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이름 붙이기 -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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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 생명의 세계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방식, 자기 주변 생물들의 이름을 짓고 체계화하고 개념화하는 방식에 관해 기존에 어떤 사실들이 알려져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오래된 책들과 옛날 과학저널들을 들쑤시고 다녔고, 이상한 것들, 잊힌 것들, 한 번도 제대로 알려진 적 없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어둡고 먼지 쌓인 도서관들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게 좋았다. 괴상한 동물과 이국적인 식물, 그리고 그보다 더 기이해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들에 관한 글을 읽을 핑곗거리가 생긴 것이 좋았다.             p.172~173

 

작년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과학 책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쓴 룰루 밀러는 감사의 말에서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에 대해 언급했다. 캐럴 계숙 윤이 지적인 부분에서 대모 역할을 해주었다고,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 덕분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나 역시 룰루 밀러의 책을 흥미롭게 읽었기에, 이 책이 매우 궁금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어로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캐럴 계숙 윤은 예일대와 코넬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진화 생물학자이자, 20년 넘게 《뉴욕 타임스》에 글을 연재한 과학 칼럼니스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현역 과학자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실험용 생쥐와 놀거나, 어머니가 꾸린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결혼도 과학자와 했으며, 친구들도 대부분 과학자인데다, 과학자가 되고 나서 수십 년 동안 과학계의 경이롭고 새로운 발견들에 대한 글을 쓰며 보내왔다. 이 책은 그렇게 과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온 학자이자 저술가인 그가 분류학과 진화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놀라운 통찰력을 담고 있다. 진화 생물학을 다룬 책들은 꽤 있어 왔지만, 분류학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류학에 대한 가장 쉽고도 정확한 설명은, 이 책의 첫 문장에 담겨 있다. '200년도 더 전에 과학자들은 생명 세계 전체(꽥꽥거리고, 휙휙 지나다니고, 꽃을 피우고, 덩굴손으로 감아 오르고, 잎을 내고, 털이 복슬복슬하고, 초록이고, 경이로운 그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려는 과업에 착수했다'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분류학'이고, 분류학은 생물학의 시작점이 된다.

 

 

 

이 책을 쓰는 작업에 착수하기 전, 나는 생명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 과학이라고 확신했다. 이치에 맞는 다른 그 어떤 방법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사실 확신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명백한 진실이었다. 진화의 질서는 올바로 판독하기만 하면 정말로 소중한 지식이며, 모든 생물의 진짜 역사를 흘깃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이것을 생명의 세계를 분류하고 명명하는 최선의 방법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맞는 방법으로 알았다. 아무리 독특하고 재미있더라도 다른 모든 분류법은 틀린 것이었다. 아무리 기이한 일 같더라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았다.             p.394

 

흥미로운 대목이 많은 책이었지만, 특히나 인상깊었던 것은 ‘움벨트(umwelt)’라는 개념이었다. 이 단어는 독일어로 ‘환경’, ‘주변 세계’, 나아가 '세계관'을 뜻하는데, 우리가 공통적으로 지각하는 세계를 말한다. 생명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 특유의 감각에 대한 생각을 일깨우는 '움벨트'라는 개념에서 비롯되어 이어지는 내용들이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아프리카부터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까지 언어와 문화, 사회, 살아가는 장소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비슷한 분류를 하는 이유를 바로 움벨트가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매일 의식하지도 못한 채 한 종 안에서도 또 질서를 매기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분류하고, 판단한다.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 움벨트라는 렌즈를 통해서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저자는 인류학과 생물학, 인지심리학, 생태학, 진화생물학을 넘나들며 분류학이라는 낯선 과학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작가가 대중을 상대로 오랜 세월 글을 써온 이력 때문인지, 굉장히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딱하고 어렵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책이었다. '과학적 분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칼 린나이우스가 시골 교구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하고 교육도 잘 못 받은 아이에서 자연의 질서라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상을 거머쥐려 하는 성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모험도 재미있었고, 진화론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을 다윈의 따개비에 관한 연구는 실패와 삽질의 연속으로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으며 물고기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처럼 분류학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룰루 밀러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직관과 진실의 충돌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자세히 들려주는 <자연에 이름 붙이기>를 향해 걷지 말고 뛰어가보시기를 권합니다.' 라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책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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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 꼴까닥 섬의 비밀 파란 이야기 15
이재문 지음, 오승민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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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비밀이 있어. 우리 할아버지 말을 빌리자면, 아이들이야말로 그 비밀을 발견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대. 아무리 뛰어놀아도 지치지 않는 체력,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관찰력, 비밀과 수수께끼를 좋아하고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호기심까지! 그러니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모험'이야. 세상을 탐험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 눈이 반짝여야 할 아이들이 흐리멍덩해진 얼굴로 숫자나 암기하고 있으니."             p.68

