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갈증 트리플 13
최미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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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 없이 당도하는 불안에 ___ 대비하는

조용히 무너져가는 세계에 대한 ___ 상상

'녹색갈증' 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환경에 대한 소설인가 지구재난SF인가 뭐 그런 예상을 했었다. 썩 멋진 제목으로 보여서 책에 대한 궁금증이 더 있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났는데도 왜 제목이 '녹색갈증'인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제야 검색해보니, 헐, '녹색갈증' 이라는 전문용어가 있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을 그리워하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감정으로, 미국의 생물학 박사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이 주장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자연으로의 회귀 본능을 말한다.




자연을 그리워하고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본능이라... 그래서 소설속에서 여주는 그토록 '산'을 이야기했던 것인가...

내가 지금 여기에서 별 탈 없이 재미도 없고 가치도 없고 바라는 바도 없는 상태로 살고 있음을 되새겼다.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었고 다시금 윤조를 생각하지 않는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의 사랑 윤조. 너는 나를 흥미진진하고 두근거리게 만들지만 사랑은 언제나 나를 망쳐왔다. 나는 오랫동안 문득문득 윤조를 불러내고 다시 없애버리는 일에 시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윤조가 내 머릿속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에 몰두했다. 최대한 윤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건 생각보다 쉬웠다. (p. 11~12)

프롤로그 中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 13번째 작품인 이 책은 역시나 세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앞에 <프롤로그> 가 있다. <프롤로그>도 하나의 단편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뒤에 이어지는 세편의 작품은 제목은 각각이지만 연작소설처럼 이어지는 서술로 <프롤로그>가 소설속의 소설임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프롤로그>가 이 책을 대표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윤조'라는 인물을 '산'에 대입시켰을 때 등식이 성립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먹어봐야 아는 사람' 중에 '똥'역할이었다. 사람들은 어딘가 독특한 기척을 맡고 내게 다가왔다. 특별한 능력도 매력도 없다는 것을 알고 망설임 없이 떠났다. 그런 경험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나는 스스로 특별한 축이라고 여기며 살았는데, 사실은 별게 아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잘하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으니까. 사람을 만나는 것만은 잘해내고 싶었으나 마음 먹은 것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사람들은 저절로 붙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때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창 밖의 날씨가 바뀌었다. 특별한 사람에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범한 줄 알았으나 이상한 사람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정해진 순서처럼 착착 진행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어 윤조야. 내 업보 였다.

윤조와 항상 붙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던 건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저 윤조와 함께 있으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땀이 솟은 팔과 등, 그 위로 부는 바람,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각 같은 게. 윤조만 바라보는 동안 가족, 다른 친구 등 인간관계는 단절되었다. 성적도 살아가는 모양도 엉망이었다. 윤조와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거워서 내게 미래라는 시간이 있다는 걸 잊어 버렸다. (p. 13)

나는 훌륭하게 살 생각은 없었지만,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며 살고 싶었다. 윤조와 그냥저냥 지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윤조와 연을 끊었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윤조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편안하고 지루한 삶이 적성에 맞는 듯 했다. 잊고 있던, 혹은 잊었다고 믿었던 윤조가 내 눈앞에 나타난 건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쯤이었다. (p. 14)

프롤로그 中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소설가 지망생인듯 하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결국 이도저도 아닌 지루한 삶을 살고 있다. '윤조'는 '나'에게 소설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 같다. '나'의 소설 속 주인공인 '윤조'를 생각하면 신나고 설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삶에는 일상이라는 것이 필요했고 꿈은 밥먹여주지 않으니까 윤조와 이별한다는 것은 글쓰는 것을 접은 것과 같았다. 그렇게 '편안하고 지루한 삶'에서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윤조를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글을 쓰고 그 작품이 최고일것만 같던 기분이 어린 시절 꿈이었고 그 꿈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고 쳇바퀴돌듯 그저그런 일상을 살아내는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제대로 '나'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쓰여진 '나'의 이야기가 프롤로그 뒤에 이어지는 세 편의 이야기들이다. 설탕으로 만든 사람 - 빈뇨 감각 - 뒷장으로부터

