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 문학과지성 시인선 504
김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문장. 언뜻 간단하다고 여길 수 있으나 겪어본 사람은 안다. 핵심을 담아 간결하게 표현하기란 꽤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그 한 문장으로 상대에게 자신이 생각한 바를 그대로 온전히 전달하기란 보기보다 어렵다.
  사실 어떤 문장은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한 문장은,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며 “지금 말하라.”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시간은 잡아둘 수 없으므로 ‘지금’이란 것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하기 전에, 지금 말하는 것이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전하지 못한 말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고마움의 말일 수도 있고, 상대방의 무례함에 대한 속 시원한 한방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제 와서 말하기에는 이게 또 무척 애매하더라. 그때의 ‘지금’과 현재의 ‘지금’ 사이에 생겨버린 이 엄청난 간극이라니!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같은 문장인데도, 이제는 어딘가 다른 느낌을 주는 그 말들. 결국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오늘도 마음속 어딘가를 무수히 배회하는 중이다.

 

 

 

  나는 슬퍼하고 있고 슬퍼지고 있고 슬프고 있고 그래서 슬프다. 사이사이 다른 감정이 끼어든다.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기쁨이 있고 환희가 있고 절망이 있고 분노가 있고 비굴함이 있고 순식간이 있고 나는 다 빠져나왔다. 다 빠져나와서 빠져 있다. (「있다」부분)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끄덕였다. 슬픔이 주를 이루게 되더라도 그 안에서는 다양한 명도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이다. 자신이 슬프다는 걸 알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혹은 깊이가 다른 슬픔이 저 멀리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음을 감지하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다른 감정이 때때로 찾아오기도 하는데, 원래 같은 일이나 상황도 수용하는 사람에 따라 느껴지는 것들이 다 다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하나의 일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만큼, 복잡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뭇잎이 푸르고 있다. 짙푸르고 있다. 진푸르고도 있다. 간혹 연푸르고도 있는 나뭇잎이 올라가면서 더 푸르고 있다. 올라가면서 가늘고 있는 나뭇가지가 더 올라가면서 가늘고 있다. 여름 한창을 가늘고 있다. 여름이 가늘고 있다. 낮이 가늘고 있다. 한낮이 사라져 있다. 온데간데없이 있다. 부지런히 도착해 있다. (「있다」전문)


  이번의 시 제목 역시 ‘있다’이다. 점점 푸름이 가득해지는 초여름, 산을 지나치며 이렇게 다양한 초록색이 존재할 수도 있구나, 감탄한 적이 있는데 이 시는 마치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이름 모를 나무들과 풀의 수만큼 다양하게 있었던 푸름. 자연은 늘 경이로운 데가 있다.

 

 


  한편「나와 이것」, 「당신과 그것」, 「그것 없이도」, 「나와 저것」이라는 시에서는 마치 시리즈처럼 이것, 그것, 저것이라는 대명사가 연이어 등장해 나름의 흥미를 자극한다.
  나와 함께 다니는 ‘이것’, ‘그것’ 없이 못 사는 당신, ‘저것’과 싸우는 나. 그리고 시인은 “그것 없이도 죽음이 온다. 그것 없이도 삶이 온다. 그것 없이도 시간을 보낼 수 있다.(p.49)”고 하는데 과연 이 대명사들이 지칭하는 것들이 뭘까 궁금하기만 하다. 스무 고개하듯 다른 문장을 통해 유추해보며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히려 구체적으로 지정해두지 않아서 읽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대로 읽을 수 있고, 그게 곧 저마다의 이야기가 될 테니 말이다.

 

 


  어떤 시에서 작가의 글은 어쩐지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처음에는 분명 한 문장이었으나, 이 문장은 점점 그 주변으로 뻗어나가고 확장되면서 상반된 의미를 가진 문장에 닿기에 이른다. 그러다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수렴되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어떤 시는 계속되는 질문과 답의 반복 과정을 거치기도 하는데 어쨌든 시 안에는 두 가지 모습이 다 언급되기에 시를 읽는 내내 조금 더 집중해서 읽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하지 못하는 걸 결정 하고 있다. (「결정」부분)


(...) 어느 하나도 중지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나는 매일같이 중지하는 사람이다. (...) 중지가 어떻게 중지될지 너는 아는가? 중지는 모른다. 나는 아는가? 중지는 괴롭다. 그 모든 중지를 대표해서 중지가 온다. 중지답게 온다. 나는 무척 중지했던 사람이라고 온다. 무척 중지했다가 그쳐버린 사람이 온다. 그가 와서 이 말을 그치고 있다. 그만 중지하자고 있다. (「중지하는 사람」부분)


물방울 하나가 물방울 하나를 만나러 간다. 둘은 물이다. (...) 그럼에도 떨어지지 못하는 둘 사이를 물이 가른다. 물이 갈라놓고 있다. 물은 물 때문에 헤어졌다. 물은 물을 찾아가서 위로받고 있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 (「물」부분)


그는 어떤 말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한다. (...) 그는 내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떤 말을 하면서 어떤 말을 숨기고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하지 못한 말」부분)

 


  결정하지 못함과 결정하는 것, 중지와 중지가 중지되는 것, 물방울과 물방울의 만남과 갈라짐 역시 물에 이루어진다는 것, 어떤 말을 하지 않고 있고 그래서 어떤 말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이나 나나 되짚어보면 마찬가지인 것. 이러한 구조의 반복들.
  미술작품으로 치자면, 에셔의 <그리는 손>이란 작품이 생각나기도 했다. 에셔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 공간을 표현해 작품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네덜란드 판화가이자 드로잉 화가로, 무한한 반복과 순환이 이루어지는 구조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는 손>역시 왼손은 오른손을, 오른손은 왼손을 그리며 두 손이 끊임없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형상화한다.

 

 

 

  A면이 있고 B면이 있다. 어느 쪽을 들어도 상관없는 손이 있다. 이 손은 악수하기 위한 것. 그리고 이 손은 그것을 막기 위한 것.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 손을 내밀어라. 손바닥이 있고 손등이 있다. 어느 쪽이든 용도가 있고 세계가 있다. 주먹이 있고 손가락이 있다. 어느 쪽이든 얼굴을 향해 가는 손이 있다. 때릴 것인가. 찌를 것인가. 어루만질 것인가. (...)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이쪽 벽이 있고 저쪽 벽이 있다. 맞닿아 있다. (「판결」부분)


  “찌를 것인가 어루만질 것인가.” 손은 신체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개인의 결정에 따라 그 쓰임새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악수하는 손은 인사나 화해를 의미하지만, 누군가를 때리게 되면 그건 폭력이 된다. 그리고 손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결과로 이르게 할지는 개인의 선택이 크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맞닿아 있는 그 모든 것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에 대해. 부디 만족스러운 쪽으로 삶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좋은 문장들이 자주 등장하는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그랬으면 좋겠다고 살짝 욕심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