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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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힘들지 않은 시대는 없겠지만, 데니스 루헤인이 그려내는 이 소설은 1920년대의 혼란스럽고 혼돈스러운, 그 당시의 미국으로 우리를 그대로 데려다 놓는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는 극명했고, 남녀 불평등과 인종차별, 그리고 경찰과 관료의 부패와 뇌물은 마치 당연한 듯 도시 전체에 만연하던 시기였다. 특히 이때의 미국은 금주법이 시행되어 불법적인 밀주 제조와 판매가 성행하던 시대였는데,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이를 둘러싼 마피아들 간의 대립, 이익에 열을 올리고 조직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펼쳐졌던 인물들 간의 음모와 갈등을 긴장감 있게 풀어내며 독자들에게 흡입력 있는 스토리를 선보인다.

 


  『리브 바이 나이트』는 제법 두꺼운 분량의 장편소설임에도 지루할 틈 없이 끝까지 흥미를 주었던 소설이다. 무엇이 이 소설에 빠져들게 했나 생각해봤더니,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주인공 ‘조 커글린’이라는 캐릭터의 힘이 아닐까 싶다. 고위 경찰인 아버지를 두었지만 집에서 나와 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조 커글린. 그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밤의 규칙을 따르지만, 그 안에도 분명 그만의 신념, 원칙이 있었다. 이것은 성공과 돈만 좇는 다른 이들과 주인공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는 큰 구별점이자 이 소설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사실 소설 초반만 해도 그는 (도박장을 터는 것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것은 맞지만) 어찌 보면 어리숙하고 사랑에 빠진 청년에 불과했다. 에마 굴드가 그 지역을 주름잡는 앨버트 화이트의 정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는데, 누가 뭐래도 그에게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은행을 털어 크게 한몫 챙긴 후 그녀와 다른 도시로 도망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일은 점점 꼬여가기만 한다. 경찰 셋이 죽으며 감옥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살해 위협과 협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주인공은 마소의 사람이 되어 탬파에서 사업을 성공시킨다. 부를 쌓고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의 위치가 되면 사람이 좀 변할 법도 한데 그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조는 본인만의 선, 넘지 않는 어떤 선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범죄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이유 없이 함부로 남을 짓밟는다거나 가볍게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배신에 쉽게 분노하지도 탐욕에 굴복당하지도 않았다.

 


  무자비하고 비열한 범죄자들 속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미 넘치고 약자를 생각할 줄 알았던 조 커글린. 책 후반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반전이 펼쳐지기도 하는데 그는 더 이상 감정만으로 행동하는 이십 대 초반의 그가 아니라 이성과 책임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릴지 찬찬히 지켜보아 주어도 좋다. 이 역시 이 책을 즐기는 하나의 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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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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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인생을 떠올려봤을 때, 이 책의 화자 토니 웹스터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삶이 너무 좋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나쁘지도 않았으며 그럭저럭 평균치 정도는 된다고. 이만하면 괜찮다고. 육십 대가 되어 은퇴를 한 그는 이혼한 전처와 친구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딸 수지와도 잘 지내고 있다. 술친구들도 있고 여자친구들도 있다. 나름 평온하다면 평온하고 안락한 삶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편지 한 통으로 인하여 확실하고 분명하리라 여겼던 자신의 기억이, 그리고 개인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달리 완전한 착각이요,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말이다.

 


  어느 날, 토니는 고故 사라 포드 여사의 유언으로 오백 파운드와 함께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유품으로 받게 된다. 사라 포드 여사는 대학교 때 사귀었던 베로니카의 어머니로, 그는 왜 사라 포드 여사가 자신에게 돈을 남겼고 그녀가 왜 자신의 친구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십 대를 아무리 떠올려 본들 기억에는 한계가 있고, 본인이 만족할만한 답은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베로니카와는 헤어진 후 어떠한 연락이나 만남도 없었던 터라, 의문과 미스터리는 더해져만 갔다. 무려 사십 년 전의 일인 것이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p.101)


에이드리언이 줄곧 인용했던 말이 무엇이었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p.106)

 

 

 

  일기장은 현재 베로니카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기장 대신 그가 건네받은 것은 문제의 그 편지, 자신이 쓴 기억이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본인이 쓴 것이 분명한 편지 한 통이다. 이십 대의 그때, 화자는 베로니카와 헤어진 후 에이드리언에게서 그녀와 데이트를 해도 되냐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토니 자신의 기억에 따르면 본인은 엽서에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라는 식의 답변을 했다. 그러나 베로니카가 준 자신의 편지는 그야말로 경멸, 악담, 저주, 악의가 넘쳐나는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의 글이었다.

