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조각난 채로 간직해왔다고 한다. 각 조각들은 꽤나 선명한데 전체의 모습은 희미한 상태로, 머릿속에 머물렀던 기억들이다. 이제 어른이 되고, 심지어 그때의 엄마보다 나이가 더 많아지고 나서야 당시 젊었던 엄마가 어떠했을지 짐작해 보는 아들이 되었다. 30대 초중반에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아들 손을 잡고 연고도 없는 낯선 곳으로 이사를 하며 얼마나 많은 각오와 다짐을 했을지를 말이다.
 
3부로 가면 아내와의 만남부터 두 딸의 탄생에 이르는 지금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소란의 팬이라면 아마도 그의 이러한 개인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더 관심있게 읽게 될 것 같다. 무대 위 스타가 아니라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만나게 될테니 말이다. 영상도 숏폼으로, 음원도 2분이 넘지 않은 곡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은 모든 게 짧아지는 시대이다. 그도 가사를 쓰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팬들과 소통하는데 갈수록 글이 짧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 긴 글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고 한다. 시대에 맞춰 모든 게 짧아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반대 일에 뛰어들 생각에 겁부터 났다고 말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각자 이 책을 직접 읽어보며 판단하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꾸밈없이 솔직한 글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 행복이란 어떤 건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펄프헤드 - 익숙해 보이지만 결코 알지 못했던 미국, 그 반대편의 이야기 알마 인코그니타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형은 내 그런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여기에 물질의 차원으로, 말라서 갈라지는 시냅스 덩어리 차원으로 축소된 의식이 있었다. 형은 단어들의 사용법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사물과 제대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그 사물들과, 에너지장처럼 다가왔다가 멀어져가는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형은 새로운 이름들을 발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형의 자리는 나무랄 데 없는, 심지어 시적인 자리라고 부를 수도 있는 곳이었다. 형은 죽음을 만져봤지만, 혹은 죽음이 형을 건드렸지만, 형에게 삶이란 심지어 그런 것도 가능한, 여전히 흥미로운 어떤 것인 듯이 보였다.             p.85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은 미주리주의 오자크 호수에서 열리는 크로스오버 페스티벌을 취재하는 일을 맡는다. 사실 그의 계획은 군중들이 모여 있는 곳 언저리에 서서 현장 분위기를 좀 끄적댄 뒤 관객들 중 몇몇 사람들과 대충 이야기를 나누다 백스테이지로 가서 연주자들의 뻔한 이야기를 적당히 받아적다가 올 예정이었다. 밤이 되면 자신이 몰고 간 렌터카에서 몰래 술을 좀 마신 뒤 모닥불가에 둘러앉은 기도 그룹 사이에 끼어앉아 있다가 분위기를 좀 느끼고 나서, 비행기 타고 귀가, 통계 사항들을 좀 섞어 넣은 뒤 입금 확인하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그 취재는 그의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급기야 자신의 트레일러로 돌아와 울기 시작한다. 이 여행을 장난처럼 생각하다니, 나는 얼마나 멍청이였던가부터 시작해 형편없이 무너져버리게 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하다면 이 책에 수록된 첫 번째 글 '이 반석 위에서'를 읽어 보자.

 

이번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고, 대피소에서 사람들을 만나 취재한 글이다. 카트리나는 미국에서 기록된 것 가운데 가장 거대한 규모의 폭풍해일을 만들어 냈는데, 파도 높이가 무려 9미터를 넘어섰다고 한다. 이 거대한 해일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밀어닥쳤기 때문에 미시시피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는 인근 초등학교에 마련된 적십자 대피소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낮잠을 자다 깨어났을 때 2미터가 넘는 물이 집 안에서 넘실대고 있었다는 사람부터, 바람이 휘몰아쳐 나무에 부딪히고, 주변에는 뱀들이 헤엄치고 있었다는 이도 있었으며, 대부분 자신이 곧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입에 올리는 말은 바로 '사라졌다'는 거였다. 집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사라지고, 산책로들이 사라져버렸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미래는 강제로 뜯겨나갔고 거대한 공백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생생하게 현장의 목소리를 담으면서도, 자신만의 시각으로 '이 세상의 진짜 마지막의 시작'을 그려낸다.

