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 좌절의 시대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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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다'는 느낌이 한 사회의 도덕 수준을 높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우리가 불편함을 더 많은 곳에서 더 자주 느끼는 예민한 사람이 되면 사회가 더 나아질까? 타인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무해한 존재가 되는 것이 도덕적 목표가 될 수 있을까? 2020년 한국사회의 뉴 노멀 중 하나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된다'이다. 이 '사람들'의 자리에 '대중'을 넣느냐 '시민'을 넣느냐에 따라 이 명령에 대한 평가도 천지 차이로 달라질 테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중과 시민으로 명쾌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p.66


작년에 장강명 작가가 중앙일보에 발표한 칼럼이 한참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흥미로운 중년이 되기 위하여>라는 제목의 그 글은 젊었을 때는 생각의 깊이보다 속도에, 완결성보다 경쾌함에 끌렸었지만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고 보니 젊을 때 반짝반짝해 보였던 또래들의 이야기가 얄팍하고 껄렁해서 놀란 적이 여러번 있다고 말하며,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 중년들에게 주름 제거 시술보다 시급한 문제가 바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장이 요지인 글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후 그의 명쾌하고 단호한 조언에 대한 다른 중년 남성들의 반응이었다. 그를 공개 저격하는 교수의 글에 이어 장강명 작가가 반박글을 올리기도 했었고, 한 동안 SNS가 떠들썩 했던 기억이 난다. 


장강명 작가의 글은 그렇게 칼럼뿐만 아니라 발표하는 작품마다 자주 이슈가 되곤 한다. 소재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엮어내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기도 하고, 실제와 유사한 설정으로 실감 나는 리얼리티를 선사하는 동시에 불편함을 자극하기도 하며, 높은 시의성과 현실 감각으로 무장한 허구의 이야기들은 오직 장강명 작가만이 써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작년에 화제였던 바로 그 칼럼이 수록된, 신작 산문집이다. 장강명 작가가 2016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경제, 그리고 몇몇 잡지에 쓴 칼럼 백삼십 편 중에서 구십여 편을 추려 책으로 묶은 것이다.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에 복잡한 사유를 풀거나 논증을 치밀하게 펼치기에는 부족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칼럼들은 굉장히 시의 적절하고, 날카롭고, 통찰력 있어 읽으면서 새삼 11년간 일간지 기자로 일했던 그의 이력을 떠올리게 된다. 




내 관찰로는 영리한 청년이었다가 내용물 흐릿한 중년이 된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영리함과 순발력으로 삼심대를 버틴 것이다. 정신의 어떤 부분을 제대로 훈련하지 않은 것이다. 그 훈련은 근력 운동과 흡사하다... 다른 경험들이 독서를 대신할 수 있을까. 내게는 걷기 운동으로 코어 근육을 단련할 수 있다는 소리만큼 전망 없게 들린다. 한 업계에서 이십 년 정도 일하면 부장급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상을 원하면 정신에 꾸준히 간접 체험과 지적 자극을 공급해야 한다. 나는 독서 부족이 노년에 마음의 병을 일으킬 거라 믿는다. 삶이 얄팍해지는.             p.372~373


이 책에는 거의 8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풀어내온 칼럼들이라 굉장히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당선, 합격, 계급>, <재수사>등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현실에 단단하게 발 딛고 서 있는 작품들을 발표해온 작가답게 짧은 칼럼으로 만나는 글 속에도 날카로운 문장들과 예리하고도 정확하게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담겨 있다. 여러 주제들을 모은 글이라 각각의 이슈를 네 개로 나누어 구성했다. 사회 분야의 이슈를 다루는 1부, 한국사회의 정치 풍경을 담고 있는 2부, 우리네 삶의 경험과 일상을 다루는 3부, 그리고 책과 영화 등 문화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만날 수 있는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글들이 많았는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표제작 '미세 좌절'의 시대라는 글도 인상적이었다. '인생 참 계획대로 안 되네'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는 상황에 '미세 좌절'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했는데, 작가가 만든 말이지만 어찌 그리 찰떡 표현인지 밑줄을 긋는다. 별 것 아닌 불행들이 쌓이면 결국 제아무리 난관적인 이도 굴복하게 마련인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 '시원하게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네'의 원인을 명확히 짚어낼 수 없다면 그 무력한 분노는 더해질 것이다. 그 외에도 영국의 '외로움 담당 장관' 임명, 코로나19 시절의 배달 노동 문제, 소셜 미디어를 통한 밈의 부작용, 인공지능 시대에 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세대 간 충돌 문제, 진보와 보수 두 진영의 민낯, 정치 팬덤, 남북 대립 문제 등등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사유하는 글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언제나 부지런히, 성실하게 글을 써온 장강명 작가의 다음 작품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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