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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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하면 떠오르는 추억 중 하나는 바로 놀이공원에 관한 것이다. 하나같이 재미있어 보이는 놀이기구들과 알록달록한 장식들, 그리고 흥겨운 음악 소리. 그곳은 아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며 혼을 쏙 빼놓는 곳이자 마치 동화 속 세상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 거대함과 화려함이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먼 훗날 그곳을 다시 갔을 때는 어렸을 적의 감동과 감흥을 그대로 느낄 수 없었다. 여전히 신나고 즐거운 곳이기는 했으나 어린아이가 느꼈던 반짝임과 마법 같은 분위기는 사라졌다고나 할까. 이런 말에 어쩌면 누군가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당연하지 않냐고, 세상에 그런 건 없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가. 펼치는 세계명작동화마다 공주님과 왕자님이 나오고, 마법사는 이런저런 마법을 부리며 뭐든 이루어지게 하는 만큼 자유롭게 어떤 상상이든 가능하다. 그러니 그것이 정말 실존하는지의 여부는 잠시 내려놓고 그것 또한 아이들의 세상이라고 바라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서 소녀가 “여왕이 어린 여자아이를 잡아가서 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남자로 변장을 해서 여왕을 속여야”(p.24)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굳게 믿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일곱 살 생일까지는 남자애이고 이후에는 여자애가 된다는 말에 어쩐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남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얘기더라도 아이 자신에게는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구나 싶어서. 그리고 우리가 같은 세계를 살아간다 할지라도 아이들 측면에서는 그들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나름의 세상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배수아의 소설집 『뱀과 물』 속 단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어린 시절 분위기와는 많이 다름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보통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아이들만의 순수함, 해맑음, 환하고 밝은 느낌들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 책의 작품들은 어딘가 무겁고 거무스름하고 괴이하며 불분명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꿈과 현실을 오가는 생생한 경험들이 인상적이다. 배수아 작가의 글은 그 혼돈스러운 경계 속에서 삶과 죽음에 밀착하며 독특한 매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책에는 총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중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서는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찾아 스키타이족의 무덤으로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른 단편 「노인 울라(Noin Ula)에서」로 이어진다. 노인 울라는 가장 북쪽에 있는 기차역으로 그곳에 도착한 소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외모를 설명한다. 역장도 부관도 그것은 사령관의 외모라 말하자 소녀는 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머무르게 되고, 그러던 중 긴 머리를 붉은 리본으로 묶고 있는 눈먼 소녀를 만나게 된다. 사실 이 눈먼 소녀는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서도 잠깐 등장했었다. 소녀는 그녀를 경찰서 분실물-미아 센터에서 본 적이 있다.

 


  「노인 울라(Noin Ula)에서」는 소녀와 눈먼 소녀와의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그런데 두 소녀는 여러 부분이 비슷하다. 둘 다 이름이 ‘눈 아이’라는 점, 눈먼 소녀도 소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찾고 있다. 그리고 소녀의 어머니는 서커스의 여자마술사로 특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마술인데, 눈먼 소녀의 어머니는 흉노 여왕을 위해 일하는 마법사로 그 자리에서 모습이 쓱 사라져 버릴 때가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소녀는 눈먼 소녀와 다른 존재임에도 둘은 때때로 겹쳐 보인다. 눈먼 소녀가 교수형을 당해 죽고 붉은 리본만이 남았을 때, 소녀는 그것을 주워 자신의 짧은 머리에 묶고 그대로 사라진다. 그날은 소녀의 일곱 살 생일이었다.

 