 

재우는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공부하느라 늘 바쁘다. 엄마가 정해 준 '글로벌 리더'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불평 없이 노력하는 착한 아들인 재우의 평범한 일상은 희지와 짝이 되면서부터 완전히 달라진다. 희지는 가슴팍에 커다랗고 하얀 'H'를 수놓은 보라색 체육복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입고 다니는 엉뚱한 아이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며, 경계를 게을리해선 안된다며 괴상한 행동을 하곤 해서 친구들에게는 괴짜로 취급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희지의 헛소리가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쫄쫄이를 입고 빨간 입술을 한 자들이 우르르 나타나 희지가 납치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재우는 우연히 주부게 된 희지의 노트에서 나오는 강렬한 힘에 이끌려, 평소 성격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되는데... 과연 재우는 희지를 악당들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까?

 

희지를 태운 트럭이 도착한 곳은 어느 한적한 부둣가였고, 차들은 멈추지 않고 승선했다. 그 동안 재우는 짐칸 안에 꼭꼭 숨어 있었는데, 이미 짐칸에 올라탈 때의 용기는 씻은 듯 사라진 상태였다. 엄마는 늘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며,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재우는 자꾸만 두려워진다. 공부를 할 때도 그랬다. 정말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재우는 해내지 못할 까봐 두려웠고, 엄마를 실망시킬까 봐 겁이 났다. 그러는 사이 일당은 섬에 도착했고, 재우는 몰래 상자에서 빠져 나와 수풀 사이로 숨어든다. 하지만 금방 쫄쫄이들에게 들켜 희지와 함께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곳은 화산 연기에 가려 있어 찾기 힘들기로 유명한 꼴까닥 섬이었다. 히든이 묻힌 곳으로 소문이 나서 다들 찾아 헤맸지만, 백 년 동안 딱 한 명 빼고는 아무도 찾지 못했던 곳, 그리고 그 한 명은 바로 희지의 할아버지인 모험가 송명이었다.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었다. 아빠처럼 살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도 아니었고, 손에 땀을 쥐게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모험가의 삶이 아닌 머저리의 삶이었다. 더는 머저리로 살고 싶지 않았다. 재우가 아빠처럼 되지 않길 바라는 엄마 마음은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해도 아빠는 아빠고, 재우는 재우다. 재우는 결코 아빠가 아니다. 재우는 재우의 길이 있다. 가슴 뛰는 일을 할 것이다. 비록 엄마의 말을 거스르게 될지라도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나답게 살 것이다. 재우는 큐브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 눈을 의심케 할 만한 일이 벌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p.141~142

 

극중 희지는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모험가 그리고 머저리. 여기서 머저리는 머리가 저릿하도록 세뇌당한 무리를 뜻하고, 스스로를 철든 인간이라 칭하며 자기들 생각만 옳다고 믿는 철인들이 사람들을 세뇌시켜 '모험가'들을 업애려고 한다는 것이다. 철인의 우두머리인 소피아는 가공할 힘이 깃든 보물 '히든'을 찾아 세상 모두를 머저리로 만들려는 속셈이다. 희지가 잃어 버려 재우가 주운 그 노트가 바로 히든맵이었다. 히든맵에 따르면 꼴까닥 섬에 히든이라는 보물이 묻혀 있다고 하는데, 과연 재우와 희지는 철인들보다 먼저 히든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몬스터 차일드>로 제1회 사계절어린이문학상 대상을 받은 이재문 작가의 신작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기도 한 작가는 평소에도 어린이들을 자주 관찰하는데, 그러다 '모든 사람들은 모험가로 태어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누구나 모험가로 태어나지만, 어른들이 정해 놓은 세상에 의해 모험가가 아니게 자랄 뿐이라고 말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세상의 숨겨진 비밀 ‘히든’을 찾아나선 모험가들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열렬하게 좋아해 본 적 없는 사람도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만든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마음과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것 투성이라서 더 근사한 거라는 믿음으로 바로 지금, 나만의 가치 있는 히든을 찾으러 떠나 보자. 다섯 개의 히든을 찾는 모험가 재우와 희지의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이 이야기는 나머지 히든을 찾는 모험으로 계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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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8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Jc 드브니 각색, PMGL 만화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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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비슷한 것'은 한 달 가량 계속 됐다. 한 달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잠을 맞이하지 못했다.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이제 자볼까 생각한다. 그러면 그 순간 마치 조건반사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되레 잠이 깼다."      

