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 역사, 형식, 이론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1
한스 포어랜더 지음, 나종석 옮김 / 북캠퍼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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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체(政體)가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도 거의 무의식적이다할만큼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다 라고 모두들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가? 하면서 의문점이 꼬리를 남기지 않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과연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시대인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일단 민주주의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너무나 근본적 질문 같지만 혼란스러울 수록 다시 근본부터 차근차근 따져봐야 하니까.

민주주의 시대는 1989, 90년에야 진정으로 시작된 듯 보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주의는 개가를 불렀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모델은 체제 경쟁에서 경쟁자를 물리친 듯 보였으며 많은 이들이 보기에 이데올로기적 논쟁의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 했다. 현실 사회주의 독재가 종식되면서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와 같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홉스봄)로 만든 역사적 대안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개선 행진은 멈출 수 없었다. 민주주의 정부 형태는 몇 차례의 물결 속에서 반대자들에 맞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p. 5) 하지만 이 같은 양상은 최근 퇴색되었다. -서문 中-

'민주주의 정부 형태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이 문장에서 눈길을 끈 것은 과거형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란 얘기, '서문'에서 제시한 몇몇의 사례들 만으로도 그 승리감은 '퇴색된'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가 과연 올바른 방향이었나? [플라톤에 따르면 아티게 민주주의가 그토록 위대했을지언정 소크라테스 한 사람도 감내하지 못했다. 아티케 민주주의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p. 8)]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무엇을 감내하지 못하고 있는가? [고대로부터 제기되어온 오래된 문제가 근대에 새롭고도 더욱 시급하게 떠올랐다. 민주주의란 모든 시민이 정치의 심의, 결정, 집행 과정에 포괄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의미하는가? (p. 11)] 민주주의는 사실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그러니 이제라도 우리는 되짚어 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가'

도시에 독재자보다 더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네.

무엇보다도 그런 도시에서는 공공의 법이 없고,

한 사람이 법을 독차지하여 자신을 위해 통치를 하기

때문일세. 그리고 그것은 이미 평등이 아닐세.

하지만 일단 법이 성문화되면 힘없는 자나

부자나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다네.

그러면 부유한 시민이 나쁜 짓을 할 경우

힘없는 자가 비판을 할 수 있으며,

약자도 옳으면 강자를 이길 수 있다네.

자유란 이런 것일세. "누가 도시에 유익한 안건을

갖고 있어 공론에 부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는 자는 이름을 날리고, 원치 않는 자는 침묵하면

된다네. 도시에 이보다 더한 평등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이 나라의 독재자요?'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탄원하는 여인들]>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18 (<민주주의> p. 17)

위와 같은 테세우스의 웅변에 테바이에서 온 전령은 아래와 같이 군주정에 대한 찬가를 부른다.


(...) 나를 보낸 도시에서는 군중이 아니라

단 한사람에 의해 통치권이 행사되며, 허튼소리로

우롱하며 순전히 제 이익을 위해 도시를 때로는 이리로,

저리로 끌고 다니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 제대로 연설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백성들이 어떻게 도시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겠어요?

지식이란 단기간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지요. 설사 가난한 농부가 멍청한 바보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에 쫓기다 보면 정치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지요. (...)

[에우리피데스는 테바이 전령을 민주주의 비판의 대변자로 삼았다. 인민은 '천민'으로, 민주주의는 선동가와 수다꾼들의 행사로, 평범한 사람은 정치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p. 19)] 테세우스의 말도 테바이 전령의 말도 다 논리적이지 않은가? 이래서 어떤 사상이나 개념에 대한 근본부터 차근차근 짚어보려면 고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는 [하지만 아테나이에 거의 200년 동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주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테바이인의 몰이해로 바뀌지 않는다. (p. 19)] 라고 말하지만 글쎄... 요즘 사람들은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들에 피곤이 쌓인 요즘 사람들은 어느 쪽에 더 마음이 갈까? 나는 왠지 테바이 전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러니 이 시대가 민주주의도 아닌 독재도 아닌 어중간한 폭력의 시대로 변해가고 있는게 아니겠는가... 흉악범죄가 늘어나고 있다는건 그런 죄를 저질러도 아니 그보다 더한 죄를 저질러도 아무 처벌 받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렇다면 나도 혹은 나쯤은 하며 범죄를 저지르는게 아닐까... 범죄의 악순환이 시작된거 같아서 무서운 시대가 되버렸다. 요즘은...

아테나이의 폴리스 집회 민주주의는 의회 민주주의도 아니었고 현대 민주주의국가들과 같은 정당 민주주의도 아니었다. 폴리스 민주주의의 중심에는 논쟁, 즉 숙의 행위를 통한 결정의 저울질이 있었다. 따라서 숙의 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을 통한 그 르네상스가 시사하는 것처럼 21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자기 이해와 작동 방식을 나타낸다. (p. 45)

저자는 민주주의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아테네 민주주의부터 차근차근 설명한다. [아테나이인들이 이해한 평등은 개인적 권리, 특히 인격적으로 이해된 권리의 평등과 동일할 수 없었다. 개인은 아테나이 폴리스의 구성원으로서 정의되었으며 폴리스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했다. (p. 50)] 폴리스 민주주의는 경계가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발전에 이바지하는 많은 조건이 전제되어 있었다. (p. 52)] 수천년전의 정체와 지금의 정체가 '민주주의'로 퉁쳐질 수 있는 게 아님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민주정과 과두정의 결정적 차이는 민주정은 빈민의 지배를, 과두정은 부자의 지배를 반영했다는 데 있다. (p. 57)] 지금 시대가... 과두정인줄 ㅋ 여하튼,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매 시대마다 그 모습을 변형시켜왔다. 하지만 그 어느 시대에서도 최선의 혹은 최고의 정치체제로 인정받지는 못한것 같다. 고대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혼합정체를 제안했다. 민주주의는 태동부터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정체였다. 그러니 고대그리스 이후 민주주의 맥이 끊겼다가 새롭게 다시 등장한 근대 민주주의 시대가 되어서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로마 자체는 민주정이 아니었다. 공화정 시대의 정치에서 시민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로마공화정은 귀족 지배라기보다 과두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p. 60)] 미국은 로마의 공화정을 이은 것처럼 보이던데... 역시 지금 시대는 과두정이었나...ㅋ

