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화의 웃기고 자빠졌네
김미화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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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먼 전설이 되어버린 god의 거짓말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가사가 이렇다.

 

  미안해 난 네가 싫어졌어 우리 이만 헤어져 다른 여자가 생겼어 너보다 훨씬 좋은

  실망하지는 마 나 원래 이런 놈이니까 제발 더 이상 귀찮게 하지마

  그래 이래야 했어 이래야만 했어 거짓말을 했어 내가 내가 결국 너를 울리고 말았어

  하지만 내가 이래야만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을 모두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내 맘을 내 결정을 어쩔 수 없음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날 떠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너무나도 잘 알기에 어쩔수 없어 널 속일게 미안해 널 울릴게

  잘 가 (가지마) 행복해 (떠나지마) 나를 잊어줘 잊고 살아가줘 (나를 잊지마)

  나는 (그래 나는) 괜찮아 (아프잖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떠나가 (제발 가지마)

  왜 자꾸 날 따라와 싫다고 했잖아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몇 번 말했잖아

  너 자꾸 이러면 나 이제 정말 화낼거야 제발 너도 다른 사람 찾아

  왜 자꾸 이러니 왜 자꾸 날 힘들게 하니

  네가 자꾸 이러면 내가 널 떠나 보내기가 힘들잖니

  내가 어디가 좋니 이렇게 매일 고생만 시키잖니

  그리고 너 정도면 훨씬 좋은 남자 얼마든지 사귈 수 있잖니(싫어 싫어)

  정신차려 바보야 정신차려 제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제 네가 정말 싫어

  그러니 제발 돌아가 제발 저리가  난 네가 싫어 네가 정말 싫어

  잘 가(가지마) 행복해 (떠나지마) 나를 잊어줘 잊고 살아가줘(나를 잊지마)

  나는 (그래 나는) 괜찮아 (아프잖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떠나가(제발 가지마)

  잘 가 (가지마) 행복해 (떠나지마) 나를 잊어줘 잊고 살아가줘(나를 잊지마)

  나는 (그래 나는) 괜찮아 (아프잖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떠나가(제발 제발 가지마)

  잘 가 행복해 나를 잊어줘 잊고 살아가줘(나를 잊으면 안돼)

  나는 (그래 나는) 괜찮아 (아프잖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란다. 노래 가사 안에 담겨진 그 상황과 마음의 불일치를 어떻게 저렇게 잘 표현했을까 싶어서이다. 미치도록 아픈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경험이 한번은 있을 것이다. 겉으로 꺼내는 말이 전부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뜻을 찾아내지 못하고 그저 말하는대로 믿는 사람은 솔직하고 순진한 사람이라아 연애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잘가라는 말, 괜찮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듣는 사람은 괄호 안에 담겨진 그 의미를 죽었다가 깨어나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god의 거짓말이 떠올랐다. 평생 코미디언으로 살고 싶다는 김미화씨가 당한 작금의 현실이 그녀로 하여금 코미디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법원에 집중하게 만들고, 색깔론에 휘말리게 만든다. 본인은 웃기고 싶지만 그를 둘러싼 현실이 웃기다. 그것도 유쾌한 코미디가 아니라 카카오 60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한 블랙코미디다.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제목이 내게 이런 말을 던지는 것 같다.

 

  "이게 웃겨?"

 

  나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게 웃깁니까? 코미디언이 코미디에 집중하지 못하고 법정 다툼에 몰두해야 하는 상황이 웃깁니까? 방송국에서 사회보라고 해서 사회를 봤는데 그걸 가지고 친노니,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것이 웃깁니까? 몇몇 연예인들을 콕 집어서 출연시키지 말라는 상황이 웃깁니까? 국정원 직원이 한낱 코미디언을 사찰하는 것이 웃깁니까? 대통령과 김미화의 공통점이라곤 정기적으로 벙커에 들어간다는 것밖에 없는데 왜 자꾸 둘을 엮어서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하는지? 김미화의 트위터를 보면서 기사를 양산해 내는 메이저 신문이 웃깁니까? 대통령 당선자에게 반말했다고 개그 프로그램을 폐지시켜 버리는 것이 웃깁니까? 썩소도 미소하고 볼수 있다면 기묘하게 틀어져 있는 상황이 웃기기는 하겠다.

