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심리학 - 자본주의를 읽는 키워드, 에리히 프롬 병든 사회를 변혁하고 ‘인간의 시대’를 열다
김태형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김태형 저 <싸우는 심리학>을 읽고 / 2014. 10., 400쪽, 서해문집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이 행복의 지름길인가? 먹고 살만 하면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은데 왜 그렇지 않을까? 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눈 앞에 보이는 진실과 불의를 왜 외면할까? 사람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물음들은 끝이 없다. 사회와 집단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데, 개인의 삶과 생각, 일부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살펴보아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 책은 그런 질문에 대해 해답을, 또는 해답으로 가는 길을 제시한다. <불안증폭사회>와 <트라우마 한국사회>에 이어 김태형 사회심리학자가 내놓은 세 번째 '한국사회 심리분석 보고서 시리즈’이다. 
저자는 이미 두 저작을 통해 심리학을 대중적이고 실질적인 학문으로 쇄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보통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라고 하면 ‘에고’나 ‘리비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 어려운 개념이나 번역 때문에 꺼려지는 데. 저자의 심리학은 쉬우면서 정교해 보인다.

전작인 <불안증폭사회>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시대을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들의 불안심리와 한국사회가 한국인들의 불안을 어떻게 증폭시키고 있는지 분석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는 지난 100여년 한국현대사를 통해 사회와 역사가 한국인들에게 끼쳐 온 역사적, 집단적, 계층적 트라우마를 자세하게 분석하여 보여주었다.
시리즈 마지막 편인 이번 책 <싸우는 심리학>은 <불안증폭사회>와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 시작한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인의 심리를 체계적 학문으로 보여 준다. 그가 분석한 한국인의 심리가 어떤 학문적 연구 과정에서 도출된 것인지 드러낸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불안증폭사회>와 <트라우마 한국사회>를 펴낸 과정에서 연구, 분석한 과제들을 통해 자신의 심리학을 정립할 필요를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에리히 프롬의 심리학에서 실마리를 찾았고, 그 출발은 "인간은 사회적 존재(동물이 아니라)이며, 사회적 존재는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다소 익숙한 명제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에서 동물과 구분되는데, 이를 확고히 다져야 할 심리학이 그동안 '생물학적 존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구의 주류심리학은 사람을 ‘개인적'인 존재이자 '생물학적' 존재로 국한하여 심리현상을 분석해 왔다.

“프롬이 주장하는 인본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분석학의 비판 정신을 계승하여 전투성을 유지한다. 둘째, 사람의 무의식에 계속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진다. 셋째, 정신 건강을 해치는 잘못된 사회를 비판한다. 인본주의적 정신분석학은 소외, 불안, 고독, 심각한 공포의 감정, 활력 및 기쁨의 상실 등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원인이 병든 사회에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어떤 사회를 병든 사회라고 하는지, 또 병든 사회가 인간의 정신을 어떤 방식으로 병들게 하는지 그 매커니즘을 밝혀내야 한다. 넷째, 병든 세상에 대한 적응이 아닌 변혁을 권장하며, 변혁을 위한 이론을 탐구한다. 병든 세상에 순응하거나 적응해서 얻을 것이라곤 오직 정신병뿐이다. 따라서 인본주의적 정신분석학은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처럼 세상에 적응할 것을 권장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병든 세상을 변혁하는 사람이 되도록 사람들을 고무해야 하며, 그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을 연구해야 한다.”(31쪽)

저자는 이제라도 올바른 심리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에리히 프롬의 혁명성을 온전히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심리학 본연의 의무라고 말한다. 
특히 심리학이 단순히 개개인의 '힐링' 또는 '자기계발'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최근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심리학자들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한다.