 

 


  토니는 그 편지에 대해 ‘내가 그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나 그렇게 험담을 퍼부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어려웠다.’(p.169)면서도 편지를 쓴 기억이나 보낸 기억이 없어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조금 억울해하기도 한다. 그때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면서.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고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이를 두고 헤어졌더라도 전 여자친구와 자신의 친구가 사귄다는 소식에 그 정도 글은 쓸 수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시선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편지를 쓸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편지에 담긴 내용과 정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험담을 퍼부었다’는 표현조차도 너무나 정중하고 매너 있게 포장해준 거다. 실질적인 내용을 읽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으니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 자신에게 심한 말을 했을 때, 그것은 큰 상처가 되어 오랫동안 지옥에서 사는 것 같은 경험이 될 수도 있음을. 그리고 어떠한 말들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아물지 않을 수도 있음을. 그런데 상대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전혀 없다며 오히려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냐고 이쪽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면 이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 일인가. 그러니 소설에서 편지가 드러나는 이 부분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데 있어, 사람들의 불확실한 기억이라든가 어떤 가정도 추측도 필요 없게 한다. 그 자체로 기억의 허점을 채우며 실질적 입증이 가능한 셈이다.

 


  편지로 인해 토니는 자신의 기억에 대한 왜곡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로서는 토니란 인물에 대해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소설 1부에서는 토니의 시선과 기억을 따라 그의 학창시절, 대학생활, 베로니카와의 연애, 인생 전반을 둘러보지 않았던가. 그는 스스로 베로니카에게 그렇게까지 열정이나 미련이 없음을, 헤어진 뒤에도 그녀를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은퇴할 나이가 되기까지 불화를 싫어해서 싸움이 될만한 일은 만들지 않았고, 꼬투리 잡힐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닌 것처럼 보여줬다. 그런데 편지를 읽고 보니 과연 둘이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차이가 너무나 컸다. 그 상황에 극히 이성적일 수 없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본인은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고 다 받아들이며, 거기에 크게 신경 안 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냐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불리한 부분은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하니 그가 말하는 자신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편지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토니의 기억에 의존해 여전히 아무 의심 없이 토니가 그리는 그의 모습만을 봤을 것 아닌가.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을 아예 기억도 못 한다고 해서 그가 안 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이 편지가 그대로 실현되어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 결말은 독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는 충격적인 반전으로 끝이 난다.
  물론 알고 있다. 토니가 정말 그렇게 되길 바라며 저주를 퍼붓고 악담을 한 것은 아닐 것이이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무리 기억에 없다 하더라도) 그런 편지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렸으니까, 치기 어린 감정이니까,라는 이유로 넘어가주어야 할까? 그러나 그것으로도 덮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어떤 상황, 어떤 말이든 선이 있고 정도가 있으며, 말은 한번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 그에게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 역시 이러한 점을 깨닫는다는 점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여러 가지를 사유하게 하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p.11)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아로새긴다.

 

나는 책임의 사슬을 보았다. (...중략...)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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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장 스트레칭 - 쾌변 x 바디 리프팅 x 다이어트를 한 번에
오노 사키 지음, 김현정 옮김 / 북라이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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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더불어 화장실을 잘 가느냐 하는 것 역시 많은 사람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겪어본 사람은 안다. 오랫동안 장에 신호가 없으면 아랫배가 묵직해지면서 컨디션도 좋지 않고, 왠지 모르게 더 피곤해지는 기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마찬가지로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규칙적인 장의 신호로 화장실을 잘 가는 것, 그래서 뱃속이 편안한 것만으로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말이다.

 

 


