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연습 창비시선 413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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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시인의 『웃는 연습』.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시로 담아낸 작가의 문장들은 살며시 다가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때로는 「카드 키드」, 「쇼핑백 출근」, 「마흔」, 「넥타이」를 통해 삶의 애환, 고단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의 어조는 결코 과하지 않다. 그저 담담하고 담백하게 써 내려감으로써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따름이다.

 


「짜장면과 케이크」는 여운이 오래 남는 기분 좋은 시였다. 작가는 마을버스 정류장 모퉁이에 있는 좁은 구둣방에 갔을 때 귀퉁이에 놓인 짜장면 빈 그릇 세 개를 발견한다. 구둣방 할아버지의 설명에 따르면 “위쪽 빵집 젊은 사장과 아래쪽 만두가게 아저씨가 와서 짜장면 송년회를 해주고 갔다고 했다” 작가는 “구둣방 왼편에 놓인 서랍장 위에는 케이크 한 조각이 얌전히 올려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검정 구두약 통 두 개와
한 뼘 반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
누가 놓고 간 거냐고 묻지 않아도
누가 놓고 간 것인지 알 수 있는


아내의 구두를 구둣방에 맡긴 나는
빵집으로 가서 빵 몇 개를 골라 나왔다
아내의 구두를 찾아갈 때는
만두가게에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세밑이 따뜻해져왔다 (p.19, 「짜장면과 케이크」중에서)


짜장면과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 그 자체로도 진심이 느껴져 기분 좋은 울림을 전해 받았다. 그래서 빵집에 들러 빵을 사고, 나중에는 만두가게에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송별회라고 꼭 거창하고 화려할 필요는 없다는 점.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일인 것이다.

 
 

좀 늦긴 했으나 콩을 심었다는 얘기, 콩 순을 따 먹은 고라니, 텃밭 옆 느티나무로 이사 온 꾀꼬리의 참견, 가을에는 도로를 차지하는 고추 등등.
시에는 시인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리고 그의 시에는 초등학생 딸과의 대화, 어머니와 장모님에 대한 이야기, 시골 풍경, 마을 어르신들이 두루 등장하는데,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같이 푸근하고 훈훈함을 전해온다.

 


밤과 대추를 나눠주던 가춘할매(「행복한 옥신각신」),
집을 비운 사이 마당 풀을 깎아 정리를 해주었던 금수양반(「금수양반」),
글 쓰는데 뭐라고 먹어 가며 일하라고 과일 보자기를 두고 가신 부녀회장님과 총무님(「어떤 방문」),
누구는 콩을 심고 가고 누구는 풀을 매고 간 동네 어머니들(「고마운 무단침입」),
스무 살 차이도 더 나지만 항상 ‘동상’이라고 챙겨주는 바우양반과 마을회관에서 시인에게 남들보다 더 큰 대접으로 시래깃국을 챙겨주는 어르신들(「어떤 대접」).

 


어쩐지 마음이 서서히 채워지며 온기가 몸속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다.
마치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 자기 일 마냥 신경 써주고 챙겨주시는 어르신들.
덕분에 시를 읽는 내내 정답고 정겨웠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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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보는 월리를 찾아라! Travel Collection - 30주년 기념 한정판 골드 에디션 월리를 찾아라
마틴 핸드포드 지음, 노은정 옮김 / 북메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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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갖고 싶다며 살까 말까 망설였던 책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월리를 찾아라 시리즈였는데,
이 시리즈는 숨은그림찾기 책의 클래식이자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 사랑을 받고 있는 유명한 책이 아닐까 싶다.
흰색과 빨간 줄무늬의 상의와 파란 바지 차림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는 월리.

 


특히 이번 TRAVEL COLLECTION 한글판은 <월리를 찾아라!>부터 시작해서

<시간여행, 환상여행, 별난 할리우드 여행, 신기한 책 속 여행, 이상한 그림 속 여행>을 포함,
여기에 7번째 에피소드 <알록달록 색다른 여행>까지 추가해 7가지 테마를 한데 묶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자 입장에서는 한 권으로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무척 반가운 구성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번 책은 크기를 확 줄였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도 너무나 좋았다.
대체적으로 그림책은 유아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큰 판형의 책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그림책을 좋아해 때때로 구매하는 어른이기에,
적당한 크기의 그림책들도 나와주었으면 했던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덩달아 그림도 작아져 더욱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기도 하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오히려 작아진 크기 덕분에 책장에 자유롭게 꽂을 수 있고 가방에도 넣어 다닐 수 있으며
그만큼 소장이 훨씬 편해진 느낌이랄까.
 