 

여자는 지금 17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병원에 가봤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가지 않았고,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치과의사인 남편과 초등학생인 아들은 그녀가 한잠도 못 잔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고, 그녀는 이건 혼자서 처리해야 할 종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가족들이 잠든 밤에 술을 마시고, 과일을 먹고, 책을 읽는다. 긴 러시아 소설이 읽고 싶어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를 꺼내 든다. 조금도 졸리지 않았기에, 그녀는 한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날이 밝으면 다시 평범한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을 무리 없이 해냈다.

 

 

그녀는 매우 신속하고 기계적으로 집안 일과 할 일을 마치고, 틈만 나면 <안나 카레니나>를 집어 들었다. 10시가 되자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 함께 자는 척을 했지만 사실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렇게 연속되는 각성이 2주째에 접어들자 불안해졌지만, 이상하게도 피부가 전에 비해 훨씬 윤기가 흐르고 탄력이 있었으며, 몸에서도 터질 듯한 생명력이 넘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지만, 점차 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녀는 도서관에 가서 잠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무덤덤하게 기계적으로 이런저런 가사 작업을 하고, 일주일에 걸려 <안나 카레니나>를 연속으로 세 번 읽는다. 과거에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했던 온갖 발견과 수수께끼들, 그리고 톨스토이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가 한눈에 내다 보였다. 그녀는 점차 점차 잠 못 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번에 다시 읽고 알았는데,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을 거의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거기에 있었을 감정의 떨림이며 흥분의 기억은 어느새 모두 스르르 빠져 나가고 없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 내가 책을 읽으며 소비한 막대한 시간은 대체 뭐였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이 프랑스 만화가 PMGL과 아트 디렉터 Jc 드브니와 만나 근사한 그래픽 노블로 재탄생했다. 아홉 편의 작품 중 <잠>은 <TV피플>이라는 소설집에 수록되었고, 카트 멘쉬크의 일러스트레이션과 함께 아트북으로도 출간된 적이 있다. 평범한 가정 주부가 어느 날 가위눌림과 기분 나쁜 꿈을 꾼 뒤로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어딘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열린 결말로 긴 여운을 남겨 준다.

 

잠을 자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이 여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를 되짚어 보게 만든다. 이상하게도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어떤 책이든 아무리 의식을 집중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어떤 난해한 대목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본연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잠을 버림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확대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깨달음이었고, 당연히 그녀의 삶은 그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만화가 PMGL과 아트 디렉터 Jc 드브니는 독창적 이미지 연출을 선보이면서도 원작 소설의 스토리와 인물, 대사 등을 왜곡 없이 담아냈다. 덕분에 원작의 문장들을 고스란히 보면서도, 창의적인 컷 분할과 디테일한 그림으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굉장히 하루키스러우면서도, 또 반대로 완전히 낯선 느낌이 공존하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텍스트로 읽으면서 상상했던 공간과 배경, 인물들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구체화시켜서 볼 수 있다는 매력과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촘촘히 글자만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도 너무 좋고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하루키 단편 만화선은 <빵가게 재습격>,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 <셰에라자드>, <버스데이 걸>, <사랑하는 잠자>,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일곱 번째 남자>, <잠>, 그리고 <타일랜드>까지 아홉 편이다. 세트로 구매해도 소장용으로 좋을 것 같고, 원하는 작품만 개별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하루키의 작품을 색다른 분위기로 만나면서 단편 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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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즐거움 - 우리가 사랑한 작가들의 매혹적인 걷기의 말들
존 다이어 외 지음, 수지 크립스 엮음, 윤교찬.조애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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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해 보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국인들은 걱정에 찌들고 조급해하고 내일에 대한 기대감에 오늘을 담보 삼아 불만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걷기는 이런 삶에 내리는 처방이다. 약을 짓는 것과 같은 기대감과 목적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피로감이 쌓일수록 약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봄날 즐거운 마음으로 언덕 너머로 산책하기. 추운 겨울 날씨에 밖으로 나가보기. 발이 땋에 닿을 때마다 마치 불이 이는 것 같고... 이런 희열감이나 탁 트인 길을 걸을 때 느끼는 즐거움에 대해 미국인들은 거의 모르고 지낸다.            p.51