 

  난 연예인들이 공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도 직장인이고, 개인의 정치적인 의사를 표현한 자유가 있다. 그 자유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고 해서(그것이 반인륜적이어서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제재를 받는다면 그 상황이 어찌 제대로 된 상황이겠는가? 웃기는 짬뽕이요, 웃기는 짜장이 아니겠는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방송 장악...너무 거대담론만 말하다보면 논점이 흐려진다. 개인의 일상 생활이 가려진다. 그렇게 가려진 이야기들이 밖으로 조금씩 표출된 것이다. 이렇게 표출된 이야기들이 너무 불편해서 애써 외면한다, 그러면서 나는 아닌척 한다.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묻는다. 이게 웃깁니까? 평생을 코미디에 매진했던 김미화는 드디어 예술가의 반열에 오른 것 같다. 무슨 예술가냐고?

 

  "행...위...예...술...가!"

 

  이 또한 웃기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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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3-1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예인은 준공인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공인인거죠. 서글프게 웃기네요. 코미디언이 코이디언다울 수 없고, 리더가 리더답지 않고, 법조인이 법조인답지 못한 나라의 현실이란게 참 말이죠. 사실 민형사를 떠나서 무조건 고소하는건 판사차원에서 막아주어야하는데 (벌금을 물리고 심하면 감옥에 보내야할 일이죠, 고소남발은 엄밀한 의미에서 국민의 세금과 국가자원의 낭비니까요) 그럴 의도도 능력도 의식도 없는 한국의 현실은 참 답답합니다.

saint236 2013-03-10 12:52   좋아요 0 | URL
그러면서 항상 하는 이야기가 미쿡에서는 입니다. 저처럼 미쿡 안갔다온 사람은 이걸 믿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합니다.

transient-guest 2013-03-12 03:52   좋아요 0 | URL
자기들이 편할때만 '선진국'운운하지요. 정말 좋은 제도는 굳이 들여오지 않는거에요. 자기들이 불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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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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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섭이 대세다. 과거에 간학문, 학문간의 대화라는 말을 통섭이라는 세련된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이 어느날 갑자기 뚝떨어진 것은 아니다. 과거 학문이 오늘날처럼 세분화 되기 전에는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과학자 안에서 이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우리가 과학의 대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철학과 인문학, 예술과 같은 일에도 조예를 보였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과학자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철학자나 예술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수도 있다. 대가들 안에서 과학과 인문학이, 철학이, 그리고 예술이 정리가 되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서 전혀 새로운, 그리고 놀라운 이론과 업적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이 더 발전할수록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세부적으로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물리와 화학이, 생물학이 구분이 되기 시작했고, 각 분야도 여러가지로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똑똑한 바보들이 양산되기 시작됐다. 자기 분야에서는 천재적이라 할 수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학의 세분화는 일반과 과학의 괴리까지 불러오기 시작했다. 과학은 머리아픈 학문, 혹은 천재들만 하는 학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호기심이 사라진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과거 어린 시절에 카메라, 시계 수도 없이 뜯었던 기억이 있다. 그냥 궁금했다. 이게 왜 찍히지? 이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지? 뜯은 다음에 재조립 하지 못해서 버렸던 시계도 한두개가 아니며 이 때문에 부모님께 혼났던 것이 얼마던가? 나중에는 비디오, 카메라, 텔레비전까지 관심을 넓히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서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원리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 그 모습 그대로 성장했다면 과학자가 아니면 고물상 둘 중에 하나는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전제품을 뜯어보는 장난들을 통해서 과학이란 우리의 삶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도, 마법처럼 신비로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었고, 일상과 과학이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나가면서 신기한 물건을 보면 저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것일까, 저 건물에 실린 하중은 얼마나 할까 등등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는데 요즘 아이들의 대화는 조금 다르다. 호기심과 경이감은 사라져 버리고, 얼마일까, 신제품이네라는 생각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다. 과학적 사고의 출발인 호기심은 이미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아마 이런 위기의식이 이 책을 의도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과학이란 일상과 괴리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건물, 가전제품, 심지어는 장난감에도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혹은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서 서로에 대해서 자극을 주어 창의력을 계발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시도는 실패로 보인다. 똑똑한 놈 둘이 만나서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그것을 지켜보는 일반인들까지 그 이야기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풀어줘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대담집이라는 특성답게, 더군다나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여러가지 대화의 주제를 가지고 행해졌던 대담들을 모아 놓은 책답게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책장은 넘어가지만 계속 내가 왜 읽고 있을까라는 의문만이 들 뿐이다.