월리는 배낭을 메고 손잡이가 구부러진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기도 하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얼굴만 빼꼼히
내밀 때도 있고 어떤 장면에서는 책을 잔뜩 들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월리를 찾았을 때의 그 반가움이란!!
그런데 월리만 찾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실 이 책에는 특별한 여행자들이 늘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월리의 여자친구쯤으로 보이는, 아니면 월리의 여자 버전이라고 봐도 좋을 삼각형의 안경을 쓴 '웬다'.
항상 긴 곧은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흰수염 마법사'
월리처럼 동그란 안경을 썼지만 검정과 노랑의 줄무늬 상의에 검은 바지에 콧수염이 난
'오들로'
그리고 월리와 커플 복장인 강아지 '우프'까지.
그 외에도 월리 지킴이 25명가 등장한다.
이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은 월리가 아니라 우프가 아닐까 싶다.
실질적으로 우프는 소개 코너에서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림 안에서는
꼬리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다른 캐릭터들을 찾는 것보다도 시간이 더 걸리고는 한다.

 


그림을 보다 보면 그야말로 온갖 일이 발생한다. 웃음을 자아내는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들!
장면을 한가득 채운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가끔씩 책을 펼쳐 월리를 찾아라의 그림 속으로
여행을 떠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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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숨어라~ 무당벌레 보인다 - 여기는 식물도시
카테리나 마놀레소 지음, 김맑아 옮김 / 라이카미(부즈펌어린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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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꼭꼭 숨어라 무당벌레 보인다』.
그림을 보는 순간 풍부한 색감에 빠져들며 구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림책이다.
이 책의 설정은 이러하다. 분홍 토끼 데이지는 장난꾸러기 무당벌레를 기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숨바꼭질 놀이가 하고 싶어졌던 무당벌레는 데이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꼭꼭 숨어버리고,
데이지는 너무나도 큰 식물 도시에서 무당벌레를 찾기 위해
최고의 탐정 바질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하여 데이지와 바질은 무당벌레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다.

 

 


<나무초등학교, 기차역, 박물관, 놀이공원, 식당, 식물원, 동굴 음악회, 울타리병원
풀놀이장, 시장>

식물 도시 이곳저곳을 다니며 무당벌레를 찾는 데이지와 바질!
이 그림책은 알록달록한 색깔이 눈을 사로잡으며 장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기분이 들게 하는
일러스트가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다양한 동물들이 한데 어울려 각 장면을 구성하고 있는데 귀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느낌이 가득이라 마치 동물원에 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데이지와 바질은 과연 무당벌레를 찾을 수 있을까?
더불어 <쿨쿨 자는 친구, 엉엉 우는 친구, 꿀벌 다섯 마리와 회색 쥐 다섯 마리>처럼
무당벌레의 친구들도 함께 찾는 이 책을 즐기는 재미 중 하나다.
그림 하나하나 아껴보게 되는 참 예쁜 그림책.
소장하기에도 충분하고, 참 잘 구매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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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2018-01-10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온나화 기사를 읽고 나서 이 책 서평을 읽으니 더 읽고 싶어집니다! 식물들이. 풍요로운 지구는 이제 힘든걸까요?

연두빛책갈피 2018-01-11 16:03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식물을 포함 우리에게 익숙했던 과일들도 미래에는 못 먹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식물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일이 안타깝네요.
 
애호가들
정영수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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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물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일컬어 ‘애호가’라고 부른다. 애호가라는 말은 어쩐지 단어 자체만으로도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당사자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며 마음을 쏟는지를 잘 전해주는 듯한 단어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차분하고도 섬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책 제목과 달리 책 속 이야기들은 어느 것 하나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각 단편의 화자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나름의 이유로 현재가 충분히 힘든 사람들이다. 그런데 소설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주인공들에게 또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게 한다.