공화정은 무엇보다도 제후의 지배와 군주정에 대한 제한 및 반대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그 자체로서 합의에 의해 보호되는 시민 통치라는 중세 말의 이상을 가리켰다. 그것은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에 기반한 통치였다. 한편으로는 군주의 통치를 받지 않고 제후의 군주적 개입으로부터 독립성을 지키고자 하는 자유국가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시민의 자치를 의미했다. 이 두 가지가 자유로운 삶이라는 이상에서 결합되었다. (p. 70)

루소는 폴리스 정통을 이어받았으며 사회계약을 통해 성립되는 자신의 공동체를 '공화국'개념으로 정립했다. 민주주의 개념의 역사에서 아이러니는 이처럼 근대 민주주의를 확립할 때 민주주의가 실제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p. 75)

[르네상스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 뿐만 아니라 특히 표현 예술을 통해 이미 낡은 세계상을 뒤흔들어놓았고, 개인을 그의 자연적, 정치적 환경의 형성자로 보는 새로운 이해의 단초를 마련했다. (p. 81)] 민주주의 발전사에서도 르네상스는 획기적 변혁의 시점이었다. [모든 정치 질서, 특히 민주적 질서는 이제 개인과 그 자유의 관점에서 사유되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개인들의 다양한 이해 관계와 가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숨겨져 있었다. (p. 82)] 그랬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 관점에서만 다뤄질 수 없었다. 바야흐로 상업의 시대가 오고 있었고 그렇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로 함께 설명되어질 수밖에 없는 시대로 되어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이제 그 경계가가 불분명해 보인다...

북아메리카에는 아테나이의 모범에 기초한 집회 민주주의인 '순수 민주주의'가 아니라 온건한 대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다른 체제가 확립되어야 했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온건한 옛 공화주의 전통 안에 서 있었다. (p. 95)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공동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직접적인 인민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의제 기구와 '이중으로 안전한' 수직적, 수평적 권력분립 체계를 통해 해결하려 했다. '야망을 상쇄하기 위해서 야망이 만들어져야 했다.' (p. 98) 연방주의자들은 견제와 균형의 체계, 즉 연방 수준 개별 기관들 사이의 그리고 연방 국가와 연방주들 사이의 권력 억제와 권력 균형의 체계를 고안했다. (p. 100)

겉으로만 봐서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의 정치체제가 다 비슷비슷해 보였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연방제는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 민주주의 역사를 훑어오는 이 책에서 미국의 연방제가 왜 그런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역시나 역사를 알아야 정치든 철학이든 경제든 뭐든 역사를 통해서야 이해가 된다. 미국 뿐만 아니라 선진국?!의 대표격이라 할만한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민주주의 변화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나라별로 살펴보니 이또한 역시 케바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민주주의라고 하나로 그저 퉁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코뱅의 '덕'의 테러는 독일의 많은 사람이 프랑스식 급진적 민주공화주의와 거리를 두는 이유가 되었다. 독일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p. 112) 독일에서는 공화주의를 반군주정 통치의 한 형식이 아니라 개혁적이고 합법적인 정부 운영 방식으로 이해하는 길이 구상되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칸트는 '진정한 공화주의'의 합법적 정부와 전제정치 사이의 오래된 구분을 다시 채택한 급진적 민주공화주의의 완화된 버전을 표명했다. (p. 113)

미영프에 이어 독일에서의 민주주의가 설명되어질 때 저자가 독일학자라서 그런건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관계가 구성적이었지만 독일에서는 그것이 해체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 특징적이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에는 법치국가가 있었지만 민주주의는 없었다. 독일 신민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누렸지만 국가권력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p. 119)] 독일에서의 민주주의가 따로 다루어져야 했던 이유는 히틀러라는 독재자의 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변화를 독일은 보았다. 그 장단점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바이마르헌법은 위기에 대비하여 대통령 독재의 예비 헌법을 준비해두었다. 이러한 대통령식 해법은 반의회적이고 반정당 국가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위기 시 정부를 구성하는데 주요 의회 정당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p. 125)] 나라를 자꾸 위기에 처해있다고 설파하는 대통령은 그렇게 독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도 맨날 위기라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ㅎㄷㄷㄷ

민주주의가 정당 민주주의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사회문제의 정치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정당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갈등 상황을 정치체제 수준에서 묘사한다. (p. 12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의 민주주의국가들은 장기적으로 안정화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에 기여한 것은 유럽 분할의 결과로 서유럽 자유민주주의와 동유럽 사회주의, 공산주의 독재 사이에서 발생한 거대한 권력과 안보의 갈등이었다. (p. 137)

서구 민주주의국가들은 20세기 후반에 경제적, 정치적 주변 조건들을 통해 진전된 내적, 제도적 안정성을 발전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생활방식, 가치관, 정치적 방향을 둘러싼 상당한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고 예전에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었던 문화적, 인종적, 소수자들을 통합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 문화적 역동성도 발전시켰다. (p. 140) 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수용된 정부 형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양식이 되었다. (p. 141)

안정화된 서구의 민주주의는 사실 반대편의 불안정한 체제들의 덕을 보고 성장한 셈이었다. 민주주의는 정부 형태일 뿐만 아니라 생황양식이 되었지만 이러한 민주주의에는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고대그리스식 민주주의에 필요한 전제조건과 다를지라도 조건은 필요했다. [안정적이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는 사회에서의 다원성, 문화에서의 다양성 그리고 경제에서의 경쟁이다. 이 사회 영역들의 광범위한 자율성, '국가로부터의 거리' 역시 자주 언급되고 있다. (p. 153)] 하지만 요즘 시대는 어떤가? 다원성, 다양성, 공정한 경쟁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세계화'는 자국의 경제를 더욱 봉쇄화 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인터넷발달에 따른 무분별한 미디어의 정보들은 더욱 시대적 위기를 커지게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위기일까?' (p. 184)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1947년 11월 11일에 하원 연설에서 했던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주의는 모든 정부 형태 중 최악이지만 그보다 나은 형태도 없다"