 

  대체로 이런 대담집이 지니는 한계일것이고, 더군다나 과학이라는 조금은 딱딱한 내용을 주제로 다룬다면 그 한계는 더 분명해질 것이다. 각 장별로 다루고 있는 내용도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기보다는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루다가 지나가버린다. 결국 사이언스 이즈 컬쳐라는 제목이 전하고자 한 과학과 문화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은 사라져 버리고, 과학자와 문화 쪽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노가리만 남았다. 제목만 좋은 책이랄까?

 

  알라딘 서평단을 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울 때가 이런 때다. 원하지 않는 책인데 읽고 서평을 써야하니 시간도 못지키고, 충실도도 약하고... 솔직하게 별 하나도 아까운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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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3-0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은 그냥 과학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목이 화려할수록 외면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 그래서 놓치는 책들도 많을겁니다. 하지만 본질은 따로 있고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노가리만 남았다는 saint님 말씀에 공감부터 가는걸요.

saint236 2013-03-06 22:44   좋아요 0 | URL
정말 노가리만 남았습니다.

transient-guest 2013-03-10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는 요즘 특히 한국에서는 조금 과도하게 인용되고 회자되는 느낌입니다. 사실 이분은 꾸준히 같은 얘길 계속 해왔는데 말이죠. 과학이야기에도 이용되는줄은 몰랐네요.

saint236 2013-03-10 12:54   좋아요 0 | URL
아무 곳에나 촘스키를 가져다 붙이고 세일즈를 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22장*2이면 44명의 대담자인데 그 중 한명인 촘스키를 저자로 떡하니 내세운 것은 다분히 불순하다고 하겠죠...

transient-guest 2013-03-12 03:52   좋아요 0 | URL
제가 그렇게 속아서 산 책이 있어요. 촘스키처럼 어쩌고였나?ㅎㅎ 보다가 말았습니다. 촘스키스러운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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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책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역시 공지영이라는 감탄사를, 어떤 이들에게는 빨갱이라는 색깔론을, 어떤 이들에게는 쌍차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책이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책가운데 이정도로 파장을 일으킨 책이 몇권이나 될까? 그것도 문학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말이다. 그뿐이겠는가? 이 책을 더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바로 저작권 문제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덮고 가야한다는 쪽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양쪽이 팽팽하게 맞섰다. 난 아직까지도 도대체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 다만 공지영씨가 조금만 더 민감하고 겸손하게 반응했더라면 좋지 않았게나 싶다. 어찌되었거나 공지영씨는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상위 클래스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공지영씨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더 느긋하게, 조금만 더 여유있게 반응했었더라면 이 문제로 소모되었던 에너지를 쌍차 해고자들에게 더 실어 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냥 아쉬워서 하는 말이다. 쌍차 문제가 아닌 저작권 문제로 시끄럽게 되면서 난 이 책을 읽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아마 그 문제가 그렇게 크게 불거진 것은 논점을 흐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풀린 것은 아닐까라는 소설을 써본다. 그 문제로 이 책을 읽기를 주저하거나 혹은 포기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책 가방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만지작 거리던 책을 당구장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는 사이에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구, 골프, 야구와 같이 작은 공은 절대로 가지고 않겠다는 쓸데없는 똥고집을 가지고 있는 내가 당구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독서와 후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당구장에서 준 음료수를 축내는 것밖에 없었다. 옆에서 친구들이 2:2로 당구를 치고 있을 때 지루해진 나는 의자놀이를 폈다. 그리고 정확히 20초 후 천장을 바라보면서 눈을 심하게 깜빡거렸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얼마나 당황스러운 시츄에이션이겠는가? 친구들이 옆에서 당구치고 있는데 30중반의 남자가 당구장에서 책을 읽다가 눈물을 뚝뚝흘린다면, 그리고 펑펑 울어버린다면.. 이틀동안 열심히 읽었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쌍차 해고자들의 삶과 고통이 손에 잡힐듯 했다. 당장이라도 대한문으로 달려가 함께 울고 싶었다. 물론 아직까지 대한문에 못나갔지만 그렇다고 쌍차에 대한 내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에 대한 내 관심이 더 깊어져 가고 있다. 쌍차라는 말만 나오면 유심히 기사를 살펴본다.