 


-<레바논의 밤> : 오랜만에 나타난 ‘장’, 그리고 남겨진 시체. 하지만 화자는 서가에서 책 정리를 하느라 그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고 어느덧 그는 눈앞에 놓인 시체보다도 장이 왜 연희와 자신을 같이 자게 했는지가 더 혼란스럽다.
-<애호가들> : 스페인어 강사를 하고 있는 나, 연이어 발생하는 불편한 일들. 주인공은 조만간 한국을 정리하고 떠나면 그만이라고 느끼지만 기대하던 번역 일이 틀어지면서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느껴지던 학교로 돌아가 어떻게든 다시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하나의 미래> :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신적 병증 때문에 매일 많은 양의 신경안정제를 먹고 있고 그래서 늘 잠이 오는 화자. 그런데 희곡 낭독 모임에서 자신과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소녀 ‘오하나’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나름의 관계를 이어가는데...
-<여름의 궤적> : 더운 여름, 서점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십 년 만에 만나게 된 그녀. 반가움보다는 불편함과 어색함이 뒤섞인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는다.
-<음악의 즐거움> : 로큰롤 스타가 되는 방법으로 시작해서 전립선암의 위험성으로 끝나는 이야기.
-<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 : 성당에서 치러진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화자는 삶의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스비극을 외운다고 고해성사를 한다.
-<북방계 호랑이의 행동반경> : 아내의 이혼 요구, 회사에서는 완전히 잘려 복직이 어려운 상태. 화자는 필수가 제안해온 호랑이 사냥에 함께 나서게 된다.
-<지평선에 닿기> : 서지연과 메일을 주고받는 화자. 지연은 본인의 쌍둥이 동생과 관련된 비밀을 그에게 털어놓고, 화자는 자신의 가족 때문에 힘든 마음을 털어놓는데...

 


  『애호가들』은 심각하고 난감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도 묘한 유머러스함을 잊지 않는다. 예를 들면 <레바논의 밤>에서 ‘나’와 연희가 시체를 묻을 땅을 파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하이라이트로 꼽고 싶다. 문득 화자는 연희에게 우리가 잔 사실을 장이 알고 있냐고 묻는다. 시체를 파묻는 와중에 그게 궁금했을까 싶지만, 연희는 화자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말을 들려준다. 장도 알고 있다며, 오빠랑 한 번 자달라고 한 게 장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은 마치 남녀 사이의 말싸움 같은 형태로 흘러가는데 시체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픽, 하고 새어 나오게 된다. 뭐든 남녀 사이가 조금이라도 연관 되면 나머지는 이렇게 상관없어지게 되는 걸까. 순식간에 분위기가 전환되며 스릴러 미스터리에서 로맨스코미디로 장르를 오가는 기분이다.
  눈앞에 발생한 일 중 어떤 것이 더 심각한 것인지 저울질하기 힘든 이 상황이여! 왠지 웃프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만 같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별다른 반전 없이 저마다의 흐름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뚜렷한 결론보다는 그냥 지금의 현상에서 그나마 일어날 만한 다음 현상으로 옮겨가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것은 ‘이상하다’와 ‘이해하다’를 양옆으로 두고 그 가운데 길을 걷는 기분이기도 했다. 이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옮겨가면 좋으련만, 이 소설에서는 그런 게 없어 조금 아쉽기도 했다. 어쩜 다들 이렇게들 일이 안 풀리는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겠지만, 그래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당황스러운 부분도 많았노라 살짝 고백해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화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살아가고 있었다. 더불어 타인이 보기에는 이상하고 황당한 이유일지라도, 개인에게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에서 화자가 그러했다. 그는 공장의 꽉 막힌 공간에서 매일 지루한 노동을 반복하며 보내고 있었는데 일하는 동안 그리스 비극을 외워 그 지루함을 이겨내고는 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잔인한 이야기가 오히려 지루함으로부터 그를 살리는 하나의 방법이라니 어떤 면에서는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그에게는 맞는 것, 필요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여자 친구 재연은 그런 화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비극 외우는 자체를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며 차라리 공부를 해 함께 대학을 가자고 권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재연처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학은 재연의 이유이고 방법일 뿐이지 화자에게는 아니었다. 그리스비극이 재연에게 맞지 않았던 것처럼.
  한편 화자는 그리스비극 번역자를 찾아가고, 노인이 된 그는 화자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빨리 가지만 삶이 권태로워진다고, 자신은 이거라도 붙들고 있지만 남들은 어떻게 이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취기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죽는 게 두렵지만 그렇다고 다른 뭔가를 기대할 수도 없어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p.151)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른 수많은 삶을 살아간다. 그중에는 즐겁고 신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는 분명 그런 사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삶이 되었든 이것 하나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것을 계속 즐기기 위해서든, 아니면 반대로 지루함을 이겨내거나 현재의 삶을 버티기 위해서든, 어쨌든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왕이면 여러 개가 좋다. 혹시 하나의 방법이 소용없어지면 또 하나의 대비책을 위해서라도. 그러니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주변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두루 살펴볼 일이다. 그러다 스스로 점점 다양한 분야에 애호가가 되어 그것을 꾸준히 즐길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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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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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의 삶과 바꾸어 살 수 있다면?
이처럼 『하얀 성』은 꽤 흥미로운 설정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베네치아의 학자로, 배를 타고 나폴리로 가던 중 터키 함대에 끌려와 이스탄불에서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호자를 만나게 되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신과 닮은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만다. 파샤는 그를 호자에게 선물로 주고, 그는 이제 호자의 노예가 되어 호자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는데...