민주주의가 차악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매우 많은 장점을 겸비하고 있기에 알려진 최선의 지배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p. 194)

[시민이 정치체제 자체를 제거하지 않고도 통치자를 제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지배 형태가 민주주의이다. (p. 196)] 라는 저자의 문장에 희망을 갖고 싶지만... 요즘 시대 굴러가는 걸 보면 솔직히 좀 절망적이다... [민주주의의 모든 질병은 어쩌면 더 많은 민주주의에 의해 치료될 수 있을지 모른다. (A. 스미스) p. 205] 라는 옮긴이의 말에도 여전히 그리 희망이 생겨나진 않는다. 하지만 [현대민주주의가 마주한 도전과 위기 상황을 성찰하기 위해 역사의 여정에서 구성되어온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들을 검토 (p. 206)] 저자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은 있다. [<민주주의>에서 포어랜더가 개관한 민주주의의 개념사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능과 작동 조건에 관한 분석은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독자에게 제공해줄 것이다. (p. 207)] 라는 역자의 말에 그나마의 기대를 걸어본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과 독자가 아닐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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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철학 입문 - 후설에서 데리다까지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2
토마스 렌취 지음, 이원석 옮김 / 북캠퍼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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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철학, 그 경계를 넓히다

짧지만 강력한 20세기 철학 안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 말을 바꿔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철학을 논하지 않는 시대에 희망은 없다 라고.

역사란게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온 이력이고 그 시간들엔 인간들의 판단이 있었다. 역사를 만든 그 판단들의 근본에는 무엇이 있었나? 철학이 아니었을까? 격변하던 시대마다 그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있었고 그 시대정신은 철학의 산물이었다. 철학을 말하지 않는 이 시대에 <20세기 철학 입문>은 어떤 의미를 줄지 궁금했다.

현대는 기술, 사회, 과학의 획기적 혁신과 유례없는 파괴를 동시에 경험하며 발전했다. 이 책은 20세기를 거치며 한편으로 치우치고 세분화된 비판적 성찰들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생산적으로 서로 결합하여 상호 보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p. 5) 이를 통해 우리는 극단적 상대주의나 합리성의 자기 파괴적 형식에 매몰되는 대신 특정 학파의 강제에서 벗어나 모든 비판적 성찰과 접근법을 구성적으로 배울 수 있다. (p. 6) -서문 中-

철학은 어렵다. 특히나 현대철학은 철학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나름 심플했던 고대철학에서 시대를 거쳐 점점 세분화되고 고도화되어 이제 갈래를 다 잡을 수도 없어 보이는 현대철학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 책은 일단 작고 얇다. 그래서 감히 용기를 내어 현대철학책을 손에 들 수 있었다. 이렇게 작고 얇은데 책속에서 20세기 철학자들을 대부분 거론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 어려운걸 저자가 해냈다. 현대철학에 대한 제대로 된 겉핥기?!

20세기 철학의 출현과 발전을 이해하려면 먼저 철학의 밖을 살펴야 한다. 19~20세기에 철학 외적으로 어떤 중요한 모색과 성과들이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야 한다. 근본적 변혁과 급진성은 이 시기 사유의 특징이다. 사회와 문화, 기술, 과학, 개인의 자기 이해가 때로는 극단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p. 9)

앞서 잠깐 말했듯이 그래서 역사와 철학은 따로 떼어 말할 수 없다. 역사적 사건이 시대적 철학을 논쟁시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사와 철학은 서로 문답을 주고받을 수 밖에 없다.


20세기 철학은 실존 철학이나 마르크스주의, 프래그머티즘의 언어분석과 논리적 개념 분석 없이, 문명 비판이나 도덕 비판, 저인분석, 상대성 이론 없이 이해될 수 없다. (p. 9)

20세기 철학에서 과학사의 과정은 특히 중요하다. 철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출현한 이래로 꾸준히 개별 과학들, 예컨대 물리학이나 정치학, 경제학, 동물학 등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나왔는데,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분리된 것이 심리학과 사회학이다. 두 개별 과학의 분리는 현대의 이행에서 심오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 우선 인간은 스스로 실증적 탐구 가능성과 함께 점점 더 사유와 과학의 중심에 선다. (p. 26) 철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이 분리되면서 현대 철학은 새로운 상황을 맞는다. (...) 철학은 심리학과 사회학의 연구로 그 위상이 바뀔 때마다 자기 성찰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p. 29)

역사가 발전하면서 학문의 갈래로 다양해졌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을때 그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철학적 질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철학은 인간의 삶과 늘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다. 그 철학이 아무리 분화되고 다양해져도 중요한건 어쨌든 여전히 철학은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아주 크게.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이 창시한 현상학은 오늘날 까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20세기 철학 사조 중 하나다. (p. 43) 현상학은 세계의 모든 현상을 그것이 무엇이든 그 본질을 제한 없이 분석하는 새로운 철학 방법론이다. (p. 44)

실존철학과 실존주의는 20세기 철학에서 중요한 흐름 중 하나다. (p. 77)

해석학은 이해의 학설이다. (...) 이해하는 기술로서 해석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묻고 대답하는 대화 구조를 갖는다. 질문을 통해 항상 새롭게 전승되며 이는 우리가 전통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p. 92)

20세기 세계 정치의 발전은 마르크스의 분석과 비판적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형식으로 동유럽의 정당화 이데올로기가 된 역사결정주의의 정통적 형태로 변모한다. (p. 104)

20세기 후반 실천철학과 정치철학, 법철학, 사회철학에서 상당한 진보와 혁신적 기획이 이루어진다. (p. 151)

구조주의는 사회철학적 그리고 타당성 추구의 해석학적 차원에서 당시의 의식철학과 인식론적 주관주의를 배제한다. (p. 169)