그런데 여기 하루 15초만으로도 쾌변 X 장 리프팅 X 다이어트라는 세 가지 효과를 잡고, 온몸의 탄력이 살아난다고 말하는 책이 있으니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다.
『기적의 장 스트레칭』.
간호사로 근무했던 이 책의 지은이는 자신부터가 극심한 변비로 고생을 했음을 털어놓으며, 그것이 낮아진 ‘장 위치’ 때문이라 말한다. 물론 장은 다른 장기보다 중력의 영향을 쉽게 받으며, 나이가 들면서 근력이 약해지기는 한다. 그렇다 보니 장의 위치가 낮아지며 온몸에 처짐 현상이 발생하는데, 지은이에 의하면 장 스트레칭을 꾸준히 함으로써 장 리프팅을 통해 신체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장은 사실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게는 소장과 대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중 소장은 위에서 보내온 음식물의 영양분을 소화하고 흡수하는 일을, 대장은 음식 찌꺼기를 모아 불필요한 것을 내보내는 배출의 역할을 하는데, 만약 장이 오염되고 노폐물로 쌓여 있다면, 몸에 좋은 것을 아무리 많이 챙겨 먹어도 영양의 흡수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만 봐도 장 스트레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더블 프레스 스트레칭>이다.
복식호흡과 흉식호흡을 동시에 하는 스트레칭으로,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서서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면서 5초간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배->가슴 순서로), 팔을 천천히 내리면서 가슴->배 순서로 10초간 입으로 숨을 내쉬면 된다. 이때 배꼽이 보일 때까지 상체를 서서히 굽힌다.

 

 

 

 

엉덩이, 가슴, 등살, 배, 다리, 얼굴, 팔뚝.
장 위치를 위로 올리면서도 부위별로 날씬하게 만들어주는 스트레칭도 있다.
간단한 동작들이라 따라하기 쉽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제4장의 '일상에서 장을 끌어올리는 상쾌한 습관', 제5장의 '처지지 않는 식습관 총정리'도 있으니 읽고서 이 기회에 생활습관, 식습관도 함께 개선해보면 참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장 건강을 위해 동작을 따라 하다 보면 저절로 다이어트도 되고 변비도 개선되며 부종이나 피부 트러블도 나아진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15분도 아니고 15초의 장 스트레칭! 움직이기 싫고 귀찮은 사람에게도 딱이다.
일상에서 꾸준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책의 동작들. 앞으로 그 효과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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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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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히 본 표지에는 저 멀리, 바다 쪽에 두 사람이 있었다. 흐릿한 모습이라 눈을 가늘게 떠봤으나 그런다고 해서 원래 흐렸던 형상이 저절로 또렷해질리 없다. 그럼에도 가까이하면 좀 나을까 싶어 이번에는 책을 한껏 끌어당긴다. 그런데 그 순간 반짝,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제목을 따라 얇게 입혀진 홀로그램이었다. 너무 밝은 곳 혹은 어두운 곳에서 봤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은은한 반짝거림. 그렇게 글자들은 바다와 하늘의 푸름을 배경으로 빛의 각도에 따라 가지런하고 단정하게 오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태양과 바람과 바다와 모래의 어느 작은 섬.
그곳에 내려와 살면서 소금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던 정모는, 어느 날 어렸을 적 친구인 연수에게서 그녀의 딸, 이우를 잠시만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형형색색의 요란한 색으로 머리 염색을 한 이우의 등장은 강렬하기만 하다. 이우는 반찬을 챙겨주는 이웃의 이삐 할미, 청각 장애로 귀가 안 들리는 소년 판도와 만나게 되고 가끔씩 소금창고에 들러 책 정리하는 일을 돕는다.
  이렇게만 보면 섬의 풍경은 무척 평화롭고 단순하고 단조롭다.
하지만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마음에도 역시 저마다의 상처와 아픔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음이다.

 

 

  고등학교를 휴학 중인 ‘이우’는 태이가 죽은 후 불면증이 생겨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 또한 좀처럼 잡지 못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정모’는 시신경 세포의 손실로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어렸을 적 자신과 연수, 태원은 늘 어울리는 친구였지만 태원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에게 상처로 남아있다. ‘태원’은 소금창고 소유주이지만 실질적인 결정권자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아버지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돈과 사업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구는 모습을 못 견뎌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잠시 이우를 보러 온 연수는 오랜만임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속 후벼파는 말을 주고받는데, 엄마가 없어 마음에 구멍이 생긴 ‘판도’에게는 그마저도 부러울 뿐이다.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있지만, 소설을 읽고 있으면 시간보다는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싶다.
  정모, 이우, 이삐 할미와 판도. 나는 이들이 주고받는 대화라든가 감정의 교류가 너무나 좋았다. 이것저것 챙겨주며 모두를 품어주는 이삐 할미와 반말과 존댓말을 오가며 투닥거릴 때가 많지만 점점 친해지고 있는 이우와 정모. 그리고 이우의 손바닥에 글을 써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판도를 볼 때면 덩달아 마음이 점점 몰랑몰랑해져 온다고나 할까. 이들의 늘 따스한 온기와 편하고 기분 좋은 기운이 내게도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조금씩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보이고 섬도 돌아다니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이우, 그녀는 풍경을 바라보며 태이의 생각을 하고, 안부를 전한다.