  이 책은 꽤 흥미롭다. 어떤 요소들은 다른 소설 속에서 조금씩 다른 구성으로 재등장하거나 반복되었는데 그럼으로써 각각의 소설은 다르면서도 닮아 있었고, 불안하고 기이한 분위기를 뽐내면서도 저마다의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일곱 번째 생일이 다가오지 않은 나에게, 누나는 넌 여자애인데 언제까지 사내아이처럼 하고 다닐 거냐고 잔소리를 늘어놓는가 하면(「얼이에 대해서」), 교사는 반에서 키가 가장 작은 아이 리우진을 두고 사내아이가 아니었냐며, “일곱 살처럼 보이는 열두 살 여자아이가 정말로 앉아 있었던 걸까.”(「1979」, p.102)라며 문득 기묘한 의문에 휩싸인다.
  이웃에 사는 아이이자 내 짝인 얼이는 나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마술사가 되기 전에 반두의 왕이었다고 하고(「얼이에 대해서」), 언덕 꼭대기 작은 식당에서 열린 시낭독회에 방문한 화자는 사람들 앞에서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할머니가 반두의 여왕이었을지도 모른다 말한다.(「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소녀와 소녀가 짝을 이루는 조합 역시 이 책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소녀와 눈먼 소녀(「노인 울라(Noin Ula)에서」), 키 큰 소녀와 리우진(「1979」), 나와 “나는 네 언니야.”라고 말하는 소녀(「도둑 자매」)들은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결속력과 동질감을 형성한다. 같이 집에 간다거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가끔은 장난을 치기도 한다. 때로는 비밀을 공유하며 아무에게 말하지 말아달라 약속을 주고받는다. 반면 소녀와 소녀는 아니지만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면 나와 얼이(「얼이에 대해서」) 또한 여기에 해당한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어쨌든 이들에게 있어 나와 너라는 구분은 그리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어린 시절의 우리라는 것은 나는 곧 너이고 너는 곧 나이기 때문이다.

 

소녀가 웃으면서, 춤추는 듯한 걸음걸이로 나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나와 눈이 마주친 최초의 낯선 것이었다. 그 마주침으로 인해 소녀는 나이자 곧 세계가 되었다. (「도둑 자매」, p.154) 

 


  이 책의 표제작인 「뱀과 물」은 읽으면서 어렵게 느낀 작품이고, 그로테스크하다는 표현이 떠오른 작품이다. 여기서는 한 인물이 내면의 여러 인물로 분열되는데 여교사 김길라는 상황에 따라 전학생 김길라가 되기도 하고 늙은 김길라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뱀과 물이 나오는 꿈을 꾸고는 한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무척 기괴하다. 오물과 배설물과 피, 찢기는 장기와 잘리는 머리, 끔찍한 태아의 모습이 가학적이고 자극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여교사는 이 모든 광경을 거울을 통해 본다. 자신의 모습에 충격에 빠진 그녀는 거울을 깨뜨린다. 하지만 그런다고 깨진 거울이 참혹한 그녀의 모습을 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교사는 자신을 죽여달라 애원하지만 뱀과 물은 그러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꿈이다.

 


  그런데 자주 꾸는 그 꿈이 여교사에게는 어린 시절보다 오히려 더 선명한 시간이고 직관적 인식에 가깝게 한다. 오래전의 일은 “피부 아래의 아득한 감각”으로 남아 있을 뿐, 여교사는 어린 시절을 두고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p.223) 생각한다. 한편 「1979」에서 교사의 동생은 어린 시절에 대해 그런 건 없다며 그 자체를 망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p.94)


 