프랑스에서는 들뢰즈, 리오타르, 데리다와 같은 철학자들이 현대성의 전통을 의심하고 곧바로 강령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통고함으로써 상대주의와 보편적 진리 주장의 철회를 추구한다. 이 새로운 시대는 방법적으로 현대에서 성공적이었던 방법론, 특히 프랑스에서 지배적이었던 구조주의와 결별을 요구한다. 그 결과 후기구조주의가 뒤따르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문화적 유행으로 번지는 동안 거의 모든 고전적 패러다임은 종말이나 몰락, 죽음을 고하게 된다. (p. 179)

20세기 후반 철학 학파의 방향은 국내 및 국제 차원에서 세분화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다. 고대 철학, 형이상학, 초월철학, 변증법적 전통의 고전적 사유는 체계적으로 다시 이어지며 재구성되고 변형된다. 현상학, 해석학, 언어철학은 서로 관련을 맺으며 전통 철학적 계획의 생산적·혁신적 해석과 습득에서 입증되는 새로운 사유를 형성한다. (p. 186)

부제인 '후설에서 데리다까지'에서 알수 있듯이 저자는 20세기 철학을 후설에서 데리다까지의 흐름으로 간략하게 소개한다.

간략하긴 하지만, 중심적 학자들과 그 학자들 사이사이에 있었던 크고작은 굴곡들을 빠짐없이 소개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름과 이론은 때론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기도 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의미 있던건 나름대로 현대철학의 흐름에 대한 개요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철학 입문>은 이런 의미에서 우선 19세기의 몇몇 중요한 철학자 및 학파(키르케고르와 니체, 신칸트학파와 마르크스)와 철학 외적인 새로운 개별 학문(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아인슈타인의 이론, 사회과학)의 출현과 함께 20세기에 일어난 두 차례의 세계대전, 러시아혁명과 냉전시대, 소비에트 붕괴와 세계화 등 여러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철학적 사유와 다양한 학파의 생성을 중심으로 20ㅅ기 철학을 기술한다. 그리고 저자는 20세기 철학에 관한 새로운 의미 연관의 제시로 앞으로의 철학을 생산적으로 만들기를 희망한다. (p. 203) -옮긴이의 말 中-

역자는 '저자의 의도와 기대가 타당하다면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20세기 철학 입문>은 철학적 지식을 다양하게 '빌드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여 흥미 있는 지적 모험의 길에 들어서게 할 것이다. (p. 205)'라며 저자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철학이 논의되지 않는 시대에 그 희망과 기대가 어느정도 현실성을 가지고 있을지 잘 모르겠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철학이 없는 시대에 사는 인간은 불행하다는 것,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늘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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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는 요일 (양장) 소설Y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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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사람이 하나의 신체를 공유하는 미래

사랑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여정이 시작된다


창비 소설Y클럽을 통해 박소영 작가의 <스노볼>을 재밌게 읽었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신작이 또다시 소설Y클럽을 통해 내게 닿았다. 소설Y클럽 서평단 참여시 가제본과 함께 받게 되는 작가의 특별한 편지와 함께.

이번 작품의 프롤로그에선 독특한 서식이 눈에 띈다. 바로 '인간 7부제 사전 동의서'


주요 내용: 일곱 명이 신체 하나를 하루씩 돌아가며 사용한다. 공유되는 신체 외의 나머지 신체는 (뇌를 제외하고) 폐기한다.

시행 목적: 인간 개체 수를 적정하게 유지해 환경 파괴와 식량난 등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인류의 공멸을 막는다.


그렇다. 일곱명의 자아가 하나의 신체를 공유한다는 일종의 각서 같은 동의서가 '인간 7부제 사전 동의서' 였다. 가상의 어느 시대, 더이상 많은 인간 개체 수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개발해 낸 기술은 하나의 신체를 공유하여 일주일에 한번만 현실 세계에서 살고 나머지 6일은 뇌를 업로드 시킨 가상의 낙원에서 사는 것.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7부제'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신체로 평생을 살아가는 일명 '365'가 존재했다. 결국은 재력, 돈이 곧 힘이었다.


일곱 사람이 공유하는 신체가 임신을 하면 어떻게 될까? 간단하다. 임신의 주체만 남고 나머지는 방을 뺀다. 보딜리스 신세가 된 이들에게는 새로운 신체가 배정되고, 임신부는 출산할 때까지 매일 오프라인에서 지내게 된다. 보디메이트들이 사라진 신체를 오롯이 혼자 사용하면서, 환경 부담금을 내기는 커녕 오히려 각종 혜택을 지원받으며. 출산 이후에는 아이를 바로 공공 보육원에 보낼 수도 있고, 36개월까지 직접 양육할 수도 있다. (p. 55)


김달과 젤리 그리고 현울림은 공공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절친들이다. 각자의 사연들로 부모를 잃고 공공 보육원에서 친해진 그들은 열일곱이 되어 7부제에 소속되었을 때 각자의 다른 공유신체의 모습으로 만나서도 여전히 절친이었고 이들은 모두 수요일에만 현실세계를 살 수 있는 수인들이었다. 늘 그랬듯 일주일만에 수요일에 다시 모였을 때 김달은 임신했음을 알렸고 아기와 함께 365로 살기위한 인생계획을 친구들에게 밝혔다. 하지만,


'현실'이라 부르는 이 세계가 굴러가는 법칙은 간단했다.

노력은 쉽게 틀어지고 간절한 바람은 가볍게 짓밟힌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것은 찰나의 순간. 사랑하는 것에도 반드시 끝은 있다. (p. 61)


김달은 공동양육자로 현울림을 선택했다. 현울림은 가상의 세계보다 현실에서의 삶을 더 좋아했고 누구보다 김달을 아껴줄 존재였기에.