 

 

여기 말이야. 천 개도 넘는 섬들이 있다니, 상상이 돼? 썰물이 지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섬도 있어. (...) 섬들은 다 다르고 다 예뻐.
아, 있잖아. 난, 여기서 조금씩 충전되고 있어. (p.104~105)

 

 

  한편, 정모는 도서관 만드는 일을 통해 여러 가지를 느끼게 되고, 자신의 눈 상태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지금의 일에 집중하기로 한다.
  소설 초반, 이우가 정모에게 맡겨졌을 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게 너무나 기억에 남는다. 그는 이우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등의 일장 연설도 늘어놓지 않았다. 정모는 그저 이우의 세 끼를 어떻게 책임지나 그 걱정이었다. 자신이야 대충 먹거나 걸러도 된다지만 누군가를 돌본다고 생각하니 밥이 가장 신경 쓰였나 보다.
  우리 주변에는 친하든 친하지 않든, 마치 그게 인사라도 되는 듯 자신의 궁금증을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며 그 사람을 바로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그런지 난 그렇게 하지 않은 정모가 참 고맙게 느껴졌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이미 너보다 더 살아봤으니 인생을 다 안다는 식의 어조로 넌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아서. 그리고 이우의 상황이 궁금했을 법한데도 질문하지 않고 그냥 지켜봐 주며 나아가 이러쿵저러쿵 이우를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아 줘서. 그건 무관심과는 다른, 정모 나름의 배려였던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번 표지를 보니 보일 듯 말 듯 한 제목의 그 은은한 빛이 너무나 좋았더랬다. 그것은 차분하고도 고요한 예쁨, 이 소설의 여운을 잘 담아낸 무지개의 색깔이자, 한편으로는 투명하지만 보석처럼 반짝이는 소금이 아닐까 싶었다.
  요즘에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알고 보면 예전에는 참 귀했던 소금. 소설에서 정모가 이우를 염전으로 데려가 소금꽃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하면 소금은 힘들고 만만치 않은 작업으로 얻어지는구나 느끼게 된다.
  새하얀 소금이 달리 보인다. 이제는 소금을 마주할 때면 ‘흔하다’ 대신 ‘귀하다’와 예쁘게 피어난 ‘꽃’으로 바라보며 이 소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지천으로 널렸다고 소금 우습게 보지 마라. 오래전 아프리카에선 금값이었다. 노예는 제 발 크기만한 소금판 하나 값에 팔렸지. 로마의 용병들은 월급을 소금으로 받기도 했고. 샐러리의 어원이 소금이잖니. 저기, 바다 가까운 저수조에선 침전과정을 거치는 거지. 흙이나 죽은 물고기 같은 불순물들. 그런 다음에야 얕은 저수조로 옮겨와. 증발지에서 물이 더 줄어들면 결정을 이루면서 소금꽃이 피기 시작해. 이런 과정이 기후와 습도에 따라 매번 달라져. 결정지의 바닷물은 아주 팽팽해. 소금꽃이 피기 직전엔 염도가 16, 17까지 오르지. 필 듯 필 듯 주춤거릴 때 소금물의 뺨을 후려치면 물이 파르르 성깔을 부리며 꽃을 토해내는 거야. 몽글몽글." (p.108)


“꽃은 어디 있는데?”
“저기 적, 물속에 하얗게 엉겨 있는.”
"그냥 소금이잖아!"
"꽃이 별거냐. 징허게 모인 기운이 터져나오면 그게 꽃이다."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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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쓸모 있는 인간 - 오늘도 살아가는 당신에게 『토지』가 건네는 말
김연숙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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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도 아직 시작하지 못한 책이 있다.
이미 완독을 한 사람들에 의하면 꼭 한 번쯤 읽어보라며 추천되는 그 책, 바로 박경리의 『토지』이다. 그러나 무려 20권이나 되는 대하소설이고, 수많은 사람이 등장해 수많은 관계가 얽히고설킨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혹시나 어렵지는 않을까, 복잡하지는 않을까 염려부터 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중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이란 책을 만났다. 이 책은 한국문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토지』 [인간, 계급, 가족, 돈, 사랑, 욕망, 부끄러움, 이유, 국가]라는 9개의 키워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그 삶을 두루 살펴보는 인문학 책이다.