저자는 ‘싸우는 심리학’을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후계자인 에리히 프롬(1900~1980)으로부터 찾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등으로 유명한 프롬은 애초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정통했으나,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정신분석학과 결별한 뒤 ‘인본주의적 정신분석학’이라 불리는 자신의 심리학을 이끌어 냈다. 저자가 프롬에게 주목한 결정적 이유는 그가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로 바라본 최초의 심리학자였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대놓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동물은 먹기 위해 살지만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다. 그러나 성욕을 인간 존재의 근간으로 봤던 프로이트로부터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거의 동일하게 취급하는 최근의 기계론적 실험심리학까지, 이 단순한 명제에 입각해 인간의 본질을 따져묻는 심리학은 없었다.

“프롬은 프로이트처럼 단지 지지를 표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존재(구체적으로는 경제적 하부구조)가 어떻게 사회적 의식(구체적으로는 정치적 상부구조)을 규정하는지를 심리학적으로 명확히 밝히기를 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경제적 기초가 어떻게 해서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변환하는지를 밝히지는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정신분석의 무기를 사용함으로써 마르크스의 학설에 있는 이 간극을 메울 수 있고, 경제적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결부시키는 메카니즘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36쪽)

저자는 그동안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본질을 ‘생물학적 존재’로만 인식해왔다고 비판한다. 
그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인식한다면 그에 따라 인간의 본성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이며 생물학적 존재의 본성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려는 속성, 세계를 목적의식적으로 개조하고 변혁하는 속성, 의식을 이용해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스스로 지휘·통제하는 속성” 등을 세가지 근본 속성으로 꼽을 수 있다. 

“프롬은 마르스크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인간 본성의 문제를 그 나름대로 심리학적 차원에서 해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첫째로 인간 본성이 존재하며, 둘째로 인간 본성은 생물학적 속성이나 특정한 시기의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도 아닌 사회,역사적 산물이며, 셋째로 인간 본성에는 불변의 요소들이 있어서 그것이 사회역사의 발전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48쪽)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자신의 본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저자는 프롬의 견해를 빌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인위적인 동기’를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병든 사회’라고 진단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의 병적인 동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절대 다수의 심리학자들조차 진정한 동기와 인위적 동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니 일반인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수의 현대인들은 몹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본성적 동기의 좌절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며, 인위적 동기를 진정한 동기로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근현대인들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으나, 실제로는 바라도록 되어 있는 것을 바라는 데 불과하다는 프롬의 지적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125쪽)

“진정한 동기와 병적인 동기를 구분하는 것은 올바른 심리학의 첫째가는 임무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고 있는 병적인 동기가 사람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폭로해야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다’ ‘사람은 원래부터 탐욕스럽다’는 따위의 잘못된 대중적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에 의해 정신적으로 불구화되어 있는 사람의 특성을 인간 본성으로 간주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사람에 대한 냉소적이고 허무적인 태도를 극복하고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게 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126쪽)

현대인에게 만연한 고립감, 무력감, 권태감 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들을 자발적 노예로 만들기 위해 강요해온 ‘인위적 동기’에 휩쓸리며 살아온 결과물이다. 이에 따라 현대인들은 대체로 권위주의적(무력한 자의 심리), 대세추종적(고립자의 심리), 쾌락지향적(권태로운 자의 심리), 시장지향적(인간 상품의 심리) 성격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처럼 병든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그 원인을 제공하는 병든 사회를 변혁해야만 해소될 수 있다.

“좀 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프롬은 ‘진실에 대한 지식은 거의가 다 무의식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보다 사람이 진실을 억압하는 까닭이 진실을 인식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진실이 가져올 후폭풍을 두려워하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156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삶의 경험을 통해 그 사회가 사람을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의식하고 저항하면 온갖 불이익과 탄압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기에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뿐이다.” 
“의식화는 새로운 진실을 외부에서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본질은 누군가가 삶을 통해 이미 말고는 있지만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진실을 의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식화의 성공 유무는 억압을 지탱해주는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의식화는 본질적으로 그가 이리미 알고 있는 진실이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억압을 제거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프롬에 의하면 억압의 주요한 원인은 공포이다. 따라서 개인 치료든 사회 치료든, 의식화는 공포가 완화될 때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 우리 사회에 적용해보면, 한국인들에게 가장 심각한 공포인 극우보수세력에 대한 공포를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의식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57쪽) 