하지만 울림과 신체공유를 함께 하는 화요일의 자아 강지나 가 문제였다. 강지나와 현울림은 고등학교 시절 지독한 악연으로 얽혀 있었는데 7부제로 인해 하나의 신체로 엮이는 그것도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이어지는 기막힌 인연으로 다시 얽히고 난 후 불화를 거듭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기에 공동양육자로 김달과 함께 현실세계에서 쭉 살게 된다면 더이상 강지나와 으르렁 거릴 이유도 없어지므로 울림은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드라마라는게 다 그렇지 않나, 가장 행복해지기 직전에 가장 큰 불행이 닥친다. 강지나가 현울림을 정확하게는 공유신체를 살해한다. 당연히 울림과 김달, 젤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판을 시작했으나...


비행기 추락 직전 혼만 낙원으로 탈출한 사람도, '묻지마 칼부림'에 찔려 죽어가며 가까스로 혼이 빠져나온 사람도 신체를 잃어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보디메이트에 의한 사망은 다른 차원이었다. 이는 7 부제 시스템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였다. 오프라인에서 사망 처리가 확정되기 전 문제의 보디 메이트끼리 재판정에 서서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기회가 주어졌다. (p. 83)

"나도 네가 당한 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쳐서 이러다 유산하는 거 아니가 싶을 정도야. 근데 우리가 뭘 어쩔 수 있어? 걔네 엄마는 낙원코리아 대표고 걔네 아빠는 학계에서 내로라하는 뇌과학자라며. 걔 부모한테는 돈, 사회적 영향력, 인맥이 다 있어. 네가 걔 건드려 봐야 다치는 건 너라고. 너랑 걘 출발선이 다르다는 거 정말 아직도 모르겠어?" (p. 104)


사실 강지나는 7부제에 속하지 않아도 될 최상위계층의 365 였다. 하지만 365에서 7부제에 속한 신체로 살아가게 된 사건에 현울림이 엮여 있었기에, 다분히 계획적이었고 그렇기에 재판은 시작부터 이미 울림이 이길 수 없는 판이었다. 억울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울림은 이제 현실 세계에서 어느 요일의 사람으로도 살 수 없게 되었고 낙원에서의 삶도 점차 감각을 잃어가게 될 상황이 되었다. 그때 '여울시'에 대해 알게 됐다. 불법적인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곳, 심지어 신체도 살 수 있다는, 알려지지 않았고 찾을 수도 없는 곳, 여울시.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그 여울시에서 울림은 강이룬을 만난다.


"이룬이는 아빠 연구소랑 파트너십을 맺은 미국 연구소의 과학 특기생인데, 특별 교류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왔어. 너희가 학교에 갈 때 이룬이는 아빠랑 같이 연구소에 가서 이런저런 연구와 실험을 진행할 거야"

강지나는 강이룬을 향한 아빠의 다정한 눈빛을 빤히 보았다. 느낄 수 있었다, 아빠가 저 유기견을 꽤나 아낀다는 것을. (p. 169)


사실 현울림은 어린시절 강지나의 집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사고로 현울림의 부모가 세상을 뜨자 엄마의 친구였던 강세영이 울림을 자신의 집에 데려갔고 딸인 강지나와 잘 지내라고 학교도 같은 곳으로 옮겨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지나는 울림을 자신이 길들인 유기견 대하듯 했고 유기견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현울림에게 은밀한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던 중 강이룬의 등장은 새로운 변곡점이 되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현울림에게. 그 시절 갑자기 사라진 이룬이 여울시에 있을 줄이야.


울림의 복수는 가능할까, 이룬은 왜 갑자기 사라졌던 것일까, 강지나는 왜 그토록 현울림을 죽이고 싶어했나, 낙원이라 불리는 가상세계의 삶이 과연 낙원일 수 있을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궁금증이 솟아나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읽어 나갈수록 사건은 장면을 거듭 빠르게 전환한다. 이 흡인력 강한 작품이 디스토피아와 스릴러에서 어느 순간 로맨스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슬며시 웃음도 짓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이유들을 제치고 일단 재밌다. 쉽게 읽히면서 재밌는 영어덜트 소설을 찾는다면 창비의 소설Y 시리즈는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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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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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의 설레는 이름, 최은미가 선사하는 깊은 아름다움

"두려움을 껴안고서라도 마주 보길 바랐다"

예전엔 책에 쓰여있는 소개문구를 통해 그 책의 선택여부가 정해지곤 했는데 언제가부터 그 책을 소개한 누군가의 문장으로 인해 책을 읽게 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내가 관심있어 하던 소설가가 추천하는 작품이라면 일단 믿고 읽어보고 싶어진달까. 조해진 소설가는 이 책에 대해 '<마주>는 소중히 읽혀야 한다' 라고 했다. 그 한 문장으로 나는 이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결혼식 전날 밤, 내 전생의 마지막 날이자 현생이 시작되기 직전의 밤 (p. 18)' 이라던가 '나는 포토라인 앞에 선 적이 있다. 평일이었고 대낮이었다. 눈앞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다. (p. 11)' 라는 식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초반부는 있지도 않았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시작해서 이 책이 판타지 장르인가? 의심하게 했고,

"얘가 그 비탈과수원집 딸? 참하게도 생겼네. 천상 여자네, 천상 여자야 (p. 23)" 라던가 '나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여자답다는 말을 들었고 아무리 귀엽게 보이고 싶지 않아도 이미 생긴게 귀여워서 어쩔 수 없이 귀여워지곤 했다 (p. 24)' 라던가 '내가 다가가보고도 싶었던 학교 내 모 단체의 여학우들은 이런 나에게 어떤 틈도 내주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내가 타도해야 할 여성성의 재현물 그 자체인 것처럼 대했다. (p. 51)' 라는 식의 문장을 보면 이 소설은 여성성을 주제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이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었고 지극히 인간애적인 인간애를 다루고 있었다. 묘하게 비껴나가게 읽혀지긴 하지만;;;

그리고 의외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여자여자하고 소설의 화자이기도한 나리도 아니고 나리가 줄창 얘기하는 수미도 아니었다.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인물은 '만조 아줌마'라고 할수 있었다. '마주'함을 알려준 인물, 만조 아줌마.

