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상 세계로 간다 - 피라미드부터 마인크래프트까지 인류가 만든 사회
허먼 나룰라 지음, 정수영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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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의 원형은 역사상 어느 대륙이든, 어느 사회든 항상 존재해 왔고 대체로 비슷한 특징을 지닌다. 우선 현실의 인간 사회가 있고, 실재한다고 믿는 사건, 정체성, 규칙, 사물이 존재하는 가상 세계가 존재하며, 두 세계 간 지속적인 가치 전달로 개인과 사회의 부와 만족감, 의미를 증진하는 과정이 있다. 이런 가상 세계는 그저 재미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실제 사건이 벌어지는 실제 공간이며, 시간이 갈수록 만든 사람들의 마음에 단단히 자리 잡아 현실 세계만큼 생생하고 중요해진다.          p.36

 

메타버스란 현실세계와 거의 같은 활동을 할 수 있는 3차원 가상 세계를 일컫는 말로,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에 처음으로 등장한 개념이다.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추세로 인해 메타버스라는 개념은 점차 주목받고 있는데, 가상현실(VR)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해 게임처럼 즐기는 것을 넘어 실제 현실에서처럼 사회, 문화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 한 메타버스 플랫폼 업체에서는 가상의 추모공간에서 성묘, 참배를 할 수 있게 하고 있고, 온라인 가상 공간을 이용해 상담과 교육 등의 활동을 하고, 이산가족들에게 고향을 방문할 수 있는 메타버스 공간도 있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음반 발매 쇼케이스를 진행하기도 하고, VR콘서트를 하거나 팬미팅을 하기도 한다.

 

가상 세계의 현실감이 이렇게 높아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메타버스와 가상 세계를 일시적인 유행이나 더 화려한 비디오 게임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상 세계와 디지털 메타버스가 왜 중요한지, 왜 우리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인지, 왜 앞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될지 총망라해 알려 준다. 인문학적 관점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미래 메타버스의 설계도를 그려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서이자, 우리를 미래로 이끄는 가이드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메타버스가 IT 투자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화려한 신기술이 아니라 인류가 처음 존재했을 때부터 지녔던 본성, 현실에 없는 세계를 창조하는 본성의 가장 최신판이라는 점이다.

 

 

 

당신이 신이 될 수 있는 세계를 하나 개발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곳 나름의 기준으로 실제 사람도 있어 당신이 지시하는 그대로 수행한다고 상상해보자. 만약 그 세계에 머물다가 현실의 일상으로 돌아왔더니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어떨까? 다른 세계에서 아무리 전지전능했어도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못 준다면 얼마나 맥빠질까? 이런 세계 간 부조화는 처음부터 예고된 불행이나 다름없다. 두 세계가 의미를 중심으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33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현실에 없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왔고, 그 세계를 현실의 삶에서 중요하게 취급했다. 동물의 왕국이나 다름없는 현실 세계부터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고고한 가상 세계까지, 인류는 태초부터 온갖 기발한 방법으로 여러 세계에 동시에 존재해왔다. 첨단 장비도 없이, 오직 언어와 상상력만으로 말이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며 내세의 삶을 준비했고, 다양한 문화권의 제례 의식과 마녀, 유령, 도깨비 등은 모두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 세계를 꿈꾸고 믿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니 가상 세계는 과거에도 지금도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며, 가상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어 그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활동도 놀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피라미드, 올림푸스로 대표되는 고대 가상 세계부터 로블록스, 마인크래프트와 게임의 형태로 만들어진 현대의 가상 세계까지,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가상 세계들을 살펴본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가상 세계와 디지털 메타버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도록 말이다. 이집트의 사후 세계 신앙부터 경기 결과에 따라 거리 행진 또는 폭동으로 번질 수 있는 프로 스포츠 팬의 열정까지, 역사상 인간이 상상한 세계는 현실 세계와 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소통해왔다. 메타버스는 단순히 가상 세계나 흥미진진한 이야기 모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메타버스에 세워질 가상 사회가 현실의 삶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낫게 할 것이라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고대부터 인류에게 현실 세계보다 중요한 가상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도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가상 현실, 증강 현실, 인공 지능, 암호 화폐 등의 기술 혁신으로 대충 설명하는 각종 메타버스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 책은 인류 역사와 심리학의 관점을 함께 엮어 내어 메타버스에 대해 통찰력 있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어 인문학적으로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메타버스의 미래가 어디로 향하는지 엿보고 싶다면, 좋은 메타버스를 알아보는 안목을 기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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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형 인간의 하루 - 찰나의 영감이 최고의 콘텐츠가 되기까지 필요한 습관
임수연 지음 / 빅피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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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독특한 상상력과 유연한 체질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분방한 태도라기보다 규칙적인 창작 사이클에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정세랑 작가는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자신이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대에 꾸준히 원고를 쓰는 유형의 창작자다. 더 나은 작업을 위해 외부의 콘텐츠를 흡수하는 시간도 의식적으로 갖고, 실제로 직간접적인 영감을 많이 얻는다. 정세랑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어렸을 때 사랑했던 범우사 세계문학선과 솔 세계문학판에서 접한 고전이 생각보다 자극적이어서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거나, J.R.R. 톨킨,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작가의 현대 소설과 다양한 만화책도 열심히 섭렵했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전해줬다.          p.86~87

