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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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생각나는 이름 하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점이라도 된 듯 그 시절 모습이라든가 주고받았던 대화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소소하고 평범했어도 이런저런 일들이 다 좋았고 즐거웠던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개인에게는 그 시절 함께 했던 누군가로 인해 더욱 의미 있고 소중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 시간의 감각들은 언제나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나애)는 '도이'의 소식을 궁금해한다. 나애를 '라애'라고 불렀던 종려할매와 도이와 상. 그녀는 어렸을 적 병원집에 맡겨져 생활한 적이 있는데 가족과 떨어져 '몸속에 얼음덩이가 박혀 있는 것'(p.143) 같았던 고독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도이'와 '상' 덕분이었다.

 

도이와 상과 나애, 나는 우리의 구성이 가진 의미를 알 수 없기에 몬드리안의 극단적인 추상화를 바라보고 있다.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어디에나 그런 구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우주의 질서 속에 존재하듯, 나뭇잎 한 장의 질서 속에도, 물 한 방울의 질서 속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우연도 필연도 아닌 물질의 속성으로서의 기본 구성, 최초의 구성. (p.217)


우리 각자가 한 일은, 모든 사람과 생물과 무생물의 꿈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그러니 도이, 내가 기억하는 것이 너에게 힘이 되면 좋겠다. (p.218)

 

  그러나 나애와 상과 도이는 이것이 끝이구나 할 만한 것, 분명하고 정확하게 인식되는 헤어짐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사정에 의해 엇갈리기도 하고 멀어지면서 서서히 이별을 하다 연락이 끊긴 것이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서 나애는 도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그의 소식을 듣고 싶어 한다.
  추억이란 건, 더불어 기억이라 건 그런 것 같다. 그 순간에도 버팀목이 되어주었지만 살아가는 동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힘이 되어준다. 그것이 약간의 슬픔이라든가 그리움을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우리는 기억과 함께 호흡한다.

 


  한편 이 소설은 화자의 어린 시절뿐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도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기에서는 그녀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로 인한 그녀의 감정을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기대나 갈망, 욕심보다는 주어진 것을 갖고, 어딘가에 갇히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한 나애. 반면 희도는 안전하고 포근함을 주며 그녀를 안심시키는 남자다. 그러나 나애는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언젠가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리라는 생각 또한 한편으로는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마음 안에 그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희도는 언제 내 눈을 열고 마음 안으로 들어왔을까. 중략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방심한 어느 사이에 희도는 원래 내 안에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p.106)

 


  살면서 반복되는 이별과 상실. 어떤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있고, 어떤 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평일의 한낮, 나애는 지방 공항으로 향한다. ‘지나간 시간만큼 주변을 빙빙 돌며 탐색하고 서성거려야 할지도’(p.244) 모르지만 그녀는 그저 손 놓고 바라보는 것이 아닌 어떤 선택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야기를 다시 이어 나가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일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마음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 앞을 향해 내딛는 그녀의 발걸음은 독자들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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