저자는 사람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건전한 사회’를 상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프롬이 말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프롬은 “물질주의적 목표를 추구하고 인간의 정신 개조를 경시했다”며 옛소련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사람이 경제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은 버리지 않는다. 되레 그는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의 (형식적인)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과 결정에 (실질적으로) 참가하는 것”이라며 훨씬 높은 수준의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저자는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가 아니라 로봇화(자본주의와 옛소련 공산주의)냐 인본주의적·공동체주의적 사회주의냐”를 묻는 프롬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또 참여 민주주의를 실질화하기 위해 서로 얼굴을 맞댈 수 있는 ‘대면 집단’을 중심으로 권력을 구성하자든가, 인간 존재의 존엄 유지를 위해 기본소득과 유사한 최저생계비 제도를 만들자는 제안 등 프롬에게서 오늘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져오자고 제안한다.

“근본적인 사회주의, 사람을 중심에 두는 사회주의를 프롬은 ‘인본주의적 사회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로 명명했다. 그렇다면 프롬이 생각했던 건전한 사회,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는 무엇보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된 사회이다. 그러러면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백성이 주인이 되는 것’이니까.”(365쪽)

이 책은 독자들이 한국인들뿐 아니라 오랫 동안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에서 살아온 지구인들의 심리와 행동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단순한 이해를 넘어서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에게 투표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데서도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물론 대다수 한국인들의 사회심리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더할 나위가 없이 훌륭해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은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 뿐만 아니라 정치인이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 그리고 한국인의 심리가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싸우는 심리학>에 대해 단원별로 공부한 내용을 블로그(http://blog.daum.net/hy2oxy/8692613)에 올렸으니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참고하기 바랍니다.

-심리학자 김태형의 강연 동영상
1부 인간본성은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https://youtu.be/W9JgdaGisZY
2부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https://youtu.be/4jqVZja4Zzo

[인상 깊은 문장]

“물론 사회와 부모의 학대로 화가 난 아이들도 나름 반항을 하기는 하는데, 그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태도, 너무 먹지 않거나 너무 먹는 행위, 공격과 사디즘, 그리고 수많은 자기파괴적인 행위 등이 그것이다. 반항은 흔히 일종의 전면적 태업(세계에 대한 관심의 소거, 태만, 수동에서부터 가장 병적인 형태의 완만한 자기 파괴에 이르기까지)으로 나타난다.’(프롬)”(279쪽)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의 가장 일반적인 반항 형태는 소극적 반항이다. 요즈음 아이들 사이에서는 세상에 대한 완벽한 무관심, 완전한 의욕 상실, 나태함, 무의식적인 자기 학대와 파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이들의 태업 역시 자신을 훈계하는 나이 든 어른에게 쌍욕을 하며 대드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학대자에 대한 반항의 한 형태이지만, 태업이 반항보다 예후가 더 나쁘다.”(280쪽)

"사람은 본성적으로 선하다. 현대인이 권위주의적, 대세추종적, 쾌락지향적, 시장지향적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아직까지는 그들 중 다수가 악마가 되지 않은 것은,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 인간 본성이 고통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사람은 선을 택한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악성 정신병자가 되면 더 이상 선을 선택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악이란 곧 정신병이다. 정신 건강을 보통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진정한 악인이 아니므로, 그가 '특별한 이유'와 맞서 싸울 용기만 낸다면 언제라도 선을 선택할 수 있다.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하고 '양심 선언'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용기를 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정신병과 결합된 악인이야말로 진정한 악인이다."(285쪽)