 

 
  그런데 이러한 닮은꼴이라는 설정은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어렸을 적 읽었던 명작동화 『왕자와 거지』라든가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도 ‘도플갱어’, ‘닮은꼴’이라는 소재가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평행우주 너머의 ‘또 다른 나’라는 매혹적인 설정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가끔 TV 예능에서도 연예인을 닮았다며 역사 속 인물이나 해외에 사는 일반인의 사진을 놓고 나란히 보여주기도 하는데, 볼 때마다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덩달아 한두 번쯤 해본 것 같다.

 


  소설에서 호자와 ‘나’는 닮은 외모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비슷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당연하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오던 전혀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비는 소설 속에서 호자는 동양을 대표하고 ‘나’는 베네치아에서 왔기에 서양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극명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물론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진 곳이기에 딱 부러지게 동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소설은 좀 더 역사적인 시대를 반영해 호자를 동양인으로 내세우고 있다. 반면 ‘나’는 문화와 종교가 다른 서양인이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교도 취급을 받는 상황이다.

 


  호자는 ‘나’에게 학교에서 배운 것을 포함해 천문학, 의학, 공학 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달라고 말한다. 호자는 서양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고, 수없이 나와 토론을 하고 의견을 나누며 지식에 대한 욕구와 학문의 갈증을 채워나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다. 바로 우위가 수시로 바뀌는 두 사람의 관계이다. 기본적으로 호자와 나는 주인과 노예 관계이지만, 호자는 나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나는 호자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그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나니 나의 우월감은 곧 사라지게 된다. 이제 나는 호자를 부러워한다. 책상 앞에서 스스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호자를 보며 그게 자신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한편, 파샤가 호자보다는 내게 관심을 가졌을 때는 또 우쭐해졌다. 그러나 호자가 황실 점성술사가 되어 파디샤와 친밀해졌을 때, 상황은 다시 역전된다. 자신감에 넘치는 호자와 달리, 나는 호자가 존재를 알아주지 않아 섭섭함을 느낀다. 대가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함께 해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호자 그 자신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상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둘은 학문뿐만 아니라 개인의 어렸을 적 추억이라든가 가족들, 습관 등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대화를 통해 주고받았다. 어느새 그 둘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생각도 행동도 서로를 이해하고 닮은 ‘우리’가 된 것이다.

 


  어느덧 소설의 후반부, 무기를 만들지만 전쟁에서 효과가 없게 되자 모두들 베네치아인 노예가 불운하기 때문이라며 그를 죽이라고 말한다. 호자와 나는 침착하게 말없이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서로의 신분을 바꾼다. 호자는 베네치아에 가고 거기에서 터키에 관한 책을 써서 유명해진다. 그리고 나는 호자의 신분으로 행복하게 살아간다. 여기에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다. 별별 소문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내가 내가 아니라는 소문도 늘 뒤따라 다녔다. 호자가 된 나는 그것을 칠 년 정도 견뎌야 했다. 나는 어느새 그것마저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 나를 불안하게 했던 내 정체에 관한 질문에 대해 이제는 노련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들 이지요."라고. (p.187)  

 

소설의 중반에 호자가 "왜 나는 나일까?"라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은 신분을 바꾸어 또 다른 나로 살아가게 된다. 그럼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노련한 대답을 읽고 보니 그렇다 아니다 결론내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디에서 살아가든 결국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은 본인 자신이고,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내면적인 본질은 꾸준히 모색하고 가꾸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들. 다시 한번 이 말을 되새기며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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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2017-12-0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아정체성을 위한 수많은 탐색경로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그러면서 자신만의 모습을 찾아가는 거 맞지요?

연두빛책갈피 2017-12-05 23:50   좋아요 0 | URL
수많은 탐색경로. 마음에 드는 표현이자 멋진 표현이네요.
자신만의 모습은 스스로만이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니 그 답을 내리기까지 여러 상황에 놓일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닮은 사람을 앞에 두고,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있고, 스스로 느낀바에 의해서도 그렇고요.

그래서 데미안님이 써주신 ‘수많은 탐색경로‘라는 표현에 한번더 고개를 끄덕여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