 

  의자놀이라는 제목이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감이 있으니 공지영이라는 작가의 책이 대중에게 읽히는구나 싶었다. 쌍차의 상황을 이렇게 정확하게 비유하고 있는 단어가 또 어디있겠는가? 어릴적 누구나 다 한번씩 해봤던 놀이다. 사람수보다 한개씩 의자를 적게 놓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의자 주위를 돌다가 사회자의 신호에 맞추어 자리에 앉는다. 자리가 없는 사람은 탈락이다. 사회자가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놀이를 진행한다. 최후의 승자는 사회자로부터 아주 소소한 선물을 하나 받고 박수를 받으면서 게임이 끝이 난다.

 

  이 게임을 가만히 뜯어 보면 게임을 유지하는 룰이 상당히 불합리하다는 것을 느낀다.

 

  먼저 사회자를 살펴보자. 세상의 어떤 일이든지 리스크를 가지고 있다. 다만 리스크가 미미하냐, 커다랗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게임을 진행하고 탈락자를 설정하는 사회자는 그 어떤 리스크를 가지고 있지 않다. 탈락의 위험도 없고, 심지어는 주변을 도는 수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떤 사람을 아웃시킬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사람들의 행위와 분위기를 보면서 탈락시키고 싶은 사람에게 불리한 타임에 신호를 줌으로 그 사람이 안고 있는 탈락의 리스크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의 참가자들은 오로지 사회자에게 집중하고 사회자의 신호에 일사분란하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즉 사회자는 그 어떤 리스크도 없이, 그 어떤 수고도 없이 게임을 지배한다.

 

  쌍차 해고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투쟁의 대상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힘을 휘두르고, 룰을 지배하는 사회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그 어던 리스크도 감당하지 않는다. 리스크가 무슨 말이냐? 오히려 그 위기 속에서도 절대적으로 이익을 추구한다. 결국 모든 리스크와 비용은 게임처럼 사회자가 아닌 가장 큰 피해자들이 탈락한 순서대로 감당하게 된다.

 

  다음으로 게임이 진행되어 갈수록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이 심화된가는 것이다. 10명 중에 한명을 탈락시키는 것은 그렇게 큰 경쟁이 아니지만 의자의 숫자가 줄어갈수록, 의자의 갯수를 줄여가는 사회자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함게 의자 주변을 도는 이들을 적으로 간주해 버린다. 함께 멈추어서 게임 끝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파블로프의 개처럼 사회자의 신호에 무비판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반응해 버린다. 만약 의자가 아닌 총이 주어졌다면 기꺼이 그 총을 상대방에게 겨누고도 남았을 것이다. 산자와 죽은자로 편을 가르고 사측에서 노측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 구사대 등이 그러한 모습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큰 리스크를 안고 게임의 승자가 된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이 고작 껌이나 사탕같이 소소한 것들, 커봐야 문화상품권 한장 정도라는 것이다. 내 친구들의 엉덩이를 밀어내고 넘어뜨리면서까지, 매 단계마다 살아남았다는 희열을 맛보면서 가슴을 졸인 결과가 고작 그 정도라는 것이다. 쌍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은 것이 무엇인가? 사람도 잃고, 긍지도 잃고, 평화도 잃었다. 이웃도 잃고 공동체도 잃었다. 대신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더 열악한 작업환경, 삭감된 월급통장, 마을 주민끼리의 반목과 갈등이 아닌가? 그들이 목숨걸고, 친구들과 친지들까지 잃어가면서 지키려고 한 것이 인상된 월급도 아닌 동결 혹은 삭감된 월급이요, 복지였던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바락바락 애쓰면서 경쟁을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찌 해야하는가? 당장 게임을 멈추고 룰을 개정해야 한다. 의자에 앉지 못한 이에게 칼락이 아니라 1분간 퇴장시킨다고 생각해 보자. 1분이 지나고 나면 퇴장자가 다시 게임으로 복귀한다. 소위 말하는 패자부활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회자도 게임의 일원임을 이해시키면서, 리스크를 분담하도록 해야 한다. 주어지는 상도 한 사람에게 줄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준다든지, 혹은 그러한 상 자체를 없애버리든지 하면 오히려 더 긴 시간동안 게임이 진행될 수가 있다.