 

씨네 21 임수연 기자가 만난 이 시대 최고의 크리에이터들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등의 대본을 쓴 정서경 작가, <옷소매 붉은 끝동>의 정지인 PD, <지구에서 한아뿐>, <피프티 피플>을 쓴 정세랑 소설가,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 배우, 뮤지션, 미술가인 백현진,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이은규 PD, 플랫폼의 경계 없이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변승민 제작자까지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단순한 인터뷰집이 아니라, 그들이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루틴은 무엇이고,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게 있는지, 몰입하기 위한 노력 등 창작 활동과 관련된 주제에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과 드라마 <작은 아씨들>로 작품성과 대중성에서 호평을 받은 정서경 작가는 '쓰지 않는 삶과 쓰는 삶 사이를 구분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들려 준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하고, 집안 일도 해야 하며 아내와 엄마로서의 모습과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일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이런 저런 집안일들을 하다 작업실로 출근하면 20분 정도 워킹패드 위를 걷고 씻으면서 집안일을 지우고 대본을 쓸 수 있는 머리를 만든다고 말이다. 그날그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다 쓰려고 하는 편이라는 정서경 작가는 지금 강동원, 전지현 주연의 <북극성>이라는 작품의 대본을 쓰는 중이다. <작은 아씨들>을 함께 했던 김희원 감독의 작품으로 배우들을 위한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초기 단계부터 작업하고 있다고 한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던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정지인 PD는 현재 후속작 <정년이>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놀 땐 노는 것에만 집중해야 창작의 영감도 얻을 수 있는 거라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한 번 보고 재미있는 것은 계속,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해서 보는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몰두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창작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사적인 경험을 재료로 보편타당성을 가진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 무려 7년을 쏟아 부은 그는 가장 최적화된 편집술을 탐구하는 과학자이면서 명상과 마사지가 가져다 주는 영감을 믿는 능동적 테라피스트다. 후자가 개인의 고통을 고백하고 타자와 교류하게끔 도와줬다면, 이를 한국 현대사와 연결 짓고 영상 매체로 옮겨내는 일은 이성과 기술의 영역이 된다. 김초엽 작가의 동명의 단편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펙트럼>을 준비 중인 김보라 감독은 자신의 내면이 아닌 타인의 기성 텍스트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작업하고 있다. 그는 시행착오를 겪고 루틴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도 원래 고수하던 창작 철학은 변하지 않았다는 흥미로운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p.125

 