이웃해 산다는 심리적 가까움 때문인지 내 부모는 부근의 어떤 과수원보다도 만조 아줌마에게 많은 걸 의지했다. 남한테 신세를 지거나 폐가 되는 걸 어지간히 싫어했던 아빠도 만조 아줌마한테만은 조언도 구하고 부탁도 했다. 내 눈에 과수원에서의 대장은 누가 뭐래도 만조 아줌마였다. (p. 32)

결핵을 앓은 적이 없는데 병원에선 예전에 결핵을 앓은 적이 있는 폐라며 잠복결핵균 보균자임이 확인된 나리, 호흡기의 주요 기관인 폐에 문제가 없었음에도 호흡에 문제가 생긴 나리 그 중심에 '수미'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딸 은채와 나리를 걱정해주는 남편 오종수와 가족을 이루고 있던 나리는 캔들 공방을 하고 있었고, 바야흐로 기침 한번 잘못하면 눈총을 사던 코로나시국 초반이었다. 하지만, '"그럼 엄마는 알고 있었단 말이야?" "뭘" 무언가를 계속 튕겨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뭔가를 더 묻고 싶었지만 뭘 물어야 할지 모른채로 전화를 끊었다. (p. 34)' 라는 문장처럼 소설은 왠지 무언가를 계속 튕겨내는 것처럼 읽혀져서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무엇을 읽고 있는 건지 잘 모르는 상태가 되어갔다. 어쨌든, 중요한 사람은 만조 아줌마였다.


나는 감각을 죽이고 사는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살다보니 죽었지만 다시 살릴 엄두를 못 내는 것들, 다시 살릴 의욕도 기력도 없는 것들. 언젠가부터 접어두고 사는 것들. 잊고 사는 것들. '생기'라고 말해지는 것들.

수미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이고 사는 감각 하나가 깨어나 무언가가 열리면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 견뎌온 것들을 더는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깨어나 삶에서 다시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면 겨우 살아내고 있던 하루가 뒤집힐 수도 있다. (...) 나는 그런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채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여자들. '니가 아니면 이게 다, 무슨 의미니?' (p. 86)

나리가 '전생'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결혼전, '현생'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결혼후 의 시기를 일컫는 것 같다. 전생때 나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만조 아줌마 였고 현생에서 내내 나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인물은 수미였다. 결혼후 자리잡고 살게 된 기정시에서 딸 은채의 놀이터 친구로 수하를 자주 만나게 가까어진 수하의 엄마인 수미.

그때까지도 나는 '딴산'이라는 지명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만조 아줌마의 발효 항아리와 여안의 비탈밭을 여름내 떠올리면서도 여안을 전부 떠올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p. 98)

코로나시국의 초반 상황이 나리를 긴장시키는 사이사이 나리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나리의 표현대로 하자면) '전생과 현생'은 자주 교차된다. 그때 여안에선 나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 기정시에서 나리가 갑자기 여안의 기억을 만조 아줌마에 대한 기억을 자꾸 떠올리려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상관이 있길래?

종수랑 결혼을 해서 평생 단짝이 되면 나는 지겹고 불편했던 여자들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가고 영화를 보고 맛집에 가는 것들을 종수랑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종수가 나를 사랑해주는데 다른 여자들이 내게 뭐라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종수랑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자 내 앞에 펼쳐진 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촘촘한 여자들의 세계였다. 나는 이제 내 아이까지 옆에 세운 채 다시 그 세계를 뚫고 들어가 자리를 틀어야 했다. 여자들과 좀 멀어지고 싶어 종수랑 가까워졌는데 그게 빼도 박도 못하도록 나를 다시 여자들한테로 데려갔던 것이다. 종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종수랑 있고 싶어서 종수랑 살기로 한 건데, 종수는 간데없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키 크고 눈을 잘 안 맞추고 슬랙스가 잘 어울리는 어떤 어려운 여자와 롯데월드 투썸 테이블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p. 151)

그 어색하고 어려운 여자가 수미였고 은채와 서하가 함께 노는 시간이 잦아질수록 둘도 자주 만나고 길게 만나게 되었다. 수미를 보면서 나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뭔가 현생의 자신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을 놓치고 살았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되고 점점 더 과거의 기억을 더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기억이 났던 것이다. 만조 아줌마라는 인물과 딴산이라는 장소가.

나리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만조 아줌마를 현생으로 등장시키고 수미와 함께 찾아가면서 '딴산'도 세상으로 불려나와지게 된다. 하필 코로나 시국에.

그들은 하나만을 알았다. 어떤 이유로 들어왔든 딴산에 들어왔다는 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겐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한 몸을 누일 장소가 없었다. 있을 자리가 없었다. 죽을 데가 없었다. 그래서 딴산으로 들어갔다. (p. 224)

수미는 만조 아줌마한테 물었다. 이웃집 아이한테 어떻게 그런 마음일 수 있었는지. 그런 친절은 어떨 때에 가능한지. (p. 282)



만조 아줌마는 딴산에 사는 그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노력했다. 만조 아줌마가 이웃집 나리에게 '그런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었던 것처럼 (p. 262)' 수미와 서하 사이에 그런 시간과 공간을 경유하게 해주고 싶었던 나리는 삼십년이 지난 후에도 만조 아주머니의 항아리를 통해 또다시 예전의 '그런 시간과 공간'을 느끼고 깨닫는다. '아이를 낳은 날짜가 적힌 항아리 옆에 앉아서야 나는 그 말이 지난 삼십년간 내 어딘가에서 숨죽인 채 살아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p. 255)' 잠복결핵균처럼. 전염성이 있지만 잠복기에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숨죽인 잠복결핵균처럼. 그런 시간과 공간의 따스함또한 숨죽인채 나리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수미와 수하 모녀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만조 아줌마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서하를 보고 있는 어른이 너뿐이 아니라고, 너만이 아니라고, 가족이어서 해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고, 가족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믿어보라고, 가족 아닌 그이들이 저기 있다고, 수미가 체감할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말해줄 수 있었다.