 

 
  『토지』에서 중심인물은 최참판댁의 무남독녀 ‘서희’다. 그녀는 자기 집의 모든 재산을 가로챈 조준구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하고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토지』는 이외에도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인물에 대한 구분 없이 저마다의 사연으로 울고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을 두고 저자는, 『토지』는 수많은 삶의 굴곡을 마주 볼 수 있는 ‘인간백화점’이라며 주어진 운명이나 굴레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게끔 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거복이와 한복이 형제가 그러했다.
최치수 살인죄로 아버지는 사형을 당하고 어머니는 목매달아 죽었을 때, 형제는 외갓집에서 얹혀살면서 눈칫밥을 먹는다. 외갓집을 뛰쳐나간 거복이는 간도로 가서 김두수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 밀정 노릇을 하다 나중에는 일본 순사 부장이 되는 한편, 한복이는 외갓집이든 고향이든 구박을 견디고 수모를 감내하며 살아간다. 두 형제 모두 부모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산다고 여겼지만, 한복이는 어느 순간 "나는 나다! 아버지도 형님도 아니다"라며 자기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는다.
  “꼽추 도령”으로 나오는 조병수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탐욕스럽고 극악한 부모의 행태(아버지 조준구는 서희 집안의 재산을 가로챈 인물이다)와 자신의 장애로 인해 늘 자책하고 살았는데 목공 일을 시작하면서 삶의 가치라든가 능동성의 변화를 느끼게 되고, 자신이 혹으로 느꼈던 그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더 이상 거기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인간이 뭔가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어디 어디에는 신경 쓰지 말아야지, 그 틀에 얽매이지 말아야지, 그저 다짐한다고 혹은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달라져야, 다른 일을 해봐야, 다른 행동에 나서야 그야말로 다르게 살게 된다는 것을 한복이를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p.70)

 


  다르게 산다는 것,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저자는 ‘삶의 재배치’를 언급한다. 삶의 재배치란 “모두 자신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흐름을 벗어나 새로운 장 속으로 자신을 옮겨 가는 일(p.78)”을 말한다. 예를 들면 집에서 공부하는 대신 독서실에 간다거나 스터디 그룹을 만듦으로써 자신을 그러한 관계, 그러한 장소로 옮겨놓는 것이다. 서희 역시 고향을 떠나 간도로 가서 사업을 하고(새로운 공간), 길상이와 결혼을 해서(새로운 관계) 그녀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

 


  저자의 설명과 함께 『토지』의 여러 인물을 들여다보니, 정말 별의별 사람이 다 있구나 싶었다.
남편보다 아들보다 돈이 중요한 임이네, 질투 때문에 자기 인생을 망친 강청댁, 지금 이렇게 가난하고 힘든 게 다 너 때문이라며 구천이를 패는 봉기와 마당쇠, 최치수의 아들을 낳고 작은 마님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던 하녀 귀녀 등. 이들은 늘 남 탓을 하고 무엇무엇 때문이라는 이유도 책임도 다 외부로 돌리며 남에게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물론 이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배울 점이 있는 사람, 닮고 싶은 사람도 있다.
자기들의 잘못을 알고 본인의 삶을 돌아볼 줄 알았던 두만네 내외, 타인의 입장에서 그 고통을 상상해보고 공감할 줄 아는 영팔이,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아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거리낌 없을 수 있었던 윤보, 서럽고 힘든 가운데서도 사는 것의 소중함을 찾아내는 주갑이 등등. 이들은 부끄러움을 아는 삶, 삶 중심에 자신을 두는 삶을 살았다.

 


  이 책은 『토지』를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줘서 여러모로 고마웠다. 특히 9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큰 범주는 『토지』를 다양한 관점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인간관계나 삶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삶은 열심히 가다듬는 작업과 수고와 노력이 필요함을 이 책을 통해서, 더불어 이 책을 징검다리 삼아 『토지』의 수많은 인물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수단이 아닌 목적을 중시하는 삶을 살 것. 그리하여 우리는 나도 너도 비교 불가능한, 특별한 그 무엇임을 마음에 늘 새겨야 할 것이다.

 

결국 목적으로서 우리가 살아간다고 할 때, 우리의 삶은 개개인마다 아주 고유하고 특별한 그 무엇이 됩니다.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삶은 내가 살아가는 나의 목적이고, 너의 삶은 너의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각각의 목적과 각각의 삶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야말로 비교 불가능한 '나'인 것입니다. (p.239~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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