장르 소설과 문단 문학, 드라마와 K팝까지 전방위로 글을 쓰는 정세랑 작가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작가로 데뷔한 케이스라고 한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처럼 독특한 상상력의 이야기를 써왔는데, 최근에는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의 대본을 직접 집필했고, 걸그룹 아이브의 서머 필름 내레이션을 쓰는 콜라보레이션에도 도전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유연하게 콘텐츠를 창작해내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인터뷰 후반에 정세랑 작가가 고른 절판 위기의 좋은 책들이라고 5권의 책이 소개되어 있어서 체크해두고 찾아 보려고 한다. 좋은 책이라고 꼭 사랑 받는 것은 아니어서, 정말 좋은 책인데도 절판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세랑 작가가 아끼는 책들이라고 하니 꼭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인터뷰들이 많았다. 크리에이터들의 창작 공간이나 영감을 받은 물건 등도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고, 김보라 감독이 몸과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법이라던가 백현진의 일상에 영감을 불러 일으킨 곡들의 리스트, 이은규 PD가 흥미롭게 본 아카이브들, 변승민 대표의 업무 툴 등 창작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그들만의 팁들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창작이라는 것이 적확한 인과관계를 거쳐 완성되기보다는 자기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을 동반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이러한 창작자들의 예술적 영감에 도움을 주었던 것들의 리스트야말로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소중한 보물 같은 것이니 말이다. 이들 창작자들은 모두 분야도 다르고, 작업 스타일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기만의 습관을 만들고, 매일 반복하는 루틴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하루의 작은 최선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창작물이 되고, 사랑 받는 컨텐츠가 된 것이다. 왜 모두에게 주어진 똑같은 24시간을 보내는데도, 누군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지 궁금했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창작형 인간의 24시간은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보여주는 책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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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
이경 지음 / 래빗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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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이런 식으로 지나가면, 똑같은 하루가 또 시작됩니다. 그런 식으로 아기는 보호자가 쌓아온 삶을 무시할 수 있는 존재예요... 이 시간 동안 보호자는 아기에게 완전히, 특히 물리적으로 완전히 묶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도 강제로요. 그래서 고립감을 더 강렬히 느끼시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생각은 묶이지 않거든요. 이 시간에 남들은 뭐 할까, 난 여기 왜 이러고 있을까, 왜 이렇게 힘들까, 왜 안 자지, 왜 안 먹지, 왜 울음을 그치지 않지, 아기는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데 난 왜 이렇게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울까....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 중에서, p.31~32

 

미주는 태어난 지 이제 31일된 신생아를 돌보느라 지친 어느 날 밤, 거실 소파에 스웨덴 출신의 잘생긴 배우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미주도, 비명 소리를 듣고 남편도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남자는 자신을 '젖병 소독의 천사, 보틀스의 엔젤'이라고 소개했다. 알고 봤더니 젖병 소독기 보틀스의 최신 모델에 탑재된 자체 AI였던 것이다. 두 달 전에 구매하고 사용자를 등록했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 동안 작동이 안 되다가 갑자기 한밤중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아기의 수유 텀에 맞춰 약 세 시간마다 나타났는데, 젖병 소독 업무를 하면서 미주와 수다를 떨고 사라졌다. 미주와 남편은 젖병 소독의 천사가 왜 하필 잘생기고 키 큰 북유럽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건지, 왜 스웨덴 배우의 얼굴을 갖게 되었는지 추리를 해나가지만, 수수께끼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그러던 중 업체로부터 제품에 탑재된 AI 엔젤 알고리즘이 오류라는 이유로 자발적 리콜을 시행하기로 했다고, 회수해서 새 제품으로 교체해준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겨우 엿새 동안 함께 했던 인공지능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미주는 감정적인 동요를 느끼게 된다.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라는 긴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2022년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 부문 수상작이기도 하다. 사실 100일도 안 된 아기를 키운다는 건, 엄마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온전히 갈아 넣어야 가능한 일이다. 늘 수면 부족으로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고, 두세 시간 마다 수유를 하고 일일이 시간을 체크하다 보면 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 헷갈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니 말이다. 아기는 좀처럼 밤에 통잠을 자지 않고, 깰 때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기를 안아 어르고 재우는 것은 보통 엄마의 일이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남편을 위해 보통 아기와 엄마는 따로 자거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새벽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기를 돌보다 보면 지독하게 서럽고, 외롭게 느껴진다. 물론 아이가 주는 기쁨은 세상 어느 것하고도 비교할 수 없지만, 그 명백한 사실과는 별개로 돌봄 노동을 전담하는 엄마는 인간다운 삶을 전혀 누리지 못한 채 꽤 긴 시간을 홀로 버텨내야 하니 말이다. 표제작인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에서도 직장맘이 AI 보육 이동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는 배경을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읽으면서 공감하는 엄마들이 많을 것 같다.