땀이 잔뜩 났다. 동시에 소변이 마려웠고 목이 말랐다. 나는 눈을 감고 눈 안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늘은 곧 바람과 벌레들의 울음, 나뭇잎이 단체로 흔들리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리를 불러들였다. 산으로 가는 법을 알려준 건 윤조였다. 그리고 그 전에는 윤조의 할머니가 윤조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방법이 아니면 지루한 삶을 견디기 어렵단다" (p. 25)

프롤로그 中

'나'는 생각으로든 실제로든 그래서 '산'에 간다. 동네뒷산 같은 산에 올라가는 것도 등산이고 계절을 느끼러 유명한 산에 가는 것도 등산이다. 등산이라는 활동은 땀이 나고 목이 마르고 숨통이 트이는 그런 것이었다.

윤조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내 마지막 소설은 분명히 끝을 맺었지만 어떻게 결말을 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중략) 나갈 준비를 하면서 소설을 쓰려고 애썼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고 비참한 예감이 들었다. 윤조가 나오는 나의 소설은 분명히 끝을 맺었지만 윤조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p. 41)

설탕으로 만든 사람 中

<설탕으로 만든 사람> 에서 '나'는 예전 애인 명을 다시 만나게 되고 '산'에 가게 된다. 명은 '나'가 '윤조'의 이야기를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코로나19이후 국경일처럼 되버린 추모일이었고 사람들은 마스크와 떠난 사람들의 옷가지들을 태웠다. '나'는 명과 [설탕으로 만든 사람]이라는 그림책 이야기를 했다. 야산에서 마스크와 옷가지들을 태우는 연기를 보며 명은 울적해했고 '나'에게 말했다.

너 설탕으로 만든 사람을 녹인다고 했잖아. 왜 녹이려고 했어? 이유 같은 거 없이 그냥 녹이고만 싶은 거잖아. 우리 그래서 헤어졌던 거야. (p. 69)

설탕으로 만든 사람 中

'산'에 다녀온 후 명은 '나'에게 말했다. '네가 설탕으로 만든 사람을 어찌하든지 말든지 이건 기억해야 할 거야. 너도 그 이야기 속에 있다는 거. 넌 자꾸만 그걸 까먹어. 아니, 자각한 적이 없지. 나는 이제 오지 않을 거야. (p. 73)' '나'는 안다. 이제 명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나'는 일기를 쓰든 소설을 쓰든 무언가를 쓰는 것에 열중했던 때가 있었지만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갈망하고 원하는 것만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 (p. 73)' 을 이제는 안다. '나'는 명이 떠난 후 자신이 글을 쓴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나왔던 집으로 돌아간다. 허구의 세계인 소설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인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집은 고요하고 어떤 의미로는 평온했다. 일정한 균열감과 스트레스가 시야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의 안개처럼 낮게 깔린 나날이었다. (p. 87)

집에 온 뒤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낮과 밤 상관없이 아무리 소변을 봐도 잔뇨감이 들었고 금방 또 소변이 마려워졌다. 자다 깨고 화장실에 가고 엄마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고 물을 먹고 다시 잠에 들었다가 깨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아무리 물을 덜 먹으려 해도 엄마와 언니를 보면 목과 가슴을 지나 배 깊은 곳까지 찬물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의식적으로 물을 입에 대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잘되지 않았고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벌컥벌컥 쏟아부었다. (p. 88)