“사람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회적 존재이다. 프롬도 동의했듯이, 사람에 관한 모든 중요한 문제는 그가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파생된다. 사람은 완전한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원할 뿐 자궁 속이나 동물로 되돌아가려는 동기 따위는 없다.”(301쪽)

“인류는 완전한 사회적 존재가 되기 위해 줄기차게 싸워왔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권위주의적, 대세추종적, 쾌락지향적, 시장지향적 성격을 강요함으로써 현대인을 정신적 사망에 이르도록 강제했다. 그리하여 인류는 완전한 사회적 존재가 되기 이해 계속 전진하는가, 아니면 정신적으로 완전히 사망함으로써 파국을 맞이하는가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프롬의 착각과는 달리 인류의 싸움은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동물 대 사람’의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현대 자본주의를 변혁하려는 ‘다수’와 인류를 멸종 위기로 몰아붙이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를 사수하려는 ‘소수’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302쪽)

“만약 사람을 사람으로서 사랑하지 못한다면, 즉 인간 본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그의 인간 본성을 파괴하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대인들 사이의 사랑이 빈번하게 서로를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우선 상대방의 부와 성공을 사랑한다. 상대방을 상품으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사코 우기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다.”(310쪽)

“이렇게 현대인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박탈한 첫째가는 범인은 병든 사회이다. 병든 사회는 현대인을 권위주의적, 데세추종적, 쾌락지향적, 시장지향적 성격자로 만듦으로써 그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박탈한다. 그 결과 현대인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고, 점점 더 병적인 사랑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현대인은 더 이상 인간 본성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가 아니므로 사랑의 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 본성이 억압되지 않은 사회적 존재의 능력이므로, 한두 가지의 심리적 특성이나 기술 계발로는 사랑의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연애 특강을 통해 사교술을 제아무리 익혀도 사랑의 능력이 생기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의 능력은 오직 전체 심리를 변혁해 완전한 사회적 존재를 향해 나아갈 때에만 가질 수 있다. 프롬이 <사랑의 기술> 서문에서 말하려고 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다.”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프롬의 충고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도 유효하다. 사랑은 기술이자 능력이다. 따라서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당장 ‘사람에 대한 지식, 즉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부터 배워야 한다. 또한 사랑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완전한 사회적 존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316쪽)

“인간 본성을 실현하면서 살아가야만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으므로 사람에게는 인간적 목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프롬은 인간적 목표를 ‘참된 이상’으로, 비인간적 목표를 ‘거짓된 이상’으로 표헌하기도 했다. 인간적 목표, 즉 참된 이상은 ‘자아의 성장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촉진하는 목표’이다. 반면에 비인간적 목표, 즉 거짓된 이상은 ‘주관적으로는 매혹적인 경험이면서도 실제로는 삶에 유해한 강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목표’이자 ‘병적인 목표’이다.
그렇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사람답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쾌락을 위해서, 그리고 밥그릇을 위해서 살다가 죽으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쾌락을 위한 삶, 밥그릇을 위한 삶은 사람에게 그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 참된 행복도 주지 않는다.”(329쪽)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계를 이어야 하는 단 하나의 목적 때문에, 자기에게는 어떤 이익의 분배도 돌아오는 것이 아닌, 그리고 어떠한 흥미 없는 물건을 만드는 데 자신의 신체 능력이나 지적 능력의 일부분을 고용자에게 팔아넘기고, 소비자로서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한다. 불만족, 권태, 즐거움과 행복의 상실, 삶의 허무감 등은 이런 데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다.(프롬)”

“프롬은 미국의 심리학자들처럼 애매모호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왜 사회주의여야 하는가?>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사람의 참 행복과 인생의 의미는 세상에 기여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인생을 짧고 위험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회에 공헌할 때에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아인슈타인)”(330쪽)