  이들의 의견에 이렇다 저렇다 말을 늘어놓거나 혹은 어린 시절은 그런 게 아니라며 부정할 마음은 없다. 어린 시절은 사람마다 다 다를 테니까. 간혹 선하고 아름다운 관점으로 무조건 좋은 점만 바라보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도 왠지 조금 불편하다. 당사자가 경험하고 느낀 것은 무시됨과 동시에 어느 일방적인 면만 주장되는데 그 역시도 어찌 보면 일종의 편협적인 사고가 아닐는지. 그리고 그러한 태도 자체가 사람을 압박하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져 약간 거북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소녀였고, 교사였다가 여교사 김길라였다가 할머니의 푸른 양철 가방을 들고 여행하는 화자였다. 등장인물들을 따라 여러 어린 시절을 겼었으며, 그들의 꿈을 따라 서커스 공연을 보러 갔다가, 과수원집을 갔다가, 해변을 가기도 했다. 「도둑 자매」에서 소녀가 눈을 감았다 뜨니 “그사이에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이었다”(p.169)라고 하는데 나 역시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이제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어린 시절) 대신, 지금에 집중하며 앞으로 현재와 미래를 잘 이어나가자 다짐해본다. 그런데 어떻게?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언제 어디서든 몇 번이고 되뇔 수 있는 문장부터 정해볼까 한다. 소설에서는 화자들을 맴돌며 반복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니 이 부분을 자신에 맞게 활용해 “한번 소리 내어진 말들은 그렇게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도둑 자매」, p.152)” 여기고 스스로 내면의 목소리를 키워나가면 어떨까 싶다. 자기만의 주문을 만들어 틈틈이 말해볼 것. 어느 순간에는 분명 그 자체로 환기가 되고 큰 힘을 발휘해주리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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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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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률 시인의『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 시집의 글들은 그러했다. 때때로 무언가에 대한 작가의 짧은 단상 같기도 했고, 때로는 작가 본인의 혼잣말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시를 읽는 이들에게 차분하고 평온한 어조로, 있잖아 오늘 말이야,라며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아 어쩐지 귀 기울이게 되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날 있었던 일, 자신의 비밀 하나, 사람과 사랑, 만남과 이별, 관계와 감정, 서로에게 가닿지도 못하고 가늠되지도 못한 어떤 말들. 그리고 어떤 때 시를 쓰느냐에 대한 대답과 시집의 맨 마지막 시는 무엇으로 할까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
  만약 부제를 정해 보라 한다면, 윤동주의 시집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차용해 ‘사람과 사랑과 별과 시’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그만큼 이 시집에서 사람, 사랑, 별은 자주 등장하는 단어였고,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들이 많았다. 더불어 시인의 세계에서는 자연적인 요소들이 종종 등장했는데, ‘선인장, 식물의 뿌리, 꽃을 피워 올리는 씨앗과 구근들, 꽃과 나무, 호수나 물, 불, 돌, 새 떼’처럼 이러한 대상들은 작가의 감정이나 생각을 투영하거나 생각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중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고 서로 말을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만남이 어떤 관계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놀라움과 감탄도 잠시, 지속적으로 오래가는 관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관계도 있으며 대개 어느 한쪽이 감정이 다하고 나면 더는 상대를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게 관계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가까웠던 사람이 누구보다 멀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만남 역시 이별과 등을 딱 맞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다림이든 이별의 과정이든, 한동안 상대를 떠올리는 시간을 겪는데 시인은 이 부분에 대해 나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었다.
  헤어짐 이후,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픔이 밀려올 때도 있을 것이고, 그리움이 왈칵 쏟아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가 대신해줄 수 없으니 그저 스스로 끊임없이 감당하고 감내하며 괜찮아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다.

 

비밀 하나를 이야기해야겠다
누군가 올 거라는 가정하에
가끔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간다는 비밀 하나를
(「이구아수 폭포 가는 방법」부분)


내 무릎 속에는 의자가 들어 있어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앉지를 않는구나
(「몇 번째 봄」부분)

 


눈보라가 칩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혼자만큼의 서로를 잊게 될 것입니다
(「이별의 원심력」부분) 

 

 

  한편, 이 시집에서는 여러 시를 통해 연(緣)에 대한 표현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 인연(因緣)의 그 ‘연(緣)’이며, 그 자체의 뜻도 ‘인연 연(緣)’이다. 인연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뜻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물과의 관계를 말할 때도 인연이라고 표현된다. 글자를 잘 살펴보면 알겠지만, 연(緣)의 부수는 ‘실 사(絲)’로 가는 실로 묶여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만큼은 이별이 너무 고통스럽거나 슬픔으로만 남지 않았다. 그 자체가 개인에게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시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무언가와 이어져 있고 닿아있다고 끊임없이 환기 시켜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병률 시인은 단절성 대신 연결성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우리 손에는 실들이 묶여 있고 누군가와,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말은 알게 모르게 작은 위로가 되어준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저 별들도 알고 보면 다 우리의 인연인 셈이다. 덕분에 마음 한편에는 따뜻함이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기분이다.

 

오늘도 새벽에 들어왔습니다
일일이 별들을 둘러보고 오느라구요
(...중략...)
오늘도 새벽에게 나를 업어다달라고 하여
첫 별의 불꽃에서부터 끝 별의 생각까지 그어놓은
큰 별의 가슴팍으로부터 작은 별의 멍까지 이어놓은
헐렁해진 실들을 하나하나 매주었습니다
(「살림」부분)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사람이 온다」부분)

 


나의 완성은 그렇다
지구 사람 가운데 나에게 연(緣)이 하나 있다면
당신들의 흩어짐을 막는 것
지금은 다만 내 마음의 1층과 2층을 더디게 터서
언제쯤 나는 귀한 사람이 되려는지 지켜보자는 것


나의 궁리는 그렇다
(「지구 서랍」부분)

 


멍이 드는 관계가 있습니다
멍이 나가는 관계가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 첫 별은
잠시 후면 이 호수에 당도해


