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세탁소 -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하이디 지음, 박주선 옮김 / 북폴리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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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아침에 제가 마지막 남은 원두를 다 썼어요. 그러니 이 캔이 비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고 말할 수도 있죠. '비었다'라고 해서 꼭 빈 것만은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여백'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미 가득 차 있을 수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여백'으로 가득 차 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여자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고, 들리고, 손에 닿아야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없는' 것일까?                p.49


막다른 골목 안에 위치한 1900년대 초반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세탁소, 사람들은 이곳에 특별히 소중한 것을 맡기곤 했다. 이유는 손님이 가져온 물건이라면 크기나 가격에 상관없이 최대한 깨끗하게 세탁해 돌려주기 때문이다. 성실하고 온화한 표정의 세탁소 주인은 부드러운 이목구비와 동그란 안경 등에서 문학 청년 느낌이 나서 서점 주인에 더 어울려 보이는 인상이다. 실제로 세탁소 한 켠에는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자리하고 있어 작은 도서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등학교 교복 차림에 긴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은 소녀가 조심스럽게 세탁소로 들어선다. 등교하기 전에 와야 했기에 시간은 새벽 6시 50분이었다. 소녀는 도톰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손수건을 세탁해 달라고 말한다. 보일 듯 말 듯 팥알만한 얼룩이 묻어 있는 손수건이었다. 좋아하는 선배에게 받은 손수건이었는데, '잠시 사귈래?'라는 그의 말에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선배의 고백에 설레었지만 그는 올해 졸업이었고, 곧 대학에 진학할 텐데 앞으로의 일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덥석 사귀어도 되는지 나름 고민이었던 거다. '잠시' 사귀자는 말이 신경 쓰이는 소녀에게 세탁소 사장은 말한다. 인생은 아주 많은 '잠시'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이다.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계속해서 '눈앞의 현재'에 집중한다면, 매번 한 발짝씩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 받는 소녀의 고민은 해결될 수 있을까. 




“저 사람 진짜 너무해요. 분명히 샤오루한테 전화로 버리라고 했으면서 왜 그러죠? 어머니의 유품이라면서 왜 애초에 버리라고 했을까요?”

아모도 자책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거야. 많은 일이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 때로는 어떤 것을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단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         p.170


첫사랑의 고백으로 고민 중인 10대 소녀의 손수건, 매사에 너무 바쁘고 급한 회사원의 셔츠, 아이를 잃은 엄마의 속싸개, 작가라는 꿈을 이루고 나니 오히려 불안해진 20대 남자의 네모난 손가방 등 세탁소에 도착하는 물품들은 각양각색이지만 모두 문제가 있거나, 고민을 가지고 있다. 세탁소 주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다정한 위로와 조언을 건넨다. 타인의 생각과 기준에 맞춰 자신의 감정을 고민하는 이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너무 바쁜 이에게는 여백의 의미에 대해서 들려주고, 슬픔에 휩싸여 있는 이에게는 감정과 생각들을 충분히 표현하고 털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고, 자신만의 어려움이 있다. 극중 세탁소의 역할은 모든 옷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있다. 세탁소 사장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그들의 구겨진 감정을 펴주고, 찢어진 관계를 이어 붙이며, 묵은 감정을 씻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듯이, 나쁜 기억을 지워주는 세탁소라니, 실제로 존재한다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작가가 심리 상담가로서 상담실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온 것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라 작품을 읽으면서 치유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두려움과 실망, 상실감과 자책 등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정화시켜주는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지는데, 가볍게 읽히면서도 따스한 여운이 남아 온기를 느끼게 해준다. 상처받고, 고단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힐링 소설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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