 

  "다같이 죽자는 말이 아니라 다같이 살자는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다. 다같이 죽는 것도, 일부의 희생을 대가로 일부가 살아남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함께 생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다수가 조금씩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이 가능하도록, 그리고 지속되도록 다수가 조금씩 양보할 수 있도록 룰을 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와락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연대한다. 다같이 살기 위해서 룰을 바꾸려고 애를 쓴다. 여기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 대한문을 가는 것도 좋고, 쌍차를 위해서 식사 한끼를 찾아가서 먹는 것도 좋겠고, 십시일반으로 모급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같이 살기 위해 룰을 바꾸려는 연대, 그 연대가 24번째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젠 의자를 그만 치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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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2-20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쌍용자동차 같은 문제는 말씀처럼 패러다임 자체를 고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노사분규도 결국은 같은 시스템, 같은 원리안의 이슈니까요. 다만 현대기업구조에서 과연 그런 방법이 도입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공지영 작가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죠. 개인적으로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인 문제에 참여하는 의식만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saint236 2013-02-20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겠지요. 이익 추구가 최우선인 기업의 속성상 반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더 크겠지요. 그렇지만 이대로는 안된다는 공감이 형성된다면 새로운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까요? 아니요.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녀 세대들은 어떤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박근혜 후보가 당선이 되고 난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높은 곳으로 계속 올라가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세실 2013-03-0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씨 팬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의식있는 작가도 필요하죠. ㅎㅎ
작년에 태풍이 한참 심할때, 공지영 의자놀이 북 콘서트인가 갔다가 얼굴만 보고 내려온 적 있습니다. 집에 오지 못할까봐 많이 무서웠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아쉽네요.