홀로 남은 채로 멍이 퍼지고 있는 한 사람을 끌어줄 것입니다
(「호수」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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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 문학과지성 시인선 504
김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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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문장. 언뜻 간단하다고 여길 수 있으나 겪어본 사람은 안다. 핵심을 담아 간결하게 표현하기란 꽤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그 한 문장으로 상대에게 자신이 생각한 바를 그대로 온전히 전달하기란 보기보다 어렵다.
  사실 어떤 문장은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한 문장은,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며 “지금 말하라.”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시간은 잡아둘 수 없으므로 ‘지금’이란 것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하기 전에, 지금 말하는 것이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전하지 못한 말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고마움의 말일 수도 있고, 상대방의 무례함에 대한 속 시원한 한방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제 와서 말하기에는 이게 또 무척 애매하더라. 그때의 ‘지금’과 현재의 ‘지금’ 사이에 생겨버린 이 엄청난 간극이라니!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같은 문장인데도, 이제는 어딘가 다른 느낌을 주는 그 말들. 결국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오늘도 마음속 어딘가를 무수히 배회하는 중이다.

 

 

 

  나는 슬퍼하고 있고 슬퍼지고 있고 슬프고 있고 그래서 슬프다. 사이사이 다른 감정이 끼어든다.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기쁨이 있고 환희가 있고 절망이 있고 분노가 있고 비굴함이 있고 순식간이 있고 나는 다 빠져나왔다. 다 빠져나와서 빠져 있다. (「있다」부분)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끄덕였다. 슬픔이 주를 이루게 되더라도 그 안에서는 다양한 명도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이다. 자신이 슬프다는 걸 알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혹은 깊이가 다른 슬픔이 저 멀리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음을 감지하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다른 감정이 때때로 찾아오기도 하는데, 원래 같은 일이나 상황도 수용하는 사람에 따라 느껴지는 것들이 다 다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하나의 일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만큼, 복잡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뭇잎이 푸르고 있다. 짙푸르고 있다. 진푸르고도 있다. 간혹 연푸르고도 있는 나뭇잎이 올라가면서 더 푸르고 있다. 올라가면서 가늘고 있는 나뭇가지가 더 올라가면서 가늘고 있다. 여름 한창을 가늘고 있다. 여름이 가늘고 있다. 낮이 가늘고 있다. 한낮이 사라져 있다. 온데간데없이 있다. 부지런히 도착해 있다. (「있다」전문)


  이번의 시 제목 역시 ‘있다’이다. 점점 푸름이 가득해지는 초여름, 산을 지나치며 이렇게 다양한 초록색이 존재할 수도 있구나, 감탄한 적이 있는데 이 시는 마치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이름 모를 나무들과 풀의 수만큼 다양하게 있었던 푸름. 자연은 늘 경이로운 데가 있다.

 

 


  한편「나와 이것」, 「당신과 그것」, 「그것 없이도」, 「나와 저것」이라는 시에서는 마치 시리즈처럼 이것, 그것, 저것이라는 대명사가 연이어 등장해 나름의 흥미를 자극한다.
  나와 함께 다니는 ‘이것’, ‘그것’ 없이 못 사는 당신, ‘저것’과 싸우는 나. 그리고 시인은 “그것 없이도 죽음이 온다. 그것 없이도 삶이 온다. 그것 없이도 시간을 보낼 수 있다.(p.49)”고 하는데 과연 이 대명사들이 지칭하는 것들이 뭘까 궁금하기만 하다. 스무 고개하듯 다른 문장을 통해 유추해보며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히려 구체적으로 지정해두지 않아서 읽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대로 읽을 수 있고, 그게 곧 저마다의 이야기가 될 테니 말이다.

 

 


  어떤 시에서 작가의 글은 어쩐지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처음에는 분명 한 문장이었으나, 이 문장은 점점 그 주변으로 뻗어나가고 확장되면서 상반된 의미를 가진 문장에 닿기에 이른다. 그러다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수렴되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어떤 시는 계속되는 질문과 답의 반복 과정을 거치기도 하는데 어쨌든 시 안에는 두 가지 모습이 다 언급되기에 시를 읽는 내내 조금 더 집중해서 읽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하지 못하는 걸 결정 하고 있다. (「결정」부분)