 

 

 

무언가, 그를 더욱 깊숙이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심금(心琴). 그래, 그의 마음의 현이 울렸다. 울리고 말았다. 다음 달이면 갈아치워질 장관이나 은퇴까지 부대껴야 할 이과장이 아니라, 자신과 명수와 명희와 구공일이, 장옥련님과 그의 생명 연장을 중단해줄 의사 둘과 이 작은 방에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모여 죽순처럼 빽빽이 늘어선 광경에 깃든 무언가가 종직의 심금을 울렸다. 아주 찌잉하게 울렸다. 오직 한 사람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집합한 타인들과 타-로봇이 현을 뜯은 바로 그 지점에 박 주무관의 영혼이 살고 있었다.          -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 중에서, p.150

 

이 작품은 2022년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가작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경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현대소설을 공부하고 국문과 박사가 되어 연구자의 길을 걷다, 출산과 육아로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공지능 젖병소독기의 홀로그램이 말동무가 되어 준다거나, 아기와 엄마를 편안하게 이송시켜주는 황새영아송영 어플 등 돌봄 노동의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들로 반짝거리는 작품들이 있었는데, '외롭고 고단한 육아'를 경험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디테일들이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육아 돌봄과 관련된 두 작품 외에도 간병로봇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존재가 존엄사를 동의할 수 있는 법적 지위를 얻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인간들의 온갖 자질구레한 질문에 답해주는 오픈AI인 채팅GPT의 사정 등 인공지능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여러 풍경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AI 육아 도우미, 간병로봇, AI 돌보미가 탑재된 차량 등 기계화된 돌봄 노동의 세계는 지금 당장 내일부터 펼쳐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육아에 지친 부모에게 친절한 말동무가 되어 주고, 아기의 울음소리를 쉬지 않고 서너 시간 들어도 고통스럽지 않고, 통증에 지친 환자의 짜증을 받아내고, 아무리 고된 간병도 너끈히 해내는,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모습으로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주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일상이 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 것인지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인간과 다르지만 닮은 존재인 ‘인공지능’을 거울 삼아 ‘인간성은 무엇인가’에 관해 질문을 이어간다는 점에 있어서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다정한 SF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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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준의 아들코칭 백과 - 기질 파악부터 말공부, 사회성, 감정코칭까지
최민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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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육에서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가 '내가 한 말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늘 일상은 변수가 시시각각 생기고 종종 어른들의 세계를 살다 보면, 아이와의 약속이 사소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혹은 아이가 먼저 텔레비전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밥 먹고 젤리 사러 가자는 약속을 까먹은 듯 보여, 살짝 넘어가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습니다. 오늘 살짝 넘어가면 다음 만족지연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잊지 마세요. 이 기다림(만족지연) 코칭법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세상은 신뢰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가르치는 일과 같습니다.            p.142

 

한 번 말해서 듣지 않는 행동, 과격하고 거침없는 표현, 게임 중독, 너무 심한 장난이나 공격적인 활동, 고집이 세고 자기 생각대로 하려고 하는 의지 등 이런 아들의 행동을 멈추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진심을 담아 화를 내는 것이다. 결국 소리를 지르고서야 행동을 멈추게 되는 아들 덕분에 엄마는 늘 화내는 사람이 되고 늘 자책하곤 한다. 실제 설문조사 결과 부모들 대다수는 아들에게 유독 화가 난다고 했고, 현직 초등교사 중 90퍼센트가 남자아이들 때문에 학급 운영이 어렵다고 했다니, 이는 결코 특정 개인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아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걸까.