빈뇨 감각 中

세 모녀는 한집에 살지만 서로에 대해 알려하지 않는다. '나'는 엄마가 왜 그토록 자꾸 사랑을 하고 이별한 후 그토록 울고 또 우는지, 언니가 왜 또다시 방 안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지 알수가 없지만 묻지 않는다. '자꾸만 물을 마시게 되는 건 목이 말라서라기보다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이었다. 웃긴 상황에서 웃음이 나는 것과 비슷했다. 목에 생선가지사 걸리면 밥을 한 숟가락 삼켜 가시를 밀어넣는 것처럼 나는 물과 함께 다른 걸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렇게 믿으니까 정말 목이 마른 것도 같고 물을 먹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p. 98)' 하지만 생선가지가 목에 걸렸을 때 밥 한 숟가락 푹 퍼서 삼킨다고 가시가 삼켜지던가? 빠질듯 말듯 걸린 가시는 계속 따끔거리고 밥을 떠 먹어도 켁켁 거려도 가시는 시원스레 빠지지 않곤 한다. 그러니 '나'가 아무리 물을 마셔도 삼켜지지 않는 것은 아무리 화장실에 가도 잔뇨감이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빈뇨 감각'이 '나'가 살아있다는 증명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마셔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에겐 '윤조'가 필요하다.

대충 닫아 튕겨져 나온 두 번째 칸을 제대로 닫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익숙한 보석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열어볼까 말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슬며시 뚜껑이 열렸다. 윤조가 보석함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당면처럼 쫄깃하고 흐물거리는 형태로 좁아터진 보석함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형상으로 굳어지는 모습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사물함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윤조가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마치 내게 꿰어진 실을 감듯이. 나는 그 손가락에 이끌여 윤조 앞에 섰다. (p. 111)

빈뇨 감각 中

프롤로그 에 나왔던 '윤조'가 다시 등장했다. 프롤로그 에서 '윤조'가 '나'에게 보여주려 했던 할머니의 보석함은 '나'가 가지고 있던 보석함과 같은 것이었다. 열고 싶지 않아서 열지 않았던 보석함이 스르르 열리고 '윤조'가 왔다. 프롤로그에서 '나'가 윤조를 다시 만났을 때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던 것처럼 윤조는 '나'를 다시 만나자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마치 내게 꿰어진 실을 감듯이' 갑작스레 끝난 느낌의 프롤로그가 왜 그렇게 끝났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프롤로그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뒷장으로부터. 윤조가 다시 등장한 순간, 이 책의 마지막 작품명은 '뒷장으로부터' 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목이 말랐다. 조용히 마른 침을 삼켰다. 윤조가 입을 열었다.

생선 가시가 걸린 채로 밥을 넘기면 목에 빵꾸 나. (p. 112)

빈뇨 감각 中

윤조는 '나'의 집에 원래 있던 식구처럼 자연스레 어울린다. 엄마도 언니도 윤조가 늘 거기 있었다는 듯이 군다. '보석함에서 기어 나온 게 윤조가 아니라 나인 것만 같았다. 엄마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낮잠을 자는 엄마 곁에는 쪼그려 앉아 책을 읽는 윤조가 있었다. (p. 116) 해는 점점 길어지고 겨울방학을 누리는 아이들만 있는 것처럼 집은 평화로웠다. 어느날 새벽에는 언니 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쩍 문을 열어보니 언니와 윤조가 맥주를 마시며 유투브를 보고 있었다. (p. 117)' '나'가 하지 못했던 행동을 윤조는 스스럼 없이 한다. 엄마를 위로하고 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나'는 그런 윤조를 보며 기이하게 여기지만 엄마와 언니는 오히려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본다. 그럴때마다 윤조는 '나'를 보며 웃는다.

너 왜 나를 보고 그렇게 웃어?

웃기니까. 설마 내가 너에게 힘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네가 쓴 소설 성장드라마 아니었잖아.

나는 윤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멀거니 그 애의 못된 표정만 쳐다볼 뿐이었다. 내 손안에서 썬캐처가 엉망으로 꼬여갔다.

나는 네가 설정해놓은 대로 자랐어.