saint236 2013-03-03 16:4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전 북콘서트에 한번도 가보지 못해서 어떤 스타일로 진행이 되던가요? 꽤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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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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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정부 들어서 최고의 히트어가 무엇일까? 어록이 너무 화려해서 어느 하나를 꼽는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하나를 뽑자면 멘붕이 아니겠는가? 멘탈붕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것은 아마도 지난 총선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그 이후로 멘탈붕괴 줄여서 멘붕이라는 말은 젊은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되었다. 위키백과 사전에는 멘붕이라는 말이 이미 등재되어 있고, 거짓말 조금 보탠다면 국어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을까 싶다. MB정부의 이니셜과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정치 행태를 잘 반영한 말이 아닐까 싶다. 멘붕이란 말이 조금 어려운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일컫는 말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총선은 그렇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도 대선이 있으니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대선을 겪고 보니 회복이 쉽지 않다. 박근혜가 됐다는 사실만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1500만이나 넘는 사람이 박근혜를 찍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다. 1500만이라는 숫자 앞에서 난 멘붕을 경험했다. 이 멘붕 상태는 쉽게 회복이 되지 않는다. 가끔 한 숨이 나오고, 앞으로 5년은 어지 살아야 하나라는 걱정은 손톱 밑의 가시처럼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 정치권에서 여러가지 분석이 나오지만 그 분석이라는 것이 반성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대안도 아닌 것이 어정쩡하다. 민주당의 문희상 체제를 보면서 언제적 문희상이냐는 한숨과 존재감마저 희미해져 버린 진보정당들을 보면서 멘붕상태가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멘붕을 경험했다. 곳곳에서 멘붕을 회복하지 못한 농성자들이 뛰어내렸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뛰어내릴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 암울하다. 우리의 살림살이는 얼마나 더 나아지게 될 것인가? 한국은 복지국가가 아니라고, 아직 한국은 멀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뭐라 위로를 해야할까? 힐링캠프? 힐링버스? 곳곳에서 힐링이라는 말은 넘치는데 실제로 와 닿는 것은 없다.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인가?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다. 눈물닦고 스피노자! 스피노자와 눈물닦는다는 말이 어떻게 연결이 될까? 철학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는 있는 것일까? 300여년 전의 스피노자의 사상이, 그것도 철학이라는 복잡한 인문학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설령 위로를 준다고 해도 스피노자의 생각을 우리가 쉽게 알아들을 수는 있을까? 이 또한 허울좋은 아는 사람들만의 이슈파이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와 걱정을 가지고 책을 한장씩 넘기기 시작한다. 책임감과 부담감을 가지고 책을 넘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시간내에 서평을 작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사라지고 제목대로 멘붕된 내 마음이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1500만이나 넘는 사람이 박근혜를 찍은 이유가 무엇일까? 내 멘붕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박근혜 당선의 최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50대는 박정희 시절을 살아본 사람들일텐데, 그것도 기성세대가 아닌 변혁을 꿈꾸는 젊은 세대로서 살았던 사람들일텐데 박근혜를 찍은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인의 정치적 수준이 그정도라서? 대선이 끝나고 난 다음 처칠의 명언이라면서 떠 돌았던 말은 분석이라기보다는 상처난 자기 몸에 소금을 뿌리는 자학일 뿐이었다. 나름대로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봤다. 정치적인 문제들,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들이 바보라서, 정치적인 수준이 낮아서, 학력이 낮고, 편파적인 언론과 미디어에 노출이 되어서?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박근혜를 찍은 것은 스피노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속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은 유혹이 강하다. 어딘가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유를 누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꽤 용기있는 일이다. 당장 스피노자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부유한 아버지로부터의 상속받을 유산을 포기했고, 학문의 자유를 위해서 하이델베르크의 교수직을 포기한 스피노자의 삶은 유리를 깎아서 살아야할 정도로 궁핍했다. 게다가 그는 유리를 깎는 그의 생업 때문에 마신 유리 가루로 인해 진폐증에 걸려 40대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는가? 이렇듯 예속하지 않고 자유를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꽤나 고단한 일이요, 용기있는 일이다.

 

  경제가 불안해지고, 정치가 불안해지고, 공동체가 깨어지고 관계가 단절되면서 사람들은 어딘가에 기댈 곳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유로운 개개인의 연대라는 어렵고도 고된 인생보다는 절대 권력에 예속되어 그 속에서 보호를 받고자 하는 욕망이 발동된 것이 아니겠는가? 박정희라는 절대 권력에 자신을 예속시킴으로 이것이 구원받는 길이요,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사고체계가 이번 대선 가운데 가장 불안함을 느끼는 50대에게 나타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렇다면 큰 오판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예속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은 권력과 불안, 파편화된 존재들을 낳는 것이지,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관계망을 형성시키지도 못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지도 못하며, 위로를 주지도 못한다. 물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길러내지 못한다.

 