 

70만 구독자로부터 무한한 지지와 신뢰를 받고 있는 <아들TV> 최민준 소장은 아들에게는 '공감육아'가 아니라 '행동육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저 따뜻함과 사랑만으론 아들을 잘 키워내기 쉽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고, 적절한 수용과 단호함으로 아이를 바로잡는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아들의 기질 파악, 말공부, 감정코칭, 게임 통제, 자기효능감을 키우기 위한 방법부터, <아들TV>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 화제의 콘텐츠를 담았다. '나를 위해서 네가 좀 움직이라고 말하는 관계'가 아니라 '한 팀'이 되어서 이야기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절대로 아들과 대립하지 말라는 말에 뜨끔한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엄마가 화내기 직전까지 웃으면서 장난을 치고,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한 번 더 할 때마다 스트레스 수치가 치솟는데, 분노를 다스리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어린이를 미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을 예뻐하는 어른이 많았다면, 지금은 시끄럽거나 버릇없이 굴까 봐 미리 걱정하거나 예민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동네 아이가 잘못하면 마을 어른들이 누구나 함께 훈육하고, 아이들은 응당 어른을 무서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아이들은 어른을 무서워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어른들은 아이들이 예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내 아들이지만 솔직히 너무 밉다는 부모님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미워하게 되었을까요?                p.370

 

지나친 공감육아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때려서 가르치는 것도 답이 아니다. 둘 다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들은 공감능력보다 논리지능이 먼저 발달하는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맞추려는 마음보다 '그래서 어디까지 가능하다는 거지?'가 궁금한 존재이다. 딸로 태어나 자란 엄마들은 이럴 때마다 당황한다. 당연히 말로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들은 계속 엄마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기 때문에 힘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분노하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아들의 이러한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 아이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남성과 여성에게는 많은 차이가 있다. 신체의 차이뿐만 아니라 뇌, 호르몬, 염색체 등에 있어서 발달 순서와 정도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육아의 난이도가 확 내려갈 수밖에 없다.

 

같은 문제라도 여자아이들은 공감능력을 우선시해 상대방 정서를 살피며 행동한다면, 남자아이들은 논리를 활용해서 해결하려는 면모가 많다. 교실에서 노는 방식이라던가,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 수업 시간에 보여야 하는 태도 등에서 이런 부분들이 확연하게 다르게 드러난다. 집에서 늘 뛰어 다니고, 공놀이까지 하려고 하는 아들에게 매번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시끄러울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왔다면, 아파트에서 공놀이를 하지 않는 건 모두가 함께 정한 규칙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수많은 아들맘과의 상담, 남자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통해 밝혀낸 저자만의 특별한 통찰이 담겨 있으니 아들맘이라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아들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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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 시네마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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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이 있었던 것도,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고, 이 친구가 없으면 곤란하겠다고 생각했다죠. 그런데 그날 여느 때처럼 작업하는데 왜 그런지 살의가 불끈 치밀었어요. 지금 이 망치로 저 녀석 머리를 내리치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더니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자기도 모르게 그러고 말았다는군요. 고향에선 꽤 오랫동안 화제가 됐던 사건인데, 그때 어른들이 연신 '마가 끼었다'란 말을 했거든요. 그런 순간이 일상에 확실히 있어요. 갈라진 틈새라고 할지, 지금 있는 세계하고 연속되지 않는, 이질적인 순간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 '풍경' 중에서, p.182

 

북쪽 벌판의 습지에 뜬, 바위 산에 들러붙은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물이 있다. 이곳은 일반적으로는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은 학교로, 특수한 환경 및 특징 때문에 국내외 특정 부유층 사이에만 알려져 있는 곳이다. 중고등학교 통합 육 년제인 이 학교는 전교생을 다 합쳐도 학생이 그리 많지 않다. 남녀 쌍둥이인 가나메와 가나에는 막 봄을 맞이한 3월, 올해 들어올 신입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곳 기숙사 학교는 매우 평온하고 안락했지만, 바깥 세상과 연락을 취할 수단은 제한되고 외출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학생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고, 타말라라는 이름의 호리호리한 소녀가 등장한다.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에 머리는 칠흑처럼 한없이 검은 타말라는 어딘가 어둡고, 수수께끼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녀였다.