윤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쏘아붙이듯 말하고 방을 나가버렸다. (p. 119)

뒷장으로부터 中

'나'는 윤조의 등장과 윤조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윤조가 속한 곳에서 이렇게 말도 안되는 해피 엔딩이 이어지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와 언니와 나는 너무 다른 사람들이라 셋이서 한 번도 착착 맞아떨어지게 살아온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이상해. 윤조 하나 나타났다고 옳다구나 하고 평범하게 돌아가는 게. 엄마는 울지 않고 언니는 혼자 침잠하지 않게 되었는데 왜 나는 괴로울까. 나는 나를 함정에 빠뜨리는 사람인 걸까. (p. 122)' 윤조는 '나'에게 함정인 것일까? 윤조와 함께 한 이 짧은 며칠이 윤조가 가져온 해피엔딩인 것일까? '아무리 걸어도 위로 향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p. 143) 뒤로 걷기는 쉬웠다. 뒷걸음질 치는 건 내 특기니까. 뒤로. 더 뒤로. (p. 145)' 그렇게 '나'는 프롤로그의 뒷장으로 간다.

윤조는 버릴 것과 남겨둘 것, 버리고 싶으나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버릴 생각 없어. 윤조는 그렇게 말하며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상자와 옷가지를 발로 밀면서 걸어왔다. 두 손에는 벽돌만한 크기의 보석함이 들려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그 안에 무수히 많은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p. 145~146)

뒷장으로부터 中

읽을 수록 황정은 작가 생각이 났다. 빈천하고 지난한 삶임에도 꾸역꾸역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이자 윤조 라는 (그림자이던 유령이던) 허구적 인물의 활용과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결말이. 아니나다를까, 세 편의 작품 뒤 이어지는 작가의 <에세이 - 내 어깨 위의 도깨비>라는 글에서 최미래 작가는 황정은 을 언급한다.

나는 어쩌면 순자 씨의 도시락 같은 소설을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순자 씨의 도시락은 황정은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 나오는 것으로, 소라와 나나와 나기의 뼈를 길러냈다. 순자 씨의 도시락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건 꽤 오래된 소망이었다. 계란프라이 하나에 양념간장을 뿌리거나, 밥에 오이지만 수북한,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순자 씨의 도시락. 나는 여전히 순자 씨의 도시락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 (p. 154)

에세이 - 내 어깨 위의 도깨비 中

<계속해보겠습니다> 였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느껴졌던 황정은 작가에 대한 오마주 같은 기분이 <계속해보겠습니다> 에서의 순자씨 도시락 때문이었구나... 황정은 작가의 작품 중 처음 읽었던 것이 <계속해보겠습니다> 였는데... 그런 지난한 삶을 대체 왜 계속해보겠다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읽다가 결국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버리게 된 그 시작점이 된 작품이었는데...

1994년생으로 2019년에 등단한 이 신인작가의 작품은 사실 처음 읽었을 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문학평론가의 작품해설은 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역시 나는 평론가의 해설과는 맞지 않는듯;;;). 그래서 다시 읽으며 정리하다보니 그제야 이 책이 꽤 잘 쓰여진 작품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에 대한 감상은 스포일러가 될 까봐 최대한 덜 자세히 쓰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 책에 대해서는 자세히 쓸 수 밖에 없었다. 자세히 써도 어차피 줄거리가 스포될 것 같진 않은 작품이라서 ㅎ. 여하튼 그래야 이해가 되고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그러니 이 작고 얇은 책을 처음 한번 읽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면 다시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처음에는 엮이지 않던 앞뒤가 보이고 엮이며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름 해피엔딩이라 (황정은 작가의 작품들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산'에 가보고 싶어질지도... 녹색갈증을 해소하러...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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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엄마 2022-07-0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고 갑니다~ ^^ 사실 책을 읽고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어요 ㅠㅠ LILY 님의 서평을 읽고 나니 다시 책을 찬찬히 뜯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드립니다 ~^^

LILLY 2022-07-02 11:15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