 

 

 

이런 식의 과열된 선언은 모두 물정 모르는 짓이라고 무시해버리기 전에, 우리는 그 노래들에 표현된 느낌이나 표현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단순하고 기술적인 설명이 하나도 없는지 질문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젊은 소비자들의 물결을 타고 전 세계를 장악해버린 로큰롤에 블루스의 서사를 강탈당했다는 것이다. 이 분리 이전으로 돌아가보면, 다른 요소 또한 존재한다. 더 깊고, 더 농익은 근원이다. 이 음악에 대해 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주목했다. 로버트 파머는 이걸 '깊은 블루스'라고 불렀다. 물론 우리는 중압감 속의 중압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p.420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의 글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끈이론>에 수록된 다소 장황한 서문으로 처음 만났었다. 천재적 재능으로 미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4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트 월리스는 <끈이론>에서 테니스 경기를 둘러싼 모든 철학적, 정치사회적, 심지어 수학적 맥락들을 깊이 쑤시고 건드리며 테니스의 시간을 경이로운 산문의 언어로 옮겨냈다. 그리고 그 독특한 에세이만큼이나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의 서문 또한 유려한 언어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미국 매거진 저널리즘계에서는 이미 뛰어난 저술가로 알려진 그는 다수의 매체에 글을 발표해왔는데, 이번에 만난 책은 그 중 선별한 열네 편의 이야기를 묶은 것이다. 에세이라는 카테고리의 책 중에 이렇게 두툼한 분량의 작품이 있었나 싶은데, <펄프헤드>는 무려 564페이지에 달한다.

 

이 벽돌 에세이집에는 음악을 하는 형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 감전되어 거의 죽을 뻔했던 일을 비롯해서, 19세기의 르네상스형 식물학자와 선사시대의 미시시피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대중문화 소비 현상의 일면을 날카롭게 고찰하고 크리스천록 페스티벌 체험기 등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글들이 담겨 있다. 그의 글은 현란하지만 어렵지 않고, 날카롭지만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루며 놀라운 세계를 보여준다. 논픽션의 기본을 유지하되 다양한 소설적인 기법들을 채택한 방식의 글은 저널리즘 역사 속에서의 독특한 위치 때문에 '뉴 저널리즘'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런 형식의 글을 우리 저널리즘 역사나 문학사에서는 흔히 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이번에 출간된 <펄프헤드>를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훌륭한 저널리즘이 갖춰야 할 덕목을 빼놓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들이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인디언 동굴에서 마이클 잭슨에 이르기까지, 미국 문화의 깊이 있는 이면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매거진 저널리즘계의 톰 웨이츠'라 불리는 뛰어난 저술가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의 탁월하고 생동감 넘치는 글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풀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8
강화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고난 신체조건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체력은 어느 정도 좋아질 수 있었다. 힘과 유연성도 마찬가지였다. 운동을 배운 지 겨우 한 달 반이었지만, 지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좋아지고 있다는 것. 그 과정이 지루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지수의 몸이 변화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매일 새벽 지수를 집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건 바로 그 감각이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뿌듯함. 삶의 다른 것도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p.69

 

서른여섯인 지수는 어머니의 오래된 빌라의 문간방에서 지내는 중이다. 5년 전만 해도 엄마와 함께 살게 되리라고는,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 있는 낡은 '무궁화 궁전'에 살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겨우 모든 돈 천만 원을 전세 사기로 날리고, 대출 빚을 지고, 남자친구에게 차이고... 그러느라 엄마 집에서 손님처럼 지내고 있다. 동생인 미수는 결혼을 해 가족들과 살고 있으며, 약국을 운영하고 육아도 하느라 늘 바쁘다. 지수가 어린 시절부터 늘 엄마인 영애 씨에게 꾸중을 들었더라면, 다방면에서 뛰어났던 미수는 자랑스럽고 기대할 일이 많은 자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세 사람의 관계는 지금도 여전했다.