  스피노자의 지적을 받으면서 MB시대의 보통의 정서가 어떤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파편하, 예속화, 권력의 사유화, 실망, 절망, 외로움, 분열, 자기 욕망의 잘못된 투영과 상대방을 통제하려는 잘못된 욕망이 우리 안에서 이미 일상이 되어버렸다. 상대방의 역능을 고양시켜주는 사랑의 관계는 깨어진지 오래고, 만인의 만인의 대한 투쟁의 관계 속으로 우리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이웃조차 밀어넣었다. 얼리버드 신드롬으로 시작한 지난 5년은 철저하게 관계를 깨버리고, 상대방을 파편화하였으며, 불안하게 만들었다. 오늘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면서 누군가 뛰어내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변용?(난 이것을 공감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되기가 아니라 이기가 삶의 기본 방식이 되어버렸고, 주인공처럼 아파서 눈물 흘리면서도 누군가에 하소연조차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이런 우리에게 스피노자가 다가와서 조용히 속삭인다. 눈물을 닦으라고. 그리고 삶의 방식을 조금만 바꾸자고. 불안하고 힘든 것은 알지만 이젠 공동체를 회복하자고, 슬픔의 관계가 아닌 기쁨의 관계로 전환하라고. 3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의 손을 잡은 스피노자와의 관계 맺기가 우리에게 작은 혁명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기쁨의 관계 맺기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도 다른 누군가에게 눈물을 닦아 준 스피노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 시대에 스피노자가 참 많아진다면 이 또한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스피노자를 통하여 멘붕을 조금씩 벗어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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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1-24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뉴스를 보니 저소득층에서 특히 많은 표를 받았다고도 하네요. 막말을 하면 역시 못배워서 그랬다고 생각하겠지만, 위의 글을 보니, 그럴수도 있겠습니다. 독재자를 원하는 그 열망 밑바닥에는 누군가가 다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을 수도 있죠. '은하영웅전설'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잖아요. 저는 그저 민주주의의 역사가 짦고 역시 근대시민사회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탓도 있다고 생각해요. 해방이후로 봐도 한 60여년, 군부독재이후부터 보면 이건 30년도 않되니까요. 하루하루 견디고 어떻게 젊은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합니다.

saint236 2013-01-24 12:46   좋아요 0 | URL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나랏님으로 보는 의식이 팽배한 것 같네요. 박정희 대통령은 거의 반신반인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웹서핑으로 박정희 탄신제를 찾아 보시면 재미있는 내용들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 같습니다. 박정희를 향수라고 하는데 전 향수라기보다는 종교고, 스스로 예속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습니다.

transient-guest 2013-01-25 07:11   좋아요 0 | URL
사당을 짓고 박정희/육영수 사진을 크게 걸어놓은 그곳에서 업드려 절하고 향 피우고 소원빌고 있는 사진을 봤습니다. 구미던가요? 우상숭배도 그런 우상숭배가 없더군요.

saint236 2013-01-25 08:25   좋아요 0 | URL
그로테스크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진이지요. 게다가 둘의 사진의 복장이 일본 천황가의 복장을 흉내낸 것이라는 것까지 깨닫게 되면 입이 다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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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이란 무엇인가?

 