(...) 어느 하나도 중지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나는 매일같이 중지하는 사람이다. (...) 중지가 어떻게 중지될지 너는 아는가? 중지는 모른다. 나는 아는가? 중지는 괴롭다. 그 모든 중지를 대표해서 중지가 온다. 중지답게 온다. 나는 무척 중지했던 사람이라고 온다. 무척 중지했다가 그쳐버린 사람이 온다. 그가 와서 이 말을 그치고 있다. 그만 중지하자고 있다. (「중지하는 사람」부분)


물방울 하나가 물방울 하나를 만나러 간다. 둘은 물이다. (...) 그럼에도 떨어지지 못하는 둘 사이를 물이 가른다. 물이 갈라놓고 있다. 물은 물 때문에 헤어졌다. 물은 물을 찾아가서 위로받고 있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 (「물」부분)


그는 어떤 말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한다. (...) 그는 내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떤 말을 하면서 어떤 말을 숨기고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하지 못한 말」부분)

 


  결정하지 못함과 결정하는 것, 중지와 중지가 중지되는 것, 물방울과 물방울의 만남과 갈라짐 역시 물에 이루어진다는 것, 어떤 말을 하지 않고 있고 그래서 어떤 말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이나 나나 되짚어보면 마찬가지인 것. 이러한 구조의 반복들.
  미술작품으로 치자면, 에셔의 <그리는 손>이란 작품이 생각나기도 했다. 에셔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 공간을 표현해 작품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네덜란드 판화가이자 드로잉 화가로, 무한한 반복과 순환이 이루어지는 구조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는 손>역시 왼손은 오른손을, 오른손은 왼손을 그리며 두 손이 끊임없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형상화한다.

 

 

 

  A면이 있고 B면이 있다. 어느 쪽을 들어도 상관없는 손이 있다. 이 손은 악수하기 위한 것. 그리고 이 손은 그것을 막기 위한 것.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 손을 내밀어라. 손바닥이 있고 손등이 있다. 어느 쪽이든 용도가 있고 세계가 있다. 주먹이 있고 손가락이 있다. 어느 쪽이든 얼굴을 향해 가는 손이 있다. 때릴 것인가. 찌를 것인가. 어루만질 것인가. (...)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이쪽 벽이 있고 저쪽 벽이 있다. 맞닿아 있다. (「판결」부분)


  “찌를 것인가 어루만질 것인가.” 손은 신체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개인의 결정에 따라 그 쓰임새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악수하는 손은 인사나 화해를 의미하지만, 누군가를 때리게 되면 그건 폭력이 된다. 그리고 손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결과로 이르게 할지는 개인의 선택이 크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맞닿아 있는 그 모든 것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에 대해. 부디 만족스러운 쪽으로 삶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좋은 문장들이 자주 등장하는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그랬으면 좋겠다고 살짝 욕심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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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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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모토 바나나가 건네는 치유와 위로의 문장. 그리고 기분 좋은 에너지들.
책을 읽는 내내 선하고 부드러운 빛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편안하고 따스한 여운들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더불어 밝은 기운과 정겨움이 몸속 어딘가에서 퐁퐁 샘솟는 듯한 느낌이다.

 


  『서커스 나이트』. 주인공 사야카는 남편 사토루가 죽은 후 어린 딸 미치루와 함께 시부모님 집 2층에서 지내는 중이다. 그러던 초여름의 어느 날, 이상한 부탁이 담긴 편지를 받고 깜짝 놀라게 된다. 편지를 쓴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옛 연인이었고 첫사랑이었던 이치로였던 것. 이치로 입장에서는 그 집에 사야카가 사는지 전혀 몰랐겠지만, 어쨌든 그녀로서도 헤어진 연인을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사야카는 당시에 있었던 어떤 사건을 떠올리며 굽은 채 펴지지 않는 자신의 왼손 엄지손가락이 욱신거림을 감지한다.