“프롬은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서는 건강하고, 즐겁고, 독립적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세상에 대해 생산적인 관심을 가지고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만이 두 발로 땅에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사람은 오직 사회, 세계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고 살아야만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조상 대대로 우리 한국인들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쳐왔던 것,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나믹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은 남긴다’는 격언의 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331쪽)

“현대 자본주의가 인류를 멸망의 문턱으로 이끌어가고 있는데도 ‘인류의 생존을 위한 진지한 계획은 전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인류는 인간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만 한다. 그것만이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변혁되어야 하는 까닭은 윤리적, 종교적인 요청이나 현대사회이 병적인 특성에 기인한 심리학적인 요구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프롬)”(342쪽)

“프롬은 현 체제 내에서 정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정신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정신 혁명에 도움이 된다.
1)우리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안다(사람이 병들어 있음을 자각한다.)
2)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있다(인간 본성을 유린하는 병든 사회가 불행의 원인임을 안다.)
3)우리는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음을 인정한다(사회 혁명과 정신 혁명을 병진하되 우선은 정치 혁명에 집중한다.)
4)우리는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생활 습관을 바꾸어야 하며 어떤 생활 규범을 따라야 하는지 안다(권위주의적, 대세추종적, 쾌락지향적, 시장지향적 성격에 기초하는 삶에서 벗어나 인간 본성에 맞게,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346쪽)

“사람은 권력과 자본의 주인이 됨으로써 최상의 높이에 있어야 하고, 이웃과 공동체를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양심적으로 살 때 가장 높은 사회적 평가를 받아야 하고, 모든 허위와 불의를 비판하고 마음껏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고, 사람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보장받음으로써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 인본주의는 ‘모든 사회경제적 조치에 있어서 최상의 가치’는 ‘인간’이고, ‘인간의 탄생을 완성시키고 인간의 인간화를 완성시키는 것’을 역사적 목표로 한다. 그것은 사람 중심의 세상을 만듦으로써 사람의 최상의 높이로 발전시키자는 사상인 것이다.”(347쪽)

“건전한 사회는 정치혁명이 성공한 다음에도 자연 개조, 사회 개조, 정신 개조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동시적인 변혁을 줄기차게 추진해야만 건설 가능하다. 생산력의 발전, 민중 정권의 공고화와 발전, 만인의 개성화가 모두 충족되어야만 비로소 사람은 완전한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한 분야에서만 변혁이 성공하고 나머지 부분이 정체한다면 건전한 사회를 건설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의 통합적인 진보는 한 발자국에 지나지 않더라도 고립된 하나의 영역에서 백 걸음을 나아가는 것보다 인류의 진보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고 오래 지속된다. 수천 년에 걸친 ‘고립된 진보’의 실패에서 인간은 보다 확실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프롬)"(355쪽)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즉 다수의 민중이 완전한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백약이 무효다. 제아무리 좋은 민주주의 제도에서도 우민은 올바른 투표를 할 수 없고, 제아무리 좋은 경제제도에서도 우민은 노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사회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주체성과 자발성이 필수적이므로 자연 개조, 사회 개조, 정신 개조, 문화 개조 등을 동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프롬은 이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경제, 사회, 정치, 문화의 각 분야에서 동시에 변화가 일어난 때라야만 진보가 있을 수 있으며 어느 ‘하나의’ 분야에 국한된 진보는 ‘모든’ 분야의 진보를 파괴한다.(프롬)”(364쪽)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는 최저생계비 제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즉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존재이고 모든 인류는 한 형제이자 가족이라는 인간관이다. 이런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큼은 주판알을 튕기지 않는다.
사회는 마땅히 사람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가능하다면 자본주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도 괜찮다. 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하다면, 인류는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386쪽)

“열 명의 의인만 있다면 인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조차도 없다면 인류는 결국 멸망할 것이다. 나는 프롬이 지적했듯이, 열 명의 의인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물건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다가올 세상은 인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인류는 21세기에 다시 살아나 사람이 원래 있어야 할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389쪽)

[ 2015년 11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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