 

한 걸음씩 꾸준히 걷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누구나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고개를 들어 길을 잘 살피면서 차곡차곡 발걸음을 쌓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때로는 별다른 목적지 없이 걷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혹은 사색에 잠겨 걷는 시간을 우리는 산책이라고 부른다. 재미있는 것은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대부분 산책이라는 행동은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역시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별다른 일정이 있지 않은 날에도 만보는 거뜬히 걷는다. 매사에 급하고,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산책을 하는 순간만큼은 어딘지 여유로워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자동차를 타고 달려갈 때는 미처 볼 수 없는, 천천히 걷기를 할 때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 또한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걷기를 예찬한 작가들은 꽤 많이 있었다. 걷기를 사유의 방법으로 택한 철학자와 작가들에 대해서는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통해 만난 적이 있다. 이 작품에도 등장했던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등은 리베카 솔닛의 책에서도 만났던 작가들이다. 걷기에 대한 열망이 어떻게 문학적인 사유로 발전되었는지 대문호들의 작품을 통해 만나는 일은 설레임을 안겨 준다. 갈수록 모든 것이 짧아지고, 빨라지는 세상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 책을 통해 만나는 세계적인 작가들의 걷기에 대한 예찬은 삶을 조금은 느리게 돌아보라고, 조금 더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원을 거닐며 자연과 하나가 되고, 사색을 통해 내면 깊숙한 곳을 파고들기도 하고, 걷는 시간을 창작 활동으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마거릿은 7월 말에 집으로 돌아왔다. 무성한 숲은 나무의 진한 녹음으로 어두워 보였고 그 아래에서 고사리가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을 받고 있었다. 날씨는 무덥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거릿은 아버지 옆에서 나란히 걸어갔는데,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사리를 밟아 특유의 향을 느끼면서 잔인한 기쁨을 맛보았다. 따스한 햇빛과 향긋한 공기로 가득 찬 공터에는 야생 식물이 햇빛 아래 자유롭게 어우러져 있었고, 빛을 받아 생기 있는 허브와 꽃 들도 보였다. 이러한 삶, 적어도 이 산책만큼은 모두 마거릿이 기대한 대로였다. 그녀는 이 숲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p.251

 

이 책은 17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문호들의 '걷기'를 주제로 한 글들을 모은 앤솔로지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버지니아 울프, E.M. 포스터, 윌키 콜린스, 제인 오스틴, 토머스 하디, 에밀리 브론테, 조지 엘리엇, 찰스 디킨스 등 서른네 명의 작가들이 시와 에세이, 소설 등에서 '걷기'라는 주제로 쓴 글들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걷기를 통해 어떻게 문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자연과 우리 본연의 자아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일평생 28만 킬로미터를 걸었다고 하는 윌리엄 워즈워스에게 걷기는 창작 활동의 일부이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거의 매일 산책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글을 썼으며, 마크 트웨인은 걷기의 즐거움이 대화를 나누는 데 있다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여행기를 유쾌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불면증으로 고통받던 찰스 디킨스는 자전적 에세이에서 노숙자의 시선으로 밤 산책을 묘사했고, 앨프리드 테니슨은 도보 여행이 중요한 테마가 되는 시에서 걷기를 통해 슬픔을 표현했다.

