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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업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8
강화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8월
평점 :
타고난 신체조건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체력은 어느 정도 좋아질 수 있었다. 힘과 유연성도 마찬가지였다. 운동을 배운 지 겨우 한 달 반이었지만, 지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좋아지고 있다는 것. 그 과정이 지루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지수의 몸이 변화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매일 새벽 지수를 집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건 바로 그 감각이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뿌듯함. 삶의 다른 것도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p.69
서른여섯인 지수는 어머니의 오래된 빌라의 문간방에서 지내는 중이다. 5년 전만 해도 엄마와 함께 살게 되리라고는, 세월의 흔적이 드러나 있는 낡은 '무궁화 궁전'에 살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겨우 모든 돈 천만 원을 전세 사기로 날리고, 대출 빚을 지고, 남자친구에게 차이고... 그러느라 엄마 집에서 손님처럼 지내고 있다. 동생인 미수는 결혼을 해 가족들과 살고 있으며, 약국을 운영하고 육아도 하느라 늘 바쁘다. 지수가 어린 시절부터 늘 엄마인 영애 씨에게 꾸중을 들었더라면, 다방면에서 뛰어났던 미수는 자랑스럽고 기대할 일이 많은 자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세 사람의 관계는 지금도 여전했다.
2년 전 겨울, 지수는 마침내 대출금을 다 갚아서 꽤 행복했다. 그러기 위해서 먹는 것, 입는 것, 그 외 모든 것을 아껴왔고, 빚을 갚느라 모아둔 돈은 다 사라졌지만 괜찮았다. 마음먹고 산 차를 팔았고, 약속은 잡지 않았으며, 회사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차렸다. 그리고 한동안 자신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이너스 부호를 함께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날 지수는 혼자 영화를 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에 가보니 미수와 제부가 와 있었고, 분위기가 이상했다. 영화 보느라 좀 늦었다는 지수에게 미수는 자신은 시간이 없어서 극장에도 못 간다며, 책망하는 듯한 말투였다. 알고 보니 엄마가 실수로 끓는 물을 손에 부어 화상을 입고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수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고, 엄마가 다쳤다는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뭘 책망하는 것일까? 퇴근하고 바로 집에 오지 않은 것? 엄마를 챙기지 않아 다치게 된 것? 지수는 반발심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두 자매와 엄마 사이의 갈등은 작지만 티나지 않게 쌓여 간다.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났고, 잘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얘를 이렇게 미워했었나. 이렇게 많이 화가 났었나. 지수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골랐다. 모든 걸 망가뜨리는 말.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말. 그런 말. 지수는 동생에게 그런 말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때가 다가온 그 순간, 지수는 (놀랍게도) 서글픈 목소리로 천천히 진심을 말했다.
"엄마가 너만 보고 있을 때...... 부담스럽지?"
그리고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지수의 꿈에는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p.111~112
지수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얼굴 없는 인간들이 풍선처럼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꿈에 시달리느라 밤새 소리를 지르다 깨곤 한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그렇게 소리를 지른 적이 없었던 지수는 꿈에서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하고, 때리기도 하며 상대에게 맞섰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얼굴은 없지만, 익숙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그녀의 전재산을 들고 사라진 집주인, 그녀가 가장 힘들 때 헤어진 전 남자친구.. 그래 미워해도 된다고 치자. 하지만 매일 밤 잠을 설쳐가며 굳이 소리 지르고, 분을 이기지 못해 깨어나 허망하게 시간을 보낼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그리고 사실 지수의 꿈에는 엄마인 영애 씨와 동생 미수도 나왔다. 지수는 엄마인 영애 씨가 어린 시절에는 서운했고, 함께 사는 지금은 어딘지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리고 뭐든 잘했던 미수가 언니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일정 부분 책임져왔던 것은 고마웠지만, 지수는 자신 역시 힘닿는 대로 자신의 몫을 감당해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매는 엄마의 진심을 알 수 없고, 동생 역시 언니가 모르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채 진심을 숨기고, 점점 멀어져 간다.
이 작품은 평생 동생에게 밀리고, 타인에게 험한 말 한 번 해보지 않은 채 살아온 지수가 어느 날 새벽 늘 같은 시간에 러닝을 하는 한 여자를 보게 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서사를 그리고 있다. 평생 운동이라고는 거들떠본 적도 없던 지수는 여자가 다니는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시작하며 조금씩 활력을 갖게 되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가꿔나가게 된다.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마음을 다해 미워할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가족 아닐까. 극중 지수가 '가족이란 절대 헤어질 수 없는 관계라 생각했지만, 결국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고' 깨닫게 되는 것처럼, 가족이라고 해서 꼭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며 애써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지수가 자신의 목소리와 존재를 드러내는 과정을 Pull-up이란 운동을 통해 몸의 감각을 익히면서 소외와 자기혐오를 극복하게 된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지금보다 더 크고 강한 몸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와 마음, 생각들을 스스로 낯설게 느끼며 앞으로 무슨 일을 겪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힘을 바라보며 지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아래에서 위로, 조금씩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그녀의 새로운 서사가 그렇게 시작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