 

2년 전 겨울, 지수는 마침내 대출금을 다 갚아서 꽤 행복했다. 그러기 위해서 먹는 것, 입는 것, 그 외 모든 것을 아껴왔고, 빚을 갚느라 모아둔 돈은 다 사라졌지만 괜찮았다. 마음먹고 산 차를 팔았고, 약속은 잡지 않았으며, 회사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차렸다. 그리고 한동안 자신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이너스 부호를 함께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날 지수는 혼자 영화를 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에 가보니 미수와 제부가 와 있었고, 분위기가 이상했다. 영화 보느라 좀 늦었다는 지수에게 미수는 자신은 시간이 없어서 극장에도 못 간다며, 책망하는 듯한 말투였다. 알고 보니 엄마가 실수로 끓는 물을 손에 부어 화상을 입고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수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고, 엄마가 다쳤다는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뭘 책망하는 것일까? 퇴근하고 바로 집에 오지 않은 것? 엄마를 챙기지 않아 다치게 된 것? 지수는 반발심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두 자매와 엄마 사이의 갈등은 작지만 티나지 않게 쌓여 간다.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났고, 잘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얘를 이렇게 미워했었나. 이렇게 많이 화가 났었나. 지수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골랐다. 모든 걸 망가뜨리는 말.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말. 그런 말. 지수는 동생에게 그런 말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때가 다가온 그 순간, 지수는 (놀랍게도) 서글픈 목소리로 천천히 진심을 말했다.
"엄마가 너만 보고 있을 때...... 부담스럽지?"
그리고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지수의 꿈에는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p.111~112

 

지수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얼굴 없는 인간들이 풍선처럼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꿈에 시달리느라 밤새 소리를 지르다 깨곤 한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그렇게 소리를 지른 적이 없었던 지수는 꿈에서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하고, 때리기도 하며 상대에게 맞섰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얼굴은 없지만, 익숙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그녀의 전재산을 들고 사라진 집주인, 그녀가 가장 힘들 때 헤어진 전 남자친구.. 그래 미워해도 된다고 치자. 하지만 매일 밤 잠을 설쳐가며 굳이 소리 지르고, 분을 이기지 못해 깨어나 허망하게 시간을 보낼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그리고 사실 지수의 꿈에는 엄마인 영애 씨와 동생 미수도 나왔다. 지수는 엄마인 영애 씨가 어린 시절에는 서운했고, 함께 사는 지금은 어딘지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리고 뭐든 잘했던 미수가 언니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일정 부분 책임져왔던 것은 고마웠지만, 지수는 자신 역시 힘닿는 대로 자신의 몫을 감당해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매는 엄마의 진심을 알 수 없고, 동생 역시 언니가 모르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채 진심을 숨기고, 점점 멀어져 간다.

 

이 작품은 평생 동생에게 밀리고, 타인에게 험한 말 한 번 해보지 않은 채 살아온 지수가 어느 날 새벽 늘 같은 시간에 러닝을 하는 한 여자를 보게 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서사를 그리고 있다. 평생 운동이라고는 거들떠본 적도 없던 지수는 여자가 다니는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시작하며 조금씩 활력을 갖게 되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가꿔나가게 된다.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마음을 다해 미워할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가족 아닐까. 극중 지수가 '가족이란 절대 헤어질 수 없는 관계라 생각했지만, 결국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고' 깨닫게 되는 것처럼, 가족이라고 해서 꼭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며 애써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지수가 자신의 목소리와 존재를 드러내는 과정을 Pull-up이란 운동을 통해 몸의 감각을 익히면서 소외와 자기혐오를 극복하게 된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지금보다 더 크고 강한 몸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와 마음, 생각들을 스스로 낯설게 느끼며 앞으로 무슨 일을 겪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힘을 바라보며 지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아래에서 위로, 조금씩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그녀의 새로운 서사가 그렇게 시작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