 

걷기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 책속 문장들 또한 우리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크게 네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실 어디서부터 읽어도 상관없다.  걷기 그 자체를 주제로 한 산책자의 내면을 다룬 장,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향하는 도보 여행을 다룬 장, 걷는 존재들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글들을 모은 장, 그리고 관찰자가 되어 배회하는 도시 산책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장으로 구분되어 있어 원하는 대로 골라 읽으면 된다. 이렇게 작가들이 길 위에서 써내려간 사유와 감성의 문장들을 책 한 권으로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앤솔로지만의 특별한 점이 아닐까 싶다.  빠르게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인생을 걷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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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6
양윤옥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Jc 드브니 각색, PMGL 만화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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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그길로 사라졌어요. 연기처럼. 그 뒤로 전혀 아무 소식도 없어요. 24층과 26층 사이 계단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아홉 편이 각각 한 권의 만화로 재탄생했다. 프랑스 만화가 PMGL과 아트 디렉터 Jc 드브니는 독창적 이미지 연출을 선보이면서도 원작 소설의 스토리와 인물, 대사 등을 왜곡 없이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원작의 문장들을 손실 없이 담아내 하루키 소설 특유의 글맛을 살렸고, 창의적인 컷 분할, 디테일한 그림에는 애독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의미와 장치를 가득 채웠다. 권마다 그림체를 다르게 해 단편소설 각각의 분위기를 살렸다. 〈빵가게 재습격〉과 같은 초기작부터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를 거쳐 〈타일랜드〉 〈셰에라자드〉 등 최근작까지 만나볼 수 있다.

 

 

먼저 만나본 것은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라는 작품이다. 이 단편은 '도쿄기담집'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래픽노블로 연출된 스토리가 원작 단편소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탐정이 여성 의뢰인을 만나 실종된 사람을 찾아 다니는 것이 주요 스토리인데, 의뢰의 내용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편을 찾아 달라는 내용이다. 남편은 같은 아파트의 24층에 사는 시어머니 집에 갔다가 26층인 그들의 집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탐정은 26층과 24층 사이를 샅샅이 뒤지면서 계단을 지나가는 이웃들과 말을 나누기 시작한다. 과연 사라진 남자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근데 아저씨,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어제도 여기 있었죠, 언뜻 봤는데."
"이 근처에서 뭘 좀 찾고 있어."
"뭘 찾는데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문 같은 걸 거야. 잘 모르겠네. 어쩌면 그건 문조차 아닐 수 있어."

 

의뢰인의 시아버지가 삼 년 전에 전차에 치여 돌아가신 뒤, 시어머니는 불안신경증에 걸렸다. 특히나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증세가 심해지곤 한다. 시어머니는 그들 부부가 살고 있는 맨션의 다른 층으로 이사를 왔고, 부부는 26층, 시어머니는 24층에 살고 있었다. 불안신경증세가 생길 때마다 그들이 내려가서 진정시켜 드리곤 했다고 한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사건 당일, 골프를 치러 갈 예정이었으나 비가 오는 덕분에 취소되어 집에 있었다. 일요일 오전, 어머니에게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현기증이 난다고 전화가 왔고, 남편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아침 식사를 준비해달라고 아내에게 말한다. 이십 오분 뒤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와 어머니가 안정되셨으니 지금 계단으로 가겠다고, 배가 고프다고 한다. 아내는 팬케이크를 굽고, 베이컨을 볶으며 아침 식사를 준비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어머니 집에 전화했더니 한참 전에 돌아갔다는 얘기만 하시고, 남편은 아무 소식도 없이 그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평소에도 비좁은 곳에 밀폐되는 걸 참을 수 없어했던 남편은 엘리베이터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계단을 이용했다. 그러니까 그는 24층과 26층 사이의 계단 중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갑도 면허증도 신용카드도 시계도 없이 맨손으로 말이다. 누구나 별다른 이유 없이 생에서 그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는 것, 물론 실제로 일상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 사라지는 초현실적인 사건은 상상 속에서만 벌어지곤 하지만 말이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의뢰인과의 마지막 통화 후에 탐정은 생각한다. '나는 다시 어딘가 또 다른 곳에서 찾아 다닐 것이다.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라고. 처음부터 의뢰인의 의뢰는 받지만 사례비는 받지 않겠다는 탐정의 미스터리한 사연 또한 그렇게 여운을 남긴 채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딘가 불가사의하고 기묘해서 전혀 실제로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소설이 아니라 만화 형식으로 읽다 보니 그게 또 어쩐지 현실감을 부여해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게다가 처음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졌던 그림체가 읽다 보니 너무도 하루키의 작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굉장히 색다른 그래픽노블 작품이었다. 소설을 보다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이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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