보라고, 서하는 해변에 가려 한다고. 마음을 접어버리지 않았다고. 너한테 계속 자기 자신을 얘기하고 있다고. 너한테 순응하지 않았다고.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p. 304)

아이를 키워본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그런 마음들이 소설 곳곳에 있었다. 또한 '엄마'의 마음이라고 좁히기보다는 그런 마음을 넓혀서 '연대'의 마음으로 가고자 하는 것또한 어렴풋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건 '나리' 였다. 철부지에서 성인으로 엄마의 역할에서 엄마의 마음으로 나리는 자라고 있었고 그 과정을 든든이 지켜주는 존재가 만조 아줌마 였다. 그 만조 아줌마에게는 술항아리가 있었다.

통기성이 있는 항아리나 참나무통에 술을 넣어놓으면 술은 그 안에서 조금씩 증발된다. 증발된 술이 날아올라 공간을 채우고, 밖으로 새어나가 그곳 일대의 허공에 흩어진다. 그렇게 날아간 술을 천사의 몫이라고 한다고, 그래서 양조장 근처에 사는 천사들은 다 조금씩 취해 있다고, 누군가 내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p. 243)

코로나 시대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균 때문에 온 사람이 죄다 숨죽이며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들숨과 남의 날숨이 섞이는 것에 공포를 느껴야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결국 사람은 따로 떨어져 살수 없었다. 사회라는 관계는 끊어질 수가 없었다. 그 삭막한 공기 속에 누군가 살짝 술을 뿌려놓았다면 그래서 누군가 살짝 기분 좋은 취기를 뿌려놓았다면 그랬기에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던 그 시절도 그럭저럭 덜 삭막하게 넘길 수 있었던 거라면 우리는 과연 서로를 '마주'했던 것일까. 어디선가 그런 술항아리를 숙성시키고 있을 그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마주>는 2020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여기 우리 마주>에서 출발했다. (p. 317) 횡단보도에서 사람들과 무심코 스쳐지나가다가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건물과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과 마주칠 때면 거기 있는 모두가 2020년을 겪고 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문득문득 놀라기도 한다.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의 오늘에, 내일과 모레에, 이 소설이 못 다한 이야기처럼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p. 318)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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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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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에서 유다는 악마가 되어야만 했나?

유다 또한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유다는 정말 예수를 배신했을까?

아무도 들려주지 않은 유다의 진실을 찾아간다!

기독교를 아는 사람이라면 "유다"라는 이름을 모를 수 없을 것이고,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유다"라는 이름이 낯설지만은 않을 만큼,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의 다른이름같은 고유명사에 오래도록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왜 의문을 품지 않을까? 유다라는 존재에 대하여 과연 그가 배신했는가 라는 지점에 대하여 정말 그랬나? 하며 왜 아무도 따져보지 않는 것일까? <유다>라는 소설을 읽고나서 나는 '유다'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옥성호 라는 저자를 알게 된 후 그의 주장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에 대해 검색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옥한흠의 장남이자 비기독교인이며 그의 아버지 옥한흠은 한국 기독계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옥한흠은 '사랑의 교회' 창설자이며, '사랑의 교회'는 국내 대표적인 메가톤급 거대교회이다. 또한 거대교회 목사들이 대부분 편파성을 드러내어 비기독교인들에겐 좀 안티를 불러일으키는 면이 없잖아 있는 것에 비하여 드물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아울러 존경받을 만한 목회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교회들이 무슨 왕위 물려주듯이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시키는 것에 비해 옥한흠 목사는 후임 목사에게 교회를 맡겼다. 이는 아들 옥성호가 종교인의 걸을 걷지 않은 것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지만 아들을 종교인으로 키워내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옥성호가 아버지의 길을 걷지 않은 것에 이어 기독교의 논리 및 부패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심장하다. 저자의 행동이 아버지가 이룬 업적?에 어떤 의문을 불러일으킬지 모르지 않을 것임에도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것 아닐까? 그러니 그의 주장들에 한번쯤이라도 귀기울여 봐야 하지 않을까? 그 시작으로 성경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존재인 '유다'에 관련한 해석들을 읽는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일 수 있다. 더구나 '음모론'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이야기들은 얼핏 스릴러소설을 읽듯이 새로운 지점이 밝혀질때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주기까지 한다.

아니,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뭔 의문을 갖고 뭔 음모냐 할 수도 있지만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 보라, 아마 혹 하는 지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부터 헐, 정말 그럴듯한데?! 싶어질수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로 시작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유명하다. 하나님의 사랑, 그런데 사랑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구원교리, 죄 없는 이가 무고한 피를 흘려서 죄 있는 이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잔인하고 불합리하다 사랑이 아니라 불의한 폭룍이다. 그건 희생양에게도, 수혜자에게도 공정하지 않다. 어쨌거나 기독교의 희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예수 하나로 끝났다면 문제 될 게 없다. 예수의 희생은 해피엔딩이니까.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예수처럼 찬란한 보상을 받은 희생양도 없으니까. 문제는 갸롯 유다, 그리고 그로 상징되는 유대민족이라는, 기독교가 만들어낸 진짜 희생양.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다. (p. 22)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을 배반할 제자가 유다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에게 깨달음을 주거나 뒤늦게라도 회개시켜주거나 하기는 커녕 마지막까지 저주를 퍼부었다. 왜 유다는 구원하지 않았을까? 세상 모두를 구원해야 하는 사랑의 종교라면서. 어쩌면 예수는 유다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성경은 예수가 직접 쓴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쓰여졌다는 점이다.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이, 후대에 쓰여진 기록은 쓰여진 사람과 시대적 배경에서 무관하게 쓰여질 수 없다. 그렇다면 쓴 사람의 생각과 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을 시대적 배경을 당연히 캐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도 감히?!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희생양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시대를 2천년 거듭했어도 유다같은 존재가 없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가? '가록 유다가 아니었다면, 예수의 십자가가 불가능했을까요? 왜 십자가 구원에 유다의 배신이 필요했지요?' (p. 24) 더구나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들마다 십자가와 유다의 관계성에 대해 말하는 바가 다르다. 무엇이 진실인가?