 

 

  흔히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그녀 역시 시간의 숙성을 통해 자신의 힘겨웠던 일들을 보듬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야카를 보며 알게 되었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에 새살이 돋게 하려면 단순히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스스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을.
  사야카는 과거 사건을 두고 자신의 대응했던 행동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해도 그것이 최선이었고 누군가를 구하는 동시에 자신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변의 악의적인 소문이나 이치로 가족들의 과도한 반응에 마음이 더 다치기 전,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발리로 떠난 일에 대해서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다른 사람들을 우선시해서 그대로 일본에 남았더라면 아무리 시간이 흐르더라도 그녀의 상처는 여전했을지 모른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곁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재 남편은 죽고 없지만, 사야카에게 있어 사토루는 그녀의 인생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라 인정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시부모님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분들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부러웠던 점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했다. 사토루의 부모님들은 어떤 관계의 틀에 매여 책임과 의무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사야카를 그저 한 인간으로 대하고 존중해주는 분들이다. 그리하여 사야카는 시어머니께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게 되는데, 그녀는 시어머니로부터 그때 필요했던 말들,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말들을 들으며 펑펑 울게 된다. 어쩌면 사야카가 조금씩 슬픔과 아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떤 판단이나 편견 없이 무엇이든 그녀의 입장에서 헤아려주며 그녀를 가장 먼저 생각해주는 시어머니 같은 존재 덕분이 아닐까.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지금’이라는 순간이 얼마나 눈부시며 반짝거리는지. 소박한 일상이라도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며 감사한 일인지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서로 영향을 미치며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갖가지 좋은 일들에 가닿으며 꽃을 활짝 피우게 될 일이다. 

 

모두가 조금씩 내놓고, 기운도 주고받고, 움직이고 또 쉬고. 마치 세포처럼. 자연과 사람과 그 외의 모든 것이 다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사람은 저마다 많은 사람들과 이어져 있고, 그 사이를 오가며 조금씩 바퀴를 돌린다. 그것도 자연의 섭리의 일부다.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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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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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생각나는 이름 하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점이라도 된 듯 그 시절 모습이라든가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소소하고 평범했어도 이런저런 일들이 다 좋았고 즐거웠던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개인에게는 그 시절 함께 했던 누군가로 인해 더욱 의미 있고 소중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 시간의 감각들은 언제나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나애)는 '도이'의 소식을 궁금해한다. 나애를 '라애'라고 불렀던 종려할매와 도이와 상. 그녀는 어렸을 적 병원집에 맡겨져 생활한 적이 있는데 가족과 떨어져 '몸속에 얼음덩이가 박혀 있는 것'(p.143) 같았던 고독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도이'와 '상' 덕분이었다.

 

도이와 상과 나애, 나는 우리의 구성이 가진 의미를 알 수 없기에 몬드리안의 극단적인 추상화를 바라보고 있다.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어디에나 그런 구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우주의 질서 속에 존재하듯, 나뭇잎 한 장의 질서 속에도, 물 한 방울의 질서 속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우연도 필연도 아닌 물질의 속성으로서의 기본 구성, 최초의 구성. (p.217)


우리 각자가 한 일은, 모든 사람과 생물과 무생물의 꿈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그러니 도이, 내가 기억하는 것이 너에게 힘이 되면 좋겠다. (p.218)

 

  그러나 나애와 상과 도이는 이것이 끝이구나 할 만한 것, 분명하고 정확하게 인식되는 헤어짐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사정에 의해 엇갈리기도 하고 멀어지면서 서서히 이별을 하다 연락이 끊긴 것이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서 나애는 도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그의 소식을 듣고 싶어 한다.
  추억이란 건, 더불어 기억이라 건 그런 것 같다. 그 순간에도 버팀목이 되어주었지만 살아가는 동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힘이 되어준다. 그것이 약간의 슬픔이라든가 그리움을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우리는 기억과 함께 호흡한다.

 


  한편 이 소설은 화자의 어린 시절뿐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도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기에서는 그녀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로 인한 그녀의 감정을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기대나 갈망, 욕심보다는 주어진 것을 갖고, 어딘가에 갇히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한 나애. 반면 희도는 안전하고 포근함을 주며 그녀를 안심시키는 남자다. 그러나 나애는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언젠가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리라는 생각 또한 한편으로는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마음 안에 그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희도는 언제 내 눈을 열고 마음 안으로 들어왔을까. 중략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방심한 어느 사이에 희도는 원래 내 안에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p.106)

 


  살면서 반복되는 이별과 상실. 어떤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있고, 어떤 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평일의 한낮, 나애는 지방 공항으로 향한다. ‘지나간 시간만큼 주변을 빙빙 돌며 탐색하고 서성거려야 할지도’(p.244) 모르지만 그녀는 그저 손 놓고 바라보는 것이 아닌 어떤 선택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야기를 다시 이어 나가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일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마음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 앞을 향해 내딛는 그녀의 발걸음은 독자들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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