 

매주 교장실에서 열리는 다과 모임에 가나에와 가나메, 그리고 타말라가 초대를 받는다. 초대받는 학생은 그때그때 달랐는데, 그날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같은 세트의 파란 꽃무늬 찻잔인데, 타말라 것만 보라색 꽃무늬였다. 어쩐지 그게 마음에 걸렸던 가나메는 이후로도 타말라의 잔만 다른 사람들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과 모임에 갈 때마다 타말라가 내키지 않는 듯 갔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이곳을 애들 진짜 '무덤'으로 삼고 싶은 부모가 있고 교장이 거기에 가담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던 터라, 가나메와 가나에는 이대로 가면 타말라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들은 타말라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마음먹는데, 과연 그들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타말라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일까. 이 작품은 신본격 미스터리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쓴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의 스핀오프 작품이다.

 

 

 

그리고 그때 직감했다. 내가 보는 게 뭔지를. 이상하게도 실은 그때까지 뚜렷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거니와 나는 분명히 다양한 풍경을 정말로 '본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대체 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마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두려웠을 테고, 동시에 오랫동안 당연하게 '그것'을 경험해온 터라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보는 것은 누구 다른 사람이 보는 광경이라는 것을. 누가 현실에서 보는 광경이 내 머릿속에 뛰어든다는 것을.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나는 직감으로 그렇게 깨달았고 그 직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첫 꿈' 중에서, p.258~259

 

온다 리쿠가 <나와 춤을> 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단편집이다.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SF, 청춘 소설 등 장르를 넘나드는 18편의 단편을 한데 엮은 소설집으로 온다 리쿠의 다양한 매력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온다 리쿠의 초기작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은 열매>의 스핀오프 작품이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섬뜩하게 느껴지는 공포도 아무렇지 않게 그려내고,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함이 스멀스멀 느껴지게 만드는 온다 리쿠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들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외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테마인 다큐멘터리를 보고 쓴 작품도 있고, <에피타프 도쿄>의 스핀오프도 있고, 괴담 특집으로 쓴 오싹한 이야기도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오마주 기획으로 쓴 작품도 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발레를 테마로 한 장편소설을 준비중이라 습작 삼아 써봤다는 단편도 있고,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쓴 작품과 은행에서 발생한 인질극, 도시전설을 담은 이야기도 있어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한 온다 리쿠의 상상력이 펼쳐진다.

 

작품의 말미에 수록된 '작가 후기'에서는 온다 리쿠가 직접 각 작품 별로 집필 스토리를 공개하고 있다. 각 단편의 배경에는 스포일러가 꽤 있으니 부디 본문을 끝까지 읽은 뒤 읽어달라는 부탁의 말도 있다. 각각의 작품이 어떤 의뢰를 받아 쓰였고, 쓰면서 어땠는지, 그리고 작품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 혹은 감상도 짧게 수록되어 있으니 아주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장면에서는 정말 소름이 오싹했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거나, 대반전이라는 테마로 쓴 이야기인데 과연 반전이 됐을지 의문이라는 멘트도 있고,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아주 나다운 단편인 것 같다'고 평한 작품도 있으니, 이 작품은 온다 리쿠의 팬이라면 놓치지 말고 읽어봐야 할 것이다. 온다 리쿠는 단편집을 전체적으로 하나이지만, 각기 맛도 모양도 다양하고, 어떤 건 좀 이상하기도 한 초콜릿 상자와 닮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 부디 각각의 맛을 즐겨달라고 말이다. 장르라는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온다 리쿠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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