신앙 여부를 떠나서 성서를 연구하는 거의 모든 학자가 인정하는 예수에 관한 유일한 역사적 팩트를 딱 하다만 꼽자면, 단연 십자가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 십자가가 무엇인가? 페니키아인의 잔인한 고문방식이다. (...) 역사상 십자가형을 받은 로마 시민은 단 한 사람도 없고, 이 형벌은 오로지 반역자에게만 시행했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은 그 자체로 메시지를 갖는다. 반로마라는 정치성이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p. 29)

바울이 선교할 때만 해도 굳이 나올 필요가 없었던 예수의 '구체적 생애', 복음서 집필이 절박한 당면 과제가 되었다. 예수의 삶과 어록이 아예 없는 바울의 일방적인 교리만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시대가 끝났다. 교리를 뒷받침하는 예수의 구체적인 인간됨이 필요했다. (p. 31)

복음서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두 가지였다. 첫번째로 평화주의자 예수를 강조했다. 두번째로 예수를 죽인 게 악마의 하수인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 그래서 예수를 유대민족과 대적하고 로마를 사랑한 인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p. 32)

본토 유대민족은 이미 전쟁에 패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야말로 무슨 말로 해도 괜찮은, 뒤탈 걱정이 없는 희생양이었다. 그래서 유대민족을 상징하는 인물로 가록 유다가 선택되었다. 이게 이른바 복음서라고 불리는, 신약성서의 문을 여는, 예수의 생애를 담은 네 권(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의 정체다. '복음', 즉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일 수 있겠지만, 유대민족에게는 날조와 저주로 가득한 기소장이다. 결과적으로 완전범죄를 노리며 증거를 지운, 살인자의 진실 은폐 기록이다. 역사는 진실 여부에 관심이 없다. '언제나' 승리자의 편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서구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면서 복음서가 은폐한 범죄현장은 아예 성지로 탈바꿈했다. (p. 33)

성서는 기독교의 교리를 담은 핵심 서적이므로 그저 종교적인 해석만 하면 되지 않냐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성서는 역사서로서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의 기적이고 그 기적이 그저 신화가 아니라 실재적으로 일어난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상 성경에 쓰여진 기록은 역사적으로 진위를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거대종교가 된 이후로 감히 누구도 의문을 표현할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희생양의 범위는 점점 넓어져서 결국 세계대전에서 학살까지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닐까. . '로마를 사랑하고, 유대민족을 저주하는 예수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핵심주제다. (p. 46)' '살아남아야만 했던 기독교인에 의해서 그나마 예수와 관련한 '유일한' 역사성, 십자가가 왜곡되었다. 그 결과 한 민족을 향한 집단적 증오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비극이 탄생했다. (p. 47)' 로마시대의 역사서로서 성경을 파고든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논리들은 굉장히 타당하게 이해되어지는 면이 컸다.

희생양이라는 원시 시스템, 누군가 나 대신 피를 흘려야 내가 산다는 구원의 교리로 움직이는 기독교는 언제라도 새로운 가롯 유다를 만들 수 있다. 기독교는 지금도 편 가르기에 골몰한다. 희생양은 기독교의 본질이고 DNA다. 인류 문명을 거스르는 상상을 하나 해보자. 행여 기독교의 손에 과거 서구세계를 지배하던 무소불위의 중세시대 권력이 다시 쥐어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21세기라고, 이단사냥, 마녀사냥이 없을까? (p. 49)

선입견만 벗어던질 수 있다면, 1장에서 소개한 내용만으로도 복음서가 어떤 책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삶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종교 관성에 맞서서 이성과 논리가 승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성과 더불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텍스트가 분명하게 드러내는 진실 앞에서, 2000년 권력의 아우라가 만든 사랑의 예수와 거룩한 정경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정직해야 한다. (p. 50)

이 무슨 불경한 소리냐고 버럭하기 전에 정말 자신의 믿음에 자신이 있다면 왜 이런 소릴 하는지 꼼꼼이 따져보는 게 올바른 태도 아닐까? 복음을 전파하는 다양한 모습들 중 좀 괴이하다 싶은 사람들을 거리에서 볼 때마다 나는 의문이 들곤 했다. 저 사람들 중 과연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을까?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 고민하고 해석해본 사람이라면 단 몇문장에 의지해 저런 행태들을 보일 순 없지 않을까? 그러니 저자의 논리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채 집어던지지 말고 숙고하며 읽어본 후 반박하는 성숙한 모습을 가져볼 것을 권한다. 1부와 2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2부는 4종류의 복음서 내용을 바탕으로 심층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따져묻고 있기에 그 하나하나에 제대로 조목조목 대응해 보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나같은 비종교인조차 기독교에 성심을 다해 반하게 되지 않을까.

오로지 예수의 죽음만이 인류의 구원을 가져온다고 치자. 구원자답게 죽는 방법이 배신당해 죽는 길밖에 없었을까? 그것도 배신자를 향해 저주하며 죽는 방법밖에 없었을까? 예수가 정녕 구원자라면, 거기에 걸맞은 죽음은 수도 없이 많다. 인류를 위한 금식기도를 하다가 굶어 죽는 것,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유대 땅을 해방하라며 외치다가 순교하는 것, 훨씬 구세주다운 죽음 아닌가?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이 선택한 방법은 한때 선택했던 민족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잠시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와 비교도 안 되는 '진짜 희생'을 치르도록 만들었다. 마비된 이성을 흔들어 깨워, 정신을 차릴 수만 있다면, 이 모든 건 증오에 눈이 먼 누군가의 창작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비극은 역사가 되어 버린 증오의 창작이 인류의 재앙을 불렀다는 것이다. (p. 275) 이 책은 독자가 이야기를 이야기로, 신화를 신화로 보도록 하는 데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다. (p. 276) -에필로그 中-

그야말로 가시밭길일 것 같은 저자의 걸음걸음이 분명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에게 의미있을 것이기에 앞으로도 당당한 행보를 이어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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