  언제부터인가 "~이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책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정의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최근에 나온 죽음이란 무엇인가까지... 이런 책들은 대개 강의를 엮은 책들이다. 물론 그 강의도 세일즈가 되어야 하니 유명한 대학의 유명한 강의여야 한다. 내용이 무엇이라는 카피 대신에 하버드대, 예일대, 아이비 리그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이런 뻑적지근한 수식어야 죽음이란 난해한 주제까지 끼어들기 시작하면 그 책은 존재자체로 대단한 미끼가 되어 버린다. 인문학의 냄새를 좀 맡았다 싶은 사람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철학에 살짝 한쪽 발가락이나마 걸쳤던 사람들은, 합리론이 어쩌구, 경험론이 저쩌구 잘 모르면서도 읊어본 사람들은 십중팔구 넘어가게 되어 있다. 물론 나도 팔구 중 하나다. 알라딘 서평단을 통해서 책을 받았기에 다행이지 내 돈을 주고 책을 샀다면 무척 아까울 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것은 아니다. 예일대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했다는 것은 날로 먹었다는 뜻이 아니다. 강의 자체는 꽤 흥미롭다. 논리도 꽤 탄탄하고.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다. 정말로 딱 거기까지다. 그게 이 책을 돈 주고 샀으면 아까왔겠다 싶은 이유다. 혹 눈치 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책에 대한 별점을 꽤 후하게 주는 편인지라 왠만하면 3개는 준다. 이 책이 별점이 3개라는 말은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뜻이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정의란 무엇인가만큼의 임팩트와 고민거리를 던져주지는 못한 것 같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철학책이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알겠지만 미국에서 삶과 죽음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수업이 인기가 있으려면 확실하게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가던지, 아니면 철저하게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하던지. 이 책은 후자다. 영혼의 존재 자체도 부정하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도 쓸데 없는 짓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유는? 그것들을 자신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논리적이라는 전제를 바닥에 깔고 있다.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죽음이란 것도 이원론이 논리적으로 불명확하기 때문에 자신은 논리적으로 클리어한 일원론을 지지한다는 식이다. 책의 서론에 말했던대로 이러한 그의 논점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철학으로 밥벌어 먹고 살만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철학으로 밥벌어먹고 산다는 말이 항상 좋은 의미는 아니다. 논리적이라는 것도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철학자로서 그가 펴는 논리라는 것이 꽤 재미있다. 그는 파이돈의 대목을 가지고 플라톤의 이원론과 그의 논리적인 문제들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일원론의 입장에서 죽음이란 지금 이순간의 문제라는 말을 결론으로 내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이원론의 입장에서 그의 일원론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만 몰입해서 읽다보면 그런가보다, 영혼이란 없는 것이구나 생각하겠지만, 조금만 수고하면 정반대의 논리를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죽음보다 삶에 더 집중해야 한다, 더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게 철학의 재미요, 신비요, 아이러니가 아닐까? 때론 철학자들을 사람들이 보면서 말장난에 능한 사람들, 궤변론자라고 비판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해본다. 과연 이게 옳은가?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이렇게 논리적이어야 하는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죽음에 대해 논리적인 분석이 과연 우리들의 삶을 얼마나 가치있게 만드는가? 죽음 이후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게 아무런 피해나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결론이 죽음에 공포를 덜어 줄 수는 있는가? 철저하게 논리로 무장된 저자의 입장이 나에겐 그다지 큰 매력이 없다. 흥미도 유발하지 못한다. 오히려 반발감만 더 불러온다. 뭐 이런 차가운 사람이 다 있는가? 세련되고 반짝반짝 빛은 나지만 심장은 없는 그런 존재, 세련된 기계를 대하고 있는 기분이다. 물론 저자는 이런 나의 주장에 기계와 인간의 유사성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파했던 부분을 들어서 설득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의 논리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내기보다는 반발감을 더 불러일으킨다. 논리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논리 대신 감정을 우선시해야할 때가 있는데 죽음의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도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구나라는 감정적인 연대가 오히려 문제에 대한 공포과 걱정을 사라지게 하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군에 있을 때의 일이다. 이등병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할 기회가 종종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교욱을 하겠는가? 군생활 잘하라는 교육이다. 그런데 모든 자유를 다 박탈당하고, 화장실도, 피엑스도 혼자 못가는 녀석들에게 아무리 논리적으로 군생활을 잘하라고 설명을 해도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행여라도 탈영하면 영창을 간다, 잘못하면 실형을 살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군생활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 주지도 못한다. 끌려온 녀석들에게 무슨 논리적인 설득이 먹히겠는가? 그냥 그 녀석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면 된다. 논리적인 설명을 해도 안 듣던 녀석들에게 농담처럼 한 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당시 이등병 월급이 1만원이 조금 넘었을 때인데 이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한달에 월급을 간단하게 12000원으로 계산하면 한달에 30일로 계산해서 일당이 400원이다. 하루에 8시간 근무한다면(절대로 8시간이 아니지만 일과 시간만 계산한다면 이정도 된다.) 시급 50원이다. 1시간에 10분 휴식하고 50분 일하면 1분에 1원, 삽질 세번 정도 하면 1분 정도 되니 삽질 세번하고 1원, 삽질 세번하고 1원 이렇게 1원씩 쌓다보면 집에 간다. 이런 이야기들을 풀어가면서 그 녀석들의 박탈감과 공포, 고민들을 함께 나누다보면 의외로 교육 효과가 좋다. 논리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이 편향된 저자의 입장을 아주 충실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래서 책을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저자의 입장에 혹하게 되지만 딱 3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꾸 어쩌라구라는 반발심이 더 커진다. 뭐라도 한마디 뱉어주고 싶다. 기대했던 만큼 배신당했다는 마음,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고민과 생각들! 논리적으로만 풀어나가기엔 역부족이 아닌가 싶다. 물론 논리적으로 풀어질 문제라면 애초에 풀어졌겠지만 말이다. 그저 죽음에 대한 일원론적인 입장의 논리가 이런 것이구나 한번 살펴 보게 된 것으로 만족한다. 주저리 주저리 불평과 궤변만 늘